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과 우리가 서로를 다르게 생각한 기반에는 [국가]가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민족의 필연적인 요소로 [국가]가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일찌감치 국가를 형성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무엇일까?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 (1882년) 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떠한 프랑스 시민도 자신이 부르군트 족인지, 알라니 사람인지, 타이파르 사람인지, 서고트 족인지 알지 못합니다.사실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해본다.
어떠한 대한민국 시민도 자신이 예 족인지, 맥 족인지, 한 족인지, 옥저 사람인지, 마한 사람인지, 변한 사람인지, 부여 족인지, 진한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아, 물론 족보를 따져 자기 가문의 연원을 위로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다. 실제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접고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계만을 따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 두기 바란다. 르낭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참고가 될 것이다.
프랑크 족에서 기원한다는 증거를 제공할 수 있는 가문은 프랑스 전체에서 열 개도 채 안 되며, 게다가 그러한 증거는 계보학자들의 이론 체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결합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불충분한 증거일 것입니다.르낭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것 하나를 더 인용해 보자.
민족은 영속적인 그 무엇이 아닙니다. 민족들은 새롭게 생겨났고, 언젠가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유럽 연맹이 민족들을 대체하게 되겠지요.이 말이 나온 것이 1882년이라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르낭의 이야기는 EU로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1882년에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 순방 중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태극기가 만들어졌다.)
그럼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보자.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 국제여론조사저널(IJPOR)이 33개국을 대상으로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22위로 나타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국민일보] 2006년 5월 30일자 보도 [클릭]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적다는 것은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는 말과 통한다고 생각들 한다. 그렇게 된 이유를 우리 고유의 것, 그리고 우리의 잘난 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교육으로 책임으로 돌리기도 한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에 [우리것]이 왜 이렇게 적은지 고민하기도 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이미 예전에 긴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따로 또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것이란 무엇인가? 첫번째 우리 것이란 무엇인가? 두번째 우리 것이란 무엇인가? 세번째 위 글을 쓸 때 분명히 언급하지 않은 부분만 덧붙이자.
우리 것을 주장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남과 다르다는 인식 아래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 관념은 현대에 와서 매우 강해졌다. 여기서 반론이 나올 수 있겠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도 [국가]가 있었고, 그 국가는 다른 종족과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이미 말했잖은가? 그렇다면 그 시절에도 [우리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아닌가? 그것이 굳이 현대에 와서 강해졌다고 이야기할 이유가 있는가?
있다.
그것은 전근대의 [국가]에 대한 인식과 현대의 [민족]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는 조선 후기로 돌아간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중앙집권적 국가로 나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유럽의 절대왕정에 비교하여 뒤떨어질 것이 없으며, 사실은 그들보다 발전된 정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농민은 평생 자기 생활의 반경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은 국민개병제를 갖추고 있던 나라다. 중앙의 권력은 개개 인민의 삶을 규정하고 있었다. 가령 온양에서 태어났던 이순신은 한양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북단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전라좌수영의 책임자가 된다. 군역을 사는 일반 백성도 마찬가지다. 전국토가 조선 임금의 지휘 아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선 후기에 조선은 격동에 휩싸이게 된다. 명의 멸망과 오랑캐 국가인 청의 등장이 그것이다. 천명이 오랑캐에게 넘어간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화의 정통이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반면 일단의 사대부들은 청을 실체로 인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중화 문명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는 사고에 이르는데,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철학적 사고의 과정이었다. 이들이 바로 실학자들이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이 무렵 수취체계가 붕괴된 상태였고, 국가는 정상적인 운영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여기에 민권의식의 도입은 국민국가(즉 민족국가, 국민국가는 시민국가라 불러도 된다.)의 건설이 지상과제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를 위한 여러가지 개혁정책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결국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제 강점기 하에서 [국민]을 강조할 수 없었던 지도자들은 [민족]을 표면에 걸었다. [민족]이 달성해야 하는 것은 [민족국가]였다. 이 [민족국가]라는 것이 한반도의 인민들을 근거로 하는 [국민국가]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채택했는데, 이는 위의 과정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왕조는 그 역사적 역할이 다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 국가의 건설은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광복 후 한반도는 국민 국가 건설의 방향을 놓고 다시 한번 격동에 휩싸였다. 불행히도 그 결말은 남과 북의 전쟁이었다.
3년을 끈 전쟁은 결말없이 휴전으로 마무리지어졌다. 우리나라는 둘로 갈라진 채 각자의 정체政體를 가지게 되었다. 북은 사회주의 국가로, 남은 자본주의 국가로.
천수백 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 찾아온 두 개의 정체는 심각한 충격을 남겼다. [민족의 통일]은 지상명제가 되었고, 우리는 [민족 중흥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다.
분단은 민족의식을 한없이 고취시켰고, 위정자들은 그 상황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과잉현상은 이렇게 우리 사이에 뿌리를 깊숙이 박기 시작했다.
앞서 한 질문에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만 줄인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차회를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