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하 요수설에 대하여 (00/01/09) 만들어진 한국사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김민후님의 글은 참 공격적인 어조로 쓰여져 있군요. 보기 민망할 정도입니다.
자기 주장을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저는 난하 요수설을 따르지 않습니다.
첫째, 난하가 언제 요수에서 난하로 이름이 바뀌었는지 고증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난하 요수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점을 명백히 해야 할 것입니다. 김민후님께 이런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김민후님도 난하 요수설을 따른다면
앞으로 고민해볼 좋은 과제가 될 것입니다.

둘째, 박영규의 설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탁군에서
출발한 수양제의 군대가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박영규의 설을
따르면 수군이 고구려 영토를 860리나 무인지경으로 행차한 것이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고구려는 이당시 요수를 건너서 <무려라>라는 전진기지를
요서에 설치해 놓은 상태였으며 수가 전쟁을 벌여 유일하게 획득한 지형이라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셋째, 엄리대수를 요수라고 볼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주몽은 동부여
출신으로 동부여는 연해주 부근에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부여의 해부루가 천도한
것으로 보아 요하를 주몽이 건넜다고 본다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발상입니다.

넷째, 김민후님의 주장대로라면 초기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성이나 환인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비정할만한 장소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섯째, 대무신왕때 요동태수가 고구려의 위나암성을 포위공격합니다. 이때
을두지는 이렇게 진언합니다. "지금 한나라 군사가 멀리 와서 싸우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서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을두지의 말은 적이
보급선이 긴 것을 약점으로 잡자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별반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고구려의 성이 한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여섯째, 민중왕때 투항한 고구려인은 한나라 본토로 간 것이 아니고 낙랑으로 간
것입니다. 낙랑의 위치는 저는 현 평양일대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이 기사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일곱째, 모본왕이 북평, 어양, 상곡, 태원으로 장수를 보내 습격케 했다는 점에서
김민후님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에 이 지역이 요동 또는 요동의 관할지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 북평(아마도 우북평), 어양, 상곡은 한의
북방도시입니다. 이곳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1월 1일에 방영된 역사 스페셜에서
다뤄진 바 있습니다. 북방 유목민족들이 이용하는 통로에 대해서 말이지요. 저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우북평으로부터 어양-상곡-태원으로 쳐들어가겠다는 플랜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난하에서 태원까지도 불가사의하게 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덟째, 이번에 광개토대왕의 영역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대능하 서편에서 고구려의
옛성을 발굴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난하 이서는 아닙니다. 대능하
서편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구려 성이 발견된 것은 이 지역이 역시
요서지방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홉째, 제가 고구려사를 보면서 요동 요서와 관련하여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태조왕 3년에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에 여전히 한의
요동태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수가 어디에 있던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는 이것이 위 일곱 번째의 의문과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즉 대능하 상류부근으로부터 현 요하에 이르는 부분, 즉 중국으로보면
자기들 영토의 이북지역이며 거란 족 등이 후일에 터전을 잡은 지역이 되지요. 이
지역에 성을 쌓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약간 막연한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마포에서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여전히 김민후님은 자기 주장에 민망한 어조를 실어서 상대를 무시하고 있군요.
처음 글은 어차피 상대가 없는 글이라 그저그렇게 보았습니다만 상대가 있는
글에서조차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줄은 몰랐습니다.

김민후님은 제 글에 대해서 이런 식의 반론을 펴고 있습니다.

첫째, 요서지역은 자세히 조사된 것이 아니므로 이 조사를 바탕으로 난하 요수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김민후님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난하 요수설이 이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지, 요하 요수설이 이것을 증명해야 하는것이 아닙니다.
역사스페샬 시간에도 자세히 나왔지만 요하를 경계로 고구려의 방어선은 잘짜여져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유적도 이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부인하고 고구려 말기까지 난하가 요수였다고 주장한다면 그에 합당한
증거를 내놓아야 하는 것은 난하 요수설 측이지 요수 요하설 측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현 요서 지역, 즉 김민후님이 주장하는 고대 요동에서 고구려 성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점은 난하 요수설의 약점일 뿐이며, 이것을 기초로 난하
요수설의 신뢰성이 별로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조사가 되지 않았다라는 변명은 그저
변명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태조왕대의 요서 십성이 김민후님 생각처럼 아무 모순이 없다면 그것은
요수가 난하이든 요동이든 아무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김민후님이 이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나 제가 이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김민후님은 제 생각은 틀리고 자신의 생각은 맞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쌍방간에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셋째, 태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로 갖고 있는 자료가 다른 모양이군요. 김민후님이
가진 자료에 그 위치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고 있는 자료는
대만에서 나온 역사지도책입니다. 또한 이 지역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역사스페샬 시간에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 바로 이 기사를
인용하면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저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말도 안되는 설명이
되는가 보지요? 결국 김민후님은 위의 두가지 반론에 대한 약점은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는지 모든 것을 제치고 모본왕의 공격 기사로 난하 요수설이 증명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도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 이 곳을 공격할 수 있었으며, 광개토대왕때 실제로 공격을 가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과 가까워야만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뢰성이
없는 주장일 뿐입니다. 김민후님은 북평 등 이 지역이 요동태수의 관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한서나 후한서에 근거한 이야기인지 궁금합니다. 다른 근거가
있다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사족으로 말합니다만 태원의 위치가 어디가
되든 이 논의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은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군요. 문제의
핵심은 고구려가 이 지방을 공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점이겠지요. (또한 제
입장에서는 공격했느냐, 안했느냐 라는 것이 됩니다)

넷째, 수양제 침공기사에서 기치가 960리에 뻗쳤다는 기사의 전후내용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960리에 걸쳐서 횡으로 진군한다는 군대 이야기는
생전처음 듣습니다. 100리 밖에 안되어서 탁군에 모였다는 군대가 꼬불꼬불 960리를
행군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민후님의 방정식 이야기는 김민후님께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요수가
요하인 증거를대보라고 말씀하셨지요? 첫째, 요하 이외에 <요>라는 강 이름을 가진
강이 없습니다. 마치 관악산에 올라와서 어떤 사람이 관악산이 북한산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북한산은 서울 북쪽에 있는 산이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그 산이 북한산이라는 증거를 대라고 말하는 것 같군요.

둘째, 고구려의 방어기지가 요하가 요수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김민후님의 난하요수설의 약점이 반증으써 증거가 되겠지요.

즉 셋째, 요수가 난하로, 그리고
이름도 몰랐던 요하라는 강이 졸지에 생겨난 이유를 아무도 모릅니다.
넷째, 고구려의 국내성이나 졸본성으로부터 난하까지는 지나치게 먼데 김민후님의
주장과는 서로 상반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고구려가 광개토대왕때로부터 동아시아의 일대 강국으로 자리잡은 힘과 그 영역에
대해서는 역사 스페셜 시간에 잘다뤄졌다고 생각합니다. 김민후님이 고구려가 작아
보인다고 불평하는 것이 난하 요수설을 지지하는 근거 중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영토라는 것에 사람이 이렇게 집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마포에서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김민후님의 주장은 네가지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의견을 밝힙니다.

1. 모본왕 대의 침공기사
김민후님은 제가 이 기사를 의심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를 삼국사기
부정론자로까지 보고 있는데 이것은 심한 발상입니다. 먼저 제가 의심하는 것은 이
습격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솔출판사에서 나온 이재호 역의 삼국사기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2년 봄에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게 했는데,
요동태수 채융이 은혜와 신의로써 장수에게 대하므로 이에 다시 화친했다."

하지만 치고 안치고를 떠나 이곳을 고구려군이 공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기사를 근거로 고구려가 이 지역에 가까이 있었다고 한다면
고구려는 오환이나 선비의 위치에 있었다고 보는게 더 나을 것입니다.

2. 관구검의 지위는 유주자사가 맞습니다. 그러나 김민후님은 유주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유주는 하북성일대가 아니며, 하북성 일대는 <기주>입니다. 한서
지리지에는 유주가 관할하는 군의 이름이 나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대, 상곡, 탁, 광양, 어양, 북평, 요서, 요동, 현도, 낙랑, 대방

한서지리지 요서군 편을 봅시다.

요서군(秦나라때 설치했다. 크고 작은 물줄기가 마흔여덟개가 있으며 모두 아우르면
3천 46리를 흘러간다. 유주에 속한다)은 가구 수가 7만 2천 6백 54호이고 인구는
35만 2천 3백 25명이다. 현은 열넷이다. 차려, 해양, 신안평, <유성>, 영지, 비여,
빈종, 교려, 양락, 호소, 도하, 문성, 임유, 유 등이다.

여기에 <유성>이 들어 있습니다. 원소의 아들 원희와 원상이 조조에게 쫓겨
오환으로 달아나고 조조는 이를 쫓아갑니다. 오환과 연합한 원희 원상을 격파하고
연이어 조조가 쳐부수는 곳이 이곳 유성입니다. 이곳은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는
지명이므로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서군을 조조가 장악하였으니 원희
원상이 갈 곳이 요동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동의 지배자 공손강은 이들의
머리를 베어 조조에게 바칩니다. 당시 요동은 거의 독립지역처럼 되어 있지만 당시
중국의 힘은 이곳까지 지배하기에 부족해서 일단 내버려 두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 이들을 무력으로 누르게 되는데 그것이 관구검의 출동입니다. 이것을 지휘한
사람은 유명한 사마중달 사마의지요. 유주자사가 된 관구검이 자기 영지의 반란군을
진압한 격이지요. 김민후님은 애초에 유주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으니 그런 착오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3. 산상왕대에 귀순한 사람들은 평주사람들입니다. 역시 하북성이 아닙니다. 저는
이 평주가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데, 대학 시절에 들은 기억으로는 유주의
일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동준님이나 이창훈님이 확인해 주실 수 있으면
좋겠군요. 평주가 하북 일대라면 김민후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4. 수양제의 탁군 결집이 근거가 될 수 없음은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습니다. 두 번
되풀이 하지 않겠습니다.

위와 같이 김민후님이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은 모두 근거가 박약하거나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정도로 난하 요수설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마포에서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김민후님과 제 생각의 차이점을 일단 이해할 수 있게 되는군요.
제가 <하북>이라고 말하면 고대 중국에서 말해지는 <하북>인데
김민후님은 현재 중국의 <하북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말하고 있는 지역이 하북이 될 수 있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혼동의 여지가 있으므로 주의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나 김민후님이나 말이지요...^^;;

그래서 스캔을 자료실에 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설명입니다.

평주.jpg - 평주의 위치입니다. 삼화출판사에서 나온 고등학교 역사부도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위치로 보면 현재 북경에서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에는 난하가 위치하지 않았는데 다음 그림을 보시면

평주2.jpg - 난하 바로 동편이 평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에 나와 있듯이 요하를 경계로 영주(현재의 조양)가 그 동편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중국문화대학에서 펴낸
중국역사지도입니다. 이 지역은 현재 중국의 하북성에 속합니다.
그러나 고대 역사상 이 지역을 하북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 지역은 유주라 불립니다.

평주3.jpg -위 두지도는 남북조 시대, 그러니까 5세기의 지도입니다.
그러니까 후한시대인 산상왕때 즉 3세기초에도 그 지역이 평주였는지는
저로서는 잘모르겠습니다. 이 지도는 서진때의 지도입니다.
이때 유주를 둘로 나눠서 평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래 글에서 제 기억은 바로 이때인 모양입니다.
글을 올릴려다가 정동준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역시 이 평주3 지도가 당시 상황에 맞는 것인 모양이군요.

유주.jpg - 그럼 유주는 어디인지 중국역사지도를 보고 알아봅시다.
이 그림은 유주의 영역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삼국시대의
유주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 부분중 상당부분이
하북성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하북이란 기주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길게 주가 편성되었을까요?
그것은 그 외의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빨간선으로 그어놓은 부분이 유주와 기주의 경계와 기주의 영역입니다.

같은 지도를 놓고 이야기하면 이제 서로 혼동할 이유는 없겠지요?
저는 이보다 자세한 지도도 가지고 있습니다만
지도가 커서 용량 문제상 올리기가 어렵군요.
(모뎀 유저의 슬픔...T.T)

아무튼 현재 삼국시대를 말한다면 유주와 하북은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분명하게 말한다면 기주와 유주로 구분하는 것이 정당할까요?
김민후님이 말씀하고 있는 현 중국의 하북성을 가지고 말한다 해도
위 지도들에 나오는 것처럼 하북성에 유주의 일부가 있었던 것이지요.
유주 전체가 하북성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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