유사역사학의 영원한 떡밥 *..역........사..*

1차 추가 : 2007년 9월 19일
2차 추가 : 2007년 9월 21일
3차 추가 : 2007년 9월 24일
4차 추가 및 수정 : 2007년 12월 5일
5차 추가 : 2008년 1월 20일
6차 추가 : 2008년 1월 27일
7차 추가 : 2008년 2월 24일
8차 추가 : 2008년 7월 25일
9차 추가 및 수정 : 2008년 10월 29일
10차 추가 : 2008년 11월 11일
11차 추가 : 2008년 11월 23일
12차 추가 : 2009년 1월 30일
13차 추가 : 2009년 2월 9일
14차 추가 및 수정 : 2009년 7월 20일 - 불의의 사고로 수정 작업
15차 추가 : 2009년 8월 24일
16차 수정 : 2009년 10월 24일
17차 추가 및 수정 : 2010년 2월 14일
18차 수정 : 2010년 7월 25일



유사역사학(Pseudohistory)이란 역사학의 탈을 뒤집어썼으나 실은 비과학적, 비역사적, 비논리적 주장을 펼치는 모든 사이비 역사학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유사역사학이 대체 왜 문제인가?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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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7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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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이발 *..자........서..*

겨우내 덥수룩해진 미미를 이발 시켰습니다.

아내가 워낙 손재주가 좋은 탓에 집에서 합니다.
이, 이러지 마세요!


일단 의자에 미미를 올려놓습니다. 높은데 올라가면 꼼짝 못하거든요.


사, 살려줘요!


사실 미미는 이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죠.

다 깎은 뒤에 시원하게 목욕도 했습니다.

최종 결과.



날씬해졌습니다. 다시 아기가 된 듯한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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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시........사..*

[한겨레] 한국인 3명중 1명 “이웃에 다른 인종 살면 싫다” [클릭]


별로 신기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미 2007년에 저는 이런 포스팅을 했어요.
유엔에서 우리나라에게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노력하라고 한 내용입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 한국은 인종 차별을 그만 둬라! [클릭]

위 기사에 나오는 워싱턴포스트의 조사 방법은 유엔의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유엔의 권고는 미국에도 있었는데, 워싱턴포스트의 조사에서 미국은 매우 양호한 국가로 나왔다는 점이 일단 눈에 띄네요. 뉴질랜드와 브라질도 빠져 나왔군요.

같은 취급을 받았던 일본도 우리보다 3단계 위에 있습니다. 페루는 4단계 위에, 프랑스는 한 단계 위에. 심지어 중국도 2단계 위에 있습니다.

사실 5년 사이에 인종차별에 대해서 뭔가 개선되었다는 느낌은 별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캠페인이 늘어난 만큼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많이 보고 있어서요. 얼마 전에 KBS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순수 한국인인데도 파란눈을 가졌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이야기가 있었지요. 방송 후에 인식이 변화되었다고 해서 참 다행스러웠지만, 그 사람들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 인식되어서 그런 현상이 고쳐진 것이라면 인종차별 의식이 개선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우려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천팔백년 전의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벌써 그 시기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일지라도 나와 피를 나누고 출신이 같아서가 아니라 신이 주신 이성을 똑같이 나누고 있으므로 나와 동족임을 알고 있다. (중략) 나는 내 동족에게 분노하거나 증오를 품을 수 없다. 우리는 두 발과 두 손, 두 눈꺼풀과 위아래의 이처럼 서로 협력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의 불화란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며, 거부감과 혐오감은 바로 불화를 낳는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자성록, 박민수 역, 열린책들, 2011





[사족]
하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노예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기는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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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의 - 고려의 학살자 *..역........사..*

정방의鄭方義는 고려 시대 인물입니다. 11세기 후반에 진주의 호족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신종 3년(1200년) 4월, 실권은 최충헌이 쥐고 있던 그 무렵 전국은 민란으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진주 지역에서도 공노비, 사노비들이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은 마을 관리들의 집 50여호에 불을 놓고 사람들을 잡아 죽였는데 이 불이 정방의의 집에도 옮겨 붙었습니다.

목사 이순중李淳中은 보고를 받고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때 정방의가 관아에 나타났습니다. 정방의는 활과 화살을 들고 관아로 들어와 사록司錄(정7품) 전수룡全守龍을 만났습니다. 전수룡은 감히 관아에 무장을 한 채 들어온 정방의를 비난했습니다.

"활과 화살을 가지고 들어와 절을 올리다니! 네가 난을 일으키려는구나!"

즉각 정방의를 체포하여 고문을 가했는데, 정방의는 반란 혐의를 극구 부인했습니다. 사록이라는 벼슬은 제술과에 급제한 사람이 처음으로 하는 벼슬로 말하자면 전수룡은 초짜 관원이었습니다. 전수룡은 토호 정방의가 극구 부인하자 그만 그를 풀어주고 맙니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목사 이순중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정방의를 체포합니다. 일단 옥에 가둔 뒤 다음날 심문을 할 작정이었으나 이건 정씨 일가를 우습게 본 처사였습니다.

형이 잡혀갔다는 사실을 안 동생 정창대鄭昌大가 관아로 뛰어들어 정방의의 차꼬를 벗겨버리고 그를 부축하여 관아를 빠져나갔습니다. 파옥을 한 것이죠.

관아와 척을 진 이상 선수를 쳐야 했고, 정방의와 정창대는 불량배들을 모아서 난리 굿을 벌이게 됩니다. 평소 자신과 원한이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여버리니 죽은 사람이 6,400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순중은 자신도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대문을 걸어잠그고 나오질 않았습니다. 정방의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고을 내 은병銀甁을 긁어모아 개경에 뇌물로 보내는 한편 이순중을 끌어내 억지로 사무를 보게 했습니다.

이런 큰일이 알려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안찰부사 손공례孫公禮가 진주로 와서 진상을 조사코자 했는데 다들 정방의가 무서워 한 입으로, "정방의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공포라는 것은 언제나 이런 현상을 가져옵니다. 이러니 공포 기간에 나오는 여론이라는 것을 그대로 믿으면 참 곤란하지요.

하지만 진실이 묻혀있지만은 않습니다. 조정에서는 무능한 목사 이순중을 귀양보내고 신하들을 보내 정방의를 치게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도착해보니 정방의의 기세가 매우 대단해서 손을 쓰지를 못했습니다. 이곳에 온 신하는 소부감 조통趙通과 중랑장 당적唐績으로 조통은 무관은 아니고 문관으로 어진 정치를 펼쳐 신망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전해에 경주의 민란을 다스린 실적도 있고 글재주가 뛰어나 신종의 즉위를 알리러 금나라에 갔다가 억류 당한지 3년 만에 금나라에서 실력을 높이 사서 풀어준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방의는 조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들을 이끌고 군사 훈련을 시키고 마음 내키는대로 사람들을 죽이며 조통이 찾아가도 간단한 예만 올릴 뿐이었습니다.

정부에서 보낸 사람들은 믿을 게 못된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므로 원한에 사무친 진주 사람들은 정방의를 제거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처럼 진주 사람들은 자신들을 도와줄 무사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발견한 사람이 있었으니...

진주 옆마을 합주(지금의 합천 - 네, 전두환 고향인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광명光明과 계발計勃이라는 두목이었습니다. 이들은 전호와 부곡민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방의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정방의는 쳐들어온 이들을 무찌른 것은 물론 패주하는 적들을 쫓아가 아예 광명과 계발 일당을 싸그리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진주는 구원 받을 길이 없어진 것일까요?

하지만 진주 사람들은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방의 일당에게 끝까지 저항했지요.

결국 다음해 진주 사람들은 정창대가 성을 떠나 있을 때 정방의를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창대가 분노해서 2백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했지만 이들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쫓겨나고 맙니다.

진주는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사족]
물론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방의와 싸우느라 진주 지방은 황폐해졌고 최충헌은 이 틈을 타 진주를 자기 영유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학살자 정방의를 스스로의 힘으로 쫓아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 소중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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