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과 왜 계승의 미스테리 (00/07/19) *..역........사..*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사실은 의견이라기보다는 질문인 셈입니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아주 많은 백제인들이
왜로 건너갔으며 이들이 일본을 건설했다는 식의 설명이
아주 널리 퍼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서 최근에 두가지 의문이 발생했습니다.

첫 번째는 왜의 항해술 문제입니다.
백제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해양제국이라고도 불리고
주산군도를 영유했다는 설도 있고 동남아 제국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라는 등 해양제국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당연히 원양항해에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떼거지로 왜로 건너갔다면 당연히
일본은 뛰어난 항해술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통일신라기에도 일본은 당으로 가는 일에
목숨을 걸고 있으며, 신라배를 빌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장보고로 대표되듯이 서해를
장악하고 멀리 페르시아와까지도 교역을 하는 등
바다의 왕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뛰어난 항해술은 고려 시대로 계승되지요.
왕건이 나주를 경영한 일화는 유명하니까요.
또한 몽골이 고려를 정복한 이유 중 하나도
일본 침공의 배를 조달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쪽에서 고려배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보아야겠지요?
그러나 일본은 이런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해양제국인 백제인들의 후예가 왜 원양항해를
못했던 것일까요?
결론은 두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은 백제인들이 항해술이 형편없었거나
왜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생각보다 적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라와의 교역 문제입니다.

일본은 거의 모든 문물을 당에서 직수입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거의 모든 문물을 신라에서 수입했던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일본 안에는 통일 신라에서
수입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널려 있습니다.
이들이 백제의 후예를 자처했다면, 과연 원수의 나라로부터
필수품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치품까지 수입을 했을까요?
저는 이점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이 정권의
핵심에서 일찌감치 도태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일 관계사에 조예가 깊은 분들의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마포에서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아래 두분 의견을 잘보았습니다.

먼저 장욱님의 견해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백제인들이 일본 건설에 참여한 비중에 대한 의문을
이야기하면서 두가지 반증을 대고 있습니다.
장욱님이 하나씩 떼어서 이야기하면서
"서로 교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개별적으로 보아서 각각 반론이
성립되는 것도 묶어 놓으면 하나로 있는 것보다
신뢰도가 높아지는 법입니다.
아무튼 한가지만 든 것처럼 쓰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장욱님이 말하는 것과 같이 일본에는 백제식 건축 양식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왜 조선술과 항해술은 남지 못했을까요?

안상현님은 기술자들이 당으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이것도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당에 끌려간 사람들은
백제의 귀족들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합리적인 것은
백제의 조선, 항해술의 마스터들은 백제에 남아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신라에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역시 정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기술이라는 것은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주해야 옮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종이가 서역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음... 무척 졸립군요.. 간단하게 마무리합니다.

다음과 같은 두가지 가정이 성립합니다.

1. 백제인이 조금 건너갔다. -> 따라서 조선, 항해술 기술자는
건너가지 못했다.

2. 백제인이 많이 건너갔다. -> 백제인들이 권력을 잡지 못해서
조선, 항해술을 전수할 위치를
차지하지 못해서 사라졌다.

어느게 정답일까요?

마포에서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역시 안상현님은 솔직 담백하신 분입니다.
아래 좋은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역사학은 여러 방면으로 뻗쳐 있고
문명사도 그 중에 한 분야이며
특히 과학사는 그 중의 또 한 분야입니다.

흔히 말하듯이 한 분야의 정상에 서면
그 분야의 열린 눈으로 다른 분야의 세계까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단일한 변수로 세상을 뒤집어 엎는 꼴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말하자면 맑스를 보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지요.
올바른 비판이 아닌 것은 당연합니다.

역사학은물론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면
김용옥 류로는 책이 열두권이 나와도 모자라겠지요...^^;;

역사학자들이 과학사에 어두운 것은 태생적인 한계입니다.
안상현님 말씀대로지요. 그점에서는.
따라서 과학사는 누가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부딪치면
과학(해당분야라고 해야겠지요?)을 전공한 사람이
역사학을 공부한 다음에 두 학문을 접목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전문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전문분야의 전문성은 항상 높이 치는 분위기인데
역사학의 전문성은 높이 쳐주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학은 공부하지 않고도 역사책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은 잘도 나옵니다....--;;

본론으로 잠시 돌아가면...

집단이주가 있어야만 기술의 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비근한 예로 목화재배법, 목면 제조법은 그저
목화씨를 빼돌리는 일에서부터 모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문익점이 보고 온 사실과 완성된 제품에 대한 분석만으로
이런 일이 가능해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집단의 이주가 있으면 기술의 이동이 따라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지요. 집짓고 사는게 필수적인 일인 것처럼
해양국가가 배를 만들고 항해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백제인의 엄청난 이주를 받아들이고도
이 일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본토에서는 못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해외의 기지들(뭐라 불러야 할까요? 이것을?)에도
선박 기술자나 제조 기술자들이 없었단 말일까요?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이들은 해외 기지들과는
완전 인연 끝! 니네끼리 잘살아가라! 이렇게 말했을까요?

저로서는 이런 점에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다른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마포에서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사실은 몇가지 점이 확인되지 않으면 계속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도
계속 해야죠...^^;;

먼저 선박 제조 기술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기술일까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안상현님이 아래서 지적한 바 있지요?

과연 상당수의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나누어져 각 핵심부분의
기술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는 저로서는 의문일 뿐입니다.
현대와 같은 분업화 세상에서도 3층집을 짓는 공정과
기술 따위는 현장감독이 꿰차고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하기에는 기술이 딸린다 하더라도 원리와 응용법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초보들을 교육시켜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집을 지으면서
직접 본 사실입니다)

옛날에는 도목수(용어가 맞던가요?)가 대궐을 짓는 일도
총괄 관리를 했습니다. 관리 감독을 했다는 것은 집짓는 일
모두를 직접 하지 않아도 역시 원리와 응용법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배를 만드는데도 당연히 이런
감독이 있었을 것이고, 백제가 해양대국이었다면
(이 가정은 무척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수자도
만만찮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 한둘만 일본으로 건너갔어도 일본의 선박제조기술은
혁신을 일으켰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일본인들이 아예 배를
만들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일본인들은 백제 부흥군에
선박 4백척을 보내었으니, 이들이 배를 못만든다는 것은
일단 말이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배 만들기의 기초 공부는
되어 있는 것이고, 원양항해에 따른 몇가지 특수한 기술들이
전파되면 일본 원양항해의 새 장이 열리는 것인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망망대해에 견당사를 태워 보내야만 했던 것은
백제가 멸망해서 선진문물 수입 창구가 없어졌던 때문입니다.
그러니 필요성은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박과 항해에서 이들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해외의 백제인들로부터도
기술 수입이 가능했을 것이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신라는 초창기에 왜 등쌀에 왜 정벌 계획을 세웠다가
항해 기술 미비로 그만두는 대목이 있습니다.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분명히 항해기술이 대폭
상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춘추가 당에 다녀오다 고구려 순시선에 걸려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요. 그렇게 걸린 이유도
연안항해를 한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백제는 남조국가들과 교역하기 위해서 서해 직항로를
개발했고 이것이 그들의 원양항해 기술의 밑받침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지 일본은 원양항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 기술을 개발하지 못했습닌다.
그것이 무엇때문일까가 현재 논의의 출발점입니다.

마포에서

덧글

  • 파랑나리 2010/11/29 23:14 #

    백제계가 일본에서 권력의 변두리로 밀려났다라.... 그럴지도 모릅니다. 신찬성씨록이라고 그 당시 수도권에 있는 모든 성씨(오늘날의 묘지라는 성씨와 다릅니다.)를 실어놓은 게 있는데(지역 별로 적어서 같은 집안도 두 지역에 걸치면 중복 게재합니다.) 여기에는 백제 왕족의 후예라는 집안들이 여럿있습니다. 야마토노아소미(和朝臣), 스가노노아소미(菅野朝臣), 후지위노스쿠네(葛井宿禰), 미야하라노스쿠네(宮原宿禰), 츠노스쿠네(津宿禰), 나카시나노스쿠네(中科宿禰), 미요시노스쿠네(三善宿禰), 가리다카노스쿠네(雁高宿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겨레는 백제왕실의 직계(의자왕의 아들)에서 비롯한 쿠다라노코니키시(百濟王)이 있습니다. 처음에 쿠다라노코니키시는 꽤 높은 벼슬도 지냈고, 야마토노아소미는 환무천황의 외척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승화지변(承和之變) 이래로 후지와라노아소미(藤原朝臣) 북가(派 이름입니다.)가 세도정치를 하게 된 것. 나중에 견당사를 폐지하는 등 나라를 폐쇄적으로 이끈 것 때문에 백제의 항해술은 전파되지 않은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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