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왜곡 *..역........사..*



지난 번에 주문한 책 중 하나가 <무측천 평전>이다. 우리한테는 <측천무후>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여자 이야기다.

이 책의 지은이는 소설가가 아니다. 중국 섬서 사범대학 역사학과 교수들이다.

수당 시대를 다룬 중국 역사서들을 보면 백제-고구려 전쟁기에 대한 평가를 먼저 보게 된다. 대개 당태종의 경우는 혹한과 풍토병 때문에 철군했다고 나온다. 전쟁에 져서 철군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못난 황제로 유명한 수양제는 져서 도망쳤다고 나오기도 한다. (그보다는 양현감의 반란 때문에 급히 철군해야 했다고 많이 쓴다)

이 책도 예외가 없다. 특히 어이가 없는 것은 신라와의 결전 부분이다. 책을 잠시 인용하자.

고구려가 평정된 지 5년이 지난 뒤, 설인귀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국경 밖으로 도망가는 고구려 사람들이 생겼다. 신라 왕 김법민이 그들을 받아들여 돌보아주었고, 백제의 고지를 쳐서 점유했다. 고종은 크게 진노하여 김법민의 관직을 삭탈하고 재상 유인궤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도록 했다. 675년 2월, 유인궤는 칠중성에서 신라군을 대파했다. 김법민은 계속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고종은 그때서야 김법민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점차 쇠약해져갔고 신라는 날로 강성해져 경계 안에 주를 두었고 많은 이민족 중에 가장 많은 산물을 바쳤다.

무엇부터 손을 봐야 할 지 모를 정도로 엉망이다. 사실 관계도 죄 이상하다.
고구려의 멸망은 668년이다. 5년후라면 673년이 된다. 그러나 이미 670년부터 당과 신라는 싸우고 있었다. 신라의 대신 양도는 당의 옥에 갇혀서 죽었다. 안승이 신라에 항복한 것도 670년이다. 애초에 대동강 이남은 신라의 영토로 주기로 했던 약속이 아무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신라가 갑자기 미쳐서 중국과 대적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그럼 문제의 칠중성 전투는 무엇인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675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2월에 유인궤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부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는데, 황제는 조칙을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경략했다. 왕은 이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또한 사죄하니, 황제는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직과 작위를 회복하게 했다. (중략) 그러나 우리나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고 드디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까지 주, 군으로 삼았다.

칠중성 전투는 졌으나 결국 땅은 신라 차지가 되어버렸다. 일개 전투를 이기고 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안동진무대사로 부임한 이근행은 다스릴 땅이 없었다. 이근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 삼국사기 기록을 본다.

9월 29일에 이근행은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둔쳤으므로, 우리 군사는 이를 쳐서 쫓고 말 3만 380필을 얻었으며, 그 나머지의 얻은 병기도 이에 상당했다.

불쌍한 이근행. 개박살이 났던 것이다. 위 중국인들의 글과는 달리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당군은 도처에서 패배했다. 칠중성에서도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우리 군사는 당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18번의 싸움에서 모두 이겨, 머리 6,047급을 얻고 말 200필을 얻었다. (675년)

설인귀와 소부리주의 기벌포에서 싸워 처음에는 패전했으나 또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에서 이겨 머리 4천여 급을 베었다. (676년)


이것이 마지막 전투였다. 당은 신라의 실효적 지배를 인정하고 손을 뗐다.

그러나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억지를 부리고 있는 중국애들... 언제쯤 정신을 차릴는지 원,...

덧글

  • 첫비행 2005/04/22 17:17 #

    중국이나 일본이나, 역사가지고 소설 써 대는 건 거기서 거기군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유사역사아웃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