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의 23가지 실증사례
[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환단고기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에게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때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다음 23가지 실증사례에 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여기서 [아! 고구려]의 저자 허성정 씨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 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 것임을 밝혀둔다.)
첫째는 환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屹撻) 단군 50년(서기전 1733년)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했는데, 이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박교수는 ‘환단고기’와 ‘단기고사’ 등에 기록된 일식 등 천문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차례 이야기한 바 있다. 아래 링크들을 확인하라.
[DC역갤]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클릭]
박창범-라대일 논문의 비판적 검증 [클릭]
고대 천문학 기록 연구에 대한 반론 [클릭]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 [클릭]
[DC역갤]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아로새긴 우리의 역사` kbs 책을 말한다를 보고 [클릭]
졸저, 『만들어진 한국사』, 141~157쪽 (이 책에서 나는 이 블로그 여기저기 있는 천문학 쟁점을 체계화하고 따로 박창범 교수 논리의 맹점을 정리했다.)
‘환단고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고,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과학적 검증을 조인성, 박광용, 이도학 등이 이미 한 바 있으나 다만 이들이 [믿지] 않을 뿐이다. 대체 뭐가 무조건인가? 이 글 자체에도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운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무조건이라고 말하면 좋은 점이 있다. 사학계가 연구 없이 무시한다는 인식을 줄 수 있으며, 사학계에서 이미 지적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답변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있다면 사학계에서 지적한 문제들을 해명하려 들어야 하는 것이지, 지적한 것이 없는 것처럼 사기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음은 환단고기 위서론에 대한 글들이다. (연대순)
이도학, [재야사서해제 환단고기], 민족지성, 1986년 11월호
조인성,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한국사시민강좌2, 일조각, 1988
조인성, [한말 단군관계사서의 재검토 -신단실기·단기고사·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 국사편찬위원회, 1989
이도학, [역사를 오도하는 상고사의 위서들], 세계와 나, 1990. 11월호.
박광용, [대종교 관련문헌에 위작 많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 역사비평, 1990년 가을호.
조인성, ["재야사서" 위서론 -단기고사·환단고기·규원사화를 중심으로-],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졸저,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이를 딱하게 여기어 두 책에 기록된 ‘5성취루’, ‘일식’ 등의 현상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했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실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는 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정효공주묘 벽화(연변 화룡현 용두산) 3대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묘는 당나라 양식을 다른 것이나 석실 내부의 벽에 백회를 바르고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는 고구려의 전통 화법을 이은 것이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온 것은 아무리 올려잡아봐야 1979년이다. 이 해에 이유립이 필사본 백 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나온 자료가 환단고기를 증명해주지 못한다. 이 자료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다 발해 문왕의 연호는 [신당서]에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신당서 열전 144 북적 발해 편에는 [아들 흠무가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으로 고쳤다(子欽茂立 改年大興)]라고 나와 있다. 무식한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저 비문은 환단고기가 아니라 신당서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셋째는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신당서 열전 138 번진치청횡해藩鎮淄青橫海 이정기李正己] 편에 보면 [李正己 , 高麗人 。]이라고 번연히 나와 있다. 대체 환단고기에 뭐가 처음 나온다는 말인가?
추가로 이야기하자면 이미 1975년에 이렇게 논문도 나온 바 있다.
唐代藩鎭의 한 硏究-高句麗遺民 李正己一家를 中心으로-(金文經, 省谷論叢 6, 1975)
넷째는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년(BC 2282년)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 148권 경기 부평도호부 강화도후부] 편에 보면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라고 적혀 있다. 무슨 첫 기록이 환단고기에 나온단 말인가?
다섯째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헤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북한의 연구 결과는 핵폭탄이 없다는 북한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대체 뭘 믿고 싶은 건가?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고구려 시대 무덤을 고조선 시대 무덤으로 뒤바꾼 김정일의 쇼에 놀아나고 싶은 건가?
여섯째,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의견을 추가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겠으나 광개토대왕릉비건, 건흥5년명금동광배建興五年銘金銅光背 건 다 1979년 전에 나온 것들이니 이것으로 무엇이 증명되겠는가? 이런 것들만 증거라고 내놓으니 처량하기 짝이 없다.
일곱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 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1923년은 1979년 전이지? 1979년 전의 기록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니깐 또 그러네.
여덟 번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대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것이 환단고기가 진짜라는 실증적 자료가 되는 이유가 뭘까? 이런 것을 증거라고 하는 것은 범죄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범인이라고 체포하는 것과 같다.
아홉 번째는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 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 씨 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없는 부분도 만들어서 읽는 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실증이라고 부른다고? 해당 링크를 타고 이병도가 쓴 글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그 안에 [환단고기]라는 글자가 나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질 용의가 있다. 거짓말 좀 작작해라.
이병도에 대한 모함 [클릭]
열 번째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적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항목에 그 사람들 이름 올려놓았으니 확인하고 말하길 바란다. 자기가 공부 안 하고는 있는 것을 없다고 그러는 건지, 원.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 유적이 발견되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역 63 기제] 편에 나오는 말이다. 주역이 1979년 전에 나온 걸 따로 증명할 필요는 없겠지?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그거야 당연히 환단고기를 쓴 인간이 비파형 동검 분포도를 보면서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을 일치시켰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고조선이 중국 대륙에 있다고 주장하는 유사역사학 신봉자(이 부류 중에는 환단고기를 믿지 않는 이들도 있다)들은 이런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유사역사학 신봉자들끼리 의견 통일하는 것부터 하면 안 되려나? 두 팀이 싸우면 볼만할 텐데.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그런데 고인돌도 고조선의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비파형 동검도 정확히 표시한다면 모순에 빠진다는 건 모르나보다. 두 영역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거든. 물론 이런 게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1979년에는 이미 이런 사실들은 다 알려져 있었으니까.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대단히 바보스런 주장이다. 진시황은 최초로 황제를 칭한 것이지, 천자를 칭한 것이 아니다. 이런 기본 상식도 없는 이야길 증거라고 내놓다니... [맹자]만 읽어보아도 천자天子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맹자가 진시황보다 앞의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 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대체 뭘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증거라고는 보이지 않고 말만 적혀있으니... 아무튼 내가 아는 한 저런 자료가 나온 바가 없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홍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홍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나오면 그게 환웅과 웅녀란 말인가? 참 사고방식도 편리하다.
열일곱 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3898년 18분의 황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러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창성조적서비라고 써놓으면 대체 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의 한자는 이렇다. 창성은 인명이다. 창성倉聖. 고대에 문자를 만들었다는 전설 상의 성인 창힐을 가리키는 것. 그럼 조적서비는? 조적서비(鳥跡書碑). [조적서]란 [새 자취 글자]라는 이야기다. 창힐이 새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니, 저것이 무슨 증거가 되랴? 중국 것들을 죄 우리 것이라 우기는 버릇이 발동했을 뿐이다.
그럼 평양 이야기는 뭘까? 평양 법수교비에 이상한 문자가 적혀 있다는 것인데 1942년에 발행된 [영변지]에 기재된 내용이라는 것. 뭐, 이것저것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1942년이면 1979년보다 전이지?
열여덟 번째는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발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다른 건 뭘 말하는지 모르겠으나, 구자라트 문자가 거론된 것을 보니 보나마나 거짓말로 일관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좀 증거를 제대로 가지고 와서 말해달란 말이다. 카더라 통신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이 니네들이 말하는 실증이냐? 구자라트 문자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조할 것.
가림토와 구자라트 문자 [클릭]
신대문자의 거짓말은 요 항목을 참고.
신대문자는 한글을 모방한 것 [클릭]
그리고 2007년 10월 7일 MBC 다큐멘터리 [한글창제의 비밀]에서 이세신궁을 찾아가 취재한 결과 이세신궁의 가림토 청동거울이란 존재하지 않는 쌩구라임이 밝혀졌고, 신대문자 비석은 18세기를 넘어가는 게 없다는 사실도 다 밝혀주었다.
열아홉 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 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 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의 해당 구절은 이렇게 되어있다. [지금의 서요하가 곧 옛날의 서압록하이다.] 그런데 이런 구절이 어째서 실증의 근거가 될까? 실증이라는 게 뭔지는 알고 있는 걸까? 이런 건 환단고기의 [주장]인 것이다. 정신차리기 바란다.
스무 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 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흘단군, 그리고 BC 195년에는 낙락왕 최승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삼국사기도 낙랑군과 낙랑국, 두 가지가 다 나온다. 이게 뭘 증명할 수 있는가? 환단고기를 지을 때 삼국사기를 참조했다는 것?
스물한 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 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 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년(BC 1833)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추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 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단기고사는 광복 후에 나왔던 책이다. 1940년대 중반에서 1979년이 엄청난 시차라고? 정말 엄청난 주장이다.
스물두 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土)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따,땅)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별 게 다 증거가 된다. 가림토가 어떻게 만들어진 말인지는 아래 포스팅을 보라.
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 3 - 가림토의 진실 [클릭]
스물세 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 상의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像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자(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을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을 밝혔다.
소도는 “솟다”에서 와서 솟터 솟토 소토 소도나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환단고기를 쓴 이가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 원저본을 그대로 썼던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한 증거이다.
자기들이 해석한 것이 실증의 증거라고 하니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런 엉터리가 증거라고 돌아다니는 것도 한숨나오는 이야기다.
[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환단고기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에게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때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다음 23가지 실증사례에 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여기서 [아! 고구려]의 저자 허성정 씨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 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 것임을 밝혀둔다.)
첫째는 환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屹撻) 단군 50년(서기전 1733년)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했는데, 이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박교수는 ‘환단고기’와 ‘단기고사’ 등에 기록된 일식 등 천문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차례 이야기한 바 있다. 아래 링크들을 확인하라.
[DC역갤]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클릭]
박창범-라대일 논문의 비판적 검증 [클릭]
고대 천문학 기록 연구에 대한 반론 [클릭]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 [클릭]
[DC역갤]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아로새긴 우리의 역사` kbs 책을 말한다를 보고 [클릭]
졸저, 『만들어진 한국사』, 141~157쪽 (이 책에서 나는 이 블로그 여기저기 있는 천문학 쟁점을 체계화하고 따로 박창범 교수 논리의 맹점을 정리했다.)
‘환단고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고,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과학적 검증을 조인성, 박광용, 이도학 등이 이미 한 바 있으나 다만 이들이 [믿지] 않을 뿐이다. 대체 뭐가 무조건인가? 이 글 자체에도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운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무조건이라고 말하면 좋은 점이 있다. 사학계가 연구 없이 무시한다는 인식을 줄 수 있으며, 사학계에서 이미 지적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답변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있다면 사학계에서 지적한 문제들을 해명하려 들어야 하는 것이지, 지적한 것이 없는 것처럼 사기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음은 환단고기 위서론에 대한 글들이다. (연대순)
이도학, [재야사서해제 환단고기], 민족지성, 1986년 11월호
조인성,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한국사시민강좌2, 일조각, 1988
조인성, [한말 단군관계사서의 재검토 -신단실기·단기고사·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3, 국사편찬위원회, 1989
이도학, [역사를 오도하는 상고사의 위서들], 세계와 나, 1990. 11월호.
박광용, [대종교 관련문헌에 위작 많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 역사비평, 1990년 가을호.
조인성, ["재야사서" 위서론 -단기고사·환단고기·규원사화를 중심으로-],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졸저,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이를 딱하게 여기어 두 책에 기록된 ‘5성취루’, ‘일식’ 등의 현상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했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실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는 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정효공주묘 벽화(연변 화룡현 용두산) 3대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묘는 당나라 양식을 다른 것이나 석실 내부의 벽에 백회를 바르고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는 고구려의 전통 화법을 이은 것이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온 것은 아무리 올려잡아봐야 1979년이다. 이 해에 이유립이 필사본 백 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나온 자료가 환단고기를 증명해주지 못한다. 이 자료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다 발해 문왕의 연호는 [신당서]에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신당서 열전 144 북적 발해 편에는 [아들 흠무가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으로 고쳤다(子欽茂立 改年大興)]라고 나와 있다. 무식한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저 비문은 환단고기가 아니라 신당서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셋째는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신당서 열전 138 번진치청횡해藩鎮淄青橫海 이정기李正己] 편에 보면 [李正己 , 高麗人 。]이라고 번연히 나와 있다. 대체 환단고기에 뭐가 처음 나온다는 말인가?
추가로 이야기하자면 이미 1975년에 이렇게 논문도 나온 바 있다.
唐代藩鎭의 한 硏究-高句麗遺民 李正己一家를 中心으로-(金文經, 省谷論叢 6, 1975)
넷째는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년(BC 2282년)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 148권 경기 부평도호부 강화도후부] 편에 보면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라고 적혀 있다. 무슨 첫 기록이 환단고기에 나온단 말인가?
다섯째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헤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북한의 연구 결과는 핵폭탄이 없다는 북한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대체 뭘 믿고 싶은 건가?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고구려 시대 무덤을 고조선 시대 무덤으로 뒤바꾼 김정일의 쇼에 놀아나고 싶은 건가?
여섯째,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의견을 추가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겠으나 광개토대왕릉비건, 건흥5년명금동광배建興五年銘金銅光背 건 다 1979년 전에 나온 것들이니 이것으로 무엇이 증명되겠는가? 이런 것들만 증거라고 내놓으니 처량하기 짝이 없다.
일곱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 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1923년은 1979년 전이지? 1979년 전의 기록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니깐 또 그러네.
여덟 번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대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것이 환단고기가 진짜라는 실증적 자료가 되는 이유가 뭘까? 이런 것을 증거라고 하는 것은 범죄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범인이라고 체포하는 것과 같다.
아홉 번째는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 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 씨 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없는 부분도 만들어서 읽는 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실증이라고 부른다고? 해당 링크를 타고 이병도가 쓴 글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그 안에 [환단고기]라는 글자가 나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질 용의가 있다. 거짓말 좀 작작해라.
이병도에 대한 모함 [클릭]
열 번째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적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항목에 그 사람들 이름 올려놓았으니 확인하고 말하길 바란다. 자기가 공부 안 하고는 있는 것을 없다고 그러는 건지, 원.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 유적이 발견되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역 63 기제] 편에 나오는 말이다. 주역이 1979년 전에 나온 걸 따로 증명할 필요는 없겠지?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그거야 당연히 환단고기를 쓴 인간이 비파형 동검 분포도를 보면서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을 일치시켰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고조선이 중국 대륙에 있다고 주장하는 유사역사학 신봉자(이 부류 중에는 환단고기를 믿지 않는 이들도 있다)들은 이런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유사역사학 신봉자들끼리 의견 통일하는 것부터 하면 안 되려나? 두 팀이 싸우면 볼만할 텐데.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그런데 고인돌도 고조선의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비파형 동검도 정확히 표시한다면 모순에 빠진다는 건 모르나보다. 두 영역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거든. 물론 이런 게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1979년에는 이미 이런 사실들은 다 알려져 있었으니까.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대단히 바보스런 주장이다. 진시황은 최초로 황제를 칭한 것이지, 천자를 칭한 것이 아니다. 이런 기본 상식도 없는 이야길 증거라고 내놓다니... [맹자]만 읽어보아도 천자天子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맹자가 진시황보다 앞의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 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대체 뭘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증거라고는 보이지 않고 말만 적혀있으니... 아무튼 내가 아는 한 저런 자료가 나온 바가 없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홍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홍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나오면 그게 환웅과 웅녀란 말인가? 참 사고방식도 편리하다.
열일곱 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3898년 18분의 황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러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창성조적서비라고 써놓으면 대체 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의 한자는 이렇다. 창성은 인명이다. 창성倉聖. 고대에 문자를 만들었다는 전설 상의 성인 창힐을 가리키는 것. 그럼 조적서비는? 조적서비(鳥跡書碑). [조적서]란 [새 자취 글자]라는 이야기다. 창힐이 새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니, 저것이 무슨 증거가 되랴? 중국 것들을 죄 우리 것이라 우기는 버릇이 발동했을 뿐이다.
그럼 평양 이야기는 뭘까? 평양 법수교비에 이상한 문자가 적혀 있다는 것인데 1942년에 발행된 [영변지]에 기재된 내용이라는 것. 뭐, 이것저것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1942년이면 1979년보다 전이지?
열여덟 번째는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발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다른 건 뭘 말하는지 모르겠으나, 구자라트 문자가 거론된 것을 보니 보나마나 거짓말로 일관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좀 증거를 제대로 가지고 와서 말해달란 말이다. 카더라 통신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이 니네들이 말하는 실증이냐? 구자라트 문자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조할 것.
가림토와 구자라트 문자 [클릭]
신대문자의 거짓말은 요 항목을 참고.
신대문자는 한글을 모방한 것 [클릭]
그리고 2007년 10월 7일 MBC 다큐멘터리 [한글창제의 비밀]에서 이세신궁을 찾아가 취재한 결과 이세신궁의 가림토 청동거울이란 존재하지 않는 쌩구라임이 밝혀졌고, 신대문자 비석은 18세기를 넘어가는 게 없다는 사실도 다 밝혀주었다.
열아홉 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 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 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의 해당 구절은 이렇게 되어있다. [지금의 서요하가 곧 옛날의 서압록하이다.] 그런데 이런 구절이 어째서 실증의 근거가 될까? 실증이라는 게 뭔지는 알고 있는 걸까? 이런 건 환단고기의 [주장]인 것이다. 정신차리기 바란다.
스무 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 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흘단군, 그리고 BC 195년에는 낙락왕 최승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삼국사기도 낙랑군과 낙랑국, 두 가지가 다 나온다. 이게 뭘 증명할 수 있는가? 환단고기를 지을 때 삼국사기를 참조했다는 것?
스물한 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 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 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년(BC 1833)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추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 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단기고사는 광복 후에 나왔던 책이다. 1940년대 중반에서 1979년이 엄청난 시차라고? 정말 엄청난 주장이다.
스물두 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土)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따,땅)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별 게 다 증거가 된다. 가림토가 어떻게 만들어진 말인지는 아래 포스팅을 보라.
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 3 - 가림토의 진실 [클릭]
스물세 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 상의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像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자(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을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을 밝혔다.
소도는 “솟다”에서 와서 솟터 솟토 소토 소도나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환단고기를 쓴 이가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 원저본을 그대로 썼던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한 증거이다.
자기들이 해석한 것이 실증의 증거라고 하니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런 엉터리가 증거라고 돌아다니는 것도 한숨나오는 이야기다.
덧글
증거는 중국에 널려 있는데 중국 정부의 방해로 확인하지 못한답니다 그건 지금 사학계가 확인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어이없어서 그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증거를 식민사학의 개라는 현 사학계가 재야학계의 말을 철떡같이 믿고 남의 나라를 증거가 나올때 까지 뒤집어 쑤시고 다녀야 하나? 라고 했더니 어이없게도 그건 우리땅이니 그래도 된다더군요.
그 이후로 그 사람과는 상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단계 피라미드나 사이비 종교 신자들과 똑같은 패턴을 보이니까요.
2. 전에 초록불님께서 올려주신 글처럼 그쪽이 5공 초기에 무진장 5공 찬양에 열을 올린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그래서 아예 5공쪽에서 뒤를 봐주지 않았는가 하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지요.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5.18 피해자이고 (당연히 그쪽이면 이를 가시는 분인데) 저 이야기를 철썩같이 믿더군요. 그래서 관련 이야기를 좀 하니. 당혹해 하는건 -_-;;;
나중에 저 논리가 발전되서 한국인과 유대인을 맞추려는 노력으로도 발전하는 경우도 있지요. 물론 이 분들의 논리 자체는 저거와 같은 정도로 조악합니다만
스케일도 크니..이스라엘이 가져간 땅정도는 1개 주도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내용 순서가 뒤바뀐 부분이 있는데 제 착각인가요?
블로그가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글로 대치해 놓았습니다.
만일 제가 고대의 비서라고 하면서 "신지비사"를 내놓았다고 해보죠. 이 책은 고려사에 그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고려 중기 이전의 저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에나 알려진 각종 증거를 이 책에 넣어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책은 진짜 고려 이전에 만들어진 책이 되는 걸까요? 당연히 그럴 리가 없죠. 환단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