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이 삼국사기를 금나라에 바쳤다? *..역........사..*

문정창이 이렇게 주장한 모양이다.

그 근거를 이렇게 들고 있다.

1.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한 때는 치사(致仕)한 뒤므로 관직에 있던 때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신(臣)이라 칭했으니 이는 금의 황제에게 신이라고 한 것이다.
(치사신이라고 써야 마땅하다)

2. 복유성상폐하(伏惟聖上陛下) 성당요지문사(性唐堯之文思) 체하우지근검(體夏禹之勤儉) - 엎드려 생각하옵기에 성상 폐하는 요임금의 문사를 바탕으로 하고 우임금의 근검함을 본받으시니...라는 김부식의 말은 금나라 황제에게 하는 말이다. 고려는 이때 금의 압력으로 폐하와 같은 말을 쓸 수 없었다.


치사라 함은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러나면 신하가 아닌가? 고려사 김부식 열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인종> 20년에 세 번이나 표문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동덕 찬화 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가사(加賜)하고 조(詔)하기를,
“경은 나이 비록 늙으나 크게 의론할 바가 있으면 마땅히 참여시켜 들을 것이다.”
고 하였다.


이런 일은 흔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물러난 신하들이라 해도 나라에 중대사가 열리면 불러들여 의견을 물었다.

더구나 웃긴 것은 [삼국사기]의 목록 난에 들어있는 김부식의 관직명에는 처음부터 치사신致仕臣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아래처럼.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 宣撰

못 믿겠다고? 그럼 원문 캡춰를 한번 볼까? 이 부분의 글자가 워낙 조밀하여 옆으로 뺀 뒤에 붉은 글씨로 풀어 놓았다. 치사신 위에 있는 글자는 상주국의 國자이다.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기 바란다.

문정창은 고려세가에 인종이 김부식에게 삼국사 편찬을 명한 바 없기 때문에 김부식의 <진삼국사편>에 나오는 "해동 삼국의 역년이 오래 되어 여러 사적에 남아 있으니 노신(김부식)에게 그것을 편집하라 명하셨습니다"라는 말은 금나라 황제에게 바치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금사>에는 금의 희종이 김부식에게 삼국사를 편찬하라고 명한 이야기가 나오나? 물론 그런 말 없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김부식이 삼국사를 지은 다음 인종에게 바친 내용이 김부식 열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 <인종> 23년에 지은 바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사(三國史)》를 올리니 왕이 내시(內侍) 최산보(崔山甫)를 보내 집에 나아가 장유(奬諭)하고 화주(花酒)를 사하였다.

금나라 황제한테 바친 책을 왜 인종이 유지를 내려 격려하고 술까지 내려 축하한단 말이냐?

또한 인종에게 바친 말인 - 성당요지문사(性唐堯之文思) 체하우지근검(體夏禹之勤儉)이란 학문을 좋아하고 근검절약했다는 뜻인데, 훗날 김부식은 인종실록 편찬을 책임지게 된다. (문정창 식으로 생각하면 치사신이 그런 일은 왜 맡을까?)
그때 김부식은 아래와 같이 인종의 학문과 근검절약 정신을 칭송한다.

사신(史臣) 김부식(金富軾)이 찬(贊)하기를,

“인종(仁宗)은 소시(少時)로부터 재예(才藝)가 많아 음률(音律)에 깨쳤으며, 서화(書畵)를 잘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손에 책을 놓지 않고 혹은 밤새도록 자지 않았다. 즉위함에 미쳐서는 명경과(明經科) 출신(出身) 신숙(申淑)이 심히 빈곤(貧困)함을 듣고 내시(內侍)로 소입(召入)하여 춘추 경전(春秋經傳)을 받았[受]다.

성품(性品)이 또 검약(儉約)하여 일찍 불예(不豫 병환)할 때 재추(宰樞)들이 내전(內殿)으로 들어가 문병(問病)하니 거처하는 침석(寢席)에 황주(黃紬)로 연식(緣飾)함이 없고 침의(寢衣)도 능금(綾錦)의 꾸밈이 없었다. 초년(初年)에는 궁중(宮中)에 환시(宦寺)와 내료(內僚)의 속관(屬官)이 심히 많았으나, 매양 미죄(微罪)만 있어도 추출(追出)하여 다시 보충(補充)하지 않았으므로 말년(末年)에 이르러서는 수인(數人)에 불과하였다.“


<폐하>라는 말을 쓰지 못했다고? 고려사를 찾아보면 그 이후에도 폐하라는 말을 얼마든지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김부식이라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분명한 사대주의자가 자신의 글에 고려왕을 <폐하>라 쓸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황당한 결론이다.

한가지 예만 들어준다. 고려 의종 24년(1170년 - 의종은 인종 다음 왕이다) 정월의 기록이다.
壬子朔, 王受賀於大觀殿, 親製臣僚賀表, 宣示群臣, 表曰, 三陽應序, 萬物惟新, 玉殿春回, 龍顔慶洽, 體一元而敷惠, 斂諸福以大和, 是大人道長之初, 乃陽德氣萌之始, 恭惟, 陛下, 重高之聖哲, 疊舜之聰明...
임자(壬子) 삭(朔)에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하례(賀禮)를 받고 친히 신료(臣僚)의 하표(賀表)를 지어 군신(群臣)에게 선시(宣示)하니, 표(表)에 이르기를,
“3양(陽)이 다음 순서에 응(應)하니 만물(萬物)이 새롭소이다. 옥전(玉殿)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龍顔)에 경사가 흡족하나이다. 일원(一元)을 체(쯜)하시어 혜택(惠澤)을 펴시니, 모든 복록(福祿)을 거두어 크게 화(和)하였나이다. 이것은 대인(大人)의 도(道)가 장구(長久)할 시초(始初)이므로 이에 양덕(陽德)의 기(氣)가 싹트기 시작하나이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陛下)께서는 요(堯)의 성철(聖哲)을 거듭하는 데에 순(舜)의 총명(聰明)을 쌓았으니...


이제는 이런 거짓말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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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슈타인호프 2005/07/09 18:19 #

    그나마 고려가 금에게 사대하기로 한 건 김부식 이후, 이자겸 집권시대가 아니던가요;;
  • 루드라 2005/07/09 19:25 #

    문정창이 뭐하는 사람입니까?
  • 초록불 2005/07/09 22:25 #

    슈타인호프 님 / 금에 사대한 것은 인종 때가 맞습니다. 이 무렵 북송이 멸망했죠. 금이 중원을 지배하고 있으니 사대받을만 했죠.

    루드라님 / 문정창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재야사학자의 선구자죠. 환단고기로 유명한 이유립과 같이 활동한 사람입니다. 위 글은 전혀 몰랐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읽고 짜증이 나서 쓴 것입니다.
  • 초록불 2005/07/09 22:27 #

    문정창에 대해서 추가하자면 개인적인 성향은 잘 모르겠지만 일제강점기에 은율군수를 지낸 사람인데 친일사학을 공격한다는 재야사학자의 선봉에 선 이상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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