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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기 1 (96/08/09)
백제의 멸망

1. 김유신의 맹세

611년 - 김유신(17세) 삼국통일의 야망을 세우다. 중악의 동굴 속에서 서원을 하고 도사 難勝에게 비법을 배우다.

2. 대야성 함락

641년 의자왕 즉위.
642년 7월 - 백제 의자왕 신라 서변의 40여성 점령.
        8월 - 백제 고구려 연합군, 당항성 공격.
                - 백제 장군 允忠, 대야성 함락.
                  대야성 도독 이찬 品釋, 사지 竹竹, 龍石 전사.
                  (신라, 당에 사신 파견. 당태종 사농승상 相里玄奬 파견. <구당서>)

대야성 전역의 내막
대야성 도독 품석은 김춘추의 딸 古抒炤娘의 남편이다. 그는 대야성에 부임한 뒤
사지 黔日의 아내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강제로 빼앗아 첩을 삼았다. 검일은 이
일로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백제군이 쳐들어왔을 때 백제 장군 윤충과 내통한
후에 毛尺과 함께 창고를 불질러 버렸다(백제 멸망 후 금일과 모척은 모두 붙잡
혀서 금일은 사지를 찢어 죽이고 모척도 사형에 처한다). 이 때문에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아찬 西川은 성위에 올라가 윤충에게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
는다면 원컨대 이 성을 들어 항복하리라"하였고 윤충은 "만약 그와 같이 한다면
공과 함께 한가지로 즐길 것이 밝은 햇빛처럼 분명하다"라고 답했다. 서천은 품
석을 설득하여 항복하려 했는데 사지 죽죽이 가로막았다. 죽죽은 윤충의 말을 믿
어서는 안된다고 극구 말렸지만 품석은 결국 성문을 열었고, 항복하러 달려나간
신라군은 백제군의 복병에 의해 전멸당하고 말았다. 이 말을 들은 품석은 낙망하
여 처자를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죽죽은 남은 군사를 추스려 방어에 나
섰다. 사지 용석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으나,
죽죽은 "내 이름을 아버지께서 죽죽이라고 지은 것은 굽히지 말고 꺾이지 말라는
뜻인데 어찌 목숨을 아껴 항복할 수 있겠는가"라며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끝내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백제군은 품석과 그 아내 김씨의
유해를 백제로 가져갔고, 신라인들은 이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김춘추는 비보를
전해듣고 백제의 멸망을 맹세한다.

3. 신라,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다

김춘추는 대야성 전역의 설욕을 위해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하고자 사간 訓信과
함께 사신으로 들어간다. 보장왕은 김춘추의 명성을 익히 들은 바 있어서 그를
조심스럽게 접견했다. 또한 접견 전에 이미 누군가가 김춘추는 고구려를 정탐하
러 온 것이며, 그는 대단한 야심가이므로 일찍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다
고 말했다. 보장왕은 대답하기 어려운 말을 질문해 김춘추를 죽이고자 마음먹고,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면 원병을 내겠다고 말한다. 김춘추는 원병 문제 이외는
권한이 없다고 말하며, 보장왕의 제의를 거부했다. 보장왕은 노해서 김춘추를 옥
에 가두어 죽이려고 했지만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김춘추는 고구려의 총신
先道解에게 청포 3백보를 보내놓았는데 연금상태인 김춘추에게 선도해가 하루는
놀러와 龜兎之說을 이야기한다. 김춘추는 이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다. 그것은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벗어나라는 뜻이다. 따라서 김춘추는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노라고 보장왕에게 서신을 올린다. 이무렵 신라에서는 60일
이 지나도록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김유신이 결사대 3천명을 뽑아 출정을
결의했다. 이 소식은 고구려의 간세인 중 德昌을 통해 보장왕에게 전달되었다. 고
구려는 김춘추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신라와 충돌을 원하지는 않았기 때
문에 일단 김춘추의 말을 믿기로 하고 그를 돌려 보낸다.
고구려가 요구한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면 신라는 대당교역로를 잃어버리게 된
다. 한강 유역이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4. 당에 도움을 청하다

643년 9월 - 고구려와 동맹에 실패한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당 태종은 신라의 계책을 물었으나 사신은 오로지 대국의 구원을 바랄뿐이라고 답했다.
                  이에 당태종은 3가지계책을 제시했다.
                       1. 당, 거란,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친다.
                           -> 신라의 위기는 절로 풀릴 것이지만 당 군사들이 계속 주둔하지 않으면
                                다시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2. 당의 깃발과 군복을 빌려주어서 당 군사들이 신라에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면 고구려, 백제는 감히 쳐들어 오지 못할 것이다.
                       3. 백제는 바다를 낀 험지만 믿고 방자하므로 능히 쳐들어갈 수 있다.
                           다만 신라는 여자가 임금이어서 권위가 없으므로 당황실의 인물을 한사람 보내
                           왕으로 삼고 군사로 호위하여, 당분간 신탁통치를 하도록 한다.
                           당태종은 이 계책 중 한가지를 고르라 했는데 신라 사신은 답변을 하지 못했다.
                           당태종은 사신을 용렬한 자라고 비난했는데, 누가 저런 허황된 계책을 받아들일
                           것인지...
644년 5월 - 645년 2월 - 당태종은 백제사자 康信을 통해 백제가 고구려와 밀계를 맺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말하고 고구려 정벌군을 발진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백제는 사죄는 하지만 군대는 동원하지 않는다.
647년 진덕여왕 즉위.

5. 다시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다

648년 - 김춘추는 다시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고구려는 이를 거부했다.
            아마도 이때 김춘추 본인이 다시 고구려에 간 것은 아닌 것 같다.
            (백제가 이해에 10여개성을 공취함. <구당서>)

6. 다시 당에 원군을 요청하다

648년 - 김춘추는 아들 文王과 당에 들어가 원군을 요청했다. 당 태종은 이를 
            승낙했고 김춘추는 예복을 당의 제도에 따르겠다고 한다. 이보다 조금 앞서 당에
            사신으로 왔던 邯帙許는 당의 연호를 쓰기로 약조한 바 있다. 김춘추는 아들
            문왕을 당에 남겨놓고 돌아왔다. 돌아오던 길에 고구려 병선의 습격을 받았으나
            부하 溫君解가김춘추로 분장을 해서 고구려 병사들은 그가 김춘추인줄 알고 살해했다.
            김춘추는 작은 배로 간신히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김유신은 대야성을 다시 빼앗고 백제장군 8명을 포로로 잡았다.
            김유신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포로 8명과 김품석 부부의 유해와 바꾸자고 제안을 했고, 
            백제 측에서는 좌평 忠常이 이에 찬동하여 교환이 이루어졌다.
649년 정월 - 중국의 의관을 쓰도록 했다.
         5월 - 당 고종 즉위.
650년 6월 -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아들 法敏을 보내서 太平頌을 바쳤다. 이때부터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
651년 2월 - 파진찬 金仁問을 당에 파견하여 숙위토록 했다. 
                  김인문은 김춘추의 둘째 아들로 이때 23세였다.
                  김인문은 후일 신구도 부대총관의 지위를 받고 소정방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덕물도로 향하게 된다.
                     - 이 해에 백제도 사신을 당에 보냈다. 당고종은 백제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고
                       화친할 것을 종용했다. 백제는 652년에 다시 한번 사신을 당에 보낸다.
653년 8월 - 왜국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다(이때 부여풍을 왜국에 파견한 것으로 여겨진다).
654년 태종무열왕 즉위.
655년 정월 - 고구려, 백제가 북변 침입하여 33성을 점령.
                    신라, 당에 구원 사신 파견.
                    신라의 대당 교통로인 당항성이 위험에 처한 상황인듯.
           3월 - 당은 소정방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
656년 - 김인문이 돌아오고, 다시 김문왕을 당에 사신으로 보낸다.
659년 4월 - 백제의 침공으로 당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10월 - 태종무열왕의 꿈에 장춘과 파랑이 나타나 당이 군대를 파견한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660년 3월 - 당 고종, 좌위대장군 蘇定方과 13만군을 파견한다.
                  이로써 643년 부터 줄기차게 요구해온 청병이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7. 나당연합군의 진격

660년 3월 - 당의 13만 군대
                       신구도행군대총관 - 소정방
                       신구도행군부대총관 - 김인문
                       좌효위장군 - 유백영 
                       우무위장군 - 풍사귀
                       좌효위장군 - 방효공 등
5월 26일 - 태종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김유신, 眞珠, 天存 등을 파견하여
6월 18일 - 남천정에 이르렀고
6월 21일 - 태자 법민이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만났다.
이때 7월 10일 사비성을 공략하기로 약조한다.
이로써 태종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 장군 品日, 欽純(김유신의
아우)으로 5만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게 한다.

#백제 내부의 몰락
(1) 적과의 내통
이보다 앞서 655년 무렵의 일이다. 천산 현령 租未坤은 포로가 되어 백제 좌평
任子의 종이 되었는데, 성실히 일을 해서 신임을 쌓은 뒤 탈출하여 신라로 돌아
온 뒤 백제의 실상을 김유신에게 고했다. 김유신은 조미곤을 다시 백제로 잠입시
켜 임자와 내통하도록 했다. 임자는 전권을 휘두르는 자로써 조미곤의 말을 듣고
몇달간 고민 끝에 김유신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김유신은 이로써 백제 정
벌을 서두르게 된다.

(2) 중신들의 유배
의자왕은 중신들을 많이 유배했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의자왕이 음란했다
고 사서는 전하지만 멸국의 왕은 흔히 그런 오명을 받는다. <唐平百濟碑>에는
"밖으로는 直臣을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를 믿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일본서기>
에는 군대부인 요녀의 전횡이 나라를 망쳤다고 나오는데, 요부나 요녀가 의자의
모후인지, 왕비(왕비의 이름은 <일본서기>에 恩古라고 전해진다)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때에 의자왕이 어떤 개혁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중신들 뿐만 아니라 왕실 내부에도 많은 변동이
있었는데, 태자의 교체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656년에 좌평 成忠이 극간을 하다가 유배되어 옥중상소문을 남기고 죽었으며, 아
마도 좌평 興首도 이때 유배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좌평 임자가 655년경 김유신
과 내통한 것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641년 정월에 모후가 죽자 의자왕은
아우의 아들 翹岐 및 자매 4인, 내좌평 岐味, 고명한 사람 40여인을 섬으로 유배
시켰다. 이 일도 백제를 뒤흔든 사건의 하나로 본다.

(3) 괴이한 징조들
659년부터 660년에 이르기까지 백제에는 괴이한 징조들이 끊이지 않는데, 이것들
이 모두 후대에 조작되어 넣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천하의 재략가인
김유신의 민심 뒤흔들기 작품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든다. 아무튼 이러한 일들로
인해 백제인의 민심은 상당히 흔들렸다.

#당군의 진로
당군은 기벌포에 이르러 진창에서 진군을 못해 고전했으나 곧 버들을 꺾어서 길
에 깔고 쳐들어갔다. 소정방은 웅진 어구에서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고, 사비성 30
리까지 진군하여 다시 백제군과 싸웠다. 이때 백제군은 만여명이 전사했다. 이제
당군은 사비성 앞에 이르렀다.

#신라군의 진로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와 만났다. 계백은 죽음을 각오하고 처자
도 손수 죽이고 나왔으며, 필사의 역전을 거듭하여 4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었다. 그러나 신라군은 김흠순의 아들 반굴과 김품일의 아들 관창의 역투에 사기
가 올라 결국 백제군을 물리친다. 다만 이 황산벌의 전투에 꼬박 하루가 소요되
어 신라군은 약속일보다 하루 늦은 7월 11일에야 당군과 합류한다. 소장방은 이
를 트집잡아 신라독군 金文潁을 목베러 하나 김유신의 격렬한 항의에 물러나고
만다.

#백제의 대응
죄평 의직 - 당과의 결전 주장
달솔 상영 - 신라와의 결전 주장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유배지의 좌평 흥수에게 문의
좌평 흥수 - 백강과 탄현의 사수,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승산이 있음을 강조.
대신 아무개 - 좌평 흥수는 귀양기간이 길어 원망이 많으므로 믿을 수 없다.

이러한 갑론을박 중 당군은 기벌포를 통과했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었다.
의자왕은 대다수의 병사를 당군을 막도록 하고 장군 계백에게 오천 결사대를 이
끌고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한다.

8. 백제 멸망

660년 7월 12일 - 나당연합군, 사비성으로 진격.
                          소정방은 두려워하며 진격하지 않으려 하여 김유신이 설득.
                          백제의 상좌평, 의자왕의 서자 躬 등이 연이어 용서를 구했으나
                          소정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13일 - 밤에 의자왕, 태자 孝 웅진으로 도망치다.
7월 14일(?) - 의자왕의 차자 泰는 왕위에 올라 사비를 사수.
                     태자 효의 아들 文思는 숙부 隆에게 말하기를 "왕과 태자가 도성을 나가자
                     숙부 泰가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장차 당군이 물러가면 우리들은 안전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융과 문사, 대좌평 千福 등은 성을 나와 항복.
                     이때에 많은 백성들이 함께 항복했는데 태는 이를 막지 못함.
                     법민은 융을 심하게 모욕 주었다.
                     당군은 이때 도성으로 쳐들어가 성루에 당기를 꽂았다.
                     태는 이로써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7월 18일 -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의 군사를 이끌고 나와 항복했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했다.
7월 29일 - 신라는 승전을 알리는 사신을 당에 파견했고, 태종 무열왕은 사비성으로 간다.
8월 2일 - 의자와 융을 당하에 꿇리고 술을 따르게 하며 잔치를 열었다.
               대야성의 반도 금일과 모척을 잡아 죽였다.

9. 당의 신라 정복 기도

소정방은 백제 멸망 후 신라 정복을 준비한다. 신라군은 이를 알고 대책회의를
갖는다. 多美公이 신라군을 백제군으로 위장하여 당군과 대항하자고 주장하고, 김
유신이 찬동한다. 태종무열왕이 망설이나 김유신이 강하게 항전을 주장하여 대비
를 갖추게 된다. 이를 탐지한 소정방은 신라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660년 9월 3일 - 소정방은 의자왕, 왕비 恩古와 왕자 13인, 대신들(대좌평 沙宅天
福, 國辨成, 孫登 등.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88명, 삼국사기 신라 본기와 김유신
열전에는 93명, 일본서기에는 37명으로 되어있으며 송환일자도 11월 1일이라고
나온다. 구당서에는 의자왕, 태자 융과 소왕 효, 연 장군 58명으로 되어 있으며
신당서도 숫자가 같지만 장군을 추장이라고 표기하고 있다.)과 백성 1만 2천 8백
7명(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것이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1만 2천명, 김유
신 열전에는 2만명으로 되어 있다)을 당나라로 끌고 간다. 사비성은 낭장 유인원
이 지키게 된다.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며칠만에 병사하고 당고종은 그 무덤을 孫
皓와 陳叔寶 묘 사이에 만들어주었다. 손호(손권의 손자)는 오의 마지막 군주로
나라를 들어 晋에 항복한 인물이다. 진숙보는 陳나라 後主로 역시 망국의 군주다.
망국의 군주 사이에 백제왕 의자도 묻힌 것.

(계속)
by 초록불 | 2004/08/08 12:48 | *..역........사..* | ▲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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