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 전사 뒤의 숨은 이야기 (00/08/11) *..역........사..*



진흥왕은 백제와 손을 잡고 북방 영토 개척에 나선 이후
돌연 백제의 뒤통수를 때려 한강 유역을 차지합니다.

본래 두 나라의 약정은 신라가 한강 상류를
백제가 한강 하류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는 이 무렵 돌궐과의 전쟁으로
남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백제를 적으로 돌린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일 수 있었습니다.
새로 점령한 한강 하류 지방의 민심이
신라로 쏠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두 국가가 연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지역을 서로의 실지(失地)로 생각해서
각기 침략해 온다고만 해도 신라가 이곳을
지켜내기는 만만치 않을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백제는 바로 신라의 배신에 대해서 응징의
칼을 들이댑니다. 그런데 백제가 공격한 곳은
한강 유역이 아니라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이었습니다.
왜 관산성이었을까요? 왜 한강이 아니었을까요?

여기에는 신라의 군세에 백제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는
설명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옥천은 그곳에서 공주와 부여로 진격하기 쉬운
위치입니다. 옥천에 신라군이 주둔한다는 것이
백제의 입장에서는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셈이므로 일단 이 부분을 평정해 놓아야
백제가 북벌을 나설 수 있게 됩니다.
백제의 목표는 관산성을 점령하고
삼년산성(지금의 충북 보은)까지 차지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즉 소백산맥을 넘어온 신라의 영토를
다시 소백산맥 안으로 밀어넣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군사작전은 백제 성왕의 태자 창(위덕왕)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전을 격려하러 전선으로
떠난 성왕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참수당하는
변을 만납니다. 이때 성왕을 잡아죽인 장수가
삼년산성의 고간 도도입니다.
관산성의 위급함을 풀어주기 위해 원군으로 나선
삼년산성군이 대어를 낚아올린 셈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전선에 의외의 군대가 등장해서
백제군을 박살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한강 유역에
진을 치고 있던 신라군이었습니다. 이 신라군을
지휘한 사람은 김유신의 할애비인 김무력.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은 백제의 영토를 다시
빼앗은 김무력. 그가 최전방을 버리고
남하하여 백제군을 요격한 것입니다.
더 재미난 것은 이때 대패한 백제군을 다시 공격한
군대가 바로 고구려군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신라는 관산성에 침공한 백제군을
궤멸시키고는 더 이상 백제로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이상한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합리적인 설명은 한가지 뿐입니다.
신라군이 최전방을 비워도 고구려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밀약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군에게 백제 왕의 전사와 백제군의 전멸이라는
사실을 재빠르게 신라가 통보를 해준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사실을 유추할만한 근거가 없습니다만
삼국유사에는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 승성 3년(554년) 9월에 백제의 군사가 진성을 쳐들어와서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앞서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은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렸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감히 고구려의 멸망함을 바라겠느냐"하고 이에 이 말을
고구려에 전했다. 고구려는 그 말에 감격하여 신라와
평화롭게 사귀었으므로,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략한 것이었다.

위와 같이 진흥왕은 사전에 고구려와 밀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신라는 한강하류를 점령하여 당과의 교역로를 뚫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원양항해를 할 수 있는 기술이 없는
신라는 고구려의 영토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안항해를
해야 당과 교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고구려와의
화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또한 한강 하류를 차지하자면
백제와 반목이 생기는 것도 필연적입니다.
진흥왕은 이 두가지 난제를 고구려와 밀약을 맺음으로써
현명하게 돌파한 것입니다.

마포에서

덧글

  • costzero 2011/06/21 22:38 #

    호오 흥미롭네요.
    백제 패잔병을 다시 고구려군이 공격했다.
    김유신의 첫 전투도 충북지역이니 한강지역에는 삼국의 세력들이 서로 고르게 분포되었어나 보군요.실질 지배는 신라였다고 해도.
  • 굔군 2011/08/08 03:02 #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관산성 전투에 대한 이희진 씨의 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초록불 2011/08/08 10:36 #

    언젠가 본 것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굔군 2011/08/08 15:46 #

    설명하자면, 관산성이 함락되고 전투가 백제의 승리로 일단락된 뒤에, 성왕이 승전보를 듣고 전투를 진두지휘한 태자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전장으로 달려가던 중,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설이죠. 전투중에 사망한 게 아니라.

    근거는 성왕의 죽음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록과, 성왕이 거느리고 간 군사가 겨우 50기(騎)에 불과하였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사 등이 있습니다.
  • 초록불 2011/08/08 16:56 #

    아, 그런 건가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이것을 입증하기는 자료가 부족한 셈이죠. 50은 5000의 오기라는 주장도 있고, 5000으로 나오기도 하니까요.

    현실적으로는 최전방 전선에 가는 국왕이라면 5천쯤은 데려갈 것 같습니다만, 극적인 면에서는 50이 좋기 때문에 제 소설 <축생>에서는 태자 창이 성왕에게 보낸 밀사가 고간 도도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성왕이 함정에 빠지는 것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성왕이 전투 중 사망했다고 하는 기록은 기억에 없는데 (지금 뭘 찾아볼 수는 없군요) 그런 기록이 있었나요? 성왕의 목을 신라가 가져간 것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정답이 있을 수 없고, 서로 가설을 내세울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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