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페로페로님의 블로그로 트랙백
이 글을 트랙백한 이유는 간단하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의 오해와, 그 오해로부터 파생한 극우민족사관의 영향으로 조선을 아주 비참한 나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에는 조선이 베르사이유 궁전이라든가, 자금성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도 있다.
저 거대한 국가인 중국과 비교하는 것도 문제지만, 조선이 그런 거대 유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조선이 백성을 철저히 보호한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오늘날 식으로 말한다면 조선은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것이다.
조선 말기의 혼란을 부각해서 조선 역사 500년을 무시하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다. 임진왜란 때 파죽지세로 일본군에게 밀려난 것이 창피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백년을 평화롭게 지내온 나라가 무슨 무시무시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겠는가? 일본은 그 이백년을 전쟁으로 지샌 나라고.
더구나 그 전쟁에서 결국 우리가 이기지 않았는가!
잘못된 점을 바로 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없었던 누명을 씌우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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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의 오해와, 그 오해로부터 파생한 극우민족사관의 영향으로 조선을 아주 비참한 나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에는 조선이 베르사이유 궁전이라든가, 자금성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도 있다.
저 거대한 국가인 중국과 비교하는 것도 문제지만, 조선이 그런 거대 유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조선이 백성을 철저히 보호한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오늘날 식으로 말한다면 조선은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것이다.
조선 말기의 혼란을 부각해서 조선 역사 500년을 무시하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다. 임진왜란 때 파죽지세로 일본군에게 밀려난 것이 창피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백년을 평화롭게 지내온 나라가 무슨 무시무시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겠는가? 일본은 그 이백년을 전쟁으로 지샌 나라고.
더구나 그 전쟁에서 결국 우리가 이기지 않았는가!
잘못된 점을 바로 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없었던 누명을 씌우지는 말자.
덧글
조선은 임란이후 총 토지결수의 회복이 구한말까지도 이루어 지지 못합니다만 (그만큼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했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토지 자체가 전란에 휩싸인 것이 아니라서 그만큼 회복이 빨랐지요.
수많은 유생들이 일어나 중국에 대한 예의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라며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국 시위가 벌어지는 장면이 떠오르는 군요...
16세기까지의 풍요(과연 풍요로웠는지 의문입니다만)가 조선의 공이라면, 임진왜란 뒤 300년이 지나도록도 그 생산력을 회복하지 못한 것 역시 조선의 과입니다.
얼마나 무능했으면 18세기 이후 외래인들의 기록마다에 나타나는 나태함, 가난함, 피폐함 등이 그렇게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박혀들어 있었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왕조가 500년이나 갔다지만, 1390년대에도 1890년대에도 심지어 마차도 아닌 소나 말, 또는 가마를 타고 다니고 19세기말 한양의 풍경을 묘사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내용을 보면 베이징보단 낫다 하나 일본의 도시들과는 아예 비교할 수도 없었더군요.
위에서 조선이 가난하지 않아다고 말하는 건 전근대 상태의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의 얘기입니다. 이미 근대 사회로 접어든 나라들과 비교하면 얘기가 안 됩니다.
1890년대 일본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서구화를 이룬 상태였습니다. 이미 근대사회로 접어든 일본과 전근대적 상태의 조선이 어떻게 비교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비교한다면 1850년대의 에도와 비교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비숍은 1850년대의 일본은 구경도 못해 본 사람입니다.
초록불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지만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보다 잘 살았다거나 근대적 의회민주주의 국가보다 정치체제가 나았다는 주장을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전근대사회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조선은 나름대로 법치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이런 노력의 이유가 아무리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생산력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상공업에서는 주변 나라들에 비해서 좀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전근대사회에서 산업생산액의 9할 이상을 차지하는 농업에서는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농지 단위당 생산량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보다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심지어 삼모작이 가능한 지방보다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예전에 데이터를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가지고 있질 못하네요)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조선시대를 통털어 미곡생산량은 현대 대한민국의 산출량과 동일합니다. 수입이란 것이 있고 쌀보다 다른 식품류의 소비가 늘어난 탓도 있지만 4천만 인구를 먹여 살리는 산출량이 조선시대에 이미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의 구휼제도나 의학정비는 타국에 비할바가 아닌것으로 국가에서 규정된 구휼창이 존재하고 구휼에 대한 구체적 사항까지 법령으로 기록한 나라는 19세기까지 전 세계에 단 한곳도 없었습니다. 18세기말과 19세기에 이르면서 서양에서 기술 발전에 의한 급속도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 같아도 시스템적 측면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구한말등의 혼란시기는 나라가 망해가는 징조였습니다. 각종 제도적 장치가 혼란해 지고 상공 농업이 문란해 지고 계급제도 자체도 혼란해 지는 전형적인 현상인 것이지요. 이는 아무리 잘난 나라라도 이런 상태를 겪는다면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초록불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임란 후에는 이런 단위를 포기하고 기계적인 수치로 결을 정합니다. 1등급 결의 면적 4배가 6등급 결이 되는 식입니다. 기계적인 방식이죠. 각각 생산력이 동일했는지는 좀 의문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더 이상은 무리)
그런데 조선 전기의 생산량은 1결당 평균 300두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17세기에 400두, 18세기에 600두였습니다. (성호사설, 천일록) 농업생산력이 이앙법 등으로 비약적 발전을 하거든요.
그리고 저 조사 수치는 루드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은결이 빠져있는 수치이며, 조선 전기 조사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당시 조사가 얼마나 부실한가 하면 세종때 각 도별 인구수 계산해 놓은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답니다.
다만 저 결수에서 모두 쌀을 생산한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네요.
그리고 일제 강점기 자료가 <쌀>만 표시한 것이라면 문제가 조금 더 달라지겠죠? 보리, 콩, 밀, 수수, 조 등도 많이 길렀으니까요...^^;;
차라리 당시 인구를 추산해서 역산하는게 나을 겁니다. 조선의 대략 선조 때에 1천만을 넘었고 임란 때 줄었다가 그 뒤로 꾸준히 증가해서 1200-1300만 수준에서 안정되어 개항 시기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합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1결당 소득이 보통 600두, 많으면 800두, 적으면 400두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300두 밖에 생산하지 못했는데, 조선 후기에는 제일 나쁜 땅에서도 조선 전기의 생산량보다 많은 양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산력의 성장으로 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부분적인 기록이지만 콩도 1919년에는 378만석이 생산되었다고 하는군요. 1941년 보리 생산량은 730만석이었습니다. 1941년 생산량을 쌀과 보리만 합해도 3천만섬이 넘어가는군요.
결당 20섬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면 맞습니다. (조선 전기에 한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