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수난사 *..역........사..*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 이성무 / 동방미디어
이 글의 내용은 대부분 이 책에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조선은 왕조실록 보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고려가 전란으로 실록을 홀랑 날려버린 일도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같은 실록을 4부 작성해서 각지에 보관시켰다.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의 4곳에 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있었다.

춘추관 사고
왕조 초기부터 존재했다. 고려왕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마지막까지 존재한 사고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쪽에.

충주사고
왕조 초기부터 존재했다. 고려왕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성주 사고
1445년 설립
1538년 전소. 춘추관 실록을 베껴서 다시 봉안.

전주 사고
1445년 설립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경상도에 있던 성주사고는 4월 23일 왜군이 침입했다. 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해 땅에 파묻었지만 결국 왜군에게 발각되어 약탈, 방화되어 사라졌다.

충주에서는 4월 28일 유명한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가 있었다.
충주가 함락된 후에 충주 사고는 불타 없어졌다. 충주 사고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온 곳이어서 이곳에 고려 때부터의 자료들이 많이 있었으나, 이때 불타서 모두 없어졌다.

춘추관 사고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복궁을 불태우는 바람에 없어졌다. 4월말에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분노한 서울 백성과 천민들이 경복궁, 창덕궁, 창운궁, 장예원, 형조 등을 모두 불태웠다.

일본군 제6진은 성주, 선산, 금산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남원을 거쳐 전주로 향했다.
이때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만이 일본군과 싸우며 그들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전주사고에 비상이 걸렸다. 처음에는 실록을 땅에 묻어서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경상도 금산에서 포로가 된 일본군에게서 성주에서 나온 실록 두 장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땅에 묻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전라감사 이광은 경기전 참봉 오희길에게 실록을 보관할 장소를 찾아내라 명했고, 그 결과 내장산 은봉암에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전라감사는 이 일을 관리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학문과 지혜가 있는 선비를 널리 구했다. 이때 태인 선비 안의(64세)손홍록(56세)이 이 일에 자원했다. 이들은 실록을 일단 은봉암으로 옮겼다가 그곳도 불안하다 생각하여 다시 더 깊은 산중에 있는 비래암으로 옮겼다.

이들이 1592년 6월 22일 옮긴 사료의 양은 이렇다.

태조에서 명종까지 실록 47상자.
고려사와 기타 서책 15상자.
총 63상자였다.

참봉 오희길과 선비 안의, 손홍록, 그리고 내장사 승려들은 1년 동안 불침번을 서며 실록을 지켰다. 참봉 오희길은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지키는데 더 신경을 썼고 안의와 손홍록은 1년 동안 하루보 빠짐없이 교대로 불침번을 서면서 실록을 지켰다고 한다.

1593년 6월, 전라도로 진격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던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7월에 일본군은 구례를 거쳐 남원까지 진격했다. 이제 내장산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전라감사는 실록을 옮길 것을 주청했다.
이리하여 실록은 아산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해로로 해주로 이송되었다.
해주에서 실록은 3년 동안 보관되었다. 그리고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실록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묘향산으로 이송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영변부 객사로 옮겨지고 1604년에 강화도로 옮겨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종6품의 관직을 제수받아 그 공을 기려주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은 길목에 사고를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고는 이후 깊은 산 속에 설치 되었다.

실록은 다음 장소에 설치되었다.

춘추관
강화도(마니산 - 정족산)
오대산
묘향산 - 적상산
태백산


각 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의 운명을 살펴보자.

춘추관 사고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상당량 소실. 이후 전대 실록을 새로 만들지 못하고 광해군일기 이후 실록만 보관.
1811년 화재로 72상자 중 66상자 소실됨.

강화도 사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마니산 사고 함락되고 상당량 파괴됨. 이곳에 보관된 실록은 전주 사고 것이었음.
1653년 화재로 상당량 소실.
1606년 정족산 사고로 옮김.
1665년 없어진 사료 보충.
1923년 경성제국대학 설립과 더불어 그곳으로 이송 보관함.

오대산 사고 가장 완전했던 실록
1912년 -1913년 일제에 의해 동경대학으로 이송됨.
1923년 동경대지진으로 소실.
현재 서울대학교 27책, 동경대학교 47책만 남아있음.
(조선왕조실록은 888책임. 고종-순종실록 60책을 빼었음.)

태백산 사고
1923년 경성제국대학 설립과 더불어 그곳으로 이송 보관함.

묘향산 - 적상산 사고
1618년 - 1633년 후금의 위협으로 설립하고 묘향산 사고본을 옮김.
1910년 이왕직 장서각으로 이송.
1945년 이왕직의 이름이 구왕궁사무청으로 변경됨

이리하여 해방이 되었을 때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구왕궁사무청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서울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던 실록은 3차례에 걸쳐 부산으로 이송되었으나 구왕궁사무청에 있던 적상산 사고본은 북한군에게 약탈되었다.

현재 실록은 서울대학교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나눠서 보관하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는 실록은 태백산본이다.

실록은 모두 5부가 제작되었으나 춘추관본은 소실, 오대산본은 일본에서 소실, 적상산본은 북한에 약탈되었던 것이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만 남은 셈이다. 5부씩이나 만들었던 실록도 이렇게 지키기 어려웠으니, 다른 사서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핑백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조선왕조실록의 귀환을 보며 2008-02-29 16:0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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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오우거 2005/10/09 20:25 #

    이러니 전대고인이 남긴 비급을 찾는게 허무맹랑하단 소릴 듣는게 당연한 건지도;;; 책 보관이 다른 나라도 이렇게 어려웠을까요?
  • 초록불 2005/10/09 20:29 #

    오우거님 / 시저가 불태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생각해보면 답이 있을지도...

    그리스의 수많은 저작물들도 아랍이 보관해주지 않았다면 모두 없어졌을 거라고 이야기하죠? 그리스 시대의 서적들 중에 제목만 남은 것들이 상당하죠.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이나 돈황문서, 사해문서 등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도 뭐 이런 데에...
  • 루드라 2005/10/09 20:56 #

    인쇄술이 생기기 이전에는 모든 기록이 필사로 행해지다 보니 책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고 부수 자체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상당수의 책이 유일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나 화재같은 사고로 한 번 유실되면 영영 복구가 불가능해지는 거죠.
    그나마 중국에서는 백서나 죽간등이 있었고 그리고 비교적 일찍 종이가 발명되어 오랫동안 보존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리스나 로마등 지중해 문명에서는 파피루스를 사용했기 때문에 전쟁이나 화재를 겪지 않아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보존이 불가능했습니다.(파피루스는 90년대 북한에서 종이가 부족하자 사용했다고 하는 옥수수종이 보다도 훨씬 형편없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 도원 2005/10/09 23:39 #

    도쿄대학에 남아 있는 것은 반환이 되었나요?
    책의 발행부수가 적기 때문에 금속활자를 발달시켰을 듯.
    적성산이 아니라 적상(裳)산이었던 듯.
  • 초록불 2005/10/10 00:05 #

    도원님 / 반환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문화재 중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걸로 압니다. (소소한 물품의 개인적인 기증은 몇 건 있었을지 모르죠.)

    책의 발행부수가 적어서 금속활자가 발달했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적상산이 맞습니다. 잘못 쳤네요. 고치는 김에 추가로 손을 좀 더 보았습니다.
  • ExtraD 2005/10/10 03:22 #

    요즘을 생각하면 집집이 책들이 쌓여있지만 책이 귀하던 옛시절에는 그것이 매우 힘들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인쇄술 이전에 '학술' 자체가 발달했더라면 그 정도의 완전한 소실은 없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13세기 사서가 현존 최古란 건 여전히 아쉽습니다.
  • 초록불 2005/10/10 09:31 #

    ExtraD님 / 그런 점도 확실히 있습니다. 북한산에 버젓이 서 있던 진흥왕 순수비를 아무도 읽지 못해 무학대사의 비라고 <생각>만 했을 정도니까요. (이 비를 판독한 사람은 추사 김정희입니다.)

    얼마나 많은 비석이 구들장과 빨래터 다듬이돌로 사라졌을지 생각하면 우울하죠...
  • 루드라 2005/10/10 18:40 #

    중국조차 문서와 전적의 보관 같은 일에 대한 중요성을 알게 된 건 겨우 송나라에 와서의 일이고 문자학과 언어학등 진정한 <소학>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 건 청나라에 들어와서의 일이었습니다. 자기나라 글와 말을 다루던 중국조차 이랬는데 남의 나라 글을 쓰던 한국에서 그런 학문의 가치를 깨닫기는 좀 어려웠을 겁니다. 서양에서도 이 방면의 학문이 발달한건 19세기 들어와서의 일이니까요.
  • 심리 2007/11/30 14:42 #

    파란만장한 역사네요. 책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지켜주신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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