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사학이란 무엇인가? (95/04/06) *..역........사..*



실증사학이란 무엇인가?

1. 들어가는 글

위 제목은 '실증사관이란 무엇인가'로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흔히 강단사학자는 "증거제일주의"에 사로잡힌 "실증사학"만을 고집한다고 말합니다(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론자'라고 총칭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실증사학이 무엇이냐고 반문한다면 그에 대하여 명확하게 답변하는 사람은 없으며, 대개 "실증사학이란 독일 랑케사학의 영향을 받은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라는 정도의 말밖에는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실증사학이 왜 문제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목청이 높아져 이렇게 말합니다. "실증사학에는 '혼'이 없다"라고. 여기서 다시 실증사학에는 왜 혼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단지 역사에 있었던 일들만을 찾는 것이고, 증거만을 조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말이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덧붙여 "고대의 역사에는 유실된 것들이 많은데 오직 증거로 남은 것만을 취한다는 실증사학이란 그 자체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없는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라고 덧붙입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역사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죄 이런 실증사학에 빠져 한국사를 왜곡시킨 학자라고 말해집니다. 그때문에 실증사학이란 곧 식민사학(식민사관)과 동의어로 처리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선 두가지 논점을 분리시켜야 합니다. 첫번째는 '실증사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한국의 실증사학자들은 식민사학자인가'라는 점입니다. 물론 두번째 논점은 우선 첫번째 논점이 해결되기 전에는 논해질 수 없는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실증사학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위의 글에 입각하여 정리해 봅시다.

위의 관점에 따르면 실증사학이란 "독일 랑케에 의해 시작된 오직 증거만을 가지고 역사를 구성해내는 '혼'이 없는 역사학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따른다면 실증사학이란 "해석"이 개입되지 않는 사학입니다. 역사학자가 주관적으로 역사를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식민사관'이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역사를 식민지 상황에 맞게 해석하는 사관입니다. 실증사학 = 식민사학이란 이미 정의 자체를 오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실증사학에 대하여 논의해 봅시다.

2. 본론

2-1. 랑케

실증사학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실증사학의 비조로 여겨지는 랑케(Leopold von Lanke 1795-1886)에 대하여 먼저 말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입니다.

먼저 랑케 당시의 문화적 경향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2-1-1. 랑케 이전의 역사학

서양에서 근대적 역사학이 대두한 것은 18세기의 볼테르부터라고 봅니다. 그는 초자연적 역사, 좁은 정치사나 전기적 연대기 등과 같은 무비판적인 역사서술을 반대하고 여러국민들의 생활, 시대정신, 예술, 과학, 정치, 풍습등에 걸쳐 광범한 문화사적 서술을 시도했습니다. 볼테르가 시작한 근대적 역사기술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민족적
전통을 탐구하는 국가사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일급의 역사가들이 속출하여 이른바 '역사학의 세기'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이 시대에 활약한 역사가들은 미슐레, 칼라일, 드로이젠, 몸젠(이런 이름들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사학사에 대한 공부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등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들을 대개 '낭만주의 역사가
'라고 부릅니다. 이들 낭만주의 사가들은 역사에 있어 풍부한 사료를 수집하고 고증작업의 활성화를 이룩했으나 때로 자신의 민족사에 천착해 공평성과 학자적 태도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민족만이 위대하다는 식의 역사서술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물결의 뒤를 이어 등장한 인물이 랑케입니다. 랑케는 낭만주의 역사가들이 역사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에 반발해 역사서술의 목적은 '단순히 일어난 그대로'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에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상 차하순, 서양사 총론, 탐구당, 1985, 8판, pp 535-536 참고)

"봐라! 랑케는 '단순히 일어난 그대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앞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가?"라는 환호는 조금 뒤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랑케의 역사관에 대한 한마디의 설명일 뿐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랑케 이전의 역사가들이 자민족의 역사를 우월하게 만들고 마음대로 도덕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물론 모든 역사가들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요. 몸젠과 같은 역사가는 국가권력을 찬양하는 독일인의 경향을 개탄하기도 했답니다). 마치 지금 한사동에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말이지요. 랑케는 그러한 자의적인(그리고 위험한) 역사관에 제동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랑케가 어떠한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봅시
다.

2-1-2. 랑케는 왜 역사를 공부하였나?

랑케는 루터파 목사와 법률가를 많이 배출한 독실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기숙학교를 나왔고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1815-25년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에서 중등학교 교사를 지냈는데 이때 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가 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째 당시 독일역사에 대한 애국적인 열정(!), 둘째 애국적인 독일 낭만주의 시(!!), 셋째 역사를 인류발전의 연대기로 본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의 영향, 넷째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연구방법을 도입한 바르톨트 게오르크 니부어의 로마사, 다섯째 중세의 역사가들에 대한 흥미, 여섯째 월터 스콧의 역사소설(지금도 널리 읽히는 아이반호우가 대표작이지요), 일곱째 역사적 인물로서의 루터에 대한 관심 등입니다. 하지만 가장 주요한 이유는 종교에 있었습니다.

랑케는 프리드리히 셸링의 영향을깊이 받았고 그때문에 역사에 나타난 신(神)의 영향을 이애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랑케는 신은 어디에나 있으며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에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직자이자 역사가가 된 것입니다.

- 재미있지요? 실증사학의 비조라는 랑케가 신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랑케의 유명한 명언 중의 하나는 "각 시대는 신에 직결되어 있다"입니다.

2-1-3. 랑케의 초기 연구

랑케는 1824년 처녀작 <1494년부터 1514년까지의 라틴족과 게르만족역사>를 내놓습니다. 이 책에는 부록으로 <근세 역사가들에 대한 비판>이 붙어 있었는데 이 논문에서 랑케는 전통에 대한 비평적 분석은 역사가들의 기본임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책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랑케는 1825년 베를린 대학교의 부교수로 초빙되었습니다. 그는 1834년 정교수가 되었고 1871년까지 강의를 계속했습니
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세미나 방식을 창안했습니다. 랑케는 이후 <16-17세기 남유럽의 영주들과 민중>, <16-17세기의 로마교황, 그 교회와 국가>라는 역사학의 고전적인 명작들을 발표했습니다(고전이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나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책을 가리킵니다. 흐-).

랑케는 이무렵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역사, 정치지>라는 잡지를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했습니다(이 대목은 아주 중요합니다. 잘 읽어 주세요).

당시 유럽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프랑스에서 진해되고 있는 대혁명이었습니다. 랑케는 스스로는 공정한 관점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당시 프로이센의 잘못된 정책을 지지하고 프랑스혁명의 유산을 거부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랑케는 프랑스의 혁명적 발전이 독일에서 되풀이될 수 없으며 되풀이되어서도 안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여 자유적, 민주적인 입장에 반대하는 프로이센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랑케는 역사가 개인, 민족, 국가가 개벌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진화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즉 사회와 민족에게 보편적인 원칙이란 필요하지 않고 각각의 국가는 각각 기초하고 있는 바에 따라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였으며 국가는 독립적으로 진화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랑케는 그를 위해 역사의 연속성을 크게 강조했으며 1848년 혁명 이전의 프로이센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랑케는 결국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자유주의자에게는 랑케는 군주제 수호의 화신이었으며 보수주의자에게는 너무나 미적지근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낙담한 랑케는 역사서술로 돌아왔으며 '객관성'이라는 자신의 절대명제를 다시 추구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2-1-4. 랑케와 '객관성'

랑케는 1845-1847년에 걸쳐 <종교개혁 시대의 독일사>를 냈으며 1847-1848년 <독일사(전9권)>, 1852-61년 <16-17세기프랑스사>, 1869년 <16-17세기 영국사>를 쓰는 등 왕성한 저작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일련의 역사서들을 통해 라틴족과 게르만족이 유럽역사의 주도적인 민족이며 프로테스탄트 계열이 점차 중요성을 점증시켰다는 점
을 지적했습니다. 그가 주로 연구한 것은 정치사였으며 경제적 사회적 요소는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랑케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점차 사회변화가 격심해지는 '현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의 저작들에서도 그가 처한 현대의 문제점들은 간략하게 넘어가는 자세를취했습니다.

그는 역사가란 본질을 추출하면서도 전체를 염두에 두고서 가능한한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때문에 그를 '분석가'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역사가들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자신을 '당파'가 아닌 '국가'와 동일시하여 객관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했습니다(하지만 이 대목에서 예리한 사람들은 '국가'라는 주관에 랑케가 몰입되었다는 점을 알 것입니다).

랑케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당대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명성을 널리 떨쳤습니다. 1865년 귀족이 되었으며(그의 이름에 들어있는 von은 귀족에게 붙는 호칭입니다) 1882년 추밀원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정책에는 반대했지만 1871년의 독일제국 성립에는 환영을 표시했습니다.

82세의 고령에 시력마저 상실한 그는 조수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의 가장 위대한 저서인 <세계사>를 저술했습니다. 전9권인 이책은 이름은 세계사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물론 유럽사였습니다. 그는 이책에서 평화로운 문화적 진보는 혁명의 위협에서 보호될 것이며 민중의 주권과 군주제 사이의 갈등은 결국 군주제의 승리로 끝났다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5. 랑케 그 이후

랑케의 역사관은 그후 독일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랑케의 제자들중 많은 수는 랑케의 객관성에 대한 훌륭한 의미보다 그의 한계를 더 잘 계승했고 랑케를 신성시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랑케는 그의 보수적인 가치관이나 국가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론으로써 제기한 '객관성'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역사가로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2-2. 실증 역사학

우리는 앞에서 랑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로써 역사가가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몰가치한 사료의 집성만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랑케도 인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랑케는 역사가가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그점을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실증사학을 몰가치한 사학과 동일어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 또한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실증사학이라는 것이 랑케의 역사학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런 역사학이 아직까지 화석화되지 않았는가라는 점을 먼저 짚고 가야 할 것입니다. 랑케는 19세기의 인물입니다. 경제학과 학생이라면 애덤스나 그의 저서인 <국부론>을 필히 한번 이상 들어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19세기의 위대한 경제학자의 이론이 아직도 살아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세운 개념 자체는 마치 수학의 공리처럼 되어 있습니다만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그 이후에 너무나 많이 발전한 형태로 바뀌어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예를 아리스토텔레스 -> 뉴튼 ->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 과학사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뉴튼의 법칙은 지금도 유효합니다만 물리학을 뉴튼이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랑케는 아직도 유효하지만 랑케가 역사학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역사학자들이 명멸했고 그때마다 역사학은 진보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21세기의 초엽에 있는 역사학도들에게 너희들은 19세기 랑케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부르짖는 것은 대단한 시행착오입니다.

사실상 문제는 실증사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정확한 개념도 없이 비판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만. 세분화해서 생각한다면 비판론자들이 말하는 실증사학이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랑케 사학과 동일한 것.
둘째, 실증주의와 동일한 것.
셋째, 한국사에 등장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게 역사적 방법론을 습득한 후 한국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역사학.

그렇다면 이 세가지를 각각 고찰해 보겠습니다.

2-2-1. 랑케 사학과 '실증사학'

여기서 말하는 실증사학이란 위에서 정의한 "오직 증거만을 가지고 역사를구성하는 '혼'이 없는 역사학"입니다. 그러나 랑케는 가능한 한 비평을 가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기본임무라고 했으며 역시 가능한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술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스스로는 주관을 배제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자신의 주관을 배제할 수 없었으며 그 스스로도 이점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가 19세기의 그에게서 배울 점은 사료는 철저히 검증받아야 한다는 자세인 것이며 그의 역사를 보는 관점, 즉 사관을 오늘날까지 유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유지하는
역사학자도 없습니다(그가 국가를 최고의 역사체로 본다는 점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랑케 사학은 지금 말해지는 실증사학이 아닙니다.

2-2-2. 실증주의

실증주의는 프랑스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에 의해서 형성된 철학 이데올로기입니다. 영어로는 positivism이라고 씁니다(실증주의 사학이라는 것을 영어로 어떻게 쓰는지 알면 도움이 좀 될텐데 저는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철학의 기본주장은 첫째 모든 지식은 실증적인 경험자료를 바탕으로 하며, 둘째 사실의 영역을 넘어서면 순수논리학과 순수수학의 영역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실증주의는 콩트와 밀의 '사회실증주의'와 마흐, 아베니리우스의 '비판적 실증주의'와 그밖의 '논리 실증주의', 후기의 '논리경험주의' 등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철학적인 것이며 하나의 사조라고는 할 수 있지만 역사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닙니다. 한 개인이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모두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단지 이름만이 실증사학과 비슷한 것이며 현실적인 인과관계는 전혀 없습니다.

2-2-3. 한국역사학과 실증사학

2-2-3-1. 한국역사학은 아직도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가?

이제 문제의 핵심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결국은 무어니무어니 해도 한국역사학의 '태두'인 이병도가 식민사학자이며 친일파이며 실증 사학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론자들은 말합니다(누가 이 사람을 '태두'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저는 여기서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굴곡되고 왜곡된(그리고 왜곡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역사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고대소설과 근대소설의 경계부분에 서있던 신소설의 효시인 이인직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작위까지 받은 인물입니다.

다음에 근대소설의 창시자이며 일제강점기의 가장 뛰어난 소설가로 평가받는 춘원 이광수는 도산 선생을 밀고하여 부귀를 누린 역시 대표적인 친일파요 매국노입니다.

또한 음악사에서 빛나는 별로 일컬어지는 김성태 역시 친일파입니다.

한국경제를 살렸다는 박정희 역시 친일파 중의 골수 친일파입니다.

한국역사에 있어 전분야에 걸쳐 친일파 매국노들은 포진해 있었습니다. 절대로 섣부른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시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이병도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해괴한 논리를 펼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픈 것은 다른 분야에서는 '확대재생산 이론'이 적용되지 않고 있는데 유독 역사학계만 이런 진정으로 해괴한 이론의 폐해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일 뿐입니다. '확대재생산 이론'이란 친일매국노학자들에 의해 식민사학이 계속 전승되고 있다는 비판론자들의 주장에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이론은 먹혀들리가 없겠지요? 지금 해방50주년을 맞는데 누가 교실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우리민족은 타율성론에 지배를 받아..."운운 하겠습니까? 이런 교육을 역사학자에게 받으신 분이 있다면 한번 말씀해 보세요. 때문에 비판론자들은 "일제의 식민사학은 그 이름을 실증사학에 감추고 있으며 그들의 교묘한 이론은 실증사학을 통해 계속 전파되고 있다"라고 주장하며 또한 "실증사학의 폐해는 일단 물들면 자신이 식민사학의 함정에 걸린 것을 모르게 되고 금과옥조로 그것만을 떠받들게 되는데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니 그럴 수 있을까요? 모든 학문의 시작은 물음표 곧 의문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기초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교수의 가르침에 의문을 표기하지 않는가 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학은 아무런 진전도 못했겠군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해방 50년 동안 한국의 역사학은 엄청난 변화를 했습니다. 지금 이병도의 학설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비판론자들은 때로 "강단사학계는 지도교수의 생각에서 어긋나면 학위를 주지 않기 때문에 틀린 줄 알면서도 지도교수의 이론을 따르기 일쑤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들이댈 수 있습니다. 이병도의 학설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논문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지도교수가 학생의 논문에 설복되어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2-3-2. 식민사학과 실증사학

식민사학에 대해서는 제가 이 게시판에 이미 올린 글(식민사관)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글을 읽어보신다면 실증사학의 정의와 식민사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실증사학과 식민사학은 동일시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이나 와세다대학,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일군의 한국사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병도, 신석호, 이선근(이상 친일파로 확실히 지목된 인물들), 이홍직, 이상백, 김상기, 유홍렬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친일파매국노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역사가는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과거의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근대서양의 사학계가 수립한 실증적인 역사방법론을 한국사에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편견을 극복하겠다고 했으나 이들 역시 당대 현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이들의 일부는 적극적인 친일에 앞장선 인물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역사인식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으며 그 한계는 식민사학 때문이기도 했고 당대의 열악한 연구환경 탓이기도 했는데, 비판론자들은 그것이 마치 실증사학의 한계인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초에 이러한 개념을 분리하려 하지 않았으며 매우 간단한 삼단논법에 의거해서 모든 사실을 유추했습니다.

1. 일제강점기의 사학자들은 식민사학자이다.
2. 일제강점기의 사학자들이 선택한 방법론은 실증사학이다.
3. 따라서 실증사학은 식민사학이다.

이들의 논리는 여기서 또 단순한 삼단논법으로 진행됩니다.

1. 실증사학은 식민사학이다.
2. 실증사학은 친일매국노에 의해 계속 교육되었다.
3. 따라서 사학과는 식민사학의 온상지이다.

여기서 전제 자체가 틀려있는 점들은 지적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분은 비판론자 논리의 모순을 파악했으리라 생각합니다.

2-2-3-3. 재야사서와 실증사학

그런데 또 한가지의 문제점이 남아있습니다. 비판론자들은 <환단고기> 등의 사서를 들먹이며 이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판에 박은듯 똑같습니다.

1. 우리 역사에 남아있는 사서는 얼마 되지 않는다.
2. 그것은 외세(당, 몽고, 일제)가 우리의 역사책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이다.
3. 보물처럼 남은 사서조차 식민사학인 실증사학에 물든 강단사학자들은 '무조건' 배척한다.

그들은 이 사서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실증사학에 물든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위의 논리에 따라 식민사학에 물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그런 주장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마치 화두처럼 문제만 던질 뿐이오, 정당한 비판의 소리조차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귀를 막은 채 대화와 토론의 길을 봉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재야사서의 문제점 및 그들의 사관, 삼국통일에 있어서 신라가 차지하는 의미 등, 상당한 양의 글을 올렸습니다만 아직까지 체계적인 반박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비판받은 논리에 대하여 아무런 방어조치도 없이 동일한 주장만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실제로 자국의 역사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세계 어느 나라이건 다 한가닥씩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런 역사인식이 지배적인 역사인식으로 자리잡을 때 세계사는 피로 얼룩졌던 것입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사서에 대하여 사료비판을 가할 경우 살아남기 힘들자 실증적인 연구방법론 자체가 마치 식민사학인 것처럼 오도하여 사료비판 자체에서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3. 글을 맺으며

우리는 이로써 비판론자들이 말하는 실증사학이란 역사학의 한 방법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코 이 방법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한국역사에서 일부 사학자들이 친일행위를 하고도 단죄를 받지 않았고 그때문에 마치 한국사학계 전체가 일제강점기의 역사인식으로부터 진전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비판론자의 오해가 있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며 역사학자들은 역사 속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노력은 한사람의 독주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화와 토론을 통해야만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한사동 회원 모두 알아주시기를 갈망합니다.

덧글

  • 孤藍居士 2005/08/15 09:57 #

    저는 이병도류의 실증사학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매우 탐탁찮게 생각합니다만(오히려 그 실증으로 연구한 결과는 '비실증'으로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욕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 초록불 2005/08/15 10:35 #

    저도 그렇습니다.
  • 총천연색 2007/09/14 09:01 #

    실증사학은 그런 것이군요. ㅇ_ㅇ
    좀 더 자세하게 공부해야겠습니다.
  • 초록불 2007/09/14 09:14 #

    총천연색님 / 오래된 글이라 지금 보면 고치고 싶은 부분도 좀 있군요...^^;; 에... 기본 개념 상에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 어릿광대 2007/09/18 13:45 #

    왠지 어려운 애기인듯하네요. 역사를 어느정도 안다고 자부하는데 님의 글을 보니 고개가 숙여지네요
  • 초록불 2007/09/18 16:30 #

    어릿광대님 / 20세기 중후반을 넘기면서 역사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바보 환빠들만 아니면 그런 이야기나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만...
  • 2008/08/22 20:3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8/08/22 20:38 #

    태그를 활용하면 간단한 일이었는데... 검색창을 이용해도 되고...

    네, 출처를 명기하고 인용하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 따뜻한 얼음집 2014/05/26 12:38 #

    안녕하세요 선배님. 한국사학사 수강중인 학생입니다. 제 무식함을 많이 깨닫고 갑니다.
  • 초록불 2014/05/26 17:46 #

    오래된 글인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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