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에 대한 모함 *..역........사..*



이병도에 대해서 [재야=유사역사학계]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를 즐긴다.

친일파 이병도가 죽기 전에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다.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해왔음을 반성했다.

이 말은 좀 지나자 이렇게까지 변했다.

친일파 이병도는 죽을 때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짜다라고 말했다.

그 회개의 증거로 삼고 있는 것이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라는 것이다. 이병도가 이 글에서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학문적 성과를 모두 부인하고 회개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정말 한국사람이라고 다 한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이병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병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병도의 학설에 민족주의적인 관점이 꽤나 많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만 예로 들자. [재야]에서는 꽤나 오랫동안 위만이 조선인이라고 주장했다. (윤내현 학설을 따르는 재야가 등장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그런데 위만이 조선인이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바로 이병도다. 위만조선인설에서 주장하는 모든 근거가 이병도가 최초로 주장한 것에 기인하고 있다. 적의 칼로 적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재야]에 빠진 인간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또한 이병도는 자신의 권위로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한 것들이 여럿 있다. 가령 중원 고구려비의 연대를 꿈에서 봤다고 지껄인 것 같은 것 말이다.

아무튼 내가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하지도 않은 말로 욕먹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잖은가? 그러니 좀 따져놓기로 한다.

그럼 이병도가 조선일보에 기고했다는 글이 뭔지, 우선 그 전문을 보자. (매우 길고 재미도 없는 글이므로 관심없는 분들을 굳이 보지 않아도 별 상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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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

-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천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을 군장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은 즉 「군장을 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 건국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은 즉 최고 시조인 단군의 즉위와 개국을 의미하는 개천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제1권의 「고조선(왕검조선)」조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 신단수하에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하고 그를 환웅천왕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풍백(풍신) 우사(우신) 운사(운신)의 삼신을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형 주선악등 무릇 인간삼백육십여사를 주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관념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환웅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군장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백사를 주관하는 수호신적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수호신의 주처住處는 곧 신단수로 이것은 지금 민속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선왕당(仙王堂 서낭당)은 즉 천왕당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신단수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신단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신단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신시였던 것이다.

신단수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수목숭배)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목자체가 신 그것이었는데, 그후 변천하여 신단수는 천신 천왕의 강하계단, 혹은 천왕의 주처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국호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아사달)이 정작 국호였고 조선은 후에 이르러 「아사달」을 아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논문집(사회과학)제2집에 「아사달과 조선」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고기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고기에는 웅熊이 여신女身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이는 웅(곰) 토템족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연래 주장해 오고 있다.

즉 웅을 신성시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상족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 천신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개천절이라 하여 단군의 개국일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시월절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시월절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신인공락)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절제(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락종(하종)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신에게 년사의 풍등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의 제전을 오월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에게 제사하고 가무와 음주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이 동락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단오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시월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신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시제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오월제 시월제의 유풍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상,고,산,신 등을 의미하는 고어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여의 영고제, 고구려의 동맹제, 동예의 무천제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연등대회, 팔관대회도 춘동이기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중동팔관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고속을 갱생시켜 이로써 단군입국의 개천절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 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정족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불안정감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두계잡필(斗溪雜筆)」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현정회이사 이희수(李喜秀) 씨가 1977년 10월 「현정지」에 「사서상에서 본 국조단군」이라는 제목하에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지금은 없어진 「고기」와 「구삼국사기」와 현존 위서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의 단군기사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사대의 입장에서 기술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사기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기재를 제외하였지만 동서 권십칠 고구려본기오 동천왕 이십일년 춘이월조에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惑云王之都王儉」이라고 하였다(惑云이하의 王之는 왕노릇을 하였다는 동사로 읽어야 하고 「都王儉城의 都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王之都王儉」이라고 연서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黃城(皇城, 즉 丸都城)의 對岸인 東黃城(今 강계)인 것이다. 지금의 평양에는 아직도 이때 낙랑군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仙人王儉之宅」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양(지금의 평양)의 지칭이므로 전후자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평양은 다른 곳

김부식과 같은 사가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古聖箕子之宅이라고 하지 않고 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한 것은 김부식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양이 선인왕검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외사서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양을 왕검성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고기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史記 地理 誌高句麗條에서 古記云朱蒙自夫餘逃難至來本則紇升骨城 ②史記 志一 祭祀條에서 「古記云溫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 ③史記 列傳 金庾信上에서 金春秋가 講和하려고 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此與本言眞平王 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傳故兩存之」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고기에는 단군기사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에 김춘추가 갔던 서기 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부식이 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이십일년서 이월조에서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택」이라고 한 것은 역시 고기이거나 단군기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육촌도 조선의 유민이 산간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 권제일 신라본기 제일에 보면 「始祖姓 朴氏‥卽位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先時 朝鮮遺民分居 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이 인용한 고기의 단군기재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이 평양이 선인(단군)왕검의 택이라고 명기한 데서 고기가 단군기사를 실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연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를 들먹여서 단군기사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묘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世年歌)에 의하여 단군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무신6월조에 유관(柳寬)의 상서를 보면 문화현(文化縣) 구월산 동령 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벽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문화현 사람들은 이를 삼성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성당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관은 그 상서중에서 「구월산은 현의 주산이던 단군조선 때에는 아사달산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에 와서 궐산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문화현을 궐구현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고려때에 유주감무로 하고 후에 또 문화현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궐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구월산이라고 부른다.

두 수의 시에 나타나

문화의 동쪽에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의 도읍지라고 한다‥」하였으며 「구월산하에는 환웅을 남면으로 모시고 동서향으로 환인과 단군을 모신 삼성당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이 입도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세종18년 병진 12월정해조 유사눌(柳思訥 유관의 조카)의 상서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土良)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基歌曰亨國一千四十八至今廟在阿斯達則등無所처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存與世年歌合」.

이로써 보면 고기 단군기 외에 가사 형식으로 된 단군기사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세년가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단군기재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유사눌은 한성부사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신이 단군세년가를 보니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몰함에 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쨋든 조선세종대까지 단군세년가가 남아있었고 식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류관의 상서에 따르면 삼성당은 황해도 구월산 동령에 있다. 류관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로들로부터 단군사적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삼성당에 환웅천왕을 상좌에 모셔서 남면하게 하고 동벽에는 환인천왕을 모셔서 서향하게 하고 서벽에는 단군천왕을 모셔서 동향하게 하였다고 한다. 삼성당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문헌비고 권64 찰고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셨으며 춘추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13년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지의 말에 좇아서 구월산에 삼성묘를 세우고 평양의 단군묘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권42 문화현사 묘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사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1 평낭조」에 보면 두 수의 시를 통하여 「개국한 지가 멀고 먼 단군은 조선시조이다. 단군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요와 함께 개국하였다고 들었으니 거금 사천년이며 단군묘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체사상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를 세우고 제사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국조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때 새 사당 지어

문헌비고 권13 여지고1 역대국계1에서는 단군조선국을 첫머리에 싣고 유사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백악은 지금의 문화현이며 구월산의 본명은 궐산인데 단군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궐산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궐산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구월산의 장당경은 또 장장평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사은주부 정척(鄭陟)의 상서에 의하면 「평양의 기자사당에 가보니 기자의 위패는 북쪽에 있어서 남향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서향하였다. 신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당요와 같이 입국하였고 기자는 무왕의 명으로 조선에 봉하여졌으니 제왕역년수로 보더라도 제요에서 무왕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기자가 북향하여 남면하고 기자보다 앞서서 입국한 단군을 동쪽에 배향하는 것은 입국전세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신이 본조의 제사의식을 고찰해보니 단군제의 진설도에 이르기를 「신위는 당의 중앙에 모셔서 남면토록 되어있으며 신이 기자사에서 본 서향의 좌는 진설도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기자와 나란히 남향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상좌에 기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입국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기자사당인데 단군을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단군사당을 지어서 단군을 남향하게 하고 제사를 받들면 사의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찰조에 명하여 정척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기자보다는 상위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단군의 제향이 끊어진 것은 일제 때부터였다고 본다.

단군조선 연구 숙제

삼국유사의 단군기재는 타서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일연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도 김부식의 인용고기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고기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김부식도 선인왕검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에는 단군사기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단군의 세년가가 전하여져서 많은 식자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단군의 사묘제천단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향단군진설도가 세전되어 왔고 그것은 단군제의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조의에 의하여 건묘 봉제사했던 것이다. 만일 단군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기재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서 단군기재를 제외한 것은 김부식의 사대적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부여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위 글을 아무리 자세히 읽어본들, 기존의 자신의 연구가 잘못 되었다거나, 그를 반성한다, 회개한다 등등의 문구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그동안 연구해온 결과를 자랑스럽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대체 [재야]의 사람들은 이 글에서 무엇을 본 것인가? 이병도를 욕하는 거야 개인자유겠지만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혹시 이 글에서 뭔가 보이시는 분은 내게도 좀 알려주시길...

추가 : 이병도가 이완용의 사촌 또는 조카, 손자뻘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두 사람이 같은 우봉이씨인 것은 맞다. 하지만 5백년 전에 갈린 사이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문제다.

[브레이크 뉴스]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반박문 [클릭] 2005년 11월 15일자

부정확한 정보로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것은 진실을 알아내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추가 : 이병도가 이완용의 관뚜껑을 불사른 사연 [클릭]

추가 : 이병도의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 근무에 대한 평가를 말송보화末松保和(스에마쓰 야스카즈)는 뭐라고 했던가?
악질식민빠님의 포스팅 [클릭]


추가2 : 그래도 이병도는 일제 학설을 고대로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몇가지만 더 써놓는다.

일제식민사학자의 대부 격인 금서룡은 훈요십조가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서 그런 증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일제 시대에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어독본에는 김정호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지도를 만들어 대원군에게 바쳤다가 고문을 당하고 옥사했다고 적었다. 이 이야기는 하도 유명해서 여러분도 한 두번 들어봤을 것이다. 이병도는 이 설을 반박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김정호가 핍박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추가3 : 이병도가 지은 국사대관(1957)을 구해서 조선일보 기고문과 비교해보았다. 그 충격적인 결과를 감상하시라.
이병도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뭐라 말했는가? [클릭]

추가4 :
이덕일은 자신의 책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의 107쪽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한국 학자 중에서는 이병도가 이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한국고대사연구] '낙랑군고'에서 수성현에 대해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썼다. 낙랑 수성현의 遂자와 황해도 수안의 遂자가 같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가 이런 비실증적인 주장을 한 이후 낙랑 수성현은 황해도 수안으로 둔갑했고, 이곳이 졸지에 장성의 기점으로 변했다.

그럼 사실을 알아보자.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에서 뭐라고 하고 있는가? 원문은 한자를 그냥 쓰고 있지만 읽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한자음을 부기한다.

(6)수성현遂成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黃海道 북단北端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比定하고 싶다. 수안遂安에는 승람산천조勝覽山川條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山名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소축後代所築의 성城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東西行城의 석성石城(고산자古山子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이를 패강장성浿江長城의 유지遺址라고 하였다)이 있고, 또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孟浪한 설說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記載도 있다. 이 진장성설秦長城說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遼東山」이란 명칭名稱과 어따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附會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記事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博英社, 1976, 148p.)

보다시피 이덕일이 말한 것처럼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쓴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낙랑 수성현의 遂자와 황해도 수안의 遂자가 같다는 이유 때문이다."라는 말은 근거가 없다. 이병도는 그런 이유는 들고 있지 않다. 또한 이병도는 수안이 장성의 기점이라는 설에 대해서도 "맹랑한 설", "그릇된 기사"라고 그 사실을 명백하게 부정하고 있다. 이덕일은 까막눈이란 말인가?

이것은 이덕일이 이병도의 논문을 읽지도 않고 엉터리 이야기를 썼거나, 읽고도 고의로 왜곡했다는 이야기다. 

재야사가 임승국도 똑같은 구절을 가지고 이병도를 비난한 바 있었는데, 임승국의 비난의 초점이 이덕일과 다른 방향에 있다는 것을 알면 매우 재미있다.

그는 동서 제이편 한사군의 연구에서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예의 반도사관의 발작으로 「황해발 북단에 있는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p.148) 했다.
분반대소噴飯大笑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이는 말일것이다. 그는 동서同書에서 계속해서 발작하기를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孟浪한 설說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記載도 있다. 이 진장성설秦長城說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遼東山」이란 명칭名稱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附會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記事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동서同書 p.148)
사학에 뜻을 둔 사람은 차치하고 차라리 삼척동자에게 물어보자. 중국정사의 기록을 「맹랑한 설」「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우겨대는 사학자의 정신파산행위가 「맹랑하고」「 터무니 없는」것인가 아니면 중국사의 직필이「맹랑하고」「 터무니 없는」것인가?  (임승국, [이병도 저 「한국고대사연구」를 논박한다] 中, 「자유」76년 8-9월호 p.45~46)


위에서 보다시피 임승국은 이병도가 수성현에서 만리장성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부인한 것을 공박하고 있다. 왜냐하면 임승국은 수성현을 요서 지방에 비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병도가 저 기사가 그릇된 것이라고 하면 자기 주장에 흠집이 생기기 때문에 중국 정사의 기록이 맞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임승국은 황해도 수안을 수성현에 비정하는 것 자체를 문제로 삼고 있을 뿐이지, 이병도가 만리장성이 수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30년 전에 나온 재야사가보다도 독해력이 떨어져서 저런 망발을 자랑스럽게 자신의 책에 실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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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라 욕하면서 그가 단군과 고조선을 부정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회개의 글을 조선일보에 발표(1986년 10월 9일)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 글의 전문은 이병도에 대한 모함 [클릭]에서 읽을 수 있다.) 과연 그랬을까? 한번 1957년의 이 책을 가지고 그 점을 살펴보자. 사실 조선일보 기사에는 단군의 실재 여부에 대한 내용이 없다 ... more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의혹 - 이병도와 단군 2007-10-01 09:14:37 #

    ... 면서도, 이 점에 대해서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재야가 날조하는 이병도가 참회했다는 조선일보 기고문도 알고보면, 자화자찬의 기고문일 뿐이니(이병도에 대한 모함 [클릭]) 이병도가 단군을 극력 부인했다는 그런 일방적인 재야의 말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는 아닐까? 이런 의심을 하게 된 것은 며칠 전 헌책방에서 [국사 ... more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이덕일의 모함 - 만리장성의 기점이 수안현? 2008-01-09 10:28:56 #

    ... 실증 증거는 나온 바 없기 때문에 국내 학계는 압록강 이북의 연진장성만 인정하고 있다.) - 이 글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곡학아세란 무엇인가?와 이병도에 대한 모함에도 넣어둔다. 이 사실에 대해서 알려주신 공석님과 악질식민빠님께 감사드린다. ... more

  • 초록불의 잡학다식 : 다윈과 이병도 2008-02-27 00:55:56 #

    ... 10월 6일 (오마이뉴스는 기고문이라고 해도 이런 거짓말을 실은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단군을 인정했다는 말에서 더 나가 [환단고기]를 믿어야 한다고 말했단다. 이병도에 대한 모함 [클릭] 비논리의 끝은 거짓말이다. 동서고금 예외가 없다. ... more

  • 11th fear : 재야사학의 추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2009-01-17 14:50:45 #

    ... 5</a>] 상황을 가정해서 설명하자면 흡사 이런 것과 같다. 히틀러가 살아있으며, 그가 지구 공동에 숨어서 UFO 를 만들고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자기 신념의 근거로 내미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다. 대체 그 책이 무슨 원리로 그가 내세우는 헛소리의 근거가 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책이 근거라고 굳게 믿는다. 누군가 비판한다. ... more

  • 야스페르츠의 墨硯樓 :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2010-03-28 16:35:50 #

    ... 해서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초록불 님께서 택도 없는 소리임을 확실하게 증명했던 바 있지만, 여전히 세간에 떠돌고 있는 모양이다. (초록불 님의 논파 : http://orumi.egloos.com/2462275) 엄밀하게 말해서 초록불 님의 저 글은, "논파"라고 말할 것도 없는 지극히 명징한 사실의 전달이다. "이러이러한 신문기사에 이병도의 ... more

  • m1a1carbine's 방치된 북극비행장 : [추환 해부] 1화)성지 훼손 2010-07-04 20:19:47 #

    ... 이 《조선사》 편찬 사업에 참가하면서 각종 사료에 손댈 수 있었던 점에 있다 하겠다.--출처.엔젤하이로-- 위키에서 긁어온 제 졸렬함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http://orumi.egloos.com/2462275뭐 이정도면 이병도가 까이는 거에 대한 반박이 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육두문자까지 써야될 매식자 인증을 당했지만 전 딱히 역사학자도 박사학위 딴 사람도 ... more

덧글

  • 얼음칼 2006/06/01 17:55 #

    그래도 이병도의 한국사신론은 처음으로 역사를 그나마 역사 답게 쓴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었습니다. 사실 교과서나 참고서 말고는 한국사에 대한 책을 읽은 건 그게 처음이었지만 말입니다.
  • 페로페로 2006/06/01 17:56 #

    그 사람들 자기들 말에 유리한 것만 눈에 들어오고 나머지는 무시합니다, 자기들 말을 위해서라면 모략과 조작도 서슴치 않죠. 그것을 비판하면 친일파 내지는 어용 학자들의 개라고도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들은 쓰래기 먹는 하이에나 들입니다. 아니 이런말이 하이에나 들에게 누가 될 정도 입니다.
  • 좌백 2006/06/01 18:04 #

    읽어본(매우 재미 없군요...-_-) 제 추측은...

    '재야'는 그동안 이병도가 무슨 주장을 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자기들이 하는 주장을 사실은 이병도가 시작한 것인줄도 모르고 그냥 이병도는 친일파고, 식민사학자는 단군을 인정할 리 없다고 씹다가 '단군은 신화가 아니다'라는 입맛에 딱맞는 주장을 하자 회개하고 단군을 인정하게 됐구나...하고 이해했나 보지요.

    소위 재야 쪽 주장을 들어보면 사실은 일제하 식민사관으로부터 시작된, 혹은 만들어진 주장을 그런 줄도 모르고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있는데...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입맛에 맞는 것들만 파고드느라 만들어진 독학의 폐해인 것 같습니다.
  • 초록불 2006/06/01 18:31 #

    얼음칼님 / 말씀하신 [한국사신론]은 이기백 교수가 쓴 것입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페로페로님 / 사냥은 하이에나가 하고, 사자가 종종 그것을 빼앗아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하이에나에게 누가 되겠습니다...^^;;

    좌백님 / 그런 것 같습니다.
  • sharkman 2006/06/01 19:19 #

    사자와 하이에나. 제가 내셔널 지아그래피에선가 그 에피소드를 본 기억이 나는군요. 정말 하이에나 무리가 사냥해 놓은 먹이를, 장엄한 갈기를 늠름하게 휘날리며 접근해 온 사자님하가 꿀꺽...
  • 이준님 2006/06/01 21:24 #

    1. 일부의 경우 일제가 엄연히 "지나"로 부터 "만주"를 뺏는 것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들을 버젓히 "우리가 만주를 찾아야 하는 이유"로 둔갑시키는 경우도 있죠, -_-;;;;

    2. 이병도, 이완용 조카 혹은 친척설은 제가 알기론 역XX평쪽에서 개최한 친일파 관련 세미나에 나온 이야기가 최초였습니다. 주인공이 이병도는 아니었고 이완용이나 송병준을 대표해서 구한말 을사오적으로 대변되는 초기의 관료 친일파 이야기를 한건데 그 세미나 주제 발표후 질문에 그 이야기가 나왔죠.

    그 질문자의 요지가 "유명한 모 역사가"(이병도)가 이완용의 행각을 부끄러워해서 이완용의 유품중에 서화를 구매해서 불태워 버린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죠. 하기야 "이완용이 며느리랑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버젓히 하는 수준의 강좌였답니다. -_-;;;

    ps: 1944년 유타 해안을 거닐었던 장군이 TR의 아들인지 FDR의 아들인지 헷갈리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는거나 같은 이야기이죠 -_-;;;;
  • 초록불 2006/06/01 21:44 #

    이준님님 / 추신에 달아놓은 이야기는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습니다...^^;;
  • 愚公 2006/06/01 23:31 #

    1944년 미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는데 지휘관 중 '루스벨트'가 있었습니다.
  • 초록불 2006/06/01 23:36 #

    愚公님 / 그렇군요. 영문약자를 보면서 그런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느쪽 아들이었나요?
  • 슈타인호프 2006/06/02 00:48 #

    디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들이었죠.
  • 초록불 2006/06/02 00:53 #

    슈타인호프님 / 난 여태 그 대통령을 테오도르 루스벨트라고 읽었는데, 브리태니커에는 시어도어라고 나오는군요. th 발음이니 시어도어나 디어도어라고 읽는 건가 봅니다. 에구에구, 창피해라.
  • 슈타인호프 2006/06/02 01:09 #

    독일식으로 읽으면 테오도르 맞습니다 뭐~~^^
  • 슈타인호프 2006/06/02 01:10 #

    아참, 근데 전 이 포스팅 읽을 때 처음에 "이영도에 대한 모함"이라고 제목을 잘못 읽고 들어왔습니다--;;
  • nautes3 2006/06/05 01:09 #

    한번씩 놀러와주셔서, 저도 다녀갑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지만,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므로...
    몇 마디만...역사는 사상, ~~~주의의 시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포함할 수 있는 더 큰 카테고리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염두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학문이라는 것을 항상 자각하셔서 사상적인 측면의 비판이 아닌 객관적인 사료 중심의 비판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해두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 nautes3 2006/06/05 01:13 #

    최근에 있어서 가장 좋은 예는 이종욱선생님과 그 반대되는 주류(?)학계의 문제가 있습니다. 좁게 말하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긍정이냐 부정이냐의 문제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긍정의 민족사관, 부정의 식민사관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것은 서로의 학문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집에서 나오는 비난에 가깝습니다.
    역사는 학문이므로 비난이 아닌, 객관적인 자료를 통한 비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고, 사상적 문제는 그 후에 다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초록불 2006/06/05 01:20 #

    nautes3님 / 옳은 말씀입니다. 그것이 역사학을 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 깐돌이 2007/09/17 08:22 #

    이병도는 이 설을 반박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김정호가 핍박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 맞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대동여지도가 남아있는데 김정호가 핍박받을리는 없죠. 목판이 다 남아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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