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번역 *..역........사..*

대청국 성황제의 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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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국 숭덕 원년(1636년) 겨울 12월에

어질고 너그럽고 그리고 온화한 성황제는 화평을 깬 것이 우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크게 성을 내어 위엄있는 군사를 이끌고 내림(來臨)하여 동녘을 향하여 불 붙듯이 진군하니 아무도 두려워서 대항하지 못했다. 그때에 우리의 임금은 남한에 자리를 정하고 두렵고 겁이 나서 봄얼음을 밟고 날밝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내기를 50일, 동남 제도의 우리 군사들은 속속 격파되었고 서북방의 장군들은 산골짝에 피해서 멀리 후퇴한 뒤에 한 걸음도

앞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성내의 양곡도 모두 떨어졌다. 그때 청의 대군이 성을 탈취하기란 찬 바람에 가을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일처럼, 화염에 깃털을 태우는 일처럼 쉬운 일이었다. 성황제는 살생하지 않는 것을 가장 큰 덕으로 여겨 전유(傳諭)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 여겨, 황지(皇旨)를 내려 깨우치기를, "항복해 오는 경우에는 옛처럼 온전케 할 것이나 항복하지 않으면 파멸시키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영아이대, 마복탑 등 여러 장군들이

성황제의 황지를 받들고 전하고자 찾아오매 우리의 임금은 문무 여러 대신을 소집하여 이르기를, "내가 대국을 향하여 화친을 맺은지 10년이 되었다. 내가 무지하고 어두워 하늘의 정벌을 서두르게 하여 만백성이 우환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 죄는 내 일신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황제는 차마 살생치 못하여 이와 같이 깨우쳐 주시니 내 어찌 감히 사직을 온전케 하고 백성을 보호할 황지를 받들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칭양(稱揚)하며 복종하니 임금은 수십 기를 이끌고 청군 앞으로 와 죄를 받으려 했다.

성황제는 예를 갖추고 인자하게 대하며 은혜를 베푸사 무양(撫養)하며,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수행한 대신들 모두에게 은혜로운 상이 돌아갔다. 예를 행한 뒤 즉시 우리의 임금을 도성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즉시 남쪽으로 떠났던 군사들을 철수시켜 서쪽으로 물러나며 백성들을 무양하고 농사룰 권장하니 가깝고 멀리 떠나갔던 백성들이 모두 돌아와 다시 살게되었다 이 아니 큰 은혜인가?

소국(우리나라)이 상국에 죄 지은지 오래이다. 기미년(광해군 11년, 1627년)에 도원수 강홍립을 명나라에 원군으로 파견하였다가 격파되어 나포되었으나

청 태조 무황제는 다만 강홍립 등 몇 사람만 억류하고 모두 되돌려보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음에도 소국은 다시 혼미해져 깨달음을 얻지 못한 탓에 정묘년(1627년)에

성황제가 장군을 파견하여 동쪽 땅을 정벌하러 왔다. 우리나라는 임금과 대신이 모두 바다에 있는 섬으로 피하여 들어가고 사신을 보내 화친하자고 칭했다. 성황제는 이 청언을 받아들여 형제의 나라가 되게 하고 강토를 옛처럼 온전케 해주었다. 더하여 강홍립을 돌려보내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예를 행함에 소홀함이 없이 사신을 끊임없이 파견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경솔한 의논이

일어나 분규의 조짐이 싹터 소국은 변방의 대관에게 청국에 대한 불손한 글을 써서 보냈다. 이 글이 청에서 조선으로 온 사신들이 입수하여 가지고 갔다. 성황제는 그럼에도 관대하게 그 글을 보고 바로 군사를 보내지 않았으며 밝은 성지를 내려 출병할 시기를 알려주면서 거듭하여 일깨워주었다. 이는 귀를 잡고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한 것이었으나 우리는 기꺼이

복종하지 않았으니, 그 죄는 소국의 대신들이 더욱 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성황제의 대군은 남한을 포위하고 또 황지를 내려, 먼저 일단의 군사를 보내 강화도를 탈취하고 왕자들과 왕비, 대신들의 처자를 모두 나포하였다.

성황제는 여러 장군들에게 "범하지 말라, 침해하지 말라"고 계고(戒告)하고, 우리의 관원들과 대감들을 시켜 그들을 간수케 했다. 그와 같은 큰 은혜를 베풀었기에 소국의 군주, 대신, 나포되었던 아이들, 부인들이 모두 전 그대로 복귀하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이 된 것만 같고 메마른 가뭄이 끝나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소국이 멸망했던 것을 다시 고쳐 존속하게 되고 조상의 사직이 단절 되었던 것이

다시 승계되었다. 동쪽 땅 수천 리의 사람이 모두 살아나는 큰 은혜를 두루 입었다. 이러한 일은 진실로 옛날의 법례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수(한강)의 상류 삼전도의 남쪽이 곧 성황제가 내림했던 곳이다. 그곳에 단위(壇位)가 있다. 우리의 임금은 역사부(役事部)의 사람에게 일러 단위를 늘리고 높여 확장시키고 또 돌을 가져와

비를 세워서 영구히 존속케 하며 성황제의 공덕을 천지와 함께 하고 싶노라고 공표하였다. 이것은 우리 소국만이 대대손손 영구히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위(武威)의 행지(行止)를 먼 곳으로부터 떠받들어 모두가 복종하는 것도 또한 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비록 하늘과 땅의 거대함을 글로 짓고, 해와 달의 밝음을 그렸다 해도 그 공덕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조잡하게나마 지은 것을 새겨 공표하는 것이다.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만물을 황량하게 하기도 하고 살아나게 하기도 한다. 성황제 또한 이를 본받아 무와 덕을 함께 고루 전령(傳令)한다.

성황제가 동쪽 땅을 정벌한 십만 군사는 그 수가 장대히 많고 호랑이와 비휴(맹수)처럼 용맹스러웠다. 서북국들이 모두 병기를 손에 잡고 선봉을 다투니 그 위세가 매우 두려웠다. 성황제가 매우 인자하여 가련히 여겨 내린 칙언과 십행의 하서(下書)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웠다. 우리는 본디 혼미하여 그것을 알지못하고 스스로 화를 입었다.

성황제의 명지가 도착하니 잠을 자다가 막 깨어난 듯 하였다. 우리의 임금이 항복을 택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한 때문만이 아니라, 그 덕에 복종한 것이다. 성황제가 어엿비 여겨 은혜를 미치게 하며, 예를 갖추고 좋은 낯, 웃는 얼굴로 병기를 거두고 훌륭한 말과 가죽으로 만든 예복을 상으로 내릴 때 성의 남녀가 노래하며 칭송한 것과 우리의 임금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황제가 내린 은혜이다.

성황제는 우리의 백성을 살리고자 군사를 철수시켰다. 우리가 문란하게 되고 산산히 흩어진 것을 가련히 여겨 농사를 권장해 주었다. 패하여 부서진 이 나라가 옛 그대로 돌아온 것이, 바로 이 단을 세우게 된 까닭이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생겨나고 겨울풀의 뿌리가 다시 봄을 만난 것처럼 되었다. 큰 강머리에 큰 비석을 세우니, 삼한의 땅이 만세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모두 성황제의 어진 덕에 의한 것이다.

숭덕 4년(1639년) 12월 초8일에 세우는 바이다.

핑백

  • 초록불의 잡학다식 : 병자호란 번외편 2008-02-29 16:01:04 #

    ... 경석을 불러 사정했다. 저들의 비위를 맞춰주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월왕 구천의 고사까지 들먹이는 인조의 말에 이경석은 비문을 고쳐쓸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클릭] 이경석은 상당히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애초에 청이 군신관계를 요청했을 때, 조정이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들끓었으나 이경석은 신중론을 펼쳤으며, 청에 보내는 ... more

덧글

  • 페로페로 2006/06/03 02:57 #

    치욕의 문구...크...으...
  • ExtraD 2006/06/03 03:05 #

    아..불과 300여년 전의 일인데도 저렇게 낯설까요..
    조선이 정말 힘이 없었나 봅니다.
  • 초록불 2006/06/03 09:39 #

    페로페로님 / 대동아공영론자들은 저런 글을 보면서도 민족이 일통되었다고 기뻐할 겁니다. 정말 한심한 노릇이죠.

    ExtraD님 / 힘없는 정의는 공허하다는 것이죠. 우리가 선조 욕을 많이 합니다만, 선조가 개뿔도 없는 주제에 한양이나, 평양에서 개겼으면 저 꼴 났을 겁니다. 고대의 전쟁은 그저 군주만 안 잡히면 끝까지 가는 법이니, 인조도 싸울 힘이 없으면 나주에서 제주도까지 도망쳤어야죠. 도망치는 것까지 입만 살아서 나불대다가 퇴로까지 끊긴 걸 보면... 한숨...
  • 서산돼지 2006/06/03 09:44 #

    소국이 대국에 대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멸망 또는 치욕의 지름길입니다.
    사대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수천년동안 중국과 많이 싸웠으나
    저런 치욕을 당한 경우는 처음인 듯 합니다.

    미국과 절연하고 중국과 손잡자는 사람들 보면 무지무지 화가 납니다. 근공원교가
    대외정책의 기본중에 기본이잖아요. 우리는 대통령 수석, 외교부 장관 출신을 대사로
    보내는데, 중국은 부국장-그것도 과장에서 막 진급시켜서 대사로 보내옵니다.
    그것만 보아도 지금 중국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읍니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중국을 업쑤이 보는 것이 대세였는데, 중국이 욱일승천하니까
    대세는 중국이야 하면서 달려드는 꼴을 보면 예전 조상을 사대주의자라고 욕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준님 2006/06/03 10:00 #

    1. 소시적에 유명한 모 만화가는 "한국역사"를 그리는 만화에서 "조선을 빼고 청을 집어 넣"는다는 계획이 있답니다. (뭐 신빙성은 모르겠는데. 이 아저씨께서 그린 "한민족 황제 초상화전"에 보면 고종이나 순종은 몰라도 "치우천황"과 함께 누르하치가 있더군요 -_-;;;;

    2. 인조의 경우도 대군과 왕비들은 강화로 보내었고. 강화에서 밀리니까 원손은 충남으로 탈출했습니다. 문제는 강화에서 거의 삽질에 가까운 짓을 하는 바람에 대군 일행이 오붓히 잡혔다는 거지요 -_-;;;;;

    임진왜란이랑 다른게 중앙에서 편성된 정예군과의 대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실상의 전쟁이 종결된겁니다. (임란은 탄금대 전투가 있었고 그 전투의 패배로 사실상 피난을 결정합니다. 병참이나 공세능력에서 후금군도 상당히 무리수를 둔 셈이었구요. 물론 장기전 태세가 없었다는게 조선의 결정적인 요인이지만)

  • 이준님 2006/06/03 10:03 #

    3. 광해군의 실리 외교가 상당히 각광받았던건 "만주를 지나에서 분리하자"는 일본 학자들의 의견이 꽤 반영된 것이 사실입니다. (강홍립 고의 항복설도 사실 일본인 학자가 제기한겁니다.) 그러나 광해군 (사실상은 선조가 기원이죠.)의 실리외교, 그리고 그 외교를 파탄내었음에도 거기에 따를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졌음에도 그걸 명분으로 덮으려던 인조는 분명히 책임이 있는거죠.

    ps: 중국과 절연뿐 아니라 중국 관련 기사를 보면 대략 정신이 멍한 경우가 많죠. -_-;;;;; 리영희 교수를 아주 씹던 언론 매체에서 리영희 교수의 중국관 (문혁 찬양이나 그런거 말고 중국민중의 힘에 대한 긍정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복사밀기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봅니다. "대세는 중국이야" 논리의 압박은 절대 "중국 사대"가 아닙니다. 중국은 아직 풋사과니까 "미국과 달리 우리가 중국을 충분히 조종할수 있다 -_-;;"는 사고 방식이죠. TV에 나와서 "저 큰 중국을 우리가 어떻게 이용해 먹을수 있는가"라고 말하는 여자분도 있던데요 (일본이나 미국인이 한국을 두고 그런 말을 하면????)
  • 초록불 2006/06/03 15:36 #

    서산돼지님 / 굳이 이 글을 옮긴 것은 하도 청나라도 우리 종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온갖 거짓 정보가 다 돌아다니더군요. 그런 소리 하는 사람 중에 삼전도비 읽어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데 손가락 장 지질 의향 있습니다...-_-;;

    다만 이제부터는 있겠죠. 한글로 이렇게 올려놓았으니까요. 툴툴...
  • 번동아제 2009/04/08 23:30 #

    잘 읽었습니다.

    삼전도비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파괴하려 했지만 이제 그 내용이 인터넷에도 올라 영생의 길을 가게 되었군요.

    사실 당시 인조와 그를 지탱했던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비판보다 더 어렵고 본질적이며 중요한 것은 교훈을 얻는 것이겠죠.
  • 초록불 2009/04/08 23:36 #

    옳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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