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에 대한 간략한 정리 *..역........사..*



흔히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멸망과 연결시키는 당쟁.

사실 많은 오해가 있다. 간략하게 당쟁에 대해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정권을 쥐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쟁은 선조 때 동인, 서인이 갈라지면서 발생한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역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문제는 이조정랑의 임명을 놓고 일어난 문제다.
이조정랑은 조정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다. 인사권을 실제로 좌우하고 삼사의 여론을 움직이는 자리기 때문이다.

당시 이조정랑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다. 이때 심의겸이 반대를 했다. 또 뒷날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이 추천되자 김효원이 반대를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등을 돌렸고 동서의 붕당이 발생했다.
김효원은 신진사림이었고, 심의겸은 구사림의 대표주자였다.

그럼 신진사림은 무엇이고 구사림은 무엇인가?

신진사림은 선조대에 새로 관직에 나온 사람들이고, 구사림은 선왕 명종 대에 관직에 나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사림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진사림은 명종대의 난잡한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신진사림인 김효원을 옹호하는 이들은 동인이라 부르고, (고등학교때 김동인이라고 외웠던 생각이 난다.)
구사림인 심의겸을 옹호하는 이들을 서인이라 부른다.

이들의 대립은 사실 권력에 따른 것이지, 학문적인 대립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동인의 영수 허엽과 서인의 영수 박순이 모두 화담 서경덕의 문하라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끼리 모인 것이니만큼 스승이 같은 더 친한 사람끼리 붕당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동인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하가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가 많게 되었다.

동인의 유명인물로는 유성룡, 김성일, 이산해, 이원익, 이덕형, 정여립 등이 있고
서인의 유명인물로는 정철, 조헌, 윤두수, 이항복 등이 있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데, 알고보면 두 사람은 당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거기까지는 다루지 않는다. 간략한 정리기 때문에...)

동서로 나뉘긴 했지만 이들은 본래 모두 다 사림이라 불리는 동질성을 가진 집단이었다. 대체 사림이란 무엇인가?

사림은 사전적으로 보면 그저 사대부의 무리를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사림이란, 훈구파와 대립하는 정치 세력이다. 그럼 훈구파는 또 무엇이냐?

세조가 단종을 몰아낸 사건을 가리켜 계유정난이라 부른다. 이때 공을 세운 사람들은 다 공신으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공신으로 임명된 사람들이 이후 18년 동안 250명이나 배출되었다. 이들을 가리켜 훈구파라고 부른다.

그리고 훈구파에 끼지 못한 사대부들이 사림이 되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조는 세종이 기른 인력풀인 집현전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세조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재야에서 명망 높은 김종직을 불러들였다.

김종직, 그는 누구인가? (어째 패턴이 계속...-_-;;)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충신은 이군불사라는 말을 남기고 재야로 떠나버린 싸나이가 있었다.
그 이름하여 야은 길재.

길재는 김숙자라는 제자를 두었다. 김종직은 그 김숙자의 아들이다.
김종직은 세조-성종을 거치며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병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김종직의 제자들이 대거 관직에 등장하면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훈구파의 반격이 무오사화다.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세조가 키운 김종직이 알고보니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사초를 쓴 것이 무오사화의 발단이다.
훈구파는 이 사화를 통해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이목 등을 죽아고 정여창, 김굉필 등은 관직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사림의 기반은 매우 튼튼했다. 이들은 안정적인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공부만 하면서 버티는데 별 지장이 없었던 것 같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사림의 기반을 무너뜨린 뒤, 갑자사화를 통해 훈구파도 무너뜨렸다. 연산군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이렇게 적을 늘린 결과 훈구파의 대대적인 반격을 맞게 된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중종은 훈구파의 입김 아래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들의 간섭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했다. 그 결과는 사림의 대대적인 기용으로 나타났다. 김굉필의 제자였던 조광조가 관직에 나왔다.

조광조는 너무 도학적인 사람이었다. 조광조는 국왕도 가르치려 들었다. 중종은 조광조에 염증을 냈다. 훈구파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는 모두 죽거나 쫓겨났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단명하자 명종이 즉위했다. 명종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 외척인 윤원형과 윤임이 서로 싸웠는데, 사림을 비호하던 윤임이 졌다. 이때 사림은 또 한번 피해를 크게 입었다. 조선 시대에 외척의 발호는 이처럼 어린 나이의 국왕이 즉위했을 때 일어난다.

그러나 명종도 사림을 기용하기 시작한다. 명종이 성년이 되어 친정을 하게 되자 외척과 훈구 세력을 견제해야 했던 것이다. 이때 큰 몫을 한 사람이 바로 심의겸이다.

심의겸은 명종의 비妃 인순왕후의 동생이다. 그도 윤원형과 같은 외척인 셈이다. 다만 그는 사림에 무척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선조대에 관직에 진출한 김효원 같은 입장에서 보면 심의겸은 물러나야 하는 구세력에 불과했다.

명종 말년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자 훈구파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다. 윤원형이 치죄되고 훈구파는 역사의 뒤로 물러나게 된다. (윤원형의 소윤과 윤임의 대윤이 대립하면서 사림도 피해를 크게 보았지만 훈구파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훈구파는 계속 그 수가 줄어들면서 외척만 남게 되고, 결국 문정왕후의 물러남과 동시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점을 생각할 때는 사림파가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며 지속적인 인재풀로 남을 수 있었다는 점도 크게 고려해야 한다.)

그 2년 후 명종이 죽자 선조의 즉위와 함께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적수가 없던 사림은 정권을 위해 분열하기 시작했다. (절대반지는 한사람의 손에만 낄 수 있다.)
중국과 달리 조선은 환관이 정치에 개입한 사례가 없다. 이것은 중국과 같은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매우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환관이나 붕당은 똑같은 곳에 의존한다. 바로 국왕의 총애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지만 조선의 권력은 국왕에게서 나왔다.

주자는 인군위당설을 주장하여 임금도 당에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 군주 시대의 정당에 대한 정확한 이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국왕이 편드는 쪽이 이기는 게임인 것이다. 투표권을 지닌 것은 군주 뿐이라고 해야 할까?

동서로 사람들이 나뉜 다음 이이는 양당을 화해시키려 무척 노력했다. 이이의 제자들이 서인에 많다고 이이가 서인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이이는 양쪽에서 다 욕먹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선조는 이이를 무척 신뢰하고 있었다. 사실 이이를 동서 양당이 공격하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주자의 말에 따라(인군위당설)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겠다. 향후 이이와 성혼을 괴롭히는 자는 반드시 죄를 묻겠다."

그러나 이이는 곧 죽고 말았다. 선조는 두 당파를 저울질하며 왕권을 강화해나가고자 했다.

얼마 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다. 정여립은 동인이었다. 서인 정철이 이 사건의 조사를 맡았다. 정철은 기회를 잡았다고 날뛰며 천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 (이런 자의 사미인곡을 배우는 고등학생들이여...)

그러나 이 피바람 속에서도 동인의 이산해와 유성룡은 건재했다. 이산해는 정철이 세자를 책봉하려 한다는 정보를 흘려 그를 쫓아낸다. 이때 유성룡은 정철을 죄주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피바람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반대한다.

이 의견 충돌은 동인을 분열시켰다. 동인은 강경파 이산해의 북인과 온건파 유성룡의 남인으로 쪼개진다.
이들 남인은 대개 퇴계 이황의 문하였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되었기에 동인으로 분류된다. (동인 안에 남인과 북인이 있으며 이 당시까지는 동인으로 통칭되었다.) 반면 서인은 원균을 옹호하고 있었다. 이것은 훗날 북인이 작성한 [선조실록]과 서인이 다시 작성한 [선조수정실록]에 서로 다른 기술이 남는 원인이 된다.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제자, 남인은 이황의 제자로 성분이 비교적 단일했지만, 북인은 아웃사이더들의 집합체였다. 이것은 북인의 결집력 약화에 한몫을 했고, 뒷날 마구 분열하다가 결국 정권을 말아먹는 이유가 된다.

북인은 대북, 소북으로 나누어지고 대북은 골북, 육북으로 쪼개지고, 소북은 탁소북, 청소북으로 쪼개진다. 이렇게 여권이 분열했으니 정권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이 이외에도 중북 등도 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자 사림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은 중종을 빼고 진행된 반정이었지만, 인조반정은 인조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이루어졌다. 인조 편에 선 사람들은 이항복의 문인들이었다. 서인이 정권 탈환에 나선 것이다.

서인은 북인과 달리 정권을 혼자 말아먹으려 하지 않았다. 남인에게도 자리를 주어 불만을 달래는 숨구멍을 열어놓는 지혜를 깨우친 것이다. 이 서인과 남인의 공존 정국은 그후 세도정치로 파행이 올 때까지 유지된다.

당쟁의 배후에는 항상 국왕이 있었다. 이 점을 망각하지 말자. 특히 후대의 인조의 정원군 추숭논쟁이나 현종 대의 예송논쟁도 국왕이 그 핵심에 있었다. 당쟁은 투표권을 지닌 국왕의 환심을 사야 하는데 기인한다. 현명한 국왕은 이것을 이용해서 정권의 견제에 이용할 수 있었다.

뒷날 서인의 세력이 비대해지자 국왕들은 견제세력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남인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남인은 숙종 때 갑술환국으로 몰락하고 만다.) 또한 서인은 남인에 대한 강경파 송시열의 노론과 온건파 남구만의 소론으로 분열한다. 영조때 소론은 노론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한다. 그러자 정조는 홍국영이라는 측근을 이용해 보기도 한다. 정조는 외척을 배격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권력을 국왕에게 돌리려 노력하지만 불행히도 급사를 하고 만다.

정권은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에게 넘어갔다. 즉위한 순조가 11세의 소년이었던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세운 모든 질서를 무너뜨렸다. 정조의 친모 혜경궁 홍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정조 개혁의 핵심인 장용영을 혁파하고, 정약용 등을 쫓아냈다.

그러나 그녀의 권세도 순조가 친정을 하게 되면서 바로 끝장이 났다. 마치 대원군이 고종의 친정과 동시에 끝장난 것처럼. 그리고 정권은 순조의 처가인 안동 김씨로 넘어갔다. 한번 외척이 권력을 휘둘렀으니, 이제 외척의 발호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가뜩이나 인재 풀이 줄어들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또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했다. 세도정치는 이제 막기가 참 어려워졌다. (사람이 있어야 뭘 하지...)

순조의 세자였던 효명세자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무척 노력을 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고, 그 뒤를 이은 세손은 8세였다. 정권은 안동김씨 출신의 대왕대비 손에 들어갔다.

효명세자는 풍양조씨와 결혼했다. 그래서 안동김씨 출신 대왕대비가 죽은 후 정권은 풍양조씨가 흔들었다.

풍양조씨와 안동김씨가 대립할 때는 그나마 정권이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철종의 즉위를 계기로 풍양조씨는 몰락했다. 이 시기에 조선의 제도는 결정적으로 문란해진다. 1862년 진주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은 전국을 휩쓸었다.

조선의 황혼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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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페로페로 2006/02/12 05:24 #

    알기쉽게 정리해 주셨군요, 그동안 상당히 복잡했었지요 이해하기가. 아무튼 엉뚱하게도 당쟁을 국난의 원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참고로 전 정철 = 투견 으로 봅니다. 얼마나 비슷한지~ ^^ 쉿쉿 하며 정적들을 물어 죽일때는 꼬리를 흔들며 크르릉 거리고는 정작 우리에 가두어 두고 관심밖으로 밀려나자 꼬리를 감고 고개를 푹 숙이며 낑낑때는 모습이 정말 비슷하다고 느꼈거든요.
  • kunoctus 2006/02/12 10:21 #

    정치적 대립 (사실상 권력투쟁)을 우아한 투쟁으로 묘사하고 픈 누군가가 교과서 작성에 참여했었나보군요. (설레 설레
  • 초록불 2006/02/12 10:26 #

    군주국가의 몰락은 권력이 능력이 아니라 신분에 의해 독점될 때 일어나죠. 중국의 경우는 환관과 외척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게 일반적인 패턴이라고 할만큼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경우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죠. 특히 조선은 외척을 엄청나게 견제했어요. 태종이 세종의 처가까지 도륙한 이야기는 유명하죠.
  • 슈타인호프 2006/02/12 10:51 #

    명문이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 joyce 2006/02/12 11:21 #

    멋진 요약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Aokizz 2006/02/12 11:50 #

    밥그릇싸움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이 있군요.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던 문제인데..;
    하나의 세력이 전횡을 하기 시작하면 국왕이고 뭐고 없겠죠. orz
    여태까지 배워온걸 생각하면 입맛이 좀 쓰군요.
  • damekana 2006/02/12 12:24 #

    정말 알기 쉽게 정리해 주셨군요. 공부 많이 되네요. 정철에 관한 건 전혀 몰랐던 탓에 약간 쇼크였습니다. 허...
    확실히 중국은 환관이나 외척이 망쳐놓은 판에 반란세력이나 침입해 온 이민족이 쐐기를 박는 패턴이 많았던 듯 하군요.
  • 초록불 2006/02/12 12:40 #

    damekana님 / 중국의 경우 왕조가 망하기 전에 수취제도의 붕괴 -> 농민봉기 -> 군벌세력의 등장 -> 왕조 교체의 수순을 밟는 경우가 많습니다. 농민봉기 세력이 왕조를 개창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전혀 없을 겁니다.), 그것은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농민봉기를 진압하며 성장하는 군벌세력들은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방토호들이거든요.
  • 치오네 2006/02/12 22:55 #

    와, 깔끔한 정리입니다.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읽고 머리 속에 제대로 정리해놔야할 것 같아요. ^^
    중국사에서 농민 봉기는 또 종교하고 관련이 된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농민 봉기는 다른 군벌 세력의 성장을 불러일으켜 새 정권을 만들고요. 지금 중국에서 파룬궁을 미친듯이 밟는(;;) 이유가 그거라 하더군요.
  • damekana 2006/02/12 22:56 #

    새로운 왕조가 성립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주원장집단이 처음에는 농민반란 세력으로 출발했다가 곧 토착지배층과 결합하여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는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네요. 단지 제가 쐐기를 박는다고 한 것은 반드시 왕조교체로 이어진다는 의미는 아니고 슬슬 망조가 보이던 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려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게 된 후에는 뒤이어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경우도 있고, 혼란상태가 몇 백년 지속되는 경우도 있지요.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이 팔왕의 난으로 망해 버린 경우 같은 것은 지배층 일부가 중심이 된 반란세력과 이민족의 침입(원인제공은 역시 이 반란세력)이 함께 작용한 사례가 되겠군요. 그리고 나서 강남에 동진이 명목상 서진의 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후 몇 백년 간 계속 혼란기였지요. 쓰고 보니 이게 유일한 예인 것 같기도 하군요....-.-;; 게다가 어째 완전히 삼천포로 빠진 느낌도...-_-
  • 초록불 2006/02/12 23:16 #

    치오네님 / 감사... 전공자들한테 이런 이야기 들으면 민망하지만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 (알고보면 속물이에요...ㅠ.ㅠ)

    damekana님 / 맞는 말씀입니다.
  • toonism 2006/02/13 00:56 #

    와, 정말 깔끔하게 정리하셨네요. 많이 배웁니다.
    몇 번 더 읽어서 확실히 숙지해 놔야겠군요.
  • honest 2006/02/13 16:12 #

    근데 이조정랑이 아니라, 이조전랑 아닌가요? 정랑은 모든 6조에 있었던 것이고, 전랑은 이조에만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수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야겠다 싶어서요.)
  • 초록불 2006/02/13 16:32 #

    honest님 / 아닙니다. 정랑은 6조에 모두 있었습니다. 정랑 밑에는 좌랑이 있는데, 이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을 합해서 전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조와 병조의 경우를 특별히 따로 다룬 것은 이들이 문관과 무관의 인사를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랑은 정5품, 좌랑은 정6품의 벼슬이었습니다.

    심의겸, 김효원 이야기가 나올 때 정랑과 전랑이 혼재되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혼동하신 모양입니다.
  • 알레프 2006/09/24 17:05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초록불 2006/09/24 18:29 #

    알레프님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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