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7년 4월 17일에 작성하여 하이텔 한국사동호회에 올라갔던 글입니다.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의 수준이 10년 전에서 한걸음도 진전하지 못한 증거라고나 할까요?
당시 이런 주장을 하는 인간들은 이 글에 대해서 제대로된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1+1=2 라는 주장과 같은 글이니 관심이 없는 분은 패쓰하세요.
[의견] 백제의 서쪽 바다에 대한 고찰 1997-04-17 10:25
참 한심한 글입니다만 글에 제목을 붙인다면 <백제의 서쪽 바다에 대한 고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글이 두번 만들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용석의 어떤 책을 보면 백제가 중국의 서촉지방(즉 삼국시대에 유비가 자리잡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글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1.
본 글과 앞으로의 글에 사용되는 모든 텍스트는 김성구님이 자료실에 올려주신 데이터를 이용합니다.
김성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완성형으로 변화되면서 제 부주의로 누락된 글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다음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조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 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 鄒>土濕水鹹, 不得安居.
백제의 땅을 <천험지리天險地利>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북으로는 한수가 막아주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막아주고, 남으로는 기름진 땅이 있고, 서로는 큰바다가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대륙론자들은 대해大海가 바다라는 뜻이 아니라 큰 평야라는 뜻이라고 우겨댔다.) 여기서 大海를 큰 평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조阻(막을 조)>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동남이 모두 터진 곳이라면 그곳이 어떻게 <천험지리天險地利>한 곳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비류는 이 <천험지리天險地利>를 버리고 해빈海濱에 가서 살고자 했습니다. 해빈海濱은 바닷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평야의 변두리라고 번역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이곳이 바닷가라는 것은 그 뒤에 나오는 토습수함土濕水鹹이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땅은 습하고 물은 짜다라는 뜻입니다. 함鹹이라는 글자는 <소금기 함>입니다.
이로써 백제의 서쪽에는 큰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서쪽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2.
다음은 온조왕 13년의 기록입니다.
八月, 遣使<馬韓>告遷都. 遂 定疆 ,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위 기록은 마한과의 경계를 정한 것인데,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으로 한계지으며, 서로는 큰바다에 다하며, 동으로는 주양에 극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대해大海를 큰 평야라고 한다면 끝간데 없는 그것의 어디를 경계로 삼는단 말입니까?
3.
다음은 고이왕 3년의 기록입니다.
三年冬十月, 王獵西海大島, 手射四十鹿.
여기에는 서해西海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을 <서해西海>라는 지명으로 본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던데, 그렇게 본다면 뒤에 나오는 대도大島(=큰섬)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해의 큰 섬에 가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일 뿐입니다.
4.
다음은 근구수왕 5년의 기록입니다.
五年春三月, 遣使朝<晉>, 其使海上遇惡風, 不達而還.
이것은 중국의 晉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바다에서 모진 바람(惡風)을 만나 되돌아왔다는 기록입니다.
5.
다음은 진사왕 2년의 기록입니다.
二年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나라사람중 15세 이상을 뽑아서 관방關防을 설치하는데, 청목령으로부터 북으로 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이르른다는 것입니다.
6.
다음은 전지왕의 즉위와 관련되는 기사중 일부입니다.
<전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전지가 머무르며 왜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지하여 때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해도海島를 바다의 섬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번역법이 있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때의 섬은 남해의 섬일수도 있고, 서해의 섬일수도 있지만 앞의 기사 내용을 읽어보면 서해의 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7.
다음은 개로왕 18년의 기록입니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사신을 중국의 魏나라에 보내서 올린 표에 臣은 나라를 동쪽 끝에 세웠다라는 구절입니다. 즉 백제는 중국의 위魏나라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바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위치는 한반도 뿐입니다.
8.
다음은 역시 개로왕이 보낸 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위 글의 내용은 위나라의 사신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이 백제로 오다가 고구려의 방해를 받아 바다에 빠져 죽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즉 위나라에서 백제로 오려면 바다를 지나야 하는 것이고, 위나라는 백제의 서쪽에 있으므로 그 바다는 지금의 서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9.
다음은 개로왕의 사신에게 위나라의 효문제가 답한 내용 중 위의 내용에 관하여 답한 부분입니다.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위 글은 전에 사신을 보내 바다를 건너 먼 나라들을 위무하라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아 존망을 알 수는 없지만 백제가 보낸 말안장 등은 중국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여기서도 백제를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부해浮海)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
다음은 위 효문제가 백제에게 준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
백제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물海物이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지극 정성을 인정해서 몇가지 물건을 내린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해물海物이 쓰여서 백제가 바다와 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
다음은 역시 개로왕 18년의 일로 중국의 사신들이 백제에 오지 못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後使<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중국의 사신인 소안이 동래東萊(산동성입니다. 중국은 이곳에서 요동반도로 갔다가 서해 연안을 따라 우리나라로 오는 항로를 이용합니다.)에서 바다를 건너(浮海) 개로왕에게 오려고 했는데,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 오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역시 중국도 바다를 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2.
다음은 문주왕 시해 사건을 삼근왕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탓하며 김부식이 달아놓은 평입니다.
<唐><憲宗>之弑, 三世而後僅能殺其賊, 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又烏足道哉!
당 헌종의 시해범도 3세가 지난 뒤에야 잡아 죽였으니, 바다 모퉁이(海隅) 황량하고 궁벽한 곳(荒僻)의 삼근 어린애(童蒙)가 어쩔 도리가 있었겠느냐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비유되는 것은 명확한 것으로, <대학자> 김부식이 백제를 중화에 비유하면 <해우지황벽海隅之荒僻>한 곳이라고 명확하게 기술해 놓은 것입니다.
13.
다음은 동성왕 5년의 기록입니다.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사약사가 남제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데 서해西海에서 고구려 병사를 만나 가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14.
다음은 동성왕조 말미에 붙어있는 기록으로 중국측에서 바닷길이 험한데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고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해로숙징海路肅澄, 요로무체要貢無替라는 부분이 바로 바닷길이 험난하나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역시 백제와 중국은 바다를 항해하여 통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
다음은 무왕 28년에 복신이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태종이 무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
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여기에서 해우하광海隅遐曠, 충도간조風濤艱阻라는 것은 바다 멀리 있어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게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
다음은 무왕이 죽자 당태종이 보낸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故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 棧山航海, 遠稟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민悼.
위 내용 중 잔산항해棧山航海라는 것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라는 뜻으로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는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7.
다음의 의자왕의 어린 시절의 기록 중 일부분입니다.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
의자왕이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바다 동쪽의(海東) 증자曾子라고 불렸다는 것으로 이 말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8.
다음은 의자왕 11년에 당고종이 의자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列疆界, 地實犬牙.
해동의 삼국이 건국한지 오래이고 영토가 벌려진 것이 개이빨처럼 인접했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묶어서 호칭할만큼 삼국은 아주 인접해 있으며, 또한 바다가 경계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륙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과 삼국이 붙어있었다면 애당초 저런 표현이 나올 리가 없지요.
19.
다음은 의자왕 20년의 기록입니다.
西海濱小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서해西海 해변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나와서 죽어 백성들이 그것을 먹었는데, 다함이 없었다라는 기록입니다. 땅속에서 물고기가 나와 죽을 리는 없으니, 백제의 서쪽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0.
다음은 당나라 정벌군 소정방의 행로를 그리고 있습니다.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소정방이 성산에서 떠나 바다를 건너(濟海) 백제의 서쪽(國西)인 덕물도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21.
다음은 백제의 장군인 의직이 의자왕에게 당군을 맞아 싸울 전략을 품하는 내용입니다.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당나라 병사는 멀리(遠) 큰바다(溟海)를 건너 오므로(涉) 물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베에서 반드시 괴로와할 것이므로 마땅히 육지에 내려서기를 기다려 공격하자는 내용입니다. 바다가 나오고 배가 나오는데도 바다 해를 평지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22.
그 외에 백제 정복전쟁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날 수 있습니다.
<文度>濟海卒
統衆浮海
海水爲丹
<문도文度>제해졸濟海卒 은 웅진 도독이 된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 죽었다는 것이고, 통중부해統衆浮海는 유인궤가 원군을 보내달라고 해서 손인사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며,해수위단 海水爲丹이라는 것은 백제 부흥군과 왜의 원군이 주류성 전투에서 패하며 전선이 모두 불태워져 바다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백제가 서해를 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굳이 증명하려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중국측 기록은 모두 거짓이라는 시각을 갖는 사람도 있고, 삼국사기의 기록만 믿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다른 일체의 사서를 배격하고 오로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을 가지고 논의를 폈습니다.
마포에서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의 수준이 10년 전에서 한걸음도 진전하지 못한 증거라고나 할까요?
당시 이런 주장을 하는 인간들은 이 글에 대해서 제대로된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1+1=2 라는 주장과 같은 글이니 관심이 없는 분은 패쓰하세요.
[의견] 백제의 서쪽 바다에 대한 고찰 1997-04-17 10:25
참 한심한 글입니다만 글에 제목을 붙인다면 <백제의 서쪽 바다에 대한 고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글이 두번 만들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용석의 어떤 책을 보면 백제가 중국의 서촉지방(즉 삼국시대에 유비가 자리잡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글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1.
본 글과 앞으로의 글에 사용되는 모든 텍스트는 김성구님이 자료실에 올려주신 데이터를 이용합니다.
김성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완성형으로 변화되면서 제 부주의로 누락된 글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다음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조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 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 鄒>土濕水鹹, 不得安居.
백제의 땅을 <천험지리天險地利>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북으로는 한수가 막아주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막아주고, 남으로는 기름진 땅이 있고, 서로는 큰바다가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대륙론자들은 대해大海가 바다라는 뜻이 아니라 큰 평야라는 뜻이라고 우겨댔다.) 여기서 大海를 큰 평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조阻(막을 조)>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동남이 모두 터진 곳이라면 그곳이 어떻게 <천험지리天險地利>한 곳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비류는 이 <천험지리天險地利>를 버리고 해빈海濱에 가서 살고자 했습니다. 해빈海濱은 바닷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평야의 변두리라고 번역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이곳이 바닷가라는 것은 그 뒤에 나오는 토습수함土濕水鹹이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땅은 습하고 물은 짜다라는 뜻입니다. 함鹹이라는 글자는 <소금기 함>입니다.
이로써 백제의 서쪽에는 큰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서쪽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2.
다음은 온조왕 13년의 기록입니다.
八月, 遣使<馬韓>告遷都. 遂 定疆 ,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위 기록은 마한과의 경계를 정한 것인데,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으로 한계지으며, 서로는 큰바다에 다하며, 동으로는 주양에 극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대해大海를 큰 평야라고 한다면 끝간데 없는 그것의 어디를 경계로 삼는단 말입니까?
3.
다음은 고이왕 3년의 기록입니다.
三年冬十月, 王獵西海大島, 手射四十鹿.
여기에는 서해西海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을 <서해西海>라는 지명으로 본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던데, 그렇게 본다면 뒤에 나오는 대도大島(=큰섬)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해의 큰 섬에 가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일 뿐입니다.
4.
다음은 근구수왕 5년의 기록입니다.
五年春三月, 遣使朝<晉>, 其使海上遇惡風, 不達而還.
이것은 중국의 晉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바다에서 모진 바람(惡風)을 만나 되돌아왔다는 기록입니다.
5.
다음은 진사왕 2년의 기록입니다.
二年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나라사람중 15세 이상을 뽑아서 관방關防을 설치하는데, 청목령으로부터 북으로 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이르른다는 것입니다.
6.
다음은 전지왕의 즉위와 관련되는 기사중 일부입니다.
<전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전지가 머무르며 왜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지하여 때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해도海島를 바다의 섬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번역법이 있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때의 섬은 남해의 섬일수도 있고, 서해의 섬일수도 있지만 앞의 기사 내용을 읽어보면 서해의 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7.
다음은 개로왕 18년의 기록입니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사신을 중국의 魏나라에 보내서 올린 표에 臣은 나라를 동쪽 끝에 세웠다라는 구절입니다. 즉 백제는 중국의 위魏나라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바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위치는 한반도 뿐입니다.
8.
다음은 역시 개로왕이 보낸 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위 글의 내용은 위나라의 사신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이 백제로 오다가 고구려의 방해를 받아 바다에 빠져 죽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즉 위나라에서 백제로 오려면 바다를 지나야 하는 것이고, 위나라는 백제의 서쪽에 있으므로 그 바다는 지금의 서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9.
다음은 개로왕의 사신에게 위나라의 효문제가 답한 내용 중 위의 내용에 관하여 답한 부분입니다.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위 글은 전에 사신을 보내 바다를 건너 먼 나라들을 위무하라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아 존망을 알 수는 없지만 백제가 보낸 말안장 등은 중국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여기서도 백제를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부해浮海)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
다음은 위 효문제가 백제에게 준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
백제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물海物이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지극 정성을 인정해서 몇가지 물건을 내린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해물海物이 쓰여서 백제가 바다와 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
다음은 역시 개로왕 18년의 일로 중국의 사신들이 백제에 오지 못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後使<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중국의 사신인 소안이 동래東萊(산동성입니다. 중국은 이곳에서 요동반도로 갔다가 서해 연안을 따라 우리나라로 오는 항로를 이용합니다.)에서 바다를 건너(浮海) 개로왕에게 오려고 했는데,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 오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역시 중국도 바다를 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2.
다음은 문주왕 시해 사건을 삼근왕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탓하며 김부식이 달아놓은 평입니다.
<唐><憲宗>之弑, 三世而後僅能殺其賊, 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又烏足道哉!
당 헌종의 시해범도 3세가 지난 뒤에야 잡아 죽였으니, 바다 모퉁이(海隅) 황량하고 궁벽한 곳(荒僻)의 삼근 어린애(童蒙)가 어쩔 도리가 있었겠느냐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비유되는 것은 명확한 것으로, <대학자> 김부식이 백제를 중화에 비유하면 <해우지황벽海隅之荒僻>한 곳이라고 명확하게 기술해 놓은 것입니다.
13.
다음은 동성왕 5년의 기록입니다.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사약사가 남제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데 서해西海에서 고구려 병사를 만나 가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14.
다음은 동성왕조 말미에 붙어있는 기록으로 중국측에서 바닷길이 험한데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고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해로숙징海路肅澄, 요로무체要貢無替라는 부분이 바로 바닷길이 험난하나 조공이 끊이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역시 백제와 중국은 바다를 항해하여 통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
다음은 무왕 28년에 복신이 당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태종이 무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
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여기에서 해우하광海隅遐曠, 충도간조風濤艱阻라는 것은 바다 멀리 있어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게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
다음은 무왕이 죽자 당태종이 보낸 조서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故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 棧山航海, 遠稟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민悼.
위 내용 중 잔산항해棧山航海라는 것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라는 뜻으로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는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7.
다음의 의자왕의 어린 시절의 기록 중 일부분입니다.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
의자왕이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바다 동쪽의(海東) 증자曾子라고 불렸다는 것으로 이 말 역시 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8.
다음은 의자왕 11년에 당고종이 의자왕에게 보낸 글 중 일부분입니다.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列疆界, 地實犬牙.
해동의 삼국이 건국한지 오래이고 영토가 벌려진 것이 개이빨처럼 인접했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묶어서 호칭할만큼 삼국은 아주 인접해 있으며, 또한 바다가 경계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륙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과 삼국이 붙어있었다면 애당초 저런 표현이 나올 리가 없지요.
19.
다음은 의자왕 20년의 기록입니다.
西海濱小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서해西海 해변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나와서 죽어 백성들이 그것을 먹었는데, 다함이 없었다라는 기록입니다. 땅속에서 물고기가 나와 죽을 리는 없으니, 백제의 서쪽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0.
다음은 당나라 정벌군 소정방의 행로를 그리고 있습니다.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소정방이 성산에서 떠나 바다를 건너(濟海) 백제의 서쪽(國西)인 덕물도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21.
다음은 백제의 장군인 의직이 의자왕에게 당군을 맞아 싸울 전략을 품하는 내용입니다.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당나라 병사는 멀리(遠) 큰바다(溟海)를 건너 오므로(涉) 물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베에서 반드시 괴로와할 것이므로 마땅히 육지에 내려서기를 기다려 공격하자는 내용입니다. 바다가 나오고 배가 나오는데도 바다 해를 평지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22.
그 외에 백제 정복전쟁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날 수 있습니다.
<文度>濟海卒
統衆浮海
海水爲丹
<문도文度>제해졸濟海卒 은 웅진 도독이 된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 죽었다는 것이고, 통중부해統衆浮海는 유인궤가 원군을 보내달라고 해서 손인사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며,해수위단 海水爲丹이라는 것은 백제 부흥군과 왜의 원군이 주류성 전투에서 패하며 전선이 모두 불태워져 바다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백제가 서해를 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굳이 증명하려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중국측 기록은 모두 거짓이라는 시각을 갖는 사람도 있고, 삼국사기의 기록만 믿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다른 일체의 사서를 배격하고 오로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을 가지고 논의를 폈습니다.
마포에서
덧글
임승국 류의 환단고기 정통론자들은 물론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에 가득찬 악서라고 주장하지요.
(덧붙여 링크 신고 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지금은 고려와 조선도 중국에 있다고 주장하잖아요...-_-;;
그나마 저때는 대륙삼국설만 주장할때들인데... 뭐, 지금은...-_-
한 10년만 지나면 안드로메다 대륙삼국설도 나올듯한...
대륙 백제설엔 혹 해가지고 질문을 두어개 올렸는데 바로 삭제합니다 -_-..
백제가 중국 유동진출, 왜와의 정복 혹은 교류는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부분이라..
대륙 백제.. 그럴수도 있겠구나.. 라고 했는데
이 이글루에서 "동이족" 에 관한 글을 보고 알게 되었네요.
대륙 백제설을 주장하는 사람의 동이족과..
초록불님의 동이족에 관한 해석이 다른데...
전 일반인이기에 잘 모릅니다만 초록불님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궁금한게 있습니다.
백제 위례성의 위치는 증거가 없어서 추론에 의해 결정된게 사실인가요?
백제는 좀 불분명한 역사자료가 있는, 좀 미스터리한 국가인가요?
고대국가는 다 불분명한 역사 자료를 가지고 있는 미스터리한 국가입니다.
http://orumi.egloos.com/4379212
파랑나리님은 다른 분들이 쓴 댓글에 질문을 붙이는 경향이 있으신데, 그 분들이 제 블로그를 감시하는 것도 아니니 그분들에 대한 질문은 그분들 블로그에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환단고기를 믿고말지...
저희아버지한테 삼국대륙설이야기를 해드렸더니 그거 주장하는인간들 혹시 친중주의자들 아니냐면서 화내시더군요. 그치들은 그렇게 우기는게 애국하는줄 아나본데
솔까 삼국이 중국대륙에 있었다면 우리가 한족과 동일하다는걸 암묵적으로 인정하는거 아닌가ㅡㅡ
그리고 삼국대륙설이 맞다해도 어느순간에 한족등한테 한반도로 쫒겨났다는건데....
환단고기보다 더치욕적인 역사라고 밖에 안보이는군요. ㅡㅡ
제가 처음 도서관에서 정용석의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를 처음 읽은적이있었는데
내용은 순 그냥 무슨 고기록 풀이랑 억지로 짜맞춘 고지도가 전부고 왜 신라가 대륙에있었는지 증거조차 제시 안하더군요.
아 세상참 재밌게 돌아가네요.
7세기에 멸망한 백제... 6세기에 멸망한 마한의 유적
겨우 마한의 영토를 백년 점유했다고 백제가 삼국으로 명명되는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기껏 경기도, 충청도 지역에 머물던 작은 국가 백제였는데...
삼국사기의 주인공중에 하나로 배정하는것은 어이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