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백두산이 화제다. 백두산이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이라는 소리를 들었을까?
우선 환웅이 내려왔다는 곳을 백두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별로 근거가 없는 소리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지적했으니까.
동명성왕 이야기에 나오는 웅심산이 백두산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때문에 신성시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고나면 관련 전설은 말갈-여진-만주족들과 관련된 것 뿐이다.
(이들을 동족이라고 믿는 분들은... 뭐...)
사실 알고보면 백두산을 성스러운 산이라고 생각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가 아닌가 싶다.
조선 시대에 백두산은 제사를 지내는 다섯 산 중 하나가 된다. (백두산-묘향산-금강산-지리산-삼각산)
그 외에 백두산을 남다르게 신성시 한 것 같지는 않다.
청과 경계를 정할 때 조선 정부는 예민하게 대응하긴 하는데,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두만강을 경계로 한 것이 너무 분명해서 이른바 토문-=송화강 상류설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대동여지도를 보아도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간도문제는 확실히 조선말의 새로운 상황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대동여지도의 백두산 부근이다. 빨간 테두리가 정계비가 선 곳. 정계비까지가 영토라면... 얼라리, 천지는 우리 꺼 아닌건가?
대동여지도는 정말 정밀한 지도다. 아래 사이트에 가면 대동여지도를 전부 검색해서 살펴볼 수 있다. 정말 멋진 사이트다. (관리가 어떻게 되고 있는건지 좀 불안한 사이트. 아무튼 아직은 잘 작동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클릭]
위의 사이트는 결국 안 열린다. 대동여지도는 아래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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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이야기에 나오는 웅심산이 백두산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때문에 신성시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고나면 관련 전설은 말갈-여진-만주족들과 관련된 것 뿐이다.
(이들을 동족이라고 믿는 분들은... 뭐...)
사실 알고보면 백두산을 성스러운 산이라고 생각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가 아닌가 싶다.
조선 시대에 백두산은 제사를 지내는 다섯 산 중 하나가 된다. (백두산-묘향산-금강산-지리산-삼각산)
그 외에 백두산을 남다르게 신성시 한 것 같지는 않다.
청과 경계를 정할 때 조선 정부는 예민하게 대응하긴 하는데,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두만강을 경계로 한 것이 너무 분명해서 이른바 토문-=송화강 상류설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대동여지도를 보아도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간도문제는 확실히 조선말의 새로운 상황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대동여지도의 백두산 부근이다. 빨간 테두리가 정계비가 선 곳. 정계비까지가 영토라면... 얼라리, 천지는 우리 꺼 아닌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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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2. 사실 환국쪽에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김정호 "사형"건을 이쪽에 결부시키는 걸 본적이 있습니다만 -_-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
즉 청나라 관리는 토문강을 두만강의 근원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혹시 국역에 오류가 있나해서 원문도 빨간 부분만 살펴보겠다.
而土門江源, 則白山東邊最下處, 有一派東流。 摠管指此爲豆江之源曰
토문이 어딘가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일부를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의 글의 일부입니다.
간도와 관련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우리의 일반 인식과 상반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글루는 블로그니 그냥 글을 작성하시면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간도협약과 관련 청(중국)측이 일본에 넘겼다는 이권의 내용 그 출처?를 물었는데
아래와 같은 답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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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관련 자료를 찾느라 늦었습니다.
간도협약시 이권과 관련된 내용은 아래의 자료를 참고하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회도서관 발행, 일본외무성 육해군성문서(제1집)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 1975,
250-252쪽에 걸쳐 '滿洲五案件에 관한 일청협약문'과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문'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선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라는 걸 볼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업무상 서울갈 때 시간을 내어서 중앙도서관에 가서 보려고 합니다만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문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 내용이 확인되는데 글쎄 이권???
길장철도와 회령을 연결하는 것이 이권이겠죠.
그리고 만주5안건에 대한 부분은 국편의 한국사DB에서 내용을 확인했는데
포츠머스조약 상의 내용 중 중국쪽의 이권과 관련한 사항은 일청만주선후조약에서
중국측이 확인, 인정하게 되는데 문제의 만주5안건협약이 간도협약 맺으질 당시에
있었다(시기는 구글에서 확인) 여기에 여러 이권 내용이 확인됩니다.
즉 간도협약으로 일본이 받았다는 이권 내용이 그래서 간도협약으로 청이 일본에
여러 이권을 넘기면서 간도를 넘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일측이 먼저 동북삼성안을 제출했다고 하며 이로해서 만주5안건협약
간도협약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국편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곳에서
이 내용을 확인한 곳은 중에는 중국측의 논리에 반박하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삼전도비에 만주어로 쓰이지 않았다며 청이 만주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형태로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좀 신빙성에 의문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일본이 먼저 동북삼성안을 제출하고 청,일본은 이후
만주5안건협약, 간도협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동북삼성안의 그 시초는 포츠머스조약, 그리고 일청만주선후조약이고
동북삼성안은 그 이후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란 점
그리고 이의 해결책으로 만주5안전협약과 간도협약 그리고 그 이후
1915년 21개조 조약으로 일단 마무리 되구요.
글쎄 우리가 간도협약의 의미를 크게 생각하는건 아닐까요?
일단 전체적으로 확인되는 내용이 그렇습니다. 글쎄 어떤 의미에서 음모론이란 건지???
청나라에서 경계를 결정하려고 실사를 나왔을때 조선측 관료들이 따라갔다가 청나라 장군의 일갈에 쫄아서 제대로 얘기도 못해보고 도망가고 청나라측은 자기들 속셈대로 기준을 정하고 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산행기를 쓴 사람이 그 위치에 갔을때 동행한 지방관료와 당시에 수행했던 수행원과 뭐라고해야되나 산행전문가? 가 이 얘기를 알려주니 분통터져하며 멍청한 놈들때문에 땅을 빼앗겼다라고 적어놓았더군요.
제가 본 조선시대 산행기들을 대부분 비슷한 언급이 있거나 두만강(지금 조선이 두만강 경계로 본다는거죠? 이런쪽은 잘몰라서 ㅎㅎ)을 경계로 보는 시각이었습니다.
ps. 초록불님 블로그를 쭉 둘러보면서 많을걸 배웁니다. 책도 사야되는데..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