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이 시작된 글은 이것
역사는 과거의 사실들로 형성되어 있으며 역사학은 이 사실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학문입니다. 이때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바로 사료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한다면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학자가 아니라 사료를 다루는 학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역사는 사료를 다루는 학문이며, 사료가 없다면 역사도 없다.
영국의 역사가 콜링우드(1889-1943)는 사료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하나 하나에 대한 명칭으로서는 document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집합 명칭이 곧 사료evidence다. document는 지금 여기 남아 있는 것을 말하며, 역사가는 그것에 대하여 사고思考를 함으로써 과거의 사건들에 관하여 제기되는 의문에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사료다.
프랑스의 역사가 블로크(1886-1944)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말하고 쓴 모든 것,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인간이 손 댄 모든 것은 인간에 관해 우리에게 뭔가를 말해주고 있으며, 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사료의 종류는 크고 넓다.
사료는 크게 문자적 사료와 비문자적 사료로 나눌 수 있다. (역사학자에 따라 이 개념에 대한 용어는 다양하게 사용된다.)
또한 이 사료들은 1차 사료(primary source=primary evidence)와 2차 사료(secondary source=secondary evidence)로 나누어진다.
1차 사료는 그 시대(혹은 거의 동일한 시대)에 제작된 유물이나 저작물이다.
2차 사료는 그 시대에서 떨어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1차 사료를 보충하는 자료다.
1차 사료에는 유물, 유적, 고고학적 자료, 금석문, 지도, 통계, 도표, 문서, 편지, 저술, 비망록, 전기, 자서전, 잡지, 신문, 회고록, 녹음 자료, 연설문 등이 포함된다.
2차 사료에는 역사책, 논평, 해석, 해설, 각주, 전기, 비평 등이 포함된다.
이 두가지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당시대성(contemporaneousness)이다.
여기서 <삼국사기>에 대한 사료적 정의는 무엇인지 보자.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역사책으로 위 기준에 따르면 2차 사료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이 책을 능가하는 다른 자료가 없으며, 이 책이 당대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책은 관례적으로 1차 사료로 인정을 받는다.
이렇게 1차 사료와 2차 사료의 판정은 기계적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이런 예는 우리나라 역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료의 종류에 따라 일부분은 1차 사료이고 일부분은 2차 사료인 경우도 존재한다.
이러한 사료는 반드시 비판을 거쳐야 한다. 앞서 말한 블로크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 연구에서 첫번째 필요한 것은 철저한 대조(crossexamination)다.
사료비판이란 사료의 타당성(validity)과 정확성(accuracy)을 검토하는 작업이다.
사료비판은
1. 사료에 담겨있는 증언이 사실인가를 검토한다. 사료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작업이다.
2. 사료에 담겨있는 증언이 개조, 개작되지 않았는가를 파악한다. 사료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판별하는 것이다.
3. 사료의 주인공, 혹은 사료의 제작자가 증언에 걸맞는 사람인가를 파악한다. 즉 증인에 대한 신뢰성을 판가름한다.
이런 사료비판에는 외적 비판(external criticism=historical criticsm)과 내적 비판(internal criticism=historical analysis)이 존재한다.
외적비판이란 사료의 원형에 대한 조사로, 사료 그 자체를 검토하며, 그 안의 내용을 검토하지 않는다.
1. 사료의 저자나 작자를 확인한다. - 사료가 실제 그 저자나 작자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확인한다.
2. 사료의 연대를 확정한다.
3. 원저작의 보존상태를 검토한다. - 사료의 조작, 위작, 표절, 오류 등을 찾아낸다.
4. 사료의 문장의 부분적 상이점을 가려낸다. - 개악된 부분을 대조 교합하여 원본을 복원한다.
이런 외적비판은 다른 학문과 과학기술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언어학, 고문서학, 서지학, 금석학, 공문서학, 문장학, 계보학, 화폐학, 연대학, 탄소연대측정법 등등. (X선, 전자현미경, thermouluminescent testing 등등 과학의 도움도 받는다.)
내적비판은 사료의 신뢰도를 결정하는 일이다. 실제로 역사가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는 여기다. 외적비판을 통해 진본으로 인정된 사료를 가지고 행해진다.
사료에 담겨있는 사실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진실을 알리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안에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거짓말, 착각, 과장 등이 섞여있게 마련이다. 내적비판을 통해 이런 점들을 파악해 내야 한다.
1. 진술 내용의 진의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동일한가? 즉 사료에 있는 단어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단어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는가? 또는 풍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가?
2. 원저자는 그가 진술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어느 정도 관찰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는가? 그런 관찰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는가, 그에 걸맞는 능력은 가지고 있었는가? 협박이나 동정 등 외부에서 끼친 영향은 없었는가?
3. 원저자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가? 관찰한 즉시 보고가 이루어졌는가? 그것을 기록할 수 있었는가?
4. 원저자가 진술한 의도는 무엇인가? 그는 누구를 위하여 진술하고 있는가? 진실을 진술하기 위해 노력했는가? 왜곡이 없었는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사실은 숨기지 않았는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바가 우연히 진술되지는 않았는가?
5. 진술 내용이 본질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내재적인 자기 모순이 있지 않은가?
6. 우리 자신의 편견이나 선입견이 진술내용에 대한 우리 견해를 왜곡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7. 다른 사료나 관련 진술 등과 대조하여 논리적 모순을 해소하고 있는가?
대개 ExtraD님이 의문을 가진 부분은 내적 비판 부분이 아니라 외적 비판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위의 이야기들은 어려웠지만 쉽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라는 역사책을 썼습니다. 이 중 무제에 대한 부분은 사마천이 생존한 상태에서 겪은 일입니다. 1차 사료입니다. 그런데 사기는 오제 시대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2차 사료입니다. 은허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사기>에 있는 은나라 텍스트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은허가 발굴이 되고 그곳에서 발견된 갑골문들, 즉 1차 사료가 <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기>의 은나라 텍스트는 1차 사료에 준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고구려 건국신화가 적혀 있습니다. 크게 보면 삼국사기의 기록과 동일합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각종 금석문은 삼국사기의 텍스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같은 관직, 인명이 등장하고 연대의 차이도 1-2년밖에 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의 텍스트적 가치는 이런 식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삼국재중국설의 주장자들은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도 후대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말하며 믿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비판은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죠. 그러나 이보다 덜하더라도, 아마추어 역사학도들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증거는 일단 부정하고 봅니다. 다른 근거없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단편적인 자료만 보고 상호교차검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래 시경의 한혁편 같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 텍스트에 韓과 貊이 나오자 바로 우리나라와 연관을 시켜버린 것입니다. 김한규 교수가 증명한 것처럼 사료비판을 충실히 했다면 금방 자신의 오류를 파악했을 것입니다.
중국사서들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서들에 대해서, 일본의 사서에 대해서 일반적인 사료 가치에 대한 평가는 내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무리하게 뒤집어 엎으려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들로 형성되어 있으며 역사학은 이 사실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학문입니다. 이때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바로 사료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한다면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학자가 아니라 사료를 다루는 학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역사는 사료를 다루는 학문이며, 사료가 없다면 역사도 없다.
영국의 역사가 콜링우드(1889-1943)는 사료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하나 하나에 대한 명칭으로서는 document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집합 명칭이 곧 사료evidence다. document는 지금 여기 남아 있는 것을 말하며, 역사가는 그것에 대하여 사고思考를 함으로써 과거의 사건들에 관하여 제기되는 의문에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사료다.
프랑스의 역사가 블로크(1886-1944)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말하고 쓴 모든 것,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인간이 손 댄 모든 것은 인간에 관해 우리에게 뭔가를 말해주고 있으며, 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사료의 종류는 크고 넓다.
사료는 크게 문자적 사료와 비문자적 사료로 나눌 수 있다. (역사학자에 따라 이 개념에 대한 용어는 다양하게 사용된다.)
또한 이 사료들은 1차 사료(primary source=primary evidence)와 2차 사료(secondary source=secondary evidence)로 나누어진다.
1차 사료는 그 시대(혹은 거의 동일한 시대)에 제작된 유물이나 저작물이다.
2차 사료는 그 시대에서 떨어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1차 사료를 보충하는 자료다.
1차 사료에는 유물, 유적, 고고학적 자료, 금석문, 지도, 통계, 도표, 문서, 편지, 저술, 비망록, 전기, 자서전, 잡지, 신문, 회고록, 녹음 자료, 연설문 등이 포함된다.
2차 사료에는 역사책, 논평, 해석, 해설, 각주, 전기, 비평 등이 포함된다.
이 두가지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당시대성(contemporaneousness)이다.
여기서 <삼국사기>에 대한 사료적 정의는 무엇인지 보자.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역사책으로 위 기준에 따르면 2차 사료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이 책을 능가하는 다른 자료가 없으며, 이 책이 당대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책은 관례적으로 1차 사료로 인정을 받는다.
이렇게 1차 사료와 2차 사료의 판정은 기계적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이런 예는 우리나라 역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료의 종류에 따라 일부분은 1차 사료이고 일부분은 2차 사료인 경우도 존재한다.
이러한 사료는 반드시 비판을 거쳐야 한다. 앞서 말한 블로크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 연구에서 첫번째 필요한 것은 철저한 대조(crossexamination)다.
사료비판이란 사료의 타당성(validity)과 정확성(accuracy)을 검토하는 작업이다.
사료비판은
1. 사료에 담겨있는 증언이 사실인가를 검토한다. 사료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작업이다.
2. 사료에 담겨있는 증언이 개조, 개작되지 않았는가를 파악한다. 사료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판별하는 것이다.
3. 사료의 주인공, 혹은 사료의 제작자가 증언에 걸맞는 사람인가를 파악한다. 즉 증인에 대한 신뢰성을 판가름한다.
이런 사료비판에는 외적 비판(external criticism=historical criticsm)과 내적 비판(internal criticism=historical analysis)이 존재한다.
외적비판이란 사료의 원형에 대한 조사로, 사료 그 자체를 검토하며, 그 안의 내용을 검토하지 않는다.
1. 사료의 저자나 작자를 확인한다. - 사료가 실제 그 저자나 작자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확인한다.
2. 사료의 연대를 확정한다.
3. 원저작의 보존상태를 검토한다. - 사료의 조작, 위작, 표절, 오류 등을 찾아낸다.
4. 사료의 문장의 부분적 상이점을 가려낸다. - 개악된 부분을 대조 교합하여 원본을 복원한다.
이런 외적비판은 다른 학문과 과학기술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언어학, 고문서학, 서지학, 금석학, 공문서학, 문장학, 계보학, 화폐학, 연대학, 탄소연대측정법 등등. (X선, 전자현미경, thermouluminescent testing 등등 과학의 도움도 받는다.)
내적비판은 사료의 신뢰도를 결정하는 일이다. 실제로 역사가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는 여기다. 외적비판을 통해 진본으로 인정된 사료를 가지고 행해진다.
사료에 담겨있는 사실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진실을 알리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안에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거짓말, 착각, 과장 등이 섞여있게 마련이다. 내적비판을 통해 이런 점들을 파악해 내야 한다.
1. 진술 내용의 진의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동일한가? 즉 사료에 있는 단어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단어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는가? 또는 풍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가?
2. 원저자는 그가 진술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어느 정도 관찰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는가? 그런 관찰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는가, 그에 걸맞는 능력은 가지고 있었는가? 협박이나 동정 등 외부에서 끼친 영향은 없었는가?
3. 원저자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가? 관찰한 즉시 보고가 이루어졌는가? 그것을 기록할 수 있었는가?
4. 원저자가 진술한 의도는 무엇인가? 그는 누구를 위하여 진술하고 있는가? 진실을 진술하기 위해 노력했는가? 왜곡이 없었는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사실은 숨기지 않았는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바가 우연히 진술되지는 않았는가?
5. 진술 내용이 본질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내재적인 자기 모순이 있지 않은가?
6. 우리 자신의 편견이나 선입견이 진술내용에 대한 우리 견해를 왜곡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7. 다른 사료나 관련 진술 등과 대조하여 논리적 모순을 해소하고 있는가?
대개 ExtraD님이 의문을 가진 부분은 내적 비판 부분이 아니라 외적 비판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위의 이야기들은 어려웠지만 쉽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라는 역사책을 썼습니다. 이 중 무제에 대한 부분은 사마천이 생존한 상태에서 겪은 일입니다. 1차 사료입니다. 그런데 사기는 오제 시대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2차 사료입니다. 은허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사기>에 있는 은나라 텍스트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은허가 발굴이 되고 그곳에서 발견된 갑골문들, 즉 1차 사료가 <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기>의 은나라 텍스트는 1차 사료에 준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고구려 건국신화가 적혀 있습니다. 크게 보면 삼국사기의 기록과 동일합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각종 금석문은 삼국사기의 텍스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같은 관직, 인명이 등장하고 연대의 차이도 1-2년밖에 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의 텍스트적 가치는 이런 식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삼국재중국설의 주장자들은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도 후대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말하며 믿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비판은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죠. 그러나 이보다 덜하더라도, 아마추어 역사학도들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보이는 증거는 일단 부정하고 봅니다. 다른 근거없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단편적인 자료만 보고 상호교차검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래 시경의 한혁편 같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 텍스트에 韓과 貊이 나오자 바로 우리나라와 연관을 시켜버린 것입니다. 김한규 교수가 증명한 것처럼 사료비판을 충실히 했다면 금방 자신의 오류를 파악했을 것입니다.
중국사서들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서들에 대해서, 일본의 사서에 대해서 일반적인 사료 가치에 대한 평가는 내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무리하게 뒤집어 엎으려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덧글
그러면 남는 것은 내용의 진위인데, 그 책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려면, 이미 있는 자료들과 교차대조했을 때 일치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문헌들에서는 참고할 수 없는 새로 발견된 자료들이 그 문헌을 뒷받침할 때, 비로소 신빙성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즉,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진 책이 "기지(旣知)"의 사실을 담고 있다면,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책이 믿을만함을 증빙할 수 없으며, 그 책에 담겨있는 "미지(未知)"의 사실이었던 것이 이후의 발견과 합치된다면, 그것은 믿을만한 사료로 평가될 것입니다.
사료비판 특히 외적비판은 학부생의 대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학부에서는 이런 것에 대해서 대개 3학점짜리 <사학개론>이나 <사적 해제> 시간에 공부하는 정도죠. <사적 해제>는 전필이 아니어서 많이 듣지도 않습니다.
저는 교감이나 경전이문을 검토하다가, 사료 교차검증을 하는 게 버릇처럼 되어서, 오히려 즐기는 편이지요.
[사료비판]이 따로 역사학의 전공으로 나뉘어져 있는지 알고 싶네요. 물론 그러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전문성이 상당히 요구되는 것일 거라 전문가가 따로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고람거사님도 사료비판과 관련된 연구를 하시는 건가요?
(이럴 때 보면 한국의 '찬란했던 고대역사'에 대해 더더욱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음... 링크를 올리려고 했더니 너무 길어서 안 올라가는군요. 그냥 교보 등에서 <반삼국지>라고 치시면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점을 확실히 해두고 말씀드리자면, 역시 전란이 가장 큰 문제죠. 고려 시절 거란침입으로 개성이 함락되었을 때, 고려 실록이 모두 불타버리는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 삼국의 전적도 많이 훼손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몽골도 우리나라 전토를 붙태우고 다녔으니, 역시 그 와중에 많은 전적이 유실되었겠지요.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장예원 등을 불태울 때(불행히도 이 화재는 일본군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른 것이죠. 이때 허준이 의서들을 구해내지 못했으면 동의보감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