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림토 문자와 한글 (96/03/14) *..역........사..*



안녕하세요? 이문영입니다.

가림토 문자와 훈민정음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글을 씁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가림토 문자와 훈민정음은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볼때 당시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떠한
문자체계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즉,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한자를 잘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가 어려우므로 "새로" 글자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코 있는 글을 개량했다고
하지 않았으며, 한자와 다른 문자체계가 있다는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정인지는 관계도 없는 설총의 이두까지 거론하고 있으나
참고했다면 가장 깊이 연관될 수도 있는 가림토문자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써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정인지의 서문 말미에 나오는 것으로 역시 분명하게
전대의 것을 본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세째, 한글이 가림토문자를 모방했다는 증거로 거론되는 것중
하나가 한글의 모양이 전자를 모방했다는 것입니다만, 이 경우
모방은 글자의 모양뿐이며, 이점은 정인지의 서문에도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합하여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이점은 뒤에 최만리가 올린 상소문에 나온다 해서 흔히 훈민정음이
가림토를 모방했다는 전거로 사용됩니다만 이때 정인지나 최만리
양인 모두 중국의 전자를 예로 들고 있을 뿐 가림토문자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전문을
뒤에 올릴테니 모두 읽어보면 오해의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째, 가림토문자를 알기 위해서 성삼문 등이 요동에 13차례 왕복했다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이야기로 당시 성삼문은 요동에 귀양와 있는 명의
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서 요동을 왕복했던 것입니다. 이는 훈민정음의
주목적 중 하나였던 올바른 중국글의 음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다섯쩨, 세종대왕 26년 2월 20일에 최만리등은 상소를 올려 언문제작의
불가함을 말합니다. 여기에 가림토문자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대목이
있다고들 합니다만 이 상소와 이로인한 세종과 신하들의 문답을 보면
훈민정음이 세종의 손에 의해 직접 만들어졌으며 순수한 창작품임이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강조는 제가 넣었습니다.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1.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
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1. 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胥吏)나 복예(僕隸)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였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結繩)하는 세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
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나 기회(期會) 등의 일에 방애(防碍)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베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
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右文)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변로지도(變魯至道)하려는 뜻으로서 오히려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1.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에 대한 옥사(獄辭)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
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寃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招辭)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1. 무릇 사공(事功)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先甲) 후경(後庚)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1.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玩好)는 대개 지기(志氣)를 빼
앗는다.’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含默)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소(疏)를 보고, 만리(萬理)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늙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細微)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니, 만리(萬理)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하온 것은 특히 문세(文勢)에 인하여 이 말을 한 것이옵고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결(參決)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하였는데, 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 상소에서 최만리는 표의문자인 한문과 표음문자인 한글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언문은 글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답에서 고조선의 가림토문자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비치고
있지 않으며 최만리 역시 훈민정음이 세종이 직접 만든 것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을 붙이고 있지 않습니다.

고조선 시대에 가림토문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가림토문자는 훈민정음과 연관이 없다는 것을 저는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림토문자가 있었다면 왜 살아남지 못하고 소멸되었는지는 연구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되는군요...

마포에서



"가림토"라는 말의 근원에 대해서 궁금하면 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 3 - 가림토의 진실 [클릭]을 참고하세요.
한글에 대한 각종 엉터리 이야기에 대해서는 한글날 특집 - 한글 떡밥 총정리 [클릭]를 참고하세요.

덧글

  • 功名誰復論 2004/10/16 01:05 #

    초록불님. 이 글을 http://fireblood.egloos.com/383234 와 함께 해서 미디어몹이란 곳에 올리고 싶은데 혹시 허락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한글이 가림토에서 나왔다는 글이 거기 올라와 반론 삼아 올릴까 해서 그렇습니다.
  • 초록불 2004/10/16 07:06 #

    예. 제 글 임을 명확히 해주시면 옮겨 가셔도 됩니다.
  • 초록불 2004/10/16 11:12 #

    미디어 몹에 가니 신대문자에 대한 내용도 있더군요. 그것에 대한 내용은 이 글에 나옵니다. ---
    신대문자는 한글을 모방한 것 (99/08/14) [2004-08-08 12:11:08 by 초록불]
  • 초록불 2004/10/16 11:53 #

    구자라트 문자가 가림토와, 또는 한글 창제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에 대한 글도 99년경에 쓴 적이 있습니다. 찾을 수가 없어서 새로 작성해서 올렸습니다. 참고들 하시기를...
  • 功名誰復論 2004/10/17 12:55 #

    예. 고맙습니다. 출처는 확실히 명기하겠습니다.
  • walnut47 2005/11/05 22:52 #

    관련글 남겨 주셨기에 들러 읽어보았습니다. 가림토 문자와 훈민정음과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셨네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초록불 2005/11/05 22:57 #

    walnut47님 / 제 블로그에서 가림토로 검색해 보시면 가림토 문자와 신대문자, 가림토 문자와 구자라트 문자의 관계도 알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기쁘네요.
  • 홍비홍신랑 2007/02/13 14:33 #

    아~~~이미 옛날 옛적에 이 글을 쓰셨군요...
    감사합니다......
    저 역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My_Pace 2007/10/16 19:07 #

    초록불님의 지식의 깊이에 혀를 내두르며, 오늘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세종대왕이 옛 전자를 모방했다는 건 글자그대로 믿으면 간단한데,
    환빠들이 온갖 해괴망측한 해석을 갖다대서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혹시 홍윤표 교수의 [훈민정음의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에 대하여]란 논문을 읽어보신 적 있으시나요?
    기회가 되시면 네이버에 한번 검색해서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개밥바라기 2007/11/01 22:34 #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요 구절때문에....;;
  • 초록불 2007/11/01 23:22 #

    My_Pace님 / 이런, 댓글을 이제야 보았네요. 좋은 논문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2400원 결재해서 읽어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유사역사아웃

구글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