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모범이 되는가?
1. 글을 시작하기 전에
2.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
3. 팔레스타인의 저항
4. 결론을 대신하여
1. 글을 시작하기 전에
중국의 동북삼성, 즉 만주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곳은 고구려의 기상이 숨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러한 역사적인 의미 이외에 이곳을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일단의 사람
들이 있다.
그들은 만주를 失地로 생각하며 따라서 회복해야 하는 영토로 여긴다. 국
경선은 변하는 것이고, 자국의 땅이 된 곳을 순순히 내어줄 나라는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 자명한데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사실상 전쟁을 일
으키고자 획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주장의 탈을
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전례가 존재하기 때
문이다.
이스라엘은 근 2천년전에 떠나온 땅을 회복하여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것
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이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의해 저질러진 폭거라는 사실은 말하
지 않는다. 또한 이스라엘이 남의 땅을 빼앗은 댓가로 치뤄야 했던 숱한
전쟁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쫓겨나고
지금도 갖은 박해를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정녕 이스라엘은 성서라는 토지문서를 근거로 들이대어 팔레스타인을 양보
받았는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단고기나 삼국사기
를 들이대어 동북삼성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빈집에 20년 이상 살면서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땅을 20년 동안 가꿨다면
우리나라의 민법은 설령 주인이 뒤늦게 나타나더라도 살던 사람의 권리를
인정해 준다. 그런데 만리강산을 우리가 “주장”하면 얻을 수 있다고 말
하는 사람들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 이후의 범죄행위에 대해
서 아는만큼 소개해 볼 생각이다. 이를 통해 이글을 읽는 여러분이 전쟁없
이 영토를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인류 최대의 범죄인 전쟁을 부추기는
속검은 인간들에 대한 경각심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2.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는 19세기 후반의 시오니즘Zionism에서 비롯된다. 시
오니즘은 “시온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로 유명한데, 시온이란 이스라엘
의 한 지명이다. 즉 <구약성서>에 나오는 지명으로 고대 예루살렘에 있던
두개의 언덕 중 동쪽에 있던 지역이다. 시온이라는 이름은 종교적인 의미
로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데 성서에 따르면 시온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
가 거처하는 곳이며, 그가 왕으로 계신 곳이며, 그가 다윗을 왕으로 세운
곳이다. 예레미야서에는 시온이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올 구원의 장소로 묘
사된다. 이런 이유로 시온이란 단순한 지명을 떠나 유대인들에게 영원한
고향으로, 구원의이름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민족국가 수립의 염원을 시오니즘이라고 명명한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
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왜 자신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떠나 유럽으로 흘러
들어왔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거주하게 된 것은 BC 13세기의 일이다(그
이전의 거주자들이 돌아와 땅을 돌려달라면 이스라엘은 돌려줄 것인가?).
BC 10세기경 유명한 솔로몬 왕 사후에 유대인들은 분열하여 북쪽의 이스라
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왕국으로 나뉘어졌다.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 아
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이스라엘은 본래 12개의 지파가 있었는데 이
때 북쪽의 10개 지파는 멸망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유다왕국을 건립한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이 남게 되었다. 아시리아는 유다왕국을 속국으로 거
느리고 있었다. BC 587년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다왕국을 침공해 많은 유대
인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수십년이 지난 키루스 2세 때에서야 유대인들
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프
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BC 141년에 이르러
서야 독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은 오래가지 못하고 BC 65년 로마
의 지배 아래 들게 되었다. 이후 로마의 지배에 항거한 반란이 있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AD 30년경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예수가 십자
가형에 처해졌다. 135년에 벌어진 마지막 반란을 끝으로 유대민족은 극소
수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 지역은 그후 비잔틴 제국의 보호 아래 놓여 있었는데 7세기 경 이슬람
에 의해서 점령 당했다. 이후 십자군 전쟁을 거쳐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
래 놓인다.
그러면 이제 시오니즘으로 돌아오자. 시오니즘이 공식적으로 표출된 것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이다. 여기서 바
젤강령이 채택되었다. 바젤강령은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고자 한다”라는 것이다. 운동본부는 오
스트리아 빈에 설립되었다. 이 운동의 핵심적인 인물은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었다. 시온주의자 대회는 매 2년마다 열렸으며 1901년까
지 지속되었다. 헤르츨은 오스만 제국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운동에 호의적이었다. 영국은 우간다의 일
부지역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시온주의자들은 이를 거절하고 팔레스타인
을 고집했다. 1904년 헤르츨은 죽었고 운동본부는 쾰른, 베를린으로 옮겨
졌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 운동은 극소수의 인물들만 참여한 미미한 운
동이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대개 러시아 거주자들이었고, 운동의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거주자였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실패하고 대학살이
일어나자 많은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감행했
다. 1914년경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모두 9만여명에 이르렀
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시오니즘은 다시 크게 힘을 얻어 일어났다. 운
동의 주도권은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쥐었다. 이
들은 영국으로부터 밸푸어 선언을 얻어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밸푸어 선언이란 무엇인가?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선언한 것으로 그
내용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라는 것
이다. 이 선언이 나온 것은 앞서 말한 시오니즘 지도자들의 노력도 큰 몫
을 했다. 그리고 영국의 이해관계에도 큰 영향이 있었다. 영국은 이 선언
을 통해 미국계 유대인들의 여론이 연합군을 향할 것을 계산했고, 영국을
지지하는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정착시키면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지키
는 통로를 그들이 충실히 지켜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밸푸어 선언은
연합국의 지지를 받았다. 때문에 1차대전 이후 1922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도 포함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에 동맹군이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방을 빼앗긴 셈이다. 오스만 제국은 그후 혁명이 일
어나 멸망했으며 그 후신이 지금의 터키이다.
그때까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별로 늘어나지는 않았다. 1925년 통계
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10만 8천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국의 확실한
지원이 뒤따르게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1933년에
는 23만 8천명으로 늘어났다. 당연히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던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물결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1929년, 그리고 1936~39년에
걸쳐 아랍인들은 영국의 정책에 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영국은 1939년
유대인의 이후 이주를 제한한다는 방침을 발표했으나 이 정도로는 유대인
과 아랍인 모두 불만을 갖게 만들 뿐이었다.
이후 히틀러의 등장으로 위기를 느낀 유대인들은 더욱 팔레스타인 이주를
재촉하게 되었다. 당연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간의 긴
장이 고조되었다.
1947년 영국은 UN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방을 유대인과 아랍인간의 나라로
분할하는 안을 내놓았다. 특히 각 교파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분할하기로
했다. 이러한 UN안을 바탕으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이 건국은 곧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8~49년간 치뤄진 전쟁으로 이
스라엘은 UN안보다 더 많은 지역(50%에 이르는)을 점령했다.
이 전쟁을 통해 자신의 고향에서 축출된 아랍인들은 80만명이나 된다. 오
늘날 세계는 이들을 팔레스타인 인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1990
년 현재 4백 61만여명이다. 이중 유대인은 4/5, 아랍인은 1/6 정도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팔레스타인 인은 모두 445만명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팔레스타인 인이 고향에서 쫓겨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국가를 건립하는데 성공했지만 주위의 아
랍국가들과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으며, 각종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이 나라는 무력으로 유지되는 병영국가이다.
3. 팔레스타인의 저항
팔레스타인 인의 저항기구로 가장 유명한 것은 PLO다. 우리는 PLO와 같은
조직을 미국적 시각의 영향으로 순 악당 깡패 조직으로 여기기 십상이지만
팔레스타인 인 입장에서 본다면 PLO는 독립운동 조직이다. 우리는 분명 안
중근 의사의 저격과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
나 일제는 김구와 같은 지도자를 테러범으로 수배했다. 이것이 바로 시각
차다.
일제는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선동조론을 주창했는데, 이러한
논리는 2천년전의 문서를 가지고 땅을 빼앗으러 온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팔레스타인 인은 7세기 이래 죽 그 땅에서 살
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영국을 등에 업은 유대인들이 그 땅에 들어와 주
인을 내쫓고 본래 자기네 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과
연 정당한 것인가? 내쫓긴 사람들이 “우리가 남의 땅에서 오래동안 잘살
았으니 됐어. 이제는 다른 곳에 가서 살자.” 이렇게 말해야 하는가?
물론 팔레스타인 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결하여 자신들의
삶과 종교를 지키기 위해 떨쳐 나섰다. 각종 저항단채들의 총결집체로 만
들어진 것이 PLO다. PLO는 1964년 조직되었고, 그 정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7년 6월의 중동전쟁 직후였다. PLO의 자금은 아랍국가들의 후원금
과 팔레스타인 근로자의 세금으로 충당된다. 1969년 야시르 아라파트가
PLO의 의장이 되었다.
당시 PLO는 요르단에 본부를 두었는데 이곳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할 군사조
직을 육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 요르단의 후세인 정부와 갈등이 생
기면서 1971년 요르단 군대에 의해 추방되어 레바논 지역으로 이동했다.
1974년 아라파트는 PLO가 더 이상 테러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고
국제사회에도 PLO의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랍국가들은 이 선언
에 찬동하고 PLO를 아랍국가연맹에 가입시켰다. 그러나 그후 이집트와 이
스라엘의 평화조약 체결에서 PLO는 제외되었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지만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에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는 PLO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이 두지역은 이스라엘의 무력점령 지역이다).
이러한 이유로 PLO는 레바논에 근거를 두고 계속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결
국 이스라엘은 1982년 레바논을 공격했다. 결국 PLO는 레바논을 떠나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아라파트의 지도력은 많이 실추되었고 강경파의 득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아랍국가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의 지위
를 유지해냈다. 1988년 11월 PLO는 독립국가 선언을 했다. 물론 이것은 영
토가 존재하지 않는 명목상의 선언일 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PLO는
그때까지의 목표였던 이스라엘의 말살을 포기하고 공존을 선택했다. 이는
PLO 노선의 극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PLO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맺어가
고 있다. 이들은 현재 자치에 돌입했으며, 독립국가 건설의 길도 그리 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두 민족 간에 쌓인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한 유대인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아랍인에게 무차별 사격
을 가해 40여명을 죽였다. 이 유대인은 정신병자도 아니고 사건 당시에 술
을 마신 것도 아니다. 그는 증오에 가득 차서 냉정하게 무기력한 사람들을
향해 총을 발사한 것이며, 이스라엘의 극우파들은 잘했다고 말하고 있는
형편이다. 세계는 나찌의 학살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의 인권과
자유를 무시하는 것을 경악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이스라엘이 잘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마도 미국인들과 미국적 시각에 길든 일부 한국인
들뿐이 아닐까 싶다.
4. 결론에 대신하여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일어나고 있
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미래까지 어두
워져서는 안된다.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삼성으로 불린다.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이
그것이다. 고대에 있어 만주의 일부 지방은 우리 민족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오랜 세월동안 만주는 잊혀진 지방과 같았다. 만주가 개발되기 시작
한 것은 청나라 때로, 청은 만주에 중국인 이주를 원칙적으로 금했지만 러
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을 이주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만주지방의 풍부한 자연자원은 중국인들을 끊임없이 유혹했다. 중
국인들이 수없이 유입되자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만주의 여진족들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걸어갔다. 오늘날 여진족은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
다.
만주지방에는 조선족 자치주가 있다. 길림성 동남부에 있는 연변조선족자
치주가 그것이다. 이곳의 인구는 약 2백만명인데 조선족은 81만 5천명이
다. 그러니까 인구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폭이다. 동북삼성의 인
구가 얼마나 될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장춘, 길림, 심양 등의 대도시
인구만도 각 3백만 이상으로 동북삼성에 사는 인구가 극히 많다는 것은 분
명하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한족이다. 대도시 3곳의 인구만도 천만에
육박하는 이들에게 땅을 비워달라는 요구가 먹혀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더구나 동북삼성의 각종 산업은 그들이
피땀을 흘려 이룩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고대의 역사서를 들이대면서 이
들에게 비켜나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더군다나 그러한 논리의 축을 이스라엘의 예에서 찾는다면 더더군다나 웃
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대로 이스라엘의 건국은 영국
의 제국주의적 횡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동지
방을 세계의 화약고라고 부르는 것 뿐이다.
이렇게 남의 땅을 강제로 빼앗자는 발상을 나는 극우, 국수주의라고 생각
한다. 자민족의 이익밖에 눈에 보이지 않고, 그런 결과로 자민족의 운명까
지 위태롭게 만드는 바로 그런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힘으로 남의 터전을 빼앗은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
다면 반론의 글을 올려주기 바란다.
이 글 이후에 한겨레 21에서 뽑아낸 팔레스타인 관련기사를 약간 올리도록
합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포에서
1. 글을 시작하기 전에
2.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
3. 팔레스타인의 저항
4. 결론을 대신하여
1. 글을 시작하기 전에
중국의 동북삼성, 즉 만주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곳은 고구려의 기상이 숨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러한 역사적인 의미 이외에 이곳을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일단의 사람
들이 있다.
그들은 만주를 失地로 생각하며 따라서 회복해야 하는 영토로 여긴다. 국
경선은 변하는 것이고, 자국의 땅이 된 곳을 순순히 내어줄 나라는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 자명한데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사실상 전쟁을 일
으키고자 획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주장의 탈을
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전례가 존재하기 때
문이다.
이스라엘은 근 2천년전에 떠나온 땅을 회복하여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것
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이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의해 저질러진 폭거라는 사실은 말하
지 않는다. 또한 이스라엘이 남의 땅을 빼앗은 댓가로 치뤄야 했던 숱한
전쟁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쫓겨나고
지금도 갖은 박해를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정녕 이스라엘은 성서라는 토지문서를 근거로 들이대어 팔레스타인을 양보
받았는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단고기나 삼국사기
를 들이대어 동북삼성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빈집에 20년 이상 살면서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땅을 20년 동안 가꿨다면
우리나라의 민법은 설령 주인이 뒤늦게 나타나더라도 살던 사람의 권리를
인정해 준다. 그런데 만리강산을 우리가 “주장”하면 얻을 수 있다고 말
하는 사람들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 이후의 범죄행위에 대해
서 아는만큼 소개해 볼 생각이다. 이를 통해 이글을 읽는 여러분이 전쟁없
이 영토를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인류 최대의 범죄인 전쟁을 부추기는
속검은 인간들에 대한 경각심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2.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는 19세기 후반의 시오니즘Zionism에서 비롯된다. 시
오니즘은 “시온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로 유명한데, 시온이란 이스라엘
의 한 지명이다. 즉 <구약성서>에 나오는 지명으로 고대 예루살렘에 있던
두개의 언덕 중 동쪽에 있던 지역이다. 시온이라는 이름은 종교적인 의미
로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데 성서에 따르면 시온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
가 거처하는 곳이며, 그가 왕으로 계신 곳이며, 그가 다윗을 왕으로 세운
곳이다. 예레미야서에는 시온이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올 구원의 장소로 묘
사된다. 이런 이유로 시온이란 단순한 지명을 떠나 유대인들에게 영원한
고향으로, 구원의이름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민족국가 수립의 염원을 시오니즘이라고 명명한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
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왜 자신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떠나 유럽으로 흘러
들어왔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거주하게 된 것은 BC 13세기의 일이다(그
이전의 거주자들이 돌아와 땅을 돌려달라면 이스라엘은 돌려줄 것인가?).
BC 10세기경 유명한 솔로몬 왕 사후에 유대인들은 분열하여 북쪽의 이스라
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왕국으로 나뉘어졌다.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 아
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이스라엘은 본래 12개의 지파가 있었는데 이
때 북쪽의 10개 지파는 멸망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유다왕국을 건립한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이 남게 되었다. 아시리아는 유다왕국을 속국으로 거
느리고 있었다. BC 587년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다왕국을 침공해 많은 유대
인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수십년이 지난 키루스 2세 때에서야 유대인들
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프
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BC 141년에 이르러
서야 독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은 오래가지 못하고 BC 65년 로마
의 지배 아래 들게 되었다. 이후 로마의 지배에 항거한 반란이 있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AD 30년경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예수가 십자
가형에 처해졌다. 135년에 벌어진 마지막 반란을 끝으로 유대민족은 극소
수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 지역은 그후 비잔틴 제국의 보호 아래 놓여 있었는데 7세기 경 이슬람
에 의해서 점령 당했다. 이후 십자군 전쟁을 거쳐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
래 놓인다.
그러면 이제 시오니즘으로 돌아오자. 시오니즘이 공식적으로 표출된 것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이다. 여기서 바
젤강령이 채택되었다. 바젤강령은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고자 한다”라는 것이다. 운동본부는 오
스트리아 빈에 설립되었다. 이 운동의 핵심적인 인물은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었다. 시온주의자 대회는 매 2년마다 열렸으며 1901년까
지 지속되었다. 헤르츨은 오스만 제국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운동에 호의적이었다. 영국은 우간다의 일
부지역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시온주의자들은 이를 거절하고 팔레스타인
을 고집했다. 1904년 헤르츨은 죽었고 운동본부는 쾰른, 베를린으로 옮겨
졌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 운동은 극소수의 인물들만 참여한 미미한 운
동이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대개 러시아 거주자들이었고, 운동의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거주자였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실패하고 대학살이
일어나자 많은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감행했
다. 1914년경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모두 9만여명에 이르렀
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시오니즘은 다시 크게 힘을 얻어 일어났다. 운
동의 주도권은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쥐었다. 이
들은 영국으로부터 밸푸어 선언을 얻어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밸푸어 선언이란 무엇인가?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선언한 것으로 그
내용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라는 것
이다. 이 선언이 나온 것은 앞서 말한 시오니즘 지도자들의 노력도 큰 몫
을 했다. 그리고 영국의 이해관계에도 큰 영향이 있었다. 영국은 이 선언
을 통해 미국계 유대인들의 여론이 연합군을 향할 것을 계산했고, 영국을
지지하는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정착시키면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지키
는 통로를 그들이 충실히 지켜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밸푸어 선언은
연합국의 지지를 받았다. 때문에 1차대전 이후 1922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도 포함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에 동맹군이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방을 빼앗긴 셈이다. 오스만 제국은 그후 혁명이 일
어나 멸망했으며 그 후신이 지금의 터키이다.
그때까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별로 늘어나지는 않았다. 1925년 통계
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10만 8천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국의 확실한
지원이 뒤따르게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1933년에
는 23만 8천명으로 늘어났다. 당연히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던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물결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1929년, 그리고 1936~39년에
걸쳐 아랍인들은 영국의 정책에 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영국은 1939년
유대인의 이후 이주를 제한한다는 방침을 발표했으나 이 정도로는 유대인
과 아랍인 모두 불만을 갖게 만들 뿐이었다.
이후 히틀러의 등장으로 위기를 느낀 유대인들은 더욱 팔레스타인 이주를
재촉하게 되었다. 당연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간의 긴
장이 고조되었다.
1947년 영국은 UN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방을 유대인과 아랍인간의 나라로
분할하는 안을 내놓았다. 특히 각 교파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분할하기로
했다. 이러한 UN안을 바탕으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이 건국은 곧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8~49년간 치뤄진 전쟁으로 이
스라엘은 UN안보다 더 많은 지역(50%에 이르는)을 점령했다.
이 전쟁을 통해 자신의 고향에서 축출된 아랍인들은 80만명이나 된다. 오
늘날 세계는 이들을 팔레스타인 인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1990
년 현재 4백 61만여명이다. 이중 유대인은 4/5, 아랍인은 1/6 정도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팔레스타인 인은 모두 445만명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팔레스타인 인이 고향에서 쫓겨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국가를 건립하는데 성공했지만 주위의 아
랍국가들과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으며, 각종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이 나라는 무력으로 유지되는 병영국가이다.
3. 팔레스타인의 저항
팔레스타인 인의 저항기구로 가장 유명한 것은 PLO다. 우리는 PLO와 같은
조직을 미국적 시각의 영향으로 순 악당 깡패 조직으로 여기기 십상이지만
팔레스타인 인 입장에서 본다면 PLO는 독립운동 조직이다. 우리는 분명 안
중근 의사의 저격과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
나 일제는 김구와 같은 지도자를 테러범으로 수배했다. 이것이 바로 시각
차다.
일제는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선동조론을 주창했는데, 이러한
논리는 2천년전의 문서를 가지고 땅을 빼앗으러 온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팔레스타인 인은 7세기 이래 죽 그 땅에서 살
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영국을 등에 업은 유대인들이 그 땅에 들어와 주
인을 내쫓고 본래 자기네 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과
연 정당한 것인가? 내쫓긴 사람들이 “우리가 남의 땅에서 오래동안 잘살
았으니 됐어. 이제는 다른 곳에 가서 살자.” 이렇게 말해야 하는가?
물론 팔레스타인 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결하여 자신들의
삶과 종교를 지키기 위해 떨쳐 나섰다. 각종 저항단채들의 총결집체로 만
들어진 것이 PLO다. PLO는 1964년 조직되었고, 그 정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7년 6월의 중동전쟁 직후였다. PLO의 자금은 아랍국가들의 후원금
과 팔레스타인 근로자의 세금으로 충당된다. 1969년 야시르 아라파트가
PLO의 의장이 되었다.
당시 PLO는 요르단에 본부를 두었는데 이곳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할 군사조
직을 육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 요르단의 후세인 정부와 갈등이 생
기면서 1971년 요르단 군대에 의해 추방되어 레바논 지역으로 이동했다.
1974년 아라파트는 PLO가 더 이상 테러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고
국제사회에도 PLO의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랍국가들은 이 선언
에 찬동하고 PLO를 아랍국가연맹에 가입시켰다. 그러나 그후 이집트와 이
스라엘의 평화조약 체결에서 PLO는 제외되었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지만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에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는 PLO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이 두지역은 이스라엘의 무력점령 지역이다).
이러한 이유로 PLO는 레바논에 근거를 두고 계속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결
국 이스라엘은 1982년 레바논을 공격했다. 결국 PLO는 레바논을 떠나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아라파트의 지도력은 많이 실추되었고 강경파의 득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아랍국가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의 지위
를 유지해냈다. 1988년 11월 PLO는 독립국가 선언을 했다. 물론 이것은 영
토가 존재하지 않는 명목상의 선언일 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PLO는
그때까지의 목표였던 이스라엘의 말살을 포기하고 공존을 선택했다. 이는
PLO 노선의 극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PLO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맺어가
고 있다. 이들은 현재 자치에 돌입했으며, 독립국가 건설의 길도 그리 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두 민족 간에 쌓인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한 유대인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아랍인에게 무차별 사격
을 가해 40여명을 죽였다. 이 유대인은 정신병자도 아니고 사건 당시에 술
을 마신 것도 아니다. 그는 증오에 가득 차서 냉정하게 무기력한 사람들을
향해 총을 발사한 것이며, 이스라엘의 극우파들은 잘했다고 말하고 있는
형편이다. 세계는 나찌의 학살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의 인권과
자유를 무시하는 것을 경악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이스라엘이 잘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마도 미국인들과 미국적 시각에 길든 일부 한국인
들뿐이 아닐까 싶다.
4. 결론에 대신하여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일어나고 있
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미래까지 어두
워져서는 안된다.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삼성으로 불린다.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이
그것이다. 고대에 있어 만주의 일부 지방은 우리 민족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오랜 세월동안 만주는 잊혀진 지방과 같았다. 만주가 개발되기 시작
한 것은 청나라 때로, 청은 만주에 중국인 이주를 원칙적으로 금했지만 러
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을 이주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만주지방의 풍부한 자연자원은 중국인들을 끊임없이 유혹했다. 중
국인들이 수없이 유입되자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만주의 여진족들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걸어갔다. 오늘날 여진족은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
다.
만주지방에는 조선족 자치주가 있다. 길림성 동남부에 있는 연변조선족자
치주가 그것이다. 이곳의 인구는 약 2백만명인데 조선족은 81만 5천명이
다. 그러니까 인구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폭이다. 동북삼성의 인
구가 얼마나 될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장춘, 길림, 심양 등의 대도시
인구만도 각 3백만 이상으로 동북삼성에 사는 인구가 극히 많다는 것은 분
명하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한족이다. 대도시 3곳의 인구만도 천만에
육박하는 이들에게 땅을 비워달라는 요구가 먹혀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더구나 동북삼성의 각종 산업은 그들이
피땀을 흘려 이룩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고대의 역사서를 들이대면서 이
들에게 비켜나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더군다나 그러한 논리의 축을 이스라엘의 예에서 찾는다면 더더군다나 웃
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대로 이스라엘의 건국은 영국
의 제국주의적 횡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동지
방을 세계의 화약고라고 부르는 것 뿐이다.
이렇게 남의 땅을 강제로 빼앗자는 발상을 나는 극우, 국수주의라고 생각
한다. 자민족의 이익밖에 눈에 보이지 않고, 그런 결과로 자민족의 운명까
지 위태롭게 만드는 바로 그런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힘으로 남의 터전을 빼앗은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
다면 반론의 글을 올려주기 바란다.
이 글 이후에 한겨레 21에서 뽑아낸 팔레스타인 관련기사를 약간 올리도록
합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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