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사에 대한 소고 (95년) *..역........사..*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이글은 게시판 정리 전에 올렸던 글입니다. 다시 올립니다.

고구려가 부여의 일파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은 모두 알
고 있지만 정작 부여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부여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존재했으며 그 구성은 어떻게
되었던 나라일까? 남방의 가야만이 신비의 나라가 아니고 북방의
부여 역시 신비의 나라 아니겠는가.

부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史記 貨殖列傳에 나온다.

연나라는 북쪽으로 오환, 부여와 인접해 있다.
燕北隣烏桓, 夫餘.

이 이전의기록인 史記 匈奴傳에는

흉노의 좌측의 왕과 장수는 동방쪽에 있으며, 상곡으로부터 그 동
쪽에 있는 자는 예맥, 조선과 접해 있다.
匈奴左方王將居東方, 自上谷以往者接穢貊, 朝鮮.

라고 되어 있어 夫餘의 기록이 없다. 이때문에 夫餘의 건국을 BC
119년 한나라가 흉노의 좌지를 평정한 후로부터 BC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함락시킨 때 사이의 일로 여기기도 한다.
晋書 四夷傳 夫餘國에는

한나라 무제 때에 자주 조공을 했다.
武帝時頻來朝貢

라는 기록이 있다. 이 이전에 史記 朝鮮傳을 보면 右渠가 주변 나
라를 방해하여 천자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되어 있다. (眞番旁衆
國, 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이 주변 나라 중에 夫餘가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원을 이때로 잡는 것은 문제가 있는 발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가를 밝히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될지
도 모른다.
論衡 吉驗篇, 魏略, 後漢書 등에는 夫餘의 기원에 대해서 실려 있
다.

北夷 탁리국의 侍婢가 임신을 했다. 왕이 이를 죽이려 했더니, 그
시비가 “어떤 기가 있어 크기가 계란만한데 하늘에서 내려와 내게
태기가 있었다”라고 했다.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돼지우리
속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이를 살려주었다. 다시 말우리에
버려 말이 깔아 죽이도록 했으나, 말 역시 입김을 불어 살려주었
다. 왕이 이를 보고 하늘의 아들이 아닌가 하여 드디어 그 어머니
에게 거두어 기르도록 했다. 이름을 東明이라 했으며, 소와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겼다. 동명이 활을 잘쏘자 왕이 그 나라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동명이 도망하여 남쪽으로 淹호水에
이르러 물을 활로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
었다. 동명이 이를 밟고 건너자, 그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물속으
로 흩어져 따라오던 추격 군사들이 쫓아오지 못했다. 이에 동명이
夫餘에 도읍을 정하니, 그로 인해 北夷에 부여국이 있게 되었다.
(원문 생략)

살펴본 것처럼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동일하다.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까지 같다. 이것은 고구려와 부여의 지배층이
한뿌리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것 같지만 고
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사서와 부여의 건국신화를 잠시 비교해 보
자.

위 글을 보면 부여 이전에 탁리국이 있었고 부여는 그 탁리국보다
남하해서 세워진 왕국이다. 물론 단신으로 남하하지는 않았겠지만
피지배민까지 모두 남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이 통치한 부족
은 누구일까?
三國志 魏志 夫餘傳에는 흥미로운 글이 있다.

그 도장의 글에는 ‘濊王의 印’이라고 되어있다.
其印文曰濊王之印.

그 나라에는 고성이 있어 이름을 濊城이라고 하니 아마 예맥의 땅
이었을 것이다. 부여왕이 그 속에 있어 스스로 ‘도망해온 자’라
고 하는데 생각컨데 까닭이 있는 것 같다.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以
也.

기록에 나오듯이 부여의 땅은 옛날에는 예맥의 땅이었고 부여왕은
탁리로부터 ‘도망해온 자’가 아니던가.
여담격이 되지만 魏略에는 탁리국이 아니라 高離國으로 나온다. 高
離와 高句麗의 음의 유사성을 볼 때 고구려의 통치자들은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부여보다 오래된 고리의 음을 따서 나라 이름을
정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穢는 어떤 나라인가? 漢書 武帝紀에는 穢에 대한 기록이 있
다.

원삭 원년(BC 128)에 동이예군 남여 등 28만 명이 투항해오자 그곳
에 창해군을 두었다.
元朔元年, 東夷穢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滄海郡.

이 창해군이라는 것은 실제로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므로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穢가 정치결사체로서의 힘을 상실
해가고 있다는 반증은 되리라 생각한다. 즉 이런 정치 공백기에 탁
리에서 내려온 선진집단이 왕권을 차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가 BC 100년경부터 존재했다면 멸망은 494년이었으므로 600년
을 이어온 대단한 왕조인 것이다. 우리는 부여에 대해서 얼마나 알
고 있는가?
부여는 邑婁와 勿吉을 속국으로 거느린 종주국이기도 했다.

읍루는 한나라 이래로 부여에 신속했으나 부여가 그 조세 부담을
가중하게 맡기자 황초(220~225)중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는 자주
이를 토벌했다.
自漢已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 叛之, 夫餘數伐
之.
(三國志 邑婁傳)

황금은 부여에서 생산되었는데......지금 부여는 물길에게 축출당
했다.
黃金出自夫餘, .......今夫餘爲勿吉所逐. (魏書 高句麗傳)

이것은 正始년간에 있었던 일이므로 504~508년 사이의 일이 된다.
이때는 이미 부여가 멸망한 때이다. 즉 부여가 멸망함으로써 勿吉
은 자동 독립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이 이후에 물길이 다시 고
구려의 세력권 안에 들어갔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부여의 습속과 문화에 대해서 알아보자.
부여의 습속은 고구려의 습속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사 시기가 다르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부여는 殷正月(12월)에 제사를 지내지만 고구려는 10월에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10월 제사는 동예나 옥저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여기고 부여의
일종이라고만 생각하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글에서
심도있게 논의할 성질은 못되지만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이지 해
부루나 금와가 아니다. 북부여의 땅에 세워진 해모수의 나라가 어
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모수가 실존 인물이라면 해모수의
나라 역시 10월에 제사를 지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이들 해모수,
주몽은 穢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제시해 본다.
부여인은 크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웠고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으며, 활, 화살, 칼, 창 등을 병기로 썼다. 형벌은 몹시 엄해서
사형수의 가족은 모두 노비로 삼고 도둑질을 하면 12배의 배상을
물렸으며 간음을 하면 남녀 모두 죽이며, 질투하는 여자는 죽여서
산위에 내다 버렸다.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았다(兄死嫂取,
이 풍속은 흉노와 같다). 순장제도가 있어서 많은 경우는 100명도
순장이 되는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노래부르기를 좋아해서 낮이건
밤이건 길에서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옷은 흰빛을 선호해서 흰 포목으로 도포를 만들어 입는데 소매가
넓다. 바지도 역시 희게 입고 신은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에 수를 놓아 입으며 털옷도 입는다. 모자는 금은으로
장식을 한다.
은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迎鼓) 군사에 관한 일도 하늘에 제
사를 지낸다. 제사의 방식은 소를 잡아서 발굽으로 길흉을 판단하
는 방식이다. 발가락이 째졌으면 흉하고 붙었으면 길하다.
왕 밑으로는 馬加, 牛加, 猪加, 狗加와 犬使가 있다. 犬使는 심부
름꾼을 가리키는 벼슬이다. 전쟁이 나면 加들이 나서서 싸우게 된
다. 백성에는 豪民이 있고 下戶는 그 밑에서 노복생활을 한다.

부여의 흥망사를 살펴보자.
부여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한 바 있다. 이 후대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解夫婁가 그 이후
의 첫 왕으로나온다. 해부루는 국도를 동해의 迦葉原으로 천도하
고 있다. 제왕운기를 따르면 해부루는 단군의 아들로 되어 있는데
이점은 수긍하기가 어렵다. 만약 이승휴의 의견이 맞다면 단군조선
의 역사는 2000년을 당겨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단군의 아들로
전해지는 부루와 부여왕 해부루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나타난 착오
일 것이다.
해부루의 후계자는 金蛙이다. 금와는 자신들의 옛 도읍지를 차지한
解慕漱의 妃 柳花를 거둬들여(BC 59) 결국 자신들을 멸망하게될 朱
蒙을 기르게 된다. 금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帶素
가 왕위를 물려받고 있다.
여기서 몇가지 의문을 제시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해모수가 실존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추론을 한다면 주몽은 금
와왕의 서자로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어서 적자들의 시기와 질투
로 인해 망명의 길을 떠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모수의 나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주몽도 연연해 하는 적이
없다. 이점은 유리가 주몽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일이다. 합리적인 추론은 고구려가 왕가의 가계를 우수한 것으로
꾸미기 위해 신화를만들어 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부여의 발전 정도에 대한 문제이다. 이미 금와왕은 대
소를 태자로 삼고 있었다. 이것은 부자상속제가 확립된 것으로 정
치적인 선진집단이었다는 점을 반영한다.
대소는 왕이 된 이후에 고구려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BC 6년에 대
소는 고구려에 볼모를 요구한다. 심약한 유리왕은 태자 都切을 보
내려 했으나 태자가 이에 응하지 않는다(이런 일은 이전의 우거왕
이 태자를 보내려 할 때도 일어난 바 있다. 고대에 태자들도 독자
적인 세력이 있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대소는 군가 5만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 5만이라는 대부
대는 부여사를 통틀어 가장 막강한 군대가 된다. 그러나 이 대역사
는 혹독한 추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대소는 다시 AD 9년에 고
구려에 사신을 보내 위협을 가한다. 유리는 역시 이 협박에 공손하
게 응대하지만 어린 왕자 無恤(뒤의 대무신왕)은 당당하게 부여의
신하에게 호통을 친다.
대소는 준비 끝에 13년 대규모의 고구려 공략을 시작한다. 그러나
무휼의 복병계에 의해 대패를 하고 만다. 이때 부여가 동원한 군대
의 수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구려가 다음 해에 군사 2만으로 정복
전쟁에 나서는 것으로 보아 역시 5만에 가까운 수가 동원되었을 것
이다.
이 두차례에 걸친 대실패로 부여의 국세는 쇠퇴일로에 접어든 것으
로 보여진다. 고구려는 14년부터 무휼이 군국정사를 담당하며 영토
를 넓히며 인재를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 대무신왕 4년(21년)에 대
무신왕은 대규모의 부여 정벌에 나선다. 불과 10여년만에 국세가
그렇게 뒤바뀌었던 것이다. 3개월간에 걸친 전투 속에서 대소는 고
구려의 장수에 의해 죽고 말았다(22년). 그러나 부여는 그 정도에
굴하지 않고 끈질긴 저항을 했으므로 대무신왕은 결국 부여에서 후
퇴하고 말았다.
부여는 이 전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금와왕의 막내(7
째 아들)는 대소가 죽자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부여를 떠난다. 그
는 曷思 지역에 도착해서 海頭國을 빼앗아 나라를 세웠으며 고구려
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손녀를 대무신왕에게 시집보내기도
한다(갈사왕의 손녀와 대무신왕 사이에 나온 왕자가 비극의 호동왕
자이다). 갈사왕이 세운 나라는 아들, 손자 都頭에 이르러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고구려에 항복하고 만다(68년. 고구려는 56년에
동옥저를멸망시키는 등 갈사국의 배후를 조이고 있었다). 한편 본
래 부여 역시 왕의 從弟가 만여인을 이끌고 고구려에 귀부한다(22
년). 고구려는 이들을 받아들여 연나부를 세우고 종제에게는
‘낙’이라는 성을 내린다.
그러면 부여는 정말 이렇게 해서 멸망하여 없어진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후한서에는 49년에 부여가 한나라에 사신을 보
낸 사실이 후한서에 적혀있다. 부여의 대환란 이후 근 30년만의 일
이다. 이때부터 계속 사신이 내부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사신을
보낸 부여는 대소의 후예들이었을까? 아니면 해모수의 나라가 계속
이어져왔던 것일까?
이미 앞에서 의문을 제시했던 것처럼 해모수의 부여일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물론 실존도 의심스럽고). 그 근거 중의 하나는 태조왕의
부여 방문이다. 태조왕은 121년에 부여를 방문하고 태후묘에 제사
를 지낸다. 이 태후묘는 바로 유화부인의 묘이다. 태조왕은 이곳을
방문하여 백성들을 구호도 하는 등 시혜를 베풀고 돌아온다. 유화
부인은 대소 때 죽었으므로 태후묘가 있는 부여란 곧 대소의 부여
가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태조왕의
모후 역시 부여 사람이다(아마도 이점이 갈사왕 손자 도두가 항복
을 하는데에도 기여를 했을 것이다).
부여는 이전에도 77년과 105년에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있다. 그
런데 태조왕의 방문은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것과는 달리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해 겨울에 고구려가 요동공격에 나
서자 부여는 즉시 한나라에 원군을 2만명 파견하고 있다. 이것은
부여가 고구려의 공격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한과 일종의 공수동맹을 맺었던 때문으로 보
인다.
약소국으로 전락한 부여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기 위해서 한나라와 손을 잡기로 한다. 그때문에 始는 왕자 尉仇台
를 120년에 한나라에 보낸다. 그리고 121년의 고구려의 현도 공격
에 원군을 파견하고 그 다음해 고구려의 요동공격 때에도 원군을
파견하여 한나라를 도와주고 있다. 136년에는 부여왕이 직접 한나
라의 순제를 만나러 가기도 한다. 161년에도 부여는 조공을 하고
있다.
167년 부여왕 夫台가 2만군으로 현도를 공격한다. 이 내용은 후한
서에 있는데 삼국지 부여전에 있는 부여왕계에는 夫台라는 왕이 없
다. 삼국지 부여전에 있는 부여왕계에는 夫台라는 왕이 없
다. 夫台가 尉仇台의 별칭일 수도 있겠지만 이점은 하나의 의문으
로 남겨둔다.
부여는 174년 다시 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사신을 파견한다.
각 사서를 종합해서 부여의 왕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동명
|
......
▒|
解夫婁
▒|
金蛙(BC 1세기경)
▒|---------------------------------
帶素(BC 1세기말부터 AD 22) 曷思 (22년 즉위)
|▒▒▒▒▒▒▒▒▒▒▒▒▒▒▒▒ |
...... ▒▒▒▒▒▒▒▒▒▒▒▒▒▒ ?
▒▒▒▒▒▒▒▒▒▒▒▒▒▒▒▒▒ |-------
▒▒▒▒▒▒▒▒▒▒▒▒▒▒▒▒▒ 都頭 大武神王 次妃
▒▒▒▒▒▒▒▒▒▒▒▒▒▒ (1세기중엽) |
▒▒▒▒▒▒▒▒▒▒▒▒▒▒▒▒▒▒▒▒▒ 好童

(~32)
▒|
始 (2세기초~2세기 중엽)
▒|
尉仇台 (2세기 중엽~3세기초)
▒|
簡位居 (3세기초)
▒|
麻余(簡位居의 서자)(3세기 중엽)
▒|
依慮 (~285)

依羅(依慮의 형제?)(286 즉위)
▒|
.....

부여는 始로부터 簡位居에 이르기까지 안정적인 왕권을 유지했던
것 같다. 그러나 麻余의 대에 이르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麻
余는 簡位居의 서자로 출신성분이 좋지 않았지만 주위의 귀족들이
지원을 해서 왕위에 올랐다. 그런만큼 전제적인 권력은 휘두를 수
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속국에도 전달되어서 읍루는 반
란을 일으킨다(220~225 연간). 강한 힘을 휘두른 귀족은 牛加 집단
이었다. 牛加의 조카 位居는 犬使를 맡아 명망이 부여 안에 가득했
다. 246년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시에 군량을 제공하는 등 배후에
서 활약한 것도 位居이다. 牛加는 그 명망을 등에 업고 반역을 꾀
했으나 핵심인물인 位居가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牛加와 그의
아들을 주살하고 만다. 위기는 넘겼지만 당시 왕권이 권위가 없었
던 것은 가뭄이 들자 왕을 바꾸자,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던
점으로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麻余가 죽자 부여의 왕위는 그의 어린 아들인 依慮로 이어졌다. 依
慮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6세 밖에 되지 않았다. 부여의 혼란
은 어린 왕의 즉위와 함께 더 심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慕容
외의 침입을 받아 依慮는 자살을 하고 나라는 일시 망하게 된다
(285). 여기까지를 前夫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부여의 멸망
에는 한나라의 책임도 있다. 한나라는 부여의 위기를 구해주었어야
하는데 수수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문에 부여에서 依羅가 원
군을 요청하자 護東安夷校尉 鮮于영을 파면시키고 河龕을 그자리에
앉혔으며 하감은 督郵 賈沈을 보내 依羅를 지원하게 했다. 賈沈은
慕容외의 도전을 받고 그를 격파해서 부여는 다시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後夫餘는 前夫餘보다 한층 더 약해졌던 모양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거의 나타내지 못한다. 중국 사서의 동이전에도 晋書 이
후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삼국사기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後夫餘는 346년 慕容황의 침공을 받아 왕을 비롯 5만의 귀족, 백성
들이 끌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명맥만 유지하던 後夫餘는 결
국 494년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완전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고 만다. 200년 이상을 존재했던 後夫餘에 대한 기록이 이만큼
밖에 없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부여민이 모두 고구려로 건너왔던 것은 아니었다. 新唐書 流鬼傳에
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達末婁는 ......북부여의 후예이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그
유민이 那河를 건너 그곳에 살았다.
達末婁, ......北夫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度那河因居之.

達末婁가 있던 지역은 지금의 오위르(烏裕爾)강 유역이다. 또 일부
부여민들은 자신들의 본래 거주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머물러 靺鞨
족속이 되었다. 구당서 지리지에는

愼州는 涑沫靺鞨 烏素固部에 두었다. 黎州는 愼州를 나누어 浮유靺
鞨 烏素固部에 두었다.
愼州, 以涑沫靺鞨烏素固部, 黎州析愼州以處浮유靺鞨烏素固部.

여기에 나오는 浮유靺鞨은 바로 夫餘靺鞨이다. 이 속말말갈(=부유
말갈)은 뒤에 발해를 세우는 주력세력이 된다.
역시 본 취지에는 어긋나지만 말갈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을 하자.
말갈은 하나의 통일된 종족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말갈에는 두가
지 종족들이 있는데 물론 이들이 뒤섞여 살았던 것도 아니다. 속말
부, 백돌부, 안차골부,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의 7종류가
있다. 이들중 속말부와 백돌부, 백산부는 예맥계로 모두 발해 건국
에 관계가 있다. 흑수부는 우디거의 선조이다. 불열, 호실, 안차골
은 숙신의 후예이고 뒤에 여진이 된다. 이 부분은 조심해야 하는데
숙신 계열은 퉁구스어 계통이고 예맥계열은 몽고어 계통이다. 둘은
선조가 틀리고 그 후예도 틀린 것이다. 물론 이들 숙신계열의 말갈
들도 발해 때에는 모두 발해 아래에 들어와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
이 발해민족으로 동화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한민족의 국가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발해
의 주력이 고구려 유민과 부여의 후예들인 속말, 백산 말갈들인 만
큼 발해가 우리민족의 국가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부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선두그룹에 나타난 국가이며 최후로
만주에 존재한 발해의 전신이기도 하다. 관계 논문조차 찾아보지
못하고 쓴 글이 되어 조잡한 곳이 많을 것이 걱정이다. 부여에 대
한 활발한 논의가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마포에서

덧글

  • 대조영 2007/05/01 00:14 #

    부여의 정체성을 밝혀야 고구려와 발해의 실체를 알수 있을겁니다..
    특히 발해의 경우에는 정통성을 고구려 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찾는바가 있어...

    부여사의 복원이 시급합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