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해군
명나라 시절 여진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건주여진(무순에서 압록강), 해서여진(장춘, 길림), 야인여진(흑룡강 일대)이 그것인데 건주여진에서 누르하치라는 영웅이 등장한다. 누르하치는 1616년(광해군 8년) 1월 58세의 나이로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대칸의 지위에 올랐다. 뒷날의 청태조다.
누르하치가 요동 일대에 농업을 시작하자 명나라가 그것을 금지하는 명을 내린다. 누르하치는 1618년 7대한서七大恨書를 발표하고 명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명은 요동경략 양호를 파견하면서 조선에게도 출병을 요구했다.
1618년 7월 형조참판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는 1만 군사가 파견되었다. 이때 광해군이 강홍립을 불러 "형세를 살펴 일을 결정하라"는 밀지를 내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1619년 11월 조명 연합군 47만과 후금군 6만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1620년 3월 사르호산에서 연합군은 대패한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에 따라 전세를 관망하다가 후금에 투항해버렸다. 누르하치는 조선에 국서를 보내, 조선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해 12월에 후금에 막대한 물자를 보내 호의도 표시했다. 후금도 이에 화답하여 강홍립을 제외한 조선 사람들을 모두 귀국시켜 주었다.
당연히 명은 조선의 태도가 석연찮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정귀를 명으로 보내 사르호산의 패배로 조선은 더 이상 힘이 없다고 적극 변명하게 했다.
1621년 명의 장수 모문룡은 심양, 요양을 후금에 빼앗기고 조선의 의주로 도망쳐온다. 후금은 모문룡을 의주에서 몰아내라고 조선을 압박한다. 광해군은 정충신을 누르하치에게 보내 조선의 입장이 불가피함을 설명하게 한다.
광해군은 정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명과 후금 사이를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2. 인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의 명분에는 명을 배반하고 후금을 돕는다는 것이 들어있었던 만큼 조선의 외교정책이 일대 변화를 가져올 것은 지극 당연한 일이었다.
인조는 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괄을 평안병사에 임명했다. 후금과의 한판을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이괄은 변방으로 토사구팽되었다고 생각했다.
1624년 1월 22일 이괄은 반란을 일으킨다. 2월 11일 반란군에게 서울이 함락된다. 인조는 공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날 길마재에서 도원수 장만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었고 이괄은 패전 끝에 부하들에 의해 목이 잘렸다. 이괄의 잔당이 후금으로 들어가 조선의 정세를 알려주게 되고, 명과 결전을 앞둔 후금은 후방의 안전을 위해 조선을 정벌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626년(인조4년) 8월 누르하치가 죽고 태종이 즉위했다. 태종은 조선 정벌을 단행한다. 1627년 1월 3만의 병력이 의주, 안주를 침공했다. 도체찰사 장만이 방어에 나섰으나 후금군을 막을 수 없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치고, 소현세자는 나주로 도망쳤다.
후금군은 평산에서 진격을 멈추고 화의를 맺었다. 최명길이 적극 화의를 주장하여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화의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후금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후금은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불평등 무역관계를 주장하여 조선의 반감을 끌어올리고 말았다.
1632년 후금은 내몽고 정벌에 나섰다. 이때 조선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라는 요구를 했다. 조선은 당연히 거절했다. 조선 안에서는 전쟁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1635년 후금은 전국옥새를 구했다. 이에 다시 조선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라는 요구를 했다. 조선은 거절했고, 후금의 사신들은 목숨에 위협을 느껴 후금으로 달아나야 했다.
1636년 4월 후금 태종은 청을 세우고 조선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11월 25일이 최후통첩에서 알린 출병시기였다. (삼전도비문에 이런 내용이 다 적혀있다.)
조선은 군신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또 거부했다. 청태종은 12월 2일 조선침공군 13만을 출발시킨다.
3. 청태종
청태종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그가 [만주]를 선언한 이야기는 유명한데, 대동아공영론자들이 좋아하는 [주신]을 버리고 [만주]를 선언한 것은 그가 자신의 출신부족에 얽매이지 않는 원대한 야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미 이무렵 청은 한족, 몽골족, 조선족에 기타 소수 종족들이 뒤섞인 이종족의 국가였다. 여진족의 나라였던 금金으로는 이들을 모두 포용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만주] 선언이며, 국호를 [청淸]이라 만든 이유였다.
청태종의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배례하기를 거부했다. 조선은 형제의 나라여서 군신관계의 배례를 올리지 않은 것이다. 청의 신하들은 오만한 조선 사신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청태종은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임금은 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어 짐으로 하여금 사신을 죽이게 하여 구실을 만들고자 한다. 이들을 풀어주어라."
청태종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침공로를 조선 사신에게 알려주었다.
"조선에 산성이 많다지만 나는 큰길로 당당히 나아갈 것이다. 조선이 강화도를 믿는다지만 우리가 팔도를 유린하면 그 작은 섬에서 나라 노릇을 하겠는가? 귀국의 벼슬아치들이 붓으로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조선에서도 인조가 평양성으로 가 당당하게 싸워야 한다는 의론이 있었으나, 인조가 머리에 총맞았겠는가? 인조는 병력을 북방에 집중해야 한다는 상소마저 물리치고 남한산성에 병력을 남겨두었다.
[계속]
명나라 시절 여진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건주여진(무순에서 압록강), 해서여진(장춘, 길림), 야인여진(흑룡강 일대)이 그것인데 건주여진에서 누르하치라는 영웅이 등장한다. 누르하치는 1616년(광해군 8년) 1월 58세의 나이로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대칸의 지위에 올랐다. 뒷날의 청태조다.
누르하치가 요동 일대에 농업을 시작하자 명나라가 그것을 금지하는 명을 내린다. 누르하치는 1618년 7대한서七大恨書를 발표하고 명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명은 요동경략 양호를 파견하면서 조선에게도 출병을 요구했다.
1618년 7월 형조참판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는 1만 군사가 파견되었다. 이때 광해군이 강홍립을 불러 "형세를 살펴 일을 결정하라"는 밀지를 내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1619년 11월 조명 연합군 47만과 후금군 6만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1620년 3월 사르호산에서 연합군은 대패한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에 따라 전세를 관망하다가 후금에 투항해버렸다. 누르하치는 조선에 국서를 보내, 조선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해 12월에 후금에 막대한 물자를 보내 호의도 표시했다. 후금도 이에 화답하여 강홍립을 제외한 조선 사람들을 모두 귀국시켜 주었다.
당연히 명은 조선의 태도가 석연찮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정귀를 명으로 보내 사르호산의 패배로 조선은 더 이상 힘이 없다고 적극 변명하게 했다.
1621년 명의 장수 모문룡은 심양, 요양을 후금에 빼앗기고 조선의 의주로 도망쳐온다. 후금은 모문룡을 의주에서 몰아내라고 조선을 압박한다. 광해군은 정충신을 누르하치에게 보내 조선의 입장이 불가피함을 설명하게 한다.
광해군은 정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명과 후금 사이를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2. 인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의 명분에는 명을 배반하고 후금을 돕는다는 것이 들어있었던 만큼 조선의 외교정책이 일대 변화를 가져올 것은 지극 당연한 일이었다.
인조는 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괄을 평안병사에 임명했다. 후금과의 한판을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이괄은 변방으로 토사구팽되었다고 생각했다.
1624년 1월 22일 이괄은 반란을 일으킨다. 2월 11일 반란군에게 서울이 함락된다. 인조는 공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날 길마재에서 도원수 장만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었고 이괄은 패전 끝에 부하들에 의해 목이 잘렸다. 이괄의 잔당이 후금으로 들어가 조선의 정세를 알려주게 되고, 명과 결전을 앞둔 후금은 후방의 안전을 위해 조선을 정벌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626년(인조4년) 8월 누르하치가 죽고 태종이 즉위했다. 태종은 조선 정벌을 단행한다. 1627년 1월 3만의 병력이 의주, 안주를 침공했다. 도체찰사 장만이 방어에 나섰으나 후금군을 막을 수 없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치고, 소현세자는 나주로 도망쳤다.
후금군은 평산에서 진격을 멈추고 화의를 맺었다. 최명길이 적극 화의를 주장하여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화의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후금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후금은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불평등 무역관계를 주장하여 조선의 반감을 끌어올리고 말았다.
1632년 후금은 내몽고 정벌에 나섰다. 이때 조선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라는 요구를 했다. 조선은 당연히 거절했다. 조선 안에서는 전쟁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1635년 후금은 전국옥새를 구했다. 이에 다시 조선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라는 요구를 했다. 조선은 거절했고, 후금의 사신들은 목숨에 위협을 느껴 후금으로 달아나야 했다.
1636년 4월 후금 태종은 청을 세우고 조선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11월 25일이 최후통첩에서 알린 출병시기였다. (삼전도비문에 이런 내용이 다 적혀있다.)
조선은 군신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또 거부했다. 청태종은 12월 2일 조선침공군 13만을 출발시킨다.
3. 청태종
청태종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그가 [만주]를 선언한 이야기는 유명한데, 대동아공영론자들이 좋아하는 [주신]을 버리고 [만주]를 선언한 것은 그가 자신의 출신부족에 얽매이지 않는 원대한 야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미 이무렵 청은 한족, 몽골족, 조선족에 기타 소수 종족들이 뒤섞인 이종족의 국가였다. 여진족의 나라였던 금金으로는 이들을 모두 포용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만주] 선언이며, 국호를 [청淸]이라 만든 이유였다.
청태종의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배례하기를 거부했다. 조선은 형제의 나라여서 군신관계의 배례를 올리지 않은 것이다. 청의 신하들은 오만한 조선 사신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청태종은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임금은 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어 짐으로 하여금 사신을 죽이게 하여 구실을 만들고자 한다. 이들을 풀어주어라."
청태종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침공로를 조선 사신에게 알려주었다.
"조선에 산성이 많다지만 나는 큰길로 당당히 나아갈 것이다. 조선이 강화도를 믿는다지만 우리가 팔도를 유린하면 그 작은 섬에서 나라 노릇을 하겠는가? 귀국의 벼슬아치들이 붓으로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조선에서도 인조가 평양성으로 가 당당하게 싸워야 한다는 의론이 있었으나, 인조가 머리에 총맞았겠는가? 인조는 병력을 북방에 집중해야 한다는 상소마저 물리치고 남한산성에 병력을 남겨두었다.
[계속]







덧글
ExtraD 2006/06/03 11:31 # 답글
초록불님의 묘사는 귀에 쏙쏙들어와서 좋습니다.제대로된 병자호란사를 알게되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2편 기다립니다~.
루드라 2006/06/03 12:35 # 답글
만주를 선언한건 태종 홍타이치가 아니라 태조 누르하치 아닙니까?누르하치 당시에 해서 여진이 보낸 국서에 대한 답변에 보면 너는 해서, 나는 만주 서로 간섭하는 건 부당하다 어쩌다 하는 문장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태종의 원대한 야심을 보여주는 건 만주 선언이 아니고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것으로 압니다. 금이 여진족에게만 호평받는 이름이고 한족에게는 아주 혐오스런 이름이라는 걸 알고 이렇게 바꾼 걸로 보이는데요.
그리고 또 하나 강홍립이 항복한 것이 광해군의 밀지를 받아서였다는 게 정확한 겁니까? 그냥 강홍립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항복이었고 밀지를 받아서 어쨌다는 건 뒤에 인조측에서 가져다 붙인거 아닐까요?
초록불 2006/06/03 13:32 # 답글
루드라님 / 청태종실록 권25에 이렇게 나옵니다.우리나라는 원래 만주, 하다, 우라, 엽혁, 휘발 등의 이름이 있었다. 지난날 무식한 사람들이 왕왕 제신이라 불렀는데 제신이란 이름은 석북초, 모르건의 후예아며, 실로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다. 우리가 만주라 이름을 세운 것은 그 기원이 멀고 대대로 빛났다. 지금 이후로는 일체 누구나 다 우리라나를 만주라는 원래 이름으로 부르고 망령된 전칭을 사용하지 말라.
만주라는 이름을 누르하치도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주를 선언한 것은 태종이지요.
강홍립 항복에는 의문이 있는 모양이네요. 저는 별로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항복 여하를 떠나 광해군이 양다리 외교를 펼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역사의 큰 흐름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준님 2006/06/03 15:14 # 답글
1. 그래서 인지 만주라는 명칭은 일본 점령기때 꽤 사용되었고. 지금은 동북 3성이라는 명칭을 공식화 합니다.2. 서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강홍립의 항복때문에 명이 멸망했다고 까지 합니다. -_-;;; 당대 서인들의 기록에도 "항복한 강홍립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았다"는게 논지였고 고의적 항복 -강홍립이 항복한게 아니라 광해군이 시킨거-은 논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연간에 여러 연구(이것 역시 왕조 실록에 바탕을 둡니다.)에 의해서 강홍립 고의항복설+ 광해군 밀약설이 돈건데요. 실질적으로 당대 상황을 보면 고의 항복이기 보다는 거의 미필적 사건이라고 보는 경향이 짙습니다.
3. 강홍립뿐 아니라 상당수의 조선인 포로들이 돌아오지 못합니다. -_-;;; 다른 이유가 아닌 "농업 노동력 확충"의 문제이죠. 실질적으로 농업 노동력의 가치가 없다고 간주한 포로는 "처형" 되었답니다. (뭐 과장은 있을수 있습니다. 탈출한 사람의 증언을 체록한거니까)
초록불 2006/06/03 15:33 # 답글
이준님님 / 동북3성이라는 것은 중국이 부르고 싶어하는 명칭이죠. 김한규 선생님은 이 지역을 통틀어 [요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만주]라 불러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만, 딱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본 것은 아닙니다.
페로페로 2006/06/03 15:49 # 답글
"...귀국의 벼슬아치들이 붓으로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문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조선이 이룬 철학적 문학적 역량을 평가절하 하는 것도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힘이 쭉 빠져 버립니다.
초록불 2006/06/03 17:37 # 답글
페로페로님 / 저도 대강 훑어본 것이긴 한데, 청의 돌입에 대응하는 조선군 사령부의 행태는 너무나 상식 이하네요. 임진왜란 때가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 한번 한국역사 최악의 지휘관 10인... 이런 포스팅 해보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현재라면 김자점 1위!!
도라지 2006/06/03 21:13 # 답글
1635년 후금은 옥새를 구했다. 이 부분이 좀 이해가 안가는 데요. 후금이 자체적으로 옥새를 만들었다는 소리인가요? 아니면 금이나 그 이전 여진족 계열 나라들이 쓰던 옥새를 어디선가 찾아내어(혹은 찾아냈다고 선전하여) 후금의 옥새로 정했다는 소리일까요.
초록불 2006/06/03 21:19 # 답글
도라지님 / 그 유명한 전국옥새 이야기입니다. 원나라에 있던 전국옥새를 청이 획득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물론 이 전국옥새가 진짜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도라지 2006/06/03 22:16 # 답글
설마 전국옥새 이야기일까? 했더니 역시나 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