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와 봉건제 *..역........사..*



한국역사와 봉건제

95/06/10 13:28

봉건제란 무엇인가?

1.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 잡자!

우리 역사에 봉건제가 있었는가?

이것이 이글의 주제입니다. 그 답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ꡒ봉건적 잔재ꡓ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것을 ꡒ봉건적 잔재ꡓ라고 여기는가요? 그것은 대개 가부장
적인 귄위, 남존여비, 독재권력, 유교문화의 잔재 등에 사용됩니
다. 과연 이것이 ꡒ봉건적 잔재ꡓ일 수 있을까요? 이것은 그저
ꡒ왕조의 유산ꡓ일 뿐입니다. 우리는 봉건시대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조선시대를 연상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봉건제의 국가였을
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은 분명 중앙집권의 국가이
며 만일 유럽의 시대구분법에 따라 비교한다면 절대왕정입니다.
봉건제 국가 다음에 이뤄지는 절대왕정이외에는 비교가 될 수 없
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조선을 봉건제 국가처럼 여기는 것일까
요?

이상하지요? 여기에는 ꡒ잘못된 역사인식ꡓ이 분명 있습니다. 그
럼 지금부터 ꡒ봉건제ꡓ의 비밀에 대한 탐험을 시작합니다. 전개
될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2> 봉건제란 무엇인가?
<2-1> 서양의 봉건제
<2-2> 중국의 봉건제
<2-3> 일본의 봉건제
<3> 일제가 꾸민 봉건제의 음모
<4> 결론 - 시대구분의 자주성

<2> 봉건제란 무엇인가

<2-1> 서양의 봉건제

사실 잘못된 역사인식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封建制란 본래
중국의 특수한 역사적 인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영어 ꡒFeudalismꡓ의 번역어로 사용하면서 혼선의 고리가 주어집
니다. 먼저 서양의 봉건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진다면 혼선을
가려내게 될 것입니다.

봉건제-Feudalism(봉건체제, 봉건사회란 말도 다같은 범주입니다)
이란 서양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 낳은 서양의 것입니다. 흔히
봉건제가 지배했던 시대를 중세-Middle Age라고 부릅니다(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 우리는 중세라고 하면 흔히 고려를 연상합니다.
이 역사인식의 괴리!).

봉건체제의 특징은 (1) 사회계층의 최상위에 있는 전문적인 군사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간에 개인적인 상호의존관계에 놓여 있
으며 (2) 부동산권이 극단적으로 재분할되고 거기에 상응한 토지
권리의 상하관계가 생겼으며 (3) 국가의 公權이 최상위계급의 사
람들에 의해 분산, 행사되었다는 점 등에 있습니다.

이런 특징의 사회는 로마제국이 몰락한 시기와 노르만인이 침입한
9세기 중엽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1세기를 전후하여 유럽 전체에
퍼졌습니다. 카롤링 왕조하에서 프랑크왕국이 쇠퇴함에 따라 노르
만족의 침입은 더욱 심해졌고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 봉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결국 봉건제가 형성된 원인은 외적의 침입(게르
만, 노르만 등)에 중앙권력이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자 자위적
인 성격을 가진 지방권력에 의해 형성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
다. 마찬가지로 봉건제의 몰락은 왕권이 강화되면서 일어나게 됩
니다. 즉 십자군과 백년전쟁 등을 거치며 봉건영주들은 몰락하게
되고 왕권은 강화되면서 봉건제는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마르크스
적인 시각에서는 이렇게 다루지 않으며 봉건제를 생산양식의 문제
로 파악합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등장함으로 봉건주의는 막을
내리며 이를 촉진한 것은 발전한 생산력을 낡은 제도가 따라가지
못함으로 농민반란에 의해서 촉진되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이러한
파악은 무척 날카로운 것이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의 교조적인 적용
으로 인해 유럽 이외의 지역 역사는 많은 왜곡이 가해집니다. 이
에 대해서는 뒷부분에 다뤄질 것입니다).

봉건사회는 봉토-feudum에 의해 주군-lord와 종신-vassal의 법적
관계가 형성되며, 이 관계는 ꡒ계약ꡓ으로 규정됩니다. 종신은 의
무를 다하는 한 자신의 영지에서는 완벽한 행정, 입법, 사법의 권
리를 갖습니다. 따라서 왕의 권력은 사실상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왕의 영지에 국한될 뿐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주군은 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왕에게서 봉토를 받은 영주는
그 봉토를 다시 기사들한테 나눠줄 수 있으며 이때는 영주가 주군
이며 기사가 종신입니다. 이런 관계는 나눠줄 토지가 있는한 계속
됩니다.

주군과 종신의 관계는 계약에 의한다고 했는데 그 계약은 무엇일
까요?

주군의 의무는 (1) 종신에게 봉토를 수여, 종신의 봉토가 적에게
침범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것, (2) 종신간의 재판을 주도해
야 하며 상위 주군의 법정에 서는 종신이 있다면 그를 변호해야
하며 (3) 종신의 봉토내에 함부로 성곽을 쌓을 수 없으며 꼭 세울
필요가 있으면 종신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4) 종신의 처자를 해
치지말고 종신의 명예를 손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신의 의무는 주군의 의무에 비해 훨씬 크고 무거웠습니다. (1)
군사적 의무로 주군을 위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전투에 참가해야
했습니다. 이 의무는 봉건사회가 안정되어지자 연 40일의 군사의
무일로 조정되었으며 추가로 의무기간이 늘어나면 주군은 그 댓가
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군사의무는 대개 수여받은 장원 하나에 기
사 1명으로 취급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중세 후기에는 이 의무
는 돈으로 대납하게 되었습니다. (2) 종신은 주군을 도와 주군의
재판진행을 도와야 합니다. (3) 종신은 금전이나 생산물의 일부를
주군에게 헌상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중세 후기에는 돈으로 내게
됩니다. (4) 주군의 방문시 체제와 향응을 책임져야 합니다. 이외
에도 자질구레한 많은 의무가 있었습니다.

종신의 상속자가 없을 경우 봉토는 주군에게 귀속되었고 상속자가
어려도 역시 주군이 종신의 상속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 봉토를 관
리합니다. 상속이 되는 경우는 상속자는 막대한 공납을 바쳐야 계
약이 갱신됩니다. 종신은 결혼도 주군의 뜻에 따라 해야 했습니
다. 이것은 미망인의 재혼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신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주군은 법정을 열어서
봉토를 압수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군이 의무를 지키지 않
는다면 종신도 주군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파기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지배층에는
기사와 사제가 있으며 피지배층은 대다수의 농민과 도시민 등입니
다. 중세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력은 농촌에 있었으며 도시가 의미
를 갖는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농민은 일반적으로 중세라고 하면 떠오르는 농노만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유민, 농촌노동자, 노예 등이 있었습니다.

<2-2> 중국의 봉건제

봉건제는 여기에서 제이름을 찾습니다. 중국의 봉건제와 서양의
Feudalism의 차이는 한마디로 가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에서
는 주군과 종신의 관계가 계약에 의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계약이 아니라 혈연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차
이이며 여기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봉건제는 周나라가 殷나라를 정복한 다음에 동방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시행한 제도입니다. 封이란 지배영역의 경계를 세우는 것
이고 建이란 그 영역에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주왕(당시는 아
직 황제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은 중원의 중요지역에 자신의 일
족과 공신을 제후로 보내 그 영지와 주민을 지배하게 하면서 이들
을 통제하여 전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제후의 통제는 제후
임명권과 종법(宗法)이라고 불리는 혈연관계에 의하여 유지되었습
니다.

그러면 여기서 두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요.

첫째, 혈연관계라면서 웬 공신? 그러나 이때문에 종법제도라는 것
이 중요합니다. 종법제도는 집안에서 ꡐ적장자ꡑ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즉 공신들도 ꡒ종법제도ꡓ에 참여함으로
써 한가족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때 가계의 권리는 적장자에
게만 계승되고 차남, 삼남, 서자 등은 별자라고 하며 별자들은 새
로운 가계를 세워야 합니다. 이때 적장자와 별자의 관계는 大宗과
小宗으로 나눕니다. 대종을 잇는 사람을 宗子라고 하고 다른 이들
은 宗人이라고 합니다. 종자는 종인을 收族(먹고 살 수 있게 하고
권리확보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해야 합니다. 종인들은 대종
의 권리를 지켜주고 종자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복종해야 합니
다.

천자(여기서 天의 개념은 주종족의 독특한 관념입니다)는 적장자
(대종이며 종자)이고 제후는 별자가 됩니다. 제후의 경우도 자신
의 적장자에게 지위를 물리고 별자들은 大夫가 됩니다.

서구의 봉건제는 왕권이 강화되면서(지배적인 영주가 나타나며)
몰락하게 되지만 중국의 봉건제는 시대가 지나며 혈연의식이 약화
됨으로써 자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이 춘추전국시대의 개막입
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영토국가의 개념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전의 국가 체제는 성읍적인 것으로 점을 지배하던 양식이었지만
이제는 각자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는 시대가 되면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이시대를 지배하게 됩니다. 각각의 성읍에 대하여 직접통
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봉건제도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인데 이제
는 그러한 장벽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발전을 하게 되는 이
유는 생산력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춘추시대에는 이런 발전의 변화를 감지하기가 어려웠으며 따라서
이러한 변화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습니다. 그런 결
과로 등장하는 것이 패(覇)입니다. 대표적으로 춘추5패라고 부르
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패자는 '존왕양이'로 대표되는 구질서
의 수호자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패자는 자신의 국가 영
토확장에 급급합니다.

이러한 패자의 시대인 춘추시대가 끝나면 전국시대가 도래하며 이
제는 구질서는 형식의 면에서조차 버려지고 실력자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춘추와 전국시대의 구분법은 몇가지 있습니다만 기원전 403년을
기준으로 잡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해에는 진(晋)의
대부국이었던 위, 조, 한(魏, 趙, 韓)이 진나라 자체를 없애버리
고 세개의 국가가 된 해입니다. 이러한 일은 봉건적 질서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왕실은 이 세나라를 승인
합니다. 이로써 봉건제도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통일로 치달아갑니다. 그것이 여러분도 잘알
고 있는 진한제국입니다. 이 이후 중국의 역사에서 봉건제란 용어
는 쓰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봉건제의 굴레
에 우리의 역사를 얽매어 놓아야 합니까?

<2-3> 일본의 봉건제

일본의 봉건제가 언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두가지 학설이 있
습니다. 하나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인 12세기경부터 보는 학설이
고 다른 하나는 17세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로 보는
학설입니다. 현재는 후자의 학설이 우세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메이지 유신으로 끝나는 1867년까지 이어졌으며 이것은 그들의 근
대화가 봉건제의 극복에 있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시사합니다. 따
라서 그들에게 근대화에 역행하는 것은 모두 봉건적 잔재였으며
그들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에 역시 똑같은 개념으로 우리의 역
사를 바라보아 근대화에 역행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봉건적이
라고 매도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조선이란 봉건의 유
산이었던 것이지요.

일본은 자신들의 전통에서 유럽과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했음을
강조해 나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탈아론(아시아를 벗어난다는
논리입니다)의 발흥과 때를 같이하는 1890년대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제가 서양의 봉건제와 동일한 것이었다고 주장
하는 학자들은 없습니다. 서양과 일본의 지리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은 너무나 유럽과 판이했으며 형식적인 관점에서 몇가지가 일
치한다고 본질적인 면까지 동일하다고 여기는 학자들은 없습니다.
인정한다면 오직 중앙집권이 붕괴한 곳에 분권적인 정부가 형성되
며 이러한 과정에 따라 일본에서 봉건제가 실시되었다는 정도입니
다.

<3> 일제가 꾸민 봉건제의 음모

이미 앞에서 밝힌 바대로 일제는 음모를 가지고 우리 역사를 봉건
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습니다. 봉건제란 결국 중앙집권이 행해
지지 못하는 미약한 국가권력을 가진 정치체제라는 것은 앞의 글
을 통해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교해 본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7세기에 통일을 이루었고 전제왕
권이 형성되어 전형적인 군주제 국가로 발전해 왔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치체제는 확고하게 발전하였으며 그 영향아래 찬란한 문
화의 꽃을 피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을 쇠퇴하게 만든 1차적
인 원인은 바로 일본의 침략(임진왜란)으로 인한 것이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이 일본에대하여 문화적, 정치적 우세에 있었음은
자명합니다.

일본인들은 바로 이러한 점을 그대로 놓아둔 상태에서는 조선을
식민통치할 수 없다는 점을 잘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우리 민족을
자괴감에 빠지게 하여 스스로 못난이라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일을 위해 동원된 방법은 수도 없이 많으며
바로 봉건제라는 굴레 역시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똑바
로 보이는 것들보다 이런 눈치채기 어려운 사항들은 살아남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인식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것입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것이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구분입니다. 마르크
스는 노예제 사회 - 봉건제 사회 - 자본주의 사회로 역사를 구분
했는데 이것은 유럽의 역사에는 정밀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
러나 세계사에 이 대목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리카, 이슬
람, 아시아, 아메리카의 어느 곳에도 이 이론은 정확하게 들어맞
지를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교조주의자들은 이러한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억지로라도 자국의 역사를 꿰어맞추고자 했습니다.
마르크스가 갈파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놀라운 이론은 사라지고
그 형해만이 유령처럼 우리들의 역사를 옭죄었던 것입니다. 더구
나 봉건이라는 말에 대해서 익숙했던 우리들은 <반봉건>이라는 말
을 쉽사리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4> 결론 - 시대구분의 자주성

우리는 시대구분에 있어서 서양의 3분법에 크게 의존합니다. 고대
- 중세 - 근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신라까지를
고대,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대로 비정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
나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서양의 인식체계에서 나온 것이므로 우
리 사회와는 맞지를 않습니다.

진정한 세계사는 2차세계대전 이후라고 말해집니다. 그것은 세계
가 자본주의라는 논리 아래 편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슬
람이나 공산주의 조차 안티테제의 개념으로 모두 포함해 버릴 수
있습니다. 상호 관계를 맺는 한 독자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전에는 사실상 하나의 일관된 역사관으로 전세계의
시대를 구분할 방법은 없습니다. 1차세계대전만 해도 사실 유럽대
전쟁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30년
전쟁을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시대를 구분할 때 그 잣대가 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권력의 관점에서 볼 때만 해도 우
리의 역사는 끊임없는 중앙집권화로 그 길을 달려왔고 중앙집권이
붕괴된 세도정치 시대에 쇠락해 버린 것입니다.

계급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역사는 끝없이 평등으로 달려왔
으며 역시 평등의 발전적 방향이 막혀버린 세도정치 시대에 농민
항쟁으로 반발하며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생산력의 관
점에서 볼수도 있을 것이며 이러한 모든 관점의 총합으로 우리 역
사를 재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일은 바로 여러분께 남겨진 것
입니다.

마포에서




이 글을 쓰고나서 하이텔 김형석님의 강력한 태클을(그러나 예의바른)
받았다.

그러나 게으른 나는 더 공부하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반성중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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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록불의 잡학다식 : 시민혁명 - 2차 수정 2008-02-29 16:10:16 #

    ... 다. 愚公님의 생각을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독일 융커와 조선의 양반을 같은 봉건지배층으로 분류한 것에도 저는 이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한국역사와 봉건제라는 제 글을 읽어보시면 고맙겠습니다. ... more

덧글

  • kunoctus 2004/08/29 20:14 #

    트랙백하나 끌어갑니다. :-)
  • 功名誰復論 2004/08/30 04:26 #

    봉건제란 말을 쓰는 건 일제의 영향보다는 마르크스의 4단계 역사론의 영향이 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시대를 봉건제로 보고 이후를 자본주의 사회로 보는 겁니다. 이 때문에 좌파 성향 역사학자들이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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