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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미스테리 3 - 마한의 멸망시기 (96/03/08)
세번째, 마한은 언제 멸망했는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마한이 온조왕 26-27년간(서기 8-9년)의
전쟁으로 멸망한 것으로 나옵니다만 이 기록을 믿지 않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 사서에 마한이 계속 등장하고(삼국지)
있기 때문이며 신라본기를 보면 탈해왕 때(서기 61년) 馬韓의 장수
孟召가 복암성을 들어 항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병도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49년조(369년) 기사를 근초고왕대의
정벌 기사로 파악한 이래 마한은 근초고왕 대에
멸망한 것으로 보는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근초고왕 대라면 4세기 후반인데, 이때까지 백제가
인근 소국들을 병합하지 못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더구나 신공황후 49년은 180년을 내리면 429년의 일이 되는데
마한이라는 소국 집단이 이렇게 존속하였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점은 쉽게 삼국사기를 통해서 증명할 수 있는데
고구려는 주몽으로부터 태조대왕대에 이르기까지 인근소국들을
정벌합니다. 그때는 대략 서기 56년경까지입니다. 이 이후 정벌이
계속되었다하더라도 2세기까지 가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신라의 경우를 보면 석씨왕조 시대에 대부분의 정벌이 이루어집니다.
파사이사금 때부터 석씨정복왕조의 찬란한 시대가 개막되는데
이때는 이미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입니다. 이 정복활동은
3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며 대개 신라의 초기영토는 이시기에
개척된 것입니다.

위의 사실로 부터 고구려와 같은 선진국가가 신라와 같은
후진국가보다 국가발전단계가 100년 이상 빨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로부터
남하한 선진 정치집단이었으며 그들이 정착한 곳은 신라가
있던 곳보다는 좀 나았겠지만 여전히 후진적인 지역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더우기 백제의 사료 중 소국정벌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더욱 마한이 이미 온조왕 때 멸망했을
것이라는 추리를 가능하게 합니다. 온조왕 때 마한의 멸망으로
인해 백제는 마한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고 이것은 대대적인
정복사업 없이 각 영토를 흡수합병하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 49년조 기사는 기사에도 나오듯이
고계진(강진)의 남만 沈彌多禮와 몇몇 소국(5개국)을 정벌한 기사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전라남도 부근의 소국들로
물론 마한의 한구성체였을 것이며 백제로부터 지리적으로 떨어진
것으로 인해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마한의 실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삼국지>에 마한의 국가 중 백제가 있으며 마한의 왕은
목지국에 산다는 구절일 것입니다. 즉 삼국지가 쓰여지던 때에
중국인들은 목지국이 아직도 마한을 대표하며, 백제는 그 목지국에
속한 나라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렇게 두 사서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그런데 <삼국지>에는 당대의 신라, 사로국도 주요한 국가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신라는 한창
정복전쟁 중이었으므로, <삼국지>가 당대의 현실을 바로
전하지 못했다는 방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설을 세워보는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 때문입니다.

탈해왕 때의 기사를 제외하면 마한이 온조대의 멸망 이후에
나타나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예로 2대 다루왕 36년조를
본다면

10월에 왕은 땅을 개척하여 낭자곡성에 이르렀다.

라는 식입니다. 낭자곡성은 청주에 비정되는데, 전투도 없이
성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이곳이 무인지경이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의 마한소국에
백제의 행정력이 미치게 된 것을 拓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온조왕대의 기록을 살펴봅시다.

13년 8월에 천도를 하며 마한과 강역을 정합니다.

이때 백제는 남으로 웅천(공주)까지의 영역을 확보하는데
이 영역 안에 마한의 소국들이 없었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한은 자신의 관할 소국들을
백제에게 내주었던 것이며, 물론 이러한 일이 호의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백제에게는
웅천까지의 영토를 관할할 무력이 있었던 것이며,
기사처럼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24년 7월조의 기사를 보면 백제가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합니다.

이때 사신은 "처음에 동북 1백리의 땅을 갈라주어
편히 살게 해주었다"라고 말하며 나라가 안정되자
이제는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다라며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온조는 이에 웅천책을 헐어버리고
있습니다. 이로볼때 이때까지도 웅천은 백제의
영토가 아니었던 것이며, 최초의 영토는 온조 13년의
영토가 아니라 1백리 정도의 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4년에는 웅천까지 군사적인 진출을 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마한에게는 커다란 위협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26년부터 29년에 걸쳐 3년동안 마한정벌이 이루어지며

정벌 후 대두산성, 탕정성, 고사부리성 등을 축조하는데
이 성들은 충남지방의 성들로 비정할 수 있습니다.

백제가 충남지방까지 세력을 뻗친 것만은 분명할 것입니다.

이러한 정벌정책은 상당히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당대 고구려와 비교해 보아도 큰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후 백제는 마한의 맹주적 위치에서
직접적인 행정력을 관철해 나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의 <삼국지>와 우리의 <삼국사기> 중 어느 것을 더 취신
하느냐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백제의 미스테리 세번째입니다.

마포에서
by 초록불 | 2004/08/08 13:02 | *..역........사..* | ▲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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