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정용석이 삼국이 중국에 있다고 주장을 한 이래 그의 주장의 허구성은 하나씩
증명이 되었습니다만 그가 <토함산>이 화산이라고 주장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4년조의 기록에 대해서는 제가 그것은 나로서는 잘모르겠으며, 가스
분출과 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한 바 있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동쪽 토함산의 땅이 탔는데 3년만에 그쳤다.
이런 류의 기사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진평왕 31년조의 기사입니다.
- 봄 정월에 모지악 밑에 있는 땅이 탔는데 넓이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다섯자나 되었다. 10월 15일에 이르러 그쳤다.
이러한 내용에서 정용석은 토함산은 화산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3년동안 불이
탄다는 것이 화산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또한
모지악의 불탄 규모를 분화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에 분화구의
크기는 그정도일 수가 없다는 것을 밝혀준 회원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재밌는 기사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경상도 땅에서
이런 식의 불이 3년간 일어났다는 기사가 있는 것입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성종 154 14/05/10(신축) / 내관 이효지와 겸사복 황형 등이 영해에서 돌아와
이변에 대해 보고하다 >>
내관(內官) 이효지(李孝智)·겸사복(兼司僕) 황형(黃衡)이 영해(寧海)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영해 남쪽 5리(里)쯤 되는 송현(松峴)이라는 곳의 낭떠러지 사이에 연기가
올라가고 나무와 돌이 모두 탔는데, 시골 늙은이에게 널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지난 신유년(세종23) 가을에 불이 나서 3년 만에 꺼졌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불에 탄 돌을 올렸는데, 모양이 숯과 같았다. 임금이 중국에서 쓰는
석탄인가 의심하여 통사(通事) 장유성(張有誠)으로 하여금 시험해 보게 하여 불속에
넣었는데, 타기는 하였으나 불꽃이 없었으니 석탄은 아니었다.
요즘은 조선도 중국 땅에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판이니 위의 기사도 조선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 증거로 정용석 등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이런
현상이 어떤 이유로 발생했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는 점 하나만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땅이 이유없이 불에 타는 현상은
화산이 아니라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해
이외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몇건의 사례가 실려있습니다. 영해에서도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기사가 또 있습니다.
<< 현종 022 15/01/24(기축) / 영남 영해부에서 땅불이 나오다 >>
영남의 영해부(寧海府)에서 땅불[地火]이 나왔다. 【영해부 남면 송현(松峴)에서
땅불이 나와 연기가 땅위로 치솟아 올랐는데, 흙과 돌이 달구워져 손발을 가까이 댈
수 없었다. 그 땅의 길이는 여덟 자이고 너비는 한 자 다섯 치였다.】
단편적인 사실을 철저한 조사와 고증 없이 이용해서 마음대로 단정짓는 일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 이로써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포에서
이 글도 참고 바랍니다.
[DC역갤] 검은 구름과 불 타는 땅 - 고대의 서상(瑞祥)정치와 재이설(災異說) [무지랭이님의 글]
정용석이 삼국이 중국에 있다고 주장을 한 이래 그의 주장의 허구성은 하나씩
증명이 되었습니다만 그가 <토함산>이 화산이라고 주장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4년조의 기록에 대해서는 제가 그것은 나로서는 잘모르겠으며, 가스
분출과 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한 바 있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동쪽 토함산의 땅이 탔는데 3년만에 그쳤다.
이런 류의 기사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진평왕 31년조의 기사입니다.
- 봄 정월에 모지악 밑에 있는 땅이 탔는데 넓이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다섯자나 되었다. 10월 15일에 이르러 그쳤다.
이러한 내용에서 정용석은 토함산은 화산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3년동안 불이
탄다는 것이 화산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또한
모지악의 불탄 규모를 분화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에 분화구의
크기는 그정도일 수가 없다는 것을 밝혀준 회원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재밌는 기사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경상도 땅에서
이런 식의 불이 3년간 일어났다는 기사가 있는 것입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성종 154 14/05/10(신축) / 내관 이효지와 겸사복 황형 등이 영해에서 돌아와
이변에 대해 보고하다 >>
내관(內官) 이효지(李孝智)·겸사복(兼司僕) 황형(黃衡)이 영해(寧海)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영해 남쪽 5리(里)쯤 되는 송현(松峴)이라는 곳의 낭떠러지 사이에 연기가
올라가고 나무와 돌이 모두 탔는데, 시골 늙은이에게 널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지난 신유년(세종23) 가을에 불이 나서 3년 만에 꺼졌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불에 탄 돌을 올렸는데, 모양이 숯과 같았다. 임금이 중국에서 쓰는
석탄인가 의심하여 통사(通事) 장유성(張有誠)으로 하여금 시험해 보게 하여 불속에
넣었는데, 타기는 하였으나 불꽃이 없었으니 석탄은 아니었다.
요즘은 조선도 중국 땅에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판이니 위의 기사도 조선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 증거로 정용석 등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이런
현상이 어떤 이유로 발생했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는 점 하나만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땅이 이유없이 불에 타는 현상은
화산이 아니라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해
이외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몇건의 사례가 실려있습니다. 영해에서도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기사가 또 있습니다.
<< 현종 022 15/01/24(기축) / 영남 영해부에서 땅불이 나오다 >>
영남의 영해부(寧海府)에서 땅불[地火]이 나왔다. 【영해부 남면 송현(松峴)에서
땅불이 나와 연기가 땅위로 치솟아 올랐는데, 흙과 돌이 달구워져 손발을 가까이 댈
수 없었다. 그 땅의 길이는 여덟 자이고 너비는 한 자 다섯 치였다.】
단편적인 사실을 철저한 조사와 고증 없이 이용해서 마음대로 단정짓는 일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 이로써 증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포에서
이 글도 참고 바랍니다.
[DC역갤] 검은 구름과 불 타는 땅 - 고대의 서상(瑞祥)정치와 재이설(災異說) [무지랭이님의 글]
덧글
본래 이글은 하이텔의 한국사동호회에 올랐던 글이며, 글 내용 중에 다른 회원분이라는 부분이 있듯이, 여러 논란을 거쳐 완성된 글입니다. 그리고 그 회원분도 지질학과에 계셨던 분이어서 분화구 크기와 화산의 생성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셨었지요.
위 글은 토함산은 화산이 아니기 때문에, 신라는 중국에 있다고 주장하는 정용석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Frey님이 무엇을 주장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다는 말씀입니다. 한반도의 지질에 대한 연구도 중요한 것이겠지만 뭔가 논의가 될 이야기로 만든 다음에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질학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 저야 고개만 끄덕끄덕할 뿐이죠.
저는 토함산쪽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는 바가 없으므로. 이미 다른 분께서 화산 부분에 대해 지적하셨다면 그 분 말씀이 옳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