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일본군 밀정 포병 대위 사코 가케아키(酒勾景信)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육군참모본부로 가지고 왔다.
그가 가지고 온 탁본은 본래 쌍구본(雙鉤本)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묵수확전본이라고 보고 있다.
비문을 탁본하는 방법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비석에 먹을 칠한 뒤 종이를 붙이고 비석을 두들겨 비문을 떠내는 탁출법과 비문에 종이를 대고 비문의 글자를 베껴서 쓰는 모사법이 있다.
모사법 중 비문의 획을 따라 그림을 그려내는 것을 쌍구법이라 하는데 이렇게 베껴낸 글자 테두리 안 쪽을 먹으로 칠하는 것을 다시 쌍구확전법이라고 한다. 묵수확전법이란 쌍구를 하지 않고 글자를 그대로 베껴낸 것을 가리킨다.
비문은 빨리 해독되어 다음해인 1884년 아오에 슈(靑江秀)가 [동부여 영락대왕 비명 해解]라는 책을,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고구려 고비 고考]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1889년에는 요코이 다다나오의 연구를 바탕으로 비문과 해석이 [회여록會余錄] 제5집에 실렸다. 앞의 2책은 간행되지 않았으나 [회여록]은 광개토대왕 비문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은 신묘년(391년) 조의 기사다. 이 기사를 따르면 왜가 신라, 백제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 실증사학의 대가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은 이 비석을 일본으로 가져갈 생각을 했다.
나는 일제가 광개토대왕비를 가져가려 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바로 고대일본이 남한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강화를 위해 가져가려 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온 뒤 임나일본부 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뒤에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 비문을 따르면 결국은 일본이 패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병신년(396년)에 서부터 기해년(399년)까지 백제를 토벌하고, 경자년(400년)에는 신라를 도와 임나가라를 정벌했으며, 갑진년(404년)에는 다시 백제와 손을 잡은 왜를 격멸하였다는 내용이 신묘년 조 다음에 적혀있다.
광개토대왕비는 일본군의 패배, 그것도 대패가 기록된 비석이다. 이런 것을 증거가 된다할지라도 굳이 자랑스럽게 가져다 전시할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다. 그럼 일제는 이것을 왜 가져가려 한 것일까?
시라토리는 1905년 8월에 [만주지명담 호태왕 비문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무렵 일본은 러일전쟁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 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었다.
고구려는 마치 지금의 러시아와 같은 관계여서 일본이 반도 남부에 세력을 얻으려 하면 고구려가 이를 누르려 한다.
남부의 삼국을 지배하고 또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해서든지 북부의 고구려를 꺾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관계는 마치 일본이 지금의 조선을 충분히 휘어잡기 위해서는 북의 노국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일본은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 북쪽 세력과 싸워왔다는 것이 시라토리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증거가 광개토대왕비였다.
다만 이 비문에는 일본에게 재미없는 것이 적혀 있다.
사실 일본은 고구려에게 졌던 것 같다. 고구려에 패하고부터 일본의 세력이 떨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일본이 대륙의 전쟁에서 패했다면 다시 대륙으로 진출하기는 쉽지 않다.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러시아를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옛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시라토리는 위와 같이 현재의 상황과 고대의 상황을 직결하여 연결했다. 그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승을 자랑하지 말라는 요지의 강연을 하며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이런 사실을 적은 비를 내가 가지고 오자고 말하면 어쩌면 재미없는 일을 말하는 자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처럼 패한 것을 있는 그대로 우리 후세에 알린다면 자손의 앞날에 비상한 인상을 주어 분개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패한 결과를 알게 하는 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광개토대왕비를 일본에 가져가려고 한 이유는 그 비에 적힌 패배를 보고 일본 국민이 분발하게 만들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광개토대왕비가 일본의 패배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은 꽤나 유명했다. 국수주의자들은 이런 점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연서南淵書]라는 위서도 등장한다. 견수사로 중국 수나라를 다녀오던 일본 사신 미나미부치 쇼안(南淵請安)이 귀국하다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그 전문을 적어온 책이 남연서라는 것이다. 남연서에 따르면 왜는 고구려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근자에 [청연서]라는 위서가 환빠들 사이에 떠돈다던데, 이름마저 유사한 것을 보면 순간 섬찟해진다.)
때로는 우리는 지극히 우리 입장에서만 생각하게 된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광개토대왕비가 임나일본부 설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지만, 반면에 임나일본부설의 거짓을 증명할 수도 있으며, 결정적으로는 일본의 패배가 기록된 비석이었다.
올해 북한에 돌아가 화제가 되었던 [북관대첩비]도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옮겨 세워진 [북관대첩비]. 이 비석은 정문부(鄭文孚)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무찌른 전공을 기록한 비석이다. 왜 이 비석을 야스쿠니 신사에 세운 것일까? 자신들 조상의 치명적인 패배를 기록한 비석을. 이 비석을 약탈해 간 것이 1905년, 러일전쟁 기간이었다는 것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숨기기 위해서 가져갔다면 그것을 사람 눈에 띠는 장소에 둘 일이 뭐 있었을까? 이것 역시 북방 세력에 지면 안 된다는 반성의 표시로 옮겨간 것이다. 이런 것이 당시 일본의 정서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분발하자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조급해지면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한다. 파리를 불태우려 한 나찌의 마지막 광기라든가, 일제가 마지막에 우리 유적을 파괴하려한 행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각도 경찰부장에게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이라는 명령을 하달하는데, 이것은 항일 기록이 있는 고비들을 폭파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었다. 이 명령은 실제로 행해졌고 가령 남원의 [황산대첩비] 같은 경우 폭파되었던 것을 현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이런 일은 그야말로 광기에 사로잡혔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패망의 징조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총독부 건물이라고 멋지게 철거해버린 중앙청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뭘까...
이상의 글은 이성시 교수의 [만들어진 고대]를 적극 참조하여 만들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