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광개토대왕비를 왜 가져가려 했을까? *..역........사..*



1883년 일본군 밀정 포병 대위 사코 가케아키(酒勾景信)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육군참모본부로 가지고 왔다.

그가 가지고 온 탁본은 본래 쌍구본(雙鉤本)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묵수확전본이라고 보고 있다.
비문을 탁본하는 방법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비석에 먹을 칠한 뒤 종이를 붙이고 비석을 두들겨 비문을 떠내는 탁출법과 비문에 종이를 대고 비문의 글자를 베껴서 쓰는 모사법이 있다.
모사법 중 비문의 획을 따라 그림을 그려내는 것을 쌍구법이라 하는데 이렇게 베껴낸 글자 테두리 안 쪽을 먹으로 칠하는 것을 다시 쌍구확전법이라고 한다. 묵수확전법이란 쌍구를 하지 않고 글자를 그대로 베껴낸 것을 가리킨다.

비문은 빨리 해독되어 다음해인 1884년 아오에 슈(靑江秀)가 [동부여 영락대왕 비명 해解]라는 책을,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고구려 고비 고考]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1889년에는 요코이 다다나오의 연구를 바탕으로 비문과 해석이 [회여록會余錄] 제5집에 실렸다. 앞의 2책은 간행되지 않았으나 [회여록]은 광개토대왕 비문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은 신묘년(391년) 조의 기사다. 이 기사를 따르면 왜가 신라, 백제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 실증사학의 대가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은 이 비석을 일본으로 가져갈 생각을 했다.

나는 일제가 광개토대왕비를 가져가려 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바로 고대일본이 남한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강화를 위해 가져가려 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온 뒤 임나일본부 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뒤에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 비문을 따르면 결국은 일본이 패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병신년(396년)에 서부터 기해년(399년)까지 백제를 토벌하고, 경자년(400년)에는 신라를 도와 임나가라를 정벌했으며, 갑진년(404년)에는 다시 백제와 손을 잡은 왜를 격멸하였다는 내용이 신묘년 조 다음에 적혀있다.

광개토대왕비는 일본군의 패배, 그것도 대패가 기록된 비석이다. 이런 것을 증거가 된다할지라도 굳이 자랑스럽게 가져다 전시할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럼 일제는 이것을 왜 가져가려 한 것일까?

시라토리는 1905년 8월에 [만주지명담 호태왕 비문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무렵 일본은 러일전쟁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 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었다.

고구려는 마치 지금의 러시아와 같은 관계여서 일본이 반도 남부에 세력을 얻으려 하면 고구려가 이를 누르려 한다.
남부의 삼국을 지배하고 또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해서든지 북부의 고구려를 꺾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관계는 마치 일본이 지금의 조선을 충분히 휘어잡기 위해서는 북의 노국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일본은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 북쪽 세력과 싸워왔다는 것이 시라토리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증거가 광개토대왕비였다.

다만 이 비문에는 일본에게 재미없는 것이 적혀 있다.
사실 일본은 고구려에게 졌던 것 같다. 고구려에 패하고부터 일본의 세력이 떨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일본이 대륙의 전쟁에서 패했다면 다시 대륙으로 진출하기는 쉽지 않다.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러시아를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옛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라토리는 위와 같이 현재의 상황과 고대의 상황을 직결하여 연결했다. 그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승을 자랑하지 말라는 요지의 강연을 하며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이런 사실을 적은 비를 내가 가지고 오자고 말하면 어쩌면 재미없는 일을 말하는 자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처럼 패한 것을 있는 그대로 우리 후세에 알린다면 자손의 앞날에 비상한 인상을 주어 분개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패한 결과를 알게 하는 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를 일본에 가져가려고 한 이유는 그 비에 적힌 패배를 보고 일본 국민이 분발하게 만들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광개토대왕비가 일본의 패배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은 꽤나 유명했다. 국수주의자들은 이런 점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연서南淵書]라는 위서도 등장한다. 견수사로 중국 수나라를 다녀오던 일본 사신 미나미부치 쇼안(南淵請安)이 귀국하다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그 전문을 적어온 책이 남연서라는 것이다. 남연서에 따르면 왜는 고구려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근자에 [청연서]라는 위서가 유사역사학 신봉자들 사이에 떠돈다던데, 이름마저 유사한 것을 보면 순간 섬찟해진다.)

때로는 우리는 지극히 우리 입장에서만 생각하게 된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광개토대왕비가 임나일본부 설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지만, 반면에 임나일본부설의 거짓을 증명할 수도 있으며, 결정적으로는 일본의 패배가 기록된 비석이었다.

올해 북한에 돌아가 화제가 되었던 [북관대첩비]도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옮겨 세워진 [북관대첩비]. 이 비석은 정문부(鄭文孚)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무찌른 전공을 기록한 비석이다. 왜 이 비석을 야스쿠니 신사에 세운 것일까? 자신들 조상의 치명적인 패배를 기록한 비석을. 이 비석을 약탈해 간 것이 1905년, 러일전쟁 기간이었다는 것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숨기기 위해서 가져갔다면 그것을 사람 눈에 띠는 장소에 둘 일이 뭐 있었을까? 이것 역시 북방 세력에 지면 안 된다는 반성의 표시로 옮겨간 것이다. 이런 것이 당시 일본의 정서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분발하자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조급해지면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한다. 파리를 불태우려 한 나찌의 마지막 광기라든가, 일제가 마지막에 우리 유적을 파괴하려한 행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각도 경찰부장에게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이라는 명령을 하달하는데, 이것은 항일 기록이 있는 고비들을 폭파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었다. 이 명령은 실제로 행해졌고 가령 남원의 [황산대첩비] 같은 경우 폭파되었던 것을 현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이런 일은 그야말로 광기에 사로잡혔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패망의 징조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총독부 건물이라고 멋지게 철거해버린 중앙청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뭘까...

이상의 글은 이성시 교수의 [만들어진 고대]를 적극 참조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덧글

  • 머스타드 2006/06/14 22:10 #

    아.. 그렇군요.. 항상 일본이 광개토대왕비를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증거로 쓰려고 한다는 것만 관심을 가졌지, 이것이 결국 일본의 대패를 의미한다는 쪽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한쪽으로만 관심을 가지면 이렇게 상식적인 사고도 마비되는군요. ^^;
  • 치오네 2006/06/14 22:17 #

    <만들어진 고대>에도 일본이 광개토대왕비를 가져가려 했던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초록불님께서 어떤 식으로 해석하실지 궁금해지네요. ^^
  • 페로페로 2006/06/15 07:20 #

    그건 별로 상관 없었겠죠, 그 전에 한반도에 일본이 없었다는 것으로 패배했다는 것은 녹여 질것이고 되려 임나일본부로 인하여 원래는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한일합방에 적당한 양념도 될것이고 거기다 원래 침략자들은 남의 나라 문화제를 긁어 가는 걸 좋아라 하더군요 프랑스도 그렇고...
  • 초록불 2006/06/15 09:35 #

    머스타드님 / 저도 사람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초록불 2006/06/15 09:36 #

    치오네님 / [만들어진 고대]를 보고 깨달은 이야기였습니다.
  • 초록불 2006/06/15 09:36 #

    페로페로님 / 역시 우파이십니다...^^;;
  • 이준님 2006/06/15 11:06 #

    1. 광개토대왕비 변조건만 해도 70년대 후반에 나온 이야기였는데 80년대 대대적으로 우리쪽에서 이슈화 되었습니다. (뭐 독립기념관 건립이나 역사왜곡 문제가 걸려 있었지만) 그걸 가장 대중적으로 이슈화한게 최인호씨의 "잃어버린 왕국"이었죠. -거기서도 "수치의 역사라서 폭파시켜버릴" 계획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2. 소시적에 친일 승려중에는 무려 "사명대사 전적비"를 깨버린 분도 있다더군요.

    3. 1943년의 유림 숙정건에 모티브를 얻은게 김정한 선생의 "수라도"에 있는 한 에피소드입니다. 여기서는 "한산도 사건"이라고 표시되죠. 원작을 발라먹은 문화방송의 압박이 심하지만

    4. 결국 그 시대에도 "제국의 적은 북방이다"였군요. 이 전통은 냉전때는 소련,. 지금은 북한으로 바뀌었지만

    ps: 이전에 조선일보 연재 소설중에 19금 삽화가 많은게 잃어버린 왕국이랑 사설 정감록이었죠. 사설..은 내용부터 그림까지 성적으로 그랬고 잃어버린...은 참수와 신체 절단이 극강이었습니다. (일본 관련은 맘에 안들지만 대당 전쟁부분은 상당 수준이었죠)
  • 독심호리™ 2006/06/15 11:14 #

    오래 동안 후손에게 잊혀지지 않을 교훈으로 삼는 것은 좋으나

    없애야 할 것은 없애야 한다고 봅니다.

    조상이 당한 치욕은 독립기념관 같은 것을 통해서도 알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일본인들이 관광와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자기네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착취했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보다, 지금 일본에서 툭툭 망언을 던지는 사람들이 가지는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 같은 것도 많지 않을까요?

    조선 총독부 없앤 것은 개인적으로 찬성합니다.
  • 초록불 2006/06/15 12:14 #

    독심호리님 /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요. 경복궁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크게 반감은 없습니다. 경복궁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니까요. 다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는 거지요.
  • 리라이벌 2006/06/15 13:44 #

    광개토 대왕하니까 갑자기 생각난건데 소서노가 3국(고구려,백제,왜)의 기초를 잡았다는게 정설인가요? 재야의 정신나간 학설인가요? 백제까지는 이해가 가되 왜라니..... 그리고 온조백제가 비류백제의 신하국인 십제에서 출발해서 비류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멸망했고 근초고왕등이 온조백제에서 나왔다는 학설을 보면 근초고왕이 비류백제를 치고난이후에 평양성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되는건데 이 학설도 재야의 정신나간 학설인지요? 가르쳐 주시길...;;;
  • 초록불 2006/06/15 14:22 #

    리라이벌님 / 김성호의 비류백제설인가 봅니다. 매우 근거가 희박한 학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서노는 백제에서 죽은 것으로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질문해주신 이야기를 전에 본 적이 없어서 근거가 무엇인지, 누가 주장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 DJHAN 2006/06/15 16:17 #

    총독부 건물은 폭파한 게 아니라 철거한 겁니다. 그리고 그거 철거 당시에 '뜯어보니 놀라울 정도의 부실공사더라'란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김03 대통령에 대해선 말이 많습니다만... 하나회 박살, 금융실명제 실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등은 '업적'이라고 평가해야 할 겁니다. 없애야 할 걸 없애지 못하고 뭉기적거리는 건 대외적으로 쪽팔리고 대내적으론 화근을 남기는 일일 뿐입니다. 하나회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DJ 정권이 들어서기 무섭게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걸요?
  • 이준님 2006/06/15 17:33 #

    1. 조선총독부 폭파건은 "최초 안"에만 있었습니다. 원래 기획이라면 덴노(천황이라고 쓰고 싶지만 다구리의 압박으로)의 항복 선언과 함께 애국가가 울리면서 폭파하는 그런 안이었죠. "공법상의 이유"로 무산되었습니다. -_-;;;

    2. 조선총독부 철거에 앞장선 바로 그 단체가 나중에 03옹이나 그 정당을 친일 정당이라고 씹은건 희대의 압박이죠. -_-;;; (전 그래서 그런류의 단체가 정치와 결합하면 상당히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3. DJHAN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쿠데타가 아니더라도 "군부가 키운 정치인"이나 "정당"이 충분히 (여론 조작이나 이런 방법으로) 합법적으로 정권을 취득하는 방법도 있지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말아먹은건 일본의 "군부" 쿠데타가 아니었습니다. -_-;;; 아울러 이승만이 그렇듯이 군부 이용해서 이상한 짓하는 문민 지도자도 없어진게 공입니다.
  • 리라이벌 2006/06/15 21:50 #

    온조백제가 십제로 독립해나올때 왜에 있던 소서노가 백제로 와서 둘을 중재했는데 온조가 소서노를 죽이고 독립했다더군요(지금 나가면 평생 눌러살야야 된다며)아이고 머리야....... 어떻게 십제를 가지고 저렇게 까지..... 에효........ 정말 재야는 못말리겠습니다......
  • 초록불 2006/06/15 23:43 #

    DJHAN님 / 그렇군요. 폭파가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게 기억에 남았나봅니다.
  • 大逝遠反 2006/06/16 07:30 #

    저는 임나일본부를 "부정"할 근거는 현재 없다고 보며, 오히려 나날이 현실화되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관방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의 희망사항이 무엇이든지간에. 이성시 선생의 만들어진 고대는 제가 학부 초년에 열독했던 책이지요.
  • 초록불 2006/06/16 11:05 #

    大逝遠反님 / 어느 정도냐의 문제가 아닐까요? [만들어진 고대]를 읽다보니 세계학계와 한국학계가 얼마만큼 동떨어진지 알게 되어 좀 당혹스럽네요. 문제는 그 간격을 인정하는 순간 친일파로 분류되는 현실이랄까요...(일본학자의 논리를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 같은 건 관심사항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정말 안습입니다.
  • 초록불 2006/06/16 11:13 #

    리라이벌님 / 음... 가끔 그사람들이 소설을 쓸 능력이 안되어서 역사를 한다고 구라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초록불 2006/06/16 12:00 #

    비밀글 / 그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작해야 하니 보낼 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2006/06/16 12:0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6/06/16 12:0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6/06/16 12:10 #

    비밀글 / 여기도 폭우 중인데 영국이 무척 가깝게 느껴집니다....^^;;
  • 치오네 2006/06/16 14:33 #

    이성시 선생님의 책을 읽으셨군요. 읽고 나서 옆방에 있는 와세다 애를 괴롭히면서 이 선생님 강의는 어떠냐 요즘엔 뭘 연구하시냐 등등을 물었는데... 그 일본애 중국어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던 슬픈 기억이 떠오릅니다. ㅜ_ㅜ
  • 초록불 2006/06/16 16:00 #

    치오네님 / 이번에 큰맘먹고(ㅠ.ㅠ) 샀지요. 아, 그런데 이 [민족]이라는 개념을 어찌 해야 좋을지 크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민족]이 근대에 형성된 개념이라는 것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데... 잘 설명해 낼 자신이 없어졌어요. 뭔가 서양사를 좀 들여다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만 드는군요. 잘 정리된 책이 뭐가 있을는지...
  • 리라이벌 2006/06/16 22:38 #

    大逝遠反/부정할 근거도 없지만 긍정할 근거도 없다고 봅니다. 현제 출토되고 있는 가야 유물들만으로도 임나일본부는 부정할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임나일본부를 인정한다면 대연동 15호 고분에서 나온 파형동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지금까지 파형동기는 일본천황가의 상징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나요? 근데 그것이 어째서 가야의 성지인 김해에서 그것도 고분에서 나온건지.... 참 역사는 파고들어가면 갈수록 미스테리로군요..... 그리고 지금 발굴되는 말안장과 말 갑옷등을 보면 일본이 상륙해서 정벌했다고 보기에는 억지가 있다는게 제 입장입니다. 당시의 그정도 기마를 보유한 국가는 고구려가 유일시 하지 않았나 싶네요.... 그런데 그런 나라를 왜가 정벌했다라.... 그것도 당시의 철제 기술도 없이요? 가야에서 나오는 철의년대가 일제의 철유물의 연대보다 빠른건 어찌 설명하시려고 그러실까요...... 아니면 가야가 왜를 정벌했다는 말이 옳다는 말씀이신가요?
  • 大逝遠反 2006/06/16 22:53 #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일본서기의 기록을 입증하는 유적들이 속속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만. 가령 2년 전에 고당(高堂)유적이 경남 함안에서 발견되었다든지, 임나가 전남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는 실정에서, 전남 지역에서 가야 관련 유물이 발견되고, 최근에는 고흥에서 일본식의 부장형식을 갖춘 무덤이 발견된 것도 저는 임나일본부를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문화의 우월함이라든지, 병장기의 월등함이 반드시 무력의 강약을 결정짓는 것 또한 아님은 진한제국이 오랫동안 외적에게 시달렸음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을 온전히 부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 大逝遠反 2006/06/16 22:56 #

    물론 "獲加多支鹵大王萬壽無疆"정도의 명문이 발견되지 않는 바에야, 임나일본부가 온전히 증명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어떤 사료(출토와 전세문헌을 합하여)를 봐도 임나일본부설을 적극적으로 부정할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 리라이벌 2006/06/16 23:13 #

    大逝遠反 /외적과 왜를 오해하시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고려와 조선때도 그렇고 외적에게 시달린건 어제오늘일이 아니었습니다. 외적이란 말그대로 도적때입니다. 고려와 조선이 왜보다 못해서 외적 즉 왜구를 못막은게 아니라는것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한나라를 완전히 정벌하기 위해서는 그나라의 병력의 약 3배이상이 필요하며 그후에도 여러 교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삼국지등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실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일본식의 부장형식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일본식인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파된것인지 알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임나일본부의 근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함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에 관한기록이 단 한줄밖에 존재하지 않고 고사기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 리라이벌 2006/06/16 23:13 #

    그런상황에서 섣불리 임나일본부를 인정하는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바다건너서 가야를 정벌했다는거 역시 믿기지 않는 주장중에 하나입니다. 당시의 철기기술도 없는상태에서 상륙을 해서 정벌을 했다는건 믿기지 않는것이죠...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왜와 가야는 동맹관계가 아니었나 조심스러운 추측입니다. 물론 임나일본를 주장하는것 중에 삼국사기에 신라가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자료를 꼽으실수 있겠으나 실제로 존재함이 분명했던 응신천왕 (그이전의 천왕은 가짜라고 이야기 하죠?)이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고 한 후라고 본다면 그만한 여력이 왜에 남아있었을까도 의심스러운 대목입니다.
  • 大逝遠反 2006/06/16 23:44 #

    리라이벌/진한대의 흉노가 단순한 도적떼입니까. 무제가 나타나기 전에는 한나라가 흉노에 조공을 바칠 지경이었는데. 《삼국사기 석우로열전》만 읽어봐도, 이미 왜는 한반도에 자주 출몰해서 신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 리라이벌 2006/06/16 23:50 #

    大逝遠反/자 흉노와 왜에 관해서라..... 자 흉노는 기마민족입니다. 우선적으로 기마민족은 생각과는 다르게 철제조기술이 뛰어났습니다.(한만큼은 아니었지만)그리고 무제가 나타나기전까지 조공을 바칠지경이라 하셨는데 솔직히 맞싸우면 이기는것은 진한이었습니다. 그리할수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 많은 오량케와 더불어 내부사정도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왜는 말그대로 해적입니다. 내오는 배를 약탈하고 상륙하여 여러 마을들을 약탈해갔지요. 그리고 양쪽모두 기동성이 뛰어납니다. 치고 빠지기에 능하다는 말이 되는거지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당시의 신라는 기마부대의 관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가야에서는 발굴되는 족족 기마관련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지요. 즉 기동면에 있어서 왜구에게 그다지 밀릴 이유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약탈행위를 시작할무렵 이미 기마부대는 도착할수 있었지요. 그런상황에서라면 당연히 보병보다 기마부대가 우수하다는 겁니다. 말의 이점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 이유로 보병만으로 샹륙했을 왜가 가야를 정벌할수 없었다는 이유도 함께 가지고 있는것이지요.
  • 大逝遠反 2006/06/16 23:55 #

    기마관련 유물이 발견되는 것과는 별개로, 가야의 영역이 기병을 운용하기에는 그다지 좋은 지형이 아닌 듯 싶습니다만.
  • 大逝遠反 2006/06/17 00:03 #

    게다가 제가 아는 한, 가야의 기마 관련 유물은 십 수건이며, 그것이 의장용인지 실전용인지도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이것으로서 가야가 기마부대를 운용하여 왜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초할 수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좀 어렵지 않을까요.
  • 리라이벌 2006/06/17 00:07 #

    강을끼고 있고 수로왕의 말대로 둘러쌓인 지형이라면(금관가야)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 무대가 김해평야지대라면 더욱더요.
  • 大逝遠反 2006/06/17 00:08 #

    "김해평야"는 가야 시대에 없었습니다...
  • 大逝遠反 2006/06/17 00:10 #

    또한 왜는 단순한 해적일 수가 없습니다. 단순한 해적이 한나라에 표문을 보내며, 한왜노국왕의 인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 리라이벌 2006/06/17 00:18 #

    자 제가 마지막으로 왜가 가야를 정벌했다고 할수 없는 이유 몇가지를 들어보죠. 일본천황가에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느천황때인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그걸 토기로 대체하기로 결정한 천황이 있었지요. 근데 여기서 강한 의문이 제기됩니다. 순장풍습이란 북방의 기마민족의 풍습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왜가 순장의 풍습을 가질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당시의 가야는 여러장신구들을 갖춘 귀족체제가 발족하던 상태였습니다. 그런상황이 가능하려면 최소한의 군사력이 있어야 하지요. 그 군사력들은 왜가 가야를 정발할때 쌈사먹었다는 소리가 될까요?
  • 大逝遠反 2006/06/17 00:22 #

    순장은 농경사회인 중국에서도 많이 했는데요. 은대부터 춘추전국기까지. 중국에서도 나중에 순장을 도용으로 대체합니다만, 맹자에서는 그나마 그것도 비난하는 말이 나오지요.
  • 리라이벌 2006/06/17 00:51 #

    당시 중국은 여러 제후국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시기지요? 농경사회라고 할수도 있지만 혼란사회라고도 할수 있지요. 그리고 제말은 그게 어떻게 일본으로 흘러들었냐는 말입니다. 후에 중국은 순장을 도용으로 대체 하게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원후에도 순장풍습이 남아있는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은 우리보다도 오래 순장을 고집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 大逝遠反 2006/06/17 00:55 #

    순장은 춘추전국기보다도 은주대에 더 성행했으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리고 순장풍습은 전세계적으로도 문명의 초기 단계에서는 흔히 보이는 것입니다.
  • 大逝遠反 2006/06/17 00:59 #

    무엇보다도 "순장풍습이란 북방의 기마민족의 풍습"이라 하는 것 부터가 문제라고 봅니다.
  • 초록불 2006/06/17 01:42 #

    두 분의 논쟁이 흥미진진합니다...^^;; 순장에 대해서는 大逝遠反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신라도 지증왕 때 순장을 폐지하던가 그렇지요? 지금 이야기하는 기마족이 유목민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삼국은 예전에 그 단계를 벗어난 것이 맞습니다. 농경민이라고 해서 기마병을 거느리지 못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다른 이야기들은 단편적인 지식밖에 없어서 함구하기로 합니다. 부정확한 지식으로 이야기해봐야 도움이 될 것도 없으니까요.
  • 루드라 2006/06/17 03:43 #

    제가 김해 사람인데(지금 살고 있는 집이 유명한 대성동 패총 바로 아래입니다) 김해평야가 가야시대에는 없었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혀 없는 건 아니었고 절반 가량만 있었다고 하는게 정답입니다. 하지만 김해지역은 산이 아주 낮고 흔히 말하는 김해 평야 부분을 제외하고도 평탄한 지형이 많아 기마병을 운용하는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을 겁니다.

    일단 임나의 실존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그게 과연 일본의 식민지였나 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 같습니다. 당나라 때의 신라방처럼 단순한 상업 거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나가 일본의 상업거점이라는 뜻이 아니고 임나라는 소국 혹은 지역에 일본인들의 상업거점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 리라이벌 2006/06/17 14:19 #

    자, 진한때부터 옛 가야의 영토에서는 많은 상업적 거래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당백전(맞나 모르겠지만?)같은 가야이전의 중국 화폐들이 가야 유적지에서 발견되는것만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구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해적이 아니면 국가단위로 운용되는 군대라는 말씀이십니까? 흉노는 말그대로 겨울내 지낼 식량이 없기 때문에 추수가 끝난 가을에 약탈을 해서 겨울을 지낸겁니다. 그것이 하도 극성이라 한에서는 미인을 주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거죠. 천고마비의 어원을 보시면 알수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는 그런상황이 아니었다고 본다면 도대체 그만한 여력을 국가차원에서 운용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마도 고대 왕조의 기틀을 잡았을것으로 생각되는 응신천왕은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 시대 보다 훨씬 후에 인물입니다. 그런상황에서 왜가 왜의 전 군사병력을 끌어모아서 왜적을 시켰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겁니까? 아니 그것보다 왜에 그럴만한 역량을 가진 왕과 그런 기반이 있었나요?
  • 나루나루 2006/06/27 11:34 #

    뒷북이지만 가토 가요마사(加藤淸正) -> 기요마사로 오타 정정이요~
  • 초록불 2006/06/27 11:40 #

    나루나루님 / 아, 그런가요? 사실 저는 그냥 한자발음으로 읽기 때문에 일본 발음은 늘 헷갈리네요. 처음에는 기토 가요마사라고 적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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