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역사학대회, 과학사분과 발표문, 2003년 3월 20일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
― 박창범 교수의 고대 천문학사 연구에 대하여 ―
* 이 글은 필자가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를 잘못 읽다"라는 제목으로 『서평문화』 제49집 (2003년 봄)에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 문 규
(전북대 과학학과)
1. 머리말
동아시아 전통 과학에서 천문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새삼 다시 강조할 필요도 없다.
천문학은 매우 일찍부터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어 하나의 전문 과학으로 자리잡았고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천문학에서 얻어진 구체적 성과와 그것이 가지는 의의를 밝히려는 작업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중국 고대 천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藪內淸는 역법에 초점을 맞추어 전통시대 중국 천문학 전반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수행했다. 천문학 관련 고대 문헌에 대한 고증학적 연구 전통을 가진 중국에서는 특히 自然科學史硏究所가 발족된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한 다양한 성과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문학사 연구는 20세기 초 和田雄治, Rufus와 같은 주한 외국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이후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첨성대, 세종시대의 각종 천문의기, 재이기록, 칠정산 등을 대상으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특히 고대사의 경우 남아 있는 사료가 많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현대 천문학 지식을 이용하여 한국 고대 천문학사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결과가 나와 많은 주목을 끌고 있다.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김영사, 2002)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하늘에…』는 저자가 지난 10여간 한국 천문학사를 연구하면서 가졌던 생각과 경험을 소개한 책으로, 그 안에는 이미 전문 학술지를 통해 발표한 연구결과가 담겨 있다.
이 글에서는 『하늘에…』에서 이용하고 있는 연구방법, 즉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하늘에…』의 출판 이후 여러 언론매체와 일반인들이 크게 주목했던 단군조선의 천문기록과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2. 단군조선의 천문기록
『하늘에…』의 3장 천문 기록으로 찾아간 단군조선>에서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와 있는 천문현상 기록에 대해 현대 천문학 지식을 동원한 이른바 '과학적 검증'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내용은 본래 박창범·라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 14 (1993), 또는 La, Daile and Park, Changbom, "On Astronomical Records of Dangun Chosun period", Journal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26 (1993)으로 발표된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고대 문헌에 들어 있는 일부 천문기록의 사실여부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② 이를 통해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 들어 있는 오행성의 결집(B.C. 1733년)과 썰물 기록(B.C. 935 년)이 조작되지 않은 단군조선 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것임을 확인했다.
③ 이로써 학자들은 이 책들을 마냥 무시할 것이 아니라 옥석을 가리는 마음으로 책의 내용을 진지하게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마치 단군조선의 실존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저자의 의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결과로 전적으로 저자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읽어 가면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을 내리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한편, 『단기고사』와 『환단고기』는 이미 학계의 철저한 사료 비판을 거쳐 20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僞書로 판명된 책으로 이 자리에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①∼②를 통해 ③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사료 비판 방법을 제시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①과 같이 현대 천문학을 이용하여 과거의 천문 기록을 검토하는 일은 현대 천문학의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작업으로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가 학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①을 통해 ②와 같이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의 기록들이 조작되지 않았다고 해석한 데 있다.
나는 ①이므로 ②라고 말한 박창범 교수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 나오는 'B.C. 1733년에 다섯 행성이 루 별자리에 모였다 (五星聚婁)',
'B.C. 935년에 큰 썰물이 있었다(南海潮水退三尺)'는 기록이 현대 천문학을 이용하여 계산한 실제 발생했던 천문현상과 부합된다고 해서, 그것이 그 시대에 기록되었다거나 또는 당시의 기록이 잘 전승되어 이후 『단기고사』와 「단군세기」가 씌어질 때 그 안에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편, 박창범 교수의 계산에 따르면 당시 오행성은 실제로 '루'에서 약 130°떨어진 바다뱀자리 근처에서 모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단기고사』와 「단군세기」는 오행성이 모인 위치를 '루'라고 틀리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창범 교수는 '후대의 개입'이라고 보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나아가 'B.C. 1733년 오행성이 모였다', 'B.C. 935년에 큰 썰물이 있었다'는 기록 자체도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 현상이 일어난 시기와 그것이 기록된 시기 사이에는 수 천년의 시간차가 있다.
『단기고사』와 「단군세기」가 20세기 이후 만들어진 것이라면 3,600년 또는 2,800년이 넘으며,
설령 이 책들이 발해 초와 고려 말에 완성된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1,500년이 훨씬 넘는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이와 같은 기록이 그처럼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승될 수 있었을까?
고대 문명권에서 천문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이 사이 어떤 형태로든 유사한 천문기록을 오늘날까지 전해질 정도로 충분하게 남겼어야 했다. 그러나 현재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또한 박창범 교수가 이 기록이 조작될 확률을 오행성 결집의 경우 0.007(2×2/550=0.007), 큰 썰물의 경우 0.04(1×8/200=0.04)로 제시하면서, 이 기록이 조작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기록이라고 주장한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 확률이란 아무런 천문학 지식도 없는 사람이 임의로 몇 년에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이 정도로 근사하게 들어맞을 확률일 뿐이다.
행성이나 해와 달의 위치를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확률은 매우 높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천체위치를 독자적으로 계산할 수 있게 된 세종시대 이후에는 이런 기록을 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수 천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이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믿는 것보다, 오히려 후대에 계산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②가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3. 『삼국사기』의 일식기록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에 대한 해석에서도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박창범 교수가 단정지어 '삼국의 영토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이었다'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는 '객관적 사실'만을 찾아 보여 주고자 할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의 4장 삼국 시대 천문 기록이 밝혀 준 고대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고 있다.
(이 내용은 처음 박창범, 라대일, "三國時代 天文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한국과학사학회지』16-2 (1994)로 발표된 것이다.)
①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은 독자적 관측에 의해 얻어진 것이다.
② 특히 일식의 경우 『삼국사기』가 바로 천체 역학적 계산을 통해 실제로 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기록의 비율, 즉 실현율이 가장 높은 사서이다.
③ 이를 토대로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은 우연히 최적 관측치가 중국 대륙 동부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실측한 기록이다.
①에서 『삼국사기』의 행성과 달의 접근 현상과 금성이 낮에 나타난 현상에 대한 기록을 보고,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만 관측 기록된 독자적인 것이라고 말한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 결과를 확대하여 ②, ③ 주장의 전제가 되는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은 모두 독자적으로 관측 기록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삼국이 일식을 독자적으로 관측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에서 다른 천문현상처럼 일식도 독자적으로 관측하고 기록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이 독자적인 관측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오히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 기록을 참고하여 불확실한 삼국의 일식기록을 바로잡았을 가능성을 제시한 박성래 교수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실제로 박창범 교수가 정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는 삼국 시대의 천문 현상 기록>을 보면, 일식의 경우 독자 기록은 단 2번에 불과하다. 그것도 이른바 천체 역학적 계산방법으로 검증해서 실제로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식이 발생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판명된 사례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일식기록에 대해 삼국의 독자 관측 기록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본다.
②의 일식 실현율에 대한 부분도 지나친 해석이다.
『삼국사기』에는 약 1,000년 동안 67개의 일식기록이 들어 있다(중복사례 포함).
이에 비해 중국의 일식기록은 아주 많아서 같은 기간 동안 400개가 넘는다.
대략 1/6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록에 대해서 실현율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일로 보이며,
더욱 이와 같이 계산된 실현율을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독자적인 실제 관측에 근거하여 기록된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부분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리고 중국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춘추』의 일식기록 37개의 실현율이 86%라는 연구결과도 있는데, 어떻게 실현율 80%로 계산된 『삼국사기』에 대해 실현율이 가장 높은 사서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의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가 단지 일식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한 것(日有食之)에 비해, 이미 『漢書』와 같은 고대 중국의 사서에서 '일식이 일어났는데 개기식이었고 그 때 해의 위치가 영실9도이다'(日有食之 旣 在營室九度)와 같이 자세하게 일식을 기록한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어느 책이 일식을 더 정확하게 기록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일식기록에 대한 최적 관측지점을 계산하여 ③과 같은 결론을 내린 것도 무리한 해석이다. 일단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①, ②의 전제를 신뢰할 수 없다.
그리고 박창범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최적 관측치를 추정한 그림을 보아도 대부분의 일식은(최적 관측지점은 아닐지라도) 신라, 고구려, 백제 모두에서 관측되었을 터인데도, 삼국에서 함께 일식을 기록한 경우가 겨우 2번에 불과한 이유에 대해서도 해명이 필요하다.
당시 세 나라가 서로 다른 일식만을 기록하기로 합의했던 것일까?
오히려 일식기록에 대한 분석에서 중요한 사항은 최적 관측지가 아니라 관측 가능한 지역을 찾아보는 일이며, 이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결국 『삼국사기』는 삼국에서 관측한 일식 기록을 직접 실은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관측 가능하여 중국의 正史에 실렸던 일식 기록을 참고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4. 맺음말
지금까지 단군조선의 천문기록과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에 대한 박창범 교수의 해석에 대해 살펴보면서,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다시 강조하지만 그 문제란 현대 천문학 지식을 이용한 계산과정이나 그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결과에 대한 해석, 특히 역사를 해석할 때 제기되는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천문학으로 계산하면 B.C. 1734년 7월 13일 초저녁 태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이 늘어섰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은 B.C. 1733년 오행성이 모였다는 기록과 1년밖에 차이가 없다. 또는 서기 205년 9월 4일 오후 4시경 달이 금성에 2.1°까지 가까워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것은 서기 205년 음력 7월 금성이 달을 범하다(太白犯月)는『삼국사기』의 기록과 잘 들어맞는다는 부분은 박창범 교수의 말대로 "누가 해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사실" 그렇지만 이런 작업은 우리나라 전통 천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현대 천문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학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결과를 가지고 B.C. 1733년 오행성의 결집에 대한 기록을 조작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기록이라고 해석하거나 그것을 기록한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와 같은 책의 위서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삼국사기』에만 실려 있는 일부 천문 기록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확인된다는 사실만으로 일식 기록까지 독자적으로 관측한 내용이 그대로 『삼국사기』에 실렸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고대 동아시아 문명권의 일식 기록 전통을 깊이 고려하지 않고 삼국에서 일식을 가장 정확히 관측하여 기록했다거나 삼국의 위치가 중국 대륙이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추가]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후한=백제가 되어버린다. 이 사실은 박창범 교수가 작성한 논문에 그대로 들어있다.
후한의 정체 [클릭]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
― 박창범 교수의 고대 천문학사 연구에 대하여 ―
* 이 글은 필자가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를 잘못 읽다"라는 제목으로 『서평문화』 제49집 (2003년 봄)에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 문 규
(전북대 과학학과)
1. 머리말
동아시아 전통 과학에서 천문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새삼 다시 강조할 필요도 없다.
천문학은 매우 일찍부터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어 하나의 전문 과학으로 자리잡았고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천문학에서 얻어진 구체적 성과와 그것이 가지는 의의를 밝히려는 작업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중국 고대 천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藪內淸는 역법에 초점을 맞추어 전통시대 중국 천문학 전반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수행했다. 천문학 관련 고대 문헌에 대한 고증학적 연구 전통을 가진 중국에서는 특히 自然科學史硏究所가 발족된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한 다양한 성과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문학사 연구는 20세기 초 和田雄治, Rufus와 같은 주한 외국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이후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첨성대, 세종시대의 각종 천문의기, 재이기록, 칠정산 등을 대상으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특히 고대사의 경우 남아 있는 사료가 많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현대 천문학 지식을 이용하여 한국 고대 천문학사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결과가 나와 많은 주목을 끌고 있다.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김영사, 2002)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하늘에…』는 저자가 지난 10여간 한국 천문학사를 연구하면서 가졌던 생각과 경험을 소개한 책으로, 그 안에는 이미 전문 학술지를 통해 발표한 연구결과가 담겨 있다.
이 글에서는 『하늘에…』에서 이용하고 있는 연구방법, 즉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하늘에…』의 출판 이후 여러 언론매체와 일반인들이 크게 주목했던 단군조선의 천문기록과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2. 단군조선의 천문기록
『하늘에…』의 3장 천문 기록으로 찾아간 단군조선>에서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와 있는 천문현상 기록에 대해 현대 천문학 지식을 동원한 이른바 '과학적 검증'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내용은 본래 박창범·라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 14 (1993), 또는 La, Daile and Park, Changbom, "On Astronomical Records of Dangun Chosun period", Journal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26 (1993)으로 발표된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고대 문헌에 들어 있는 일부 천문기록의 사실여부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② 이를 통해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 들어 있는 오행성의 결집(B.C. 1733년)과 썰물 기록(B.C. 935 년)이 조작되지 않은 단군조선 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것임을 확인했다.
③ 이로써 학자들은 이 책들을 마냥 무시할 것이 아니라 옥석을 가리는 마음으로 책의 내용을 진지하게 재고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마치 단군조선의 실존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저자의 의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결과로 전적으로 저자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읽어 가면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을 내리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한편, 『단기고사』와 『환단고기』는 이미 학계의 철저한 사료 비판을 거쳐 20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僞書로 판명된 책으로 이 자리에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①∼②를 통해 ③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사료 비판 방법을 제시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①과 같이 현대 천문학을 이용하여 과거의 천문 기록을 검토하는 일은 현대 천문학의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작업으로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가 학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①을 통해 ②와 같이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의 기록들이 조작되지 않았다고 해석한 데 있다.
나는 ①이므로 ②라고 말한 박창범 교수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에 나오는 'B.C. 1733년에 다섯 행성이 루 별자리에 모였다 (五星聚婁)',
'B.C. 935년에 큰 썰물이 있었다(南海潮水退三尺)'는 기록이 현대 천문학을 이용하여 계산한 실제 발생했던 천문현상과 부합된다고 해서, 그것이 그 시대에 기록되었다거나 또는 당시의 기록이 잘 전승되어 이후 『단기고사』와 「단군세기」가 씌어질 때 그 안에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편, 박창범 교수의 계산에 따르면 당시 오행성은 실제로 '루'에서 약 130°떨어진 바다뱀자리 근처에서 모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단기고사』와 「단군세기」는 오행성이 모인 위치를 '루'라고 틀리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창범 교수는 '후대의 개입'이라고 보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나아가 'B.C. 1733년 오행성이 모였다', 'B.C. 935년에 큰 썰물이 있었다'는 기록 자체도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 현상이 일어난 시기와 그것이 기록된 시기 사이에는 수 천년의 시간차가 있다.
『단기고사』와 「단군세기」가 20세기 이후 만들어진 것이라면 3,600년 또는 2,800년이 넘으며,
설령 이 책들이 발해 초와 고려 말에 완성된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1,500년이 훨씬 넘는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이와 같은 기록이 그처럼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승될 수 있었을까?
고대 문명권에서 천문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이 사이 어떤 형태로든 유사한 천문기록을 오늘날까지 전해질 정도로 충분하게 남겼어야 했다. 그러나 현재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또한 박창범 교수가 이 기록이 조작될 확률을 오행성 결집의 경우 0.007(2×2/550=0.007), 큰 썰물의 경우 0.04(1×8/200=0.04)로 제시하면서, 이 기록이 조작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기록이라고 주장한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 확률이란 아무런 천문학 지식도 없는 사람이 임의로 몇 년에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이 정도로 근사하게 들어맞을 확률일 뿐이다.
행성이나 해와 달의 위치를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확률은 매우 높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천체위치를 독자적으로 계산할 수 있게 된 세종시대 이후에는 이런 기록을 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수 천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이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믿는 것보다, 오히려 후대에 계산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②가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3. 『삼국사기』의 일식기록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에 대한 해석에서도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박창범 교수가 단정지어 '삼국의 영토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이었다'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는 '객관적 사실'만을 찾아 보여 주고자 할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의 4장 삼국 시대 천문 기록이 밝혀 준 고대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고 있다.
(이 내용은 처음 박창범, 라대일, "三國時代 天文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한국과학사학회지』16-2 (1994)로 발표된 것이다.)
①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은 독자적 관측에 의해 얻어진 것이다.
② 특히 일식의 경우 『삼국사기』가 바로 천체 역학적 계산을 통해 실제로 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기록의 비율, 즉 실현율이 가장 높은 사서이다.
③ 이를 토대로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은 우연히 최적 관측치가 중국 대륙 동부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실측한 기록이다.
①에서 『삼국사기』의 행성과 달의 접근 현상과 금성이 낮에 나타난 현상에 대한 기록을 보고,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만 관측 기록된 독자적인 것이라고 말한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 결과를 확대하여 ②, ③ 주장의 전제가 되는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은 모두 독자적으로 관측 기록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삼국이 일식을 독자적으로 관측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에서 다른 천문현상처럼 일식도 독자적으로 관측하고 기록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이 독자적인 관측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오히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 기록을 참고하여 불확실한 삼국의 일식기록을 바로잡았을 가능성을 제시한 박성래 교수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실제로 박창범 교수가 정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는 삼국 시대의 천문 현상 기록>을 보면, 일식의 경우 독자 기록은 단 2번에 불과하다. 그것도 이른바 천체 역학적 계산방법으로 검증해서 실제로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식이 발생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판명된 사례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일식기록에 대해 삼국의 독자 관측 기록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고 본다.
②의 일식 실현율에 대한 부분도 지나친 해석이다.
『삼국사기』에는 약 1,000년 동안 67개의 일식기록이 들어 있다(중복사례 포함).
이에 비해 중국의 일식기록은 아주 많아서 같은 기간 동안 400개가 넘는다.
대략 1/6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록에 대해서 실현율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일로 보이며,
더욱 이와 같이 계산된 실현율을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독자적인 실제 관측에 근거하여 기록된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부분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리고 중국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춘추』의 일식기록 37개의 실현율이 86%라는 연구결과도 있는데, 어떻게 실현율 80%로 계산된 『삼국사기』에 대해 실현율이 가장 높은 사서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의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가 단지 일식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한 것(日有食之)에 비해, 이미 『漢書』와 같은 고대 중국의 사서에서 '일식이 일어났는데 개기식이었고 그 때 해의 위치가 영실9도이다'(日有食之 旣 在營室九度)와 같이 자세하게 일식을 기록한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어느 책이 일식을 더 정확하게 기록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일식기록에 대한 최적 관측지점을 계산하여 ③과 같은 결론을 내린 것도 무리한 해석이다. 일단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①, ②의 전제를 신뢰할 수 없다.
그리고 박창범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최적 관측치를 추정한 그림을 보아도 대부분의 일식은(최적 관측지점은 아닐지라도) 신라, 고구려, 백제 모두에서 관측되었을 터인데도, 삼국에서 함께 일식을 기록한 경우가 겨우 2번에 불과한 이유에 대해서도 해명이 필요하다.
당시 세 나라가 서로 다른 일식만을 기록하기로 합의했던 것일까?
오히려 일식기록에 대한 분석에서 중요한 사항은 최적 관측지가 아니라 관측 가능한 지역을 찾아보는 일이며, 이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결국 『삼국사기』는 삼국에서 관측한 일식 기록을 직접 실은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관측 가능하여 중국의 正史에 실렸던 일식 기록을 참고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4. 맺음말
지금까지 단군조선의 천문기록과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에 대한 박창범 교수의 해석에 대해 살펴보면서,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다시 강조하지만 그 문제란 현대 천문학 지식을 이용한 계산과정이나 그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결과에 대한 해석, 특히 역사를 해석할 때 제기되는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천문학으로 계산하면 B.C. 1734년 7월 13일 초저녁 태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이 늘어섰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은 B.C. 1733년 오행성이 모였다는 기록과 1년밖에 차이가 없다. 또는 서기 205년 9월 4일 오후 4시경 달이 금성에 2.1°까지 가까워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것은 서기 205년 음력 7월 금성이 달을 범하다(太白犯月)는『삼국사기』의 기록과 잘 들어맞는다는 부분은 박창범 교수의 말대로 "누가 해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사실" 그렇지만 이런 작업은 우리나라 전통 천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현대 천문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학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결과를 가지고 B.C. 1733년 오행성의 결집에 대한 기록을 조작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기록이라고 해석하거나 그것을 기록한 『단기고사』와 「단군세기」와 같은 책의 위서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삼국사기』에만 실려 있는 일부 천문 기록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확인된다는 사실만으로 일식 기록까지 독자적으로 관측한 내용이 그대로 『삼국사기』에 실렸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고대 동아시아 문명권의 일식 기록 전통을 깊이 고려하지 않고 삼국에서 일식을 가장 정확히 관측하여 기록했다거나 삼국의 위치가 중국 대륙이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추가]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후한=백제가 되어버린다. 이 사실은 박창범 교수가 작성한 논문에 그대로 들어있다.
후한의 정체 [클릭]
덧글
1.삼국이 관측을 하긴 한 것으로 볼 수는 있지만, 질은 중국에 떨어진다.
2.삼국의 일식관측은 김부식이 중국의 자료를 토대로 수정한 것이다.
기원전 1700 년대의 천문학 사건을 계산할 능력은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조작되었다면 아예 20세기 직전이나 이후 상당한 천문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단군이 2333년에 개국했다는 것 자체가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http://orumi.egloos.com/841154]의 제 글을 참조하세요.
3. 저는 위 논문의 관점과는 다른 방향에서 박창범 교수의 논문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http://orumi.egloos.com/214633]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4. 천문학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위 방법을 비판한 글도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chonge24?Redirect=Log&logNo=140018734241]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벼룩이 1미터 73센티 3 밀리미터를 뛴 것을 보고,
벼룩이 사람말을 알아듣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2. 저 학설이 무려 '신동아'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진 적이 있었죠. 뭐 "한국의 메뚜기설 의혹"이랑 한반도에서 홍수와 가뭄이 동시에 일어나는 의혹등등해서 부정기 시리즈로 돈걸로 압니다 (결론은 대륙 삼국- 하기야 이 잡지는 무려 이현세씨 필자로 해서 천국의 신화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도 실어주었으니)
3. 바이블 관련해서도 저런 해석이-아무래도 후대에 가필이나 해석을 새로했다는 의혹- 무진장이죠. 다만 저쪽에는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분도 있지만서도) 그런 학설을 인정하지만 우리는 민족주의와 상업주의만 결합하면 비이성이 이성이 되는게 다르다는게 문제이죠.
적어도 천문학적 사건에 대해서 정확한 연대를 계산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삼국사기의 천문관측 기사를 김부식이 중국책을 보고 베꼈는지는 박창범 교수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므로, 그 책임을 그에게 묻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자들이 근거를 가지고 김부식이 베꼈다는
것을 증명하면 되는 일이죠.
위작으로 판명된 책에 기술된 천문학적 사건의
연대가 매우 정밀하게 실제 천문학적 사실과 맞다는 것을 알게되어 결론에
혼선이 생겼겠지만, 실제 천문학적 사실과 다르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흥미롭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이 [박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역사학자들과 긴밀한 협의를 거쳐주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서울대에도 훌륭한 역사교수님들이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도 주로 [해석]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박창범 교수가 처음 논문을 발표할 때는 역사학의 [해석]에 대해서 매우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데, 책으로 낼 때는 역사학자가 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 논의를 따라도 3-4세기 이후 신라, 고려, 조선이 모두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이 박창범 교수의 결론인데, 이런 대륙론자들은 그런 부분은 뚝 잘라먹은 채 자신들의 주장에 이용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더욱 이성적인 논의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논의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상대성이론이 잘못되었다고 하거나 영구기관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과학계의 이상한 행동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네, 저도 초록불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적어도 [역사 해석]에 대해서는 당연히 역사학 전문가와 상의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그러지 않았나 보군요.
뒤에 제가 써놓은 [이런 논의]란 삼국-고려-조선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 이른바 한민족대륙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재야에서 처음에는 삼국만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박교수 논문이 나오기 한참 전입니다.) 각종 증거라고 들이댄 것이 있었습니다만, 대부분 너무나 쉽게 논파되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지명 관련 논의는 고려사와 대조하면 거짓말이라는 것이 분명했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도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지명이 그렇게 나오는 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한반도로 들어갔다고 주장했죠.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이 또 무너지자, 이번에는 조선도 중국 땅에 있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얄타 회담을 통해 막강한 한민족의 힘이 무서운 강대국들이 한국사를 한반도로 한정하는 조치를 내렸다는 게 주장의 골자입니다.
저는 고천문학이 우리 역사의 비밀을 밝히는데 여러가지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 역사는 풍부해지겠지요. 하지만 그 연구의 하한선은 삼국통일 무렵까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중국의 역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도 기재가 부정확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고천문학을 적용하려면 역사학자와 역할을 나눠 세밀한 검토를 한 후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저 두 현상에 대하여 기록된 타 문건없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다른 문헌이 있고, 시기가 유사하거나 거의 유사할 경우에 베껴적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언급가능합니다만, 지금 그런 증거는 보이지 않는 것 같군요.
하나의 "가능성"을 찾은 것이라고 보입니다.
저도 단기고사나 한단고기의 전체 기록을 믿지는 않지만, 100% 순수 위조 사서라고는 생각이 안 들더군요. 과거의 사료를 짜집기 한 것으로는 보입니다.
그 과거의 사료의 일부분들은 진정한 사료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요.
어쨋든, 중국 대륙에 고려, 조선이 있었다는 황당한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아주 과거의 기록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 못하는 것 아닐까요?
과학과 역사가 만나서 좀더 가치있는 역사해석이 나왔으면 합니다.
천문 관련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다른 사서에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사실 그 정도로 주의하지 않아서 그냥 읽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예만 제시해 드립니다.
사기 천관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漢 之 興 , 五 星 聚 于 東 井 。
한이 흥기하자 오성이 동쪽 정수(井宿:정은 오성취루의 루와 마찬가지로 별자리 이름입니다)에 모였다.
똑같죠? 사기 천관서에 따르면 오성이 모이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 행성이 만나면 이는 길을 바꾼 것으로, 덕이 있는 이는 복을 받아 임금을 바꾸고 사방의 땅을 통합하며 자손이 번창한다. 덕이 없는 이는 재앙을 당하거나 멸망한다. 다섯 행성이 모두 크면 일도 크고, 모두 작으면 일도 작다.
http://www.epochtimes.com/gb/2/4/18/n184273.htm
(후다닥)
[죽서기년]에 은말주초에 오성이 방수(房宿)에 모였다(五星聚房)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죠.
환단고기의 [오성취루]는 이 [오성취방]에서 가져왔을 확률이 높습니다.
링크해두겠습니다(__)
박창범의 논문은 문제가 많습니다
http://katnani.egloos.com/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림 넣는 법을 알아 붙여 넣었습니다.^-^
http://goodmaniac.blogspot.kr/2013/11/blog-post_72.html
http://cafe.daum.net/molanthro/I4rp/432?q=%C7%D1%B1%B9%C0%CE%C0%C7%20%B8%F0%B0%E8%20%C7%CF%C7%C3%B7%CE&re=1
모두 파미르/티벳에서 출발해서...
신라계열은 중국남부를 거쳐 한반도로, 백제계열은 중국감숙성을 거쳐 발해만, 한반도로 이동
고구려는 몽골/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동...
또한 최초 파미르/티벳에서 시작한 부계 하플로 K타입이 유럽형 주류하플로 R로, 북방유라시아대륙의 주류인 N타입 및 중국,동아시아 주류 하플로 O타입으로 각각 분기한 것으로 분석되며, 그 최초의 시기는 약 BC 45,000년 전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즉 유전자 분석 결과로 보면, 오늘날 유럽과 중앙아시아, 아시아의 주류 하플로그룹의 시원이 파미르/티벳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단편적으로 간혹 나오지만, 조만간 더 유전자데이터가 축적되면 아마도 종합적인 분석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하겠죠...
어쨌든 인간의 유전자 특성은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적인 절대증거가 될테니까요...
역사연구에서도 조만간 본젹적으로 참조가 되기 시작하겠죠...
역사연구를 하시는 분들도 이런 분야를 참고하시면 연구에 도움이 되실 듯 합니다...
좋은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멀고먼 선사시대의 얘기가 아닌데요...
고구려,백제,신라의 기원이 한반도 이외 지역일 가능성이나 BC2~3천년 전 중국남부에서 일련의 집단들이 벼농사문화를 가지고 한반도로 이주했을 가능성 등등은 여기 카페에서도 중요한 논제인 듯해서 자료를 소개했습니다만... 분자인류학 연구결과들이 거의 대부분 역사시대를 다루게 있는데...
인간의 유전자 만큼 확실한 역사증거가 또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당대 인간의 관념이 개입된 문헌자료보다 유전자 등이 훨씬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자료가 아닌가요???
최근 세계적인 역사학이나 인류학 논문에서도 분자인류학적인 연구와 증거들이 빠지지않고 나오던데,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아직 별로 관심들이 없으신가보네요...
흠
다른 카페들은 무슨 단군이 어떻고 너무 허황되어 여기 카페에서는 무척 현실적이고 근거와 논리에 기반하는 것 같아서 소개를 했었는데...
알겠습니다. 아마도 제가 역사학을 잘 몰라서 그런가봅니다... 죄송...
여기 자료들도 불과 BC 1천년에서 2천년 정도 분석대상입니다...
청동기의 기원에 관한...
반면에 동아시아의 청동기유물이 몇천년 전 유물들도 나오는데...
과연 동아시아가 청동기문명에서 서양에 그렇게 뒤졌는가 반문해볼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연구하시는데 참조하시기 바랍니니다...
지난 달에 네이처지에 발표된 Allentoft et al,<Population genomics of Bronze age Eurasia> 는 금년 초에 나온 Reich et al. <Massive migration from the steppe is a source for Indo-European languages in Europe> 과 함께, 고인골에 대한 직접적인 DNA측정과 비교를 통해, 언어학계에서 오랜 기간 논쟁이 되어온 Indo-European language의 기원과 확장에 대한 양대가설 1) 카스피해 연안 스텝 유목민 기원설 ,2)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동 농민 기원설 중, 1)의 스텝기원설에 더 사실과 부합한다는 것을 확정지은 기념비적 논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도 박교수 논문에 문헌자료로만 공방을 하시는 듯해서...
최신 미국 NASA의 천문현상 검색싸이트입니다...
천문기록을 직접 확인해보면, 논란이 맞는지 안맞는지 직접 알수 있을 겁니다...
기록의 일식현상에 관한 몇가지 날짜를 샘플로 같이 올립니다...
직접 찾아보시면 논란이 없을 듯 한데요...
http://eclipse.gsfc.nasa.gov/SEatlas/SEatlas.html
혁거세한 4년: BC 54년 5월9일
혁거세한 56년: BC 2년 2월5일
남해왕 13년: AD 16년 8월21일
지마왕 13년: AD 124년 10월25일
벌휴왕 3년: AD 186년 7월4일
그리고 혹시 여기 이 날짜들에 대응하는 중국의 일식기록이 있나요???
있는지 없는지 비교하면 중국쪽 기록을 copy했는지 여부도 간단히 알수 있을텐데...
그리고 이런 천문현상을 고성능 컴퓨터로 본격적으로 재현하게 된 시기가 1990년대 중반 이후입니다. 최신 기술로 역사의 천문기록을 조작하기 불가능했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