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려 이야기 *..역........사..*



범려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아마 이 고사성어는 알 것이다.

와신상담.

섶에 누워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고사성어로 원한을 잊지 않고 지고의 노력을 한다는 뜻이다.

와신상담의 고사는 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에 얽힌 것이다.

오나라의 합려는 월나라 왕이 죽었을 때, 기회라고 생각하여 월나라를 침공했다. 그러자 월나라의 왕 구천은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선봉으로 내보냈다.

이들은 오나라 군대 앞에 세 줄로 선 뒤에 고함을 지르더니 모두 목을 베어 자살을 해버렸다.
이 어이없는 행동에 오나라 군사들이 벙쩌 있을 때 월나라 군대가 습격하여 오나라를 물리치고 합려는 활에 맞았다.
합려는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이 원한을 잊지 말라 이야기했다.
부차는 섶에 누워자며 원한을 곱씹었다.

부차가 원한을 가지고 군사를 양성한다는 것을 안 구천은 선수를 쳤다.
이때 범려는 구천의 신하였는데,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나 구천은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전쟁에 졌다. 궁지에 몰린 구천은 범려의 충언에 따라 항복하고 말았다. 대부 문종이 항복의 사신으로 부차를 찾아갔다.
부차의 장군 오자서는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종이 돌아와 항복이 받아지기 어렵다고 보고하자 구천은 자결하려 했다. 문종은 오나라의 태재 백비를 뇌물로 구워삶으면 방도가 있으리라 진언하며 구천의 자결을 막았다.

백비 덕분에 구천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구천은 이후 쓸개를 핥으며 그 원한을 잊지 않고 복수할 날을 기다렸다. 이것이 바로 <와신상담>의 고사다.

이때 구천은 범려에게 국정을 맡기려 했으나 범려는 "군사의 일은 제가 나으나 국가를 다스리는 일은 문종이 낫습니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오나라의 인질이 되어 2년을 오나라에서 보냈다.

구천이 부차에게 복수하는데는 20여년이 걸렸다. 구천은 그동안 여러차례 군사를 일으키고 싶어했으나 그때마다 범려는 준비가 부족하다고 구천을 만류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군대를 출동시켜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부차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범려는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부차는 자결하고 말았다.

구천은 이후 상장군 범려와 함께 중원으로 진출하여 패왕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자 범려는 자신의 지위와 명성이 너무 높아졌다 여기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국왕이 모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날 왕이 모욕을 받았음에도 살아남았던 것은 복수를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복수가 달성되었으니 지나날의 죄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범려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물론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구천은 범려가 떠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범려는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자신의 명령을 집행하고, 신하는 자기의 희망을 실행할 뿐입니다."

범려는 간단한 보물을 챙겨 식솔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나가버렸다. 구천은 회계산을 범려의 봉읍지로 삼았으나 범려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범려는 제나라에 가 정착했다. 그곳에서 대부 문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 나는 새가 잡히면 좋은 활은 거두어지는 것이고(조진궁장), 교활한 토끼가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오.(교토구팽) 월왕 구천은 목이 길고 입은 뾰족하니,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 할 수 없소. 그대는 왜 월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이오?

구천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구천은 문종에게 칼을 내려 자결하게 했다.

범려는 제나라에서 치이자피로 개명했다. 치이는 가죽 자루라는 뜻인데, 부차가 충언하는 오자서를 죽인 뒤 가죽 자루에 넣어 버렸던 것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범려는 해안가의 땅을 개간해서 커다란 부자가 되었다. 제나라 사람들은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상국으로 삼았다. 범려는 재산과 명망을 다시 얻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자리란 항상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시 그곳을 떠났다. 그는 재산을 친구와 마을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귀한 보물만 챙겨서 도주해 버렸다.

그는 도 땅에 가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는 그곳이 교역의 중심지인 것을 알고 물건을 사재기했다가 적절한 시기에 팔아서 1할의 이윤을 남겼다. 머지 않아 그는 다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는 도주공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중 막내는 도에서 얻은 아들이었다. 막내가 청년이 되었을 때,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살인을 하는 바람에 옥에 갇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범려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황금 2천 4백냥을 준비했다. 이것을 막내에게 주어 초나라로 가게 했다. 그러자 큰아들이 삐쳤다. 집안의 장남으로 자신이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못 가게 하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통에 범려는 어쩔 수 없이 큰아들에게 황금을 맡겼다. 떠나는 장남에게 범려가 당부했다.

"초나라로 가면 장선생을 만나서 황금을 주고 부탁해라. 장선생의 말대로 따르되 절대 논쟁하지 마라."

장선생은 청빈한 선비로 이름이 높았다. 장남이 둘째의 일을 부탁하며 황금을 건네자 장선생이 말했다.

"어서 떠나라. 동생이 나오면 그 까닭을 묻지 마라."

장선생은 청렴한 사람이어서 황금에 욕심이 없었다. 장선생은 일을 마치면 황금을 돌려줄 생각으로 받아 놓았을 뿐이었다.

장선생은 초나라 왕을 만나 "하늘의 별이 불길하므로 대사면을 내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초나라 왕은 이 말을 따르기로 했다. 초나라 왕이 대사면을 내릴 것이라는 소문은 장남에게도 전해졌다.

장남은 대사면이 있으면 둘째는 자동적으로 살아날 것이니, 황금을 헛되이 썼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장남은 장선생에게 찾아가 돌려가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명한 장선생은 그가 황금을 되찾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분노한 장선생은 황금을 돌려준 뒤 초나라 왕을 만나 다시 말했다.

"이번 사면이 도주공의 아들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초나라 왕은 둘째를 처형한 뒤 대사면을 베풀었다. 장남은 둘째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갔다.

모두들 슬퍼했지만 범려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막내를 보내려 한 것은 막내가 고생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막내는 돈이 귀한 줄 몰라 황금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둘째는 살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는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고생을 했던 터라 함부로 돈을 쓰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런 이치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니 슬퍼할 것도 없다."

범려는 도 땅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일국의 상장군으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와 진나라를 굴복시켰으며,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고, 도 땅에서 거상으로 지냈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앞일을 헤아렸다.

범려와 같은 정치인이 그리운 시절이다.

덧글

  • 어젤리어 2005/10/25 06:02 #

    저시대는 다사다난하지요 지금도 별다르진 않은 모양이지만(쓴웃음)
  • 孤藍居士 2005/10/25 07:09 #

    도주공과 범려가 동일인물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는 듯 합니다.
  • 루드라 2005/10/25 12:13 #

    구천과 범려의 이름이 서로 엇갈려 적힌 부분이 있네요. '궁지에 몰린 범려는 구천의 충언에 따라 항복하고 말았다.' '구천은 그동안 여러차례 군사를 일으키고 싶어했으나 그때마다 구천은 준비가 부족하다고 구천을 만류했다.'

    저도 도주공과 범려는 동일인이 아니라고 봅니다. 동일인이라고 보기엔 뭔가 이상합니다.
  • 초록불 2005/10/25 17:25 #

    루드라님 / 수정했습니다. 사료는 다른 증거가 없는 한은 믿는 방향을 따르는 게 맞지 않습니까?
  • 루드라 2005/10/26 00:01 #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사기의 기록이라고 해서 그대로 믿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부분이 상당히 많지 않습니까. 전 저 부분도 그렇고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부분도 그렇고 영 믿기지 않습니다. 범려가 구천을 떠날때 이미 5-60은 됐을 터인데 어떻게 치이자피가 되었다가 다시 도주공이 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 초록불 2005/10/26 00:26 #

    루드라님 /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다만 쉰이나 예순이라고 해서 불가능할 것도 아니죠. 텍스트대로 보면 범려는 여든 쯤에 죽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치오네 2005/10/26 01:56 #

    아니, 장남을 보내면 둘째가 죽을 것을 빤히 알면서도 보냈단 말입니까? =_=
    무서운 아버지네요. 으음...
  • sharkman 2005/10/27 07:27 #

    그렇게 똑똑한 사람인데 어째서 같이 고락을 같이할 수 있는 주군인지 종사전에 구별할 수 있는 눈은 갖추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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