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 제8조의 의미 *..역........사..*



차별은 없다 - 훈요십조의 위작설- 페로페로님 블로그에 링크

신년 첫날에 역사 이야기라 좀 그렇지만 페로페로님 블로그에 훈요십조 글이 올라왔기에 평소 궁금해하던 부분을 좀 정리해 보았습니다. 훈요십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이 많지만 우선 원문을 보는 것이 좋겠죠?

여덟째, 차현(車峴 차령산맥(車嶺山脈))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함께 배역(背逆)으로 달리니 인심(人心)도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고을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王侯), 국척(國戚)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를 변란케 하거나 혹은 통합된 원한을 품고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관시(官寺 관청)의 노비(奴婢)와 진역(津驛)의 잡척(雜尺)에 속하던 무리가 혹은 권세(權勢)에 붙어 이면(移免)하고 혹은 왕후궁원(王侯宮院)에 붙어 말을 간교하게 하여 권세(權勢)를 농락하고 정사(政事)를 어지럽혀 재앙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良民)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라.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橙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束與朝廷, 與王侯國戚, 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甁統合之怨, 犯魚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徙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훈요십조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역차별의 근원이라는 거죠. 영호남 간의 갈등이라는 것이 과거에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는 다른 [국가]였고, 그러는만큼 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 영호남 갈등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늘날 영호남 갈등은 산업의 불균형 발전에 따른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반사 이익을 보아온 정치권의 책임이 제일 큽니다.)

현대의 관점을 투영할수록 이 문제는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왕건은 호남차별의 의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이것이 신라계 인물의 조작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종때 신하인 최제안이 훈요십조를 조작해서 백제계를 물리치고 신라계의 득세를 노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사실이런 이야기는 영호남 갈등의 짐을 왕건에서 들어내 신라에 얹으려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저 간악한 신라놈들=경상도 문둥이들이라는 결론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훈요십조를 바쳤다는 최제안은 최승로의 손자이며, 훈요십조를 보관했다는 최항은 최언휘의 손자입니다. 어떤 글에서는 최제안이 훈요십조를 고려사에 끼워넣었다고까지 하던데, 이 역시 원문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처음 태조의 신서훈요(信書訓要)를 전란(戰亂)으로 잃었는데 최제안(崔齊顔)이 최항(崔沆)의 집에서 얻어 간직하여 두었다가 바치니 이로 인하여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고려사 세가 최승로/제안)

고려사에 훈요십조는 두 번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태조가 박술희에게 훈요십조를 내리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훈요십조의 전문이 실려있습니다. 두번째는 열전 최유선 조에 최유선이 훈요십조를 들어 문종이 절을 짓는 것을 막고자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최유선은 해동공자라 불린 최충의 아들입니다. 훈요십조가 날조라면 이런 명문의 자손이 그것을 인용하여 이야기했을 리가 없습니다. 최충이 최씨라 혹 다같은 신라계 아닌가 의심할 분이 있을 겁니다. 최충은 해주 사람으로 신라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최충은 고려7대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에 따라 훈요십조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음모설은 항상 재미있습니다만, 항상 증거가 부족하죠...^^;;

이보다는 한층 나은 설이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연세대 국문과 설선경 교수의 주장입니다.

[신동아] 영호남 지역갈등의 원천‘훈요십조’ [클릭]

[공주강외]에서 [외外]가 [바깥]이 아니라 [위]를 뜻하는 것이라 주장한 것은 일견 참신하지만, 그 근거가 [한화사전]이라는 것에 이르면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차게 됩니다. 한문 해석할 때 한자의 여러가지 뜻 중에서 적당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짜맞추기를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만한 용례를 가지고 설명해야 하죠. 즉 外가 上이라는 뜻이 있더라라는 말로 설명해서는 안 되며, 지명과 함께 쓰인 外가 北쪽을 뜻한 용례가 있는가, 혹은 이야기 중심 쪽을 內가 아닌 外로 쓴 용례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에 근거해서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한 한문 해석은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이런 간단한 한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암호놀이를 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표기하겠습니까? 더구나 위 글을 보면 차현 이남 공주강 북쪽을 배역의 땅으로 정한 것은 그 지역의 각종 반란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지적된 홍천의 반란. 홍천은 차현 이북이 됩니다. 자 여기서 잠깐 지도를 봅시다. 대동여지도의 그 일대 지도입니다.


저 지도에 나오지 않았지만 홍성은 차령을 포함하고 있는 차령산맥 이북에 있습니다. 그리고 설 교수가 지목한 반란 중 공주 반란은 공주강, 즉 금강 이북으로 보면 포함되지 않는 결과를 빚습니다. 또 하나의 반란인 청주는 아예 이 근방이 아니고요.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대동여지도가 워낙 커서 그렇지, 차령에서 공주 사이에는 알만한 도시도 없는, 아주 좁은 지역이기 때문이죠. 대동여지도의 도로 표시에는 방점이 찍혀있는데 방점은 10리(4.4Km)마다 찍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 지도를 보면 차령에서 공주까지 기껏 30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좁은 지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안에 사람이 얼마나 산다고 굳이 언급하겠습니까?

따라서 훈요십조 제8조의 해석은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이라는 기존 해석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입니다. 고려 시대에 호남인을 차별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점은 페로페로님 블로그에도 잘 설명 되어 있고, 위 설 교수의 글에도 잘 나와있습니다.

더구나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은 전라도 출신 생모 태생입니다. 왕건은 혜종을 후계자로 삼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후계자로 삼았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훈요십조에는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셋째, 장자(長子)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이 비록 상례(常禮)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단주(丹朱)가 어질지 못하여 요(堯)가 순(舜)에게 선양(禪讓)한 것은 참으로 공명정대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원자(元子)가 어질지 못하거든 그 다음 아들에게 전하여 줄 것이며 그 아들도 그러하거든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는 자에게 전하여 주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하라.

원자가 어질지 못하면 대통을 다른 아들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는 것이 왕건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왕건은 생모가 미천한 출신이라 반대가 있을 혜종을 강력히 후계자로 밀었습니다. 고려사 열전의 박술희 조를 봅시다.

혜종(惠宗)이 7살 때 태조가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 어머니 오씨(吳氏)가 미천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낡은 상자[盧]에 비황포(沸黃袍)를 담아 오씨(吳氏)에게 내리니 오씨(吳氏)가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였다. 박술희(朴述熙)가 태조의 뜻을 짐작하고 혜종(惠宗)을 세워 정윤(正胤)을 삼기를 청하니 정윤(正胤)은 곧 태자이다. 태조가 임종시(臨終時)에 군국(軍國)의 일을 부탁하여 이르기를,
“경(卿)은 태자를 부립(扶立)하였으니 잘 보좌하라.”
하니 박술희(朴述熙)가 한결같이 유명(遺命)대로 하였다.


저기에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임종 시에 군국의 일을 부탁했다 합니다. 이때 훈요십조도 전해졌음이 분명합니다. 훈요십조 제8조의 다음 대목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저 아래 고을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王侯), 국척(國戚)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를 변란케 하거나 혹은 통합된 원한을 품고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중략) 혹은 왕후궁원(王侯宮院)에 붙어 말을 간교하게 하여 권세(權勢)를 농락하고 정사(政事)를 어지럽혀 재앙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왕건이 죽고 전라도 출신 태후가 세워지면 외척이 기승을 부릴까 염려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외척을 배제하라는 소리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죠. 따라서 제 8조는 지극히 정치적인 발언이었던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외척 경계를 에둘러서 이야기한 것이죠.

빈한한 가문 출신인 오씨의 친정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냐고요? 조선말 대원군은 외척의 기승을 막을 의도로 빈한한 가문의 소녀를 왕비로 맞습니다만, 십여년이 지나자 조선은 그 빈한한 가문이었던 민씨 천하가 되고 말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외척의 발호를 막아놓자니, 고민스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혜종의 동생들은 유력가문의 후광을 업고 있는 경우가 많았던 거죠. 실제로 뒤에 왕위에 오르는 정종과 광종은 충주 출신의 유씨 가문이 외가라 가장 막강한 가문을 배경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건은 충성스러운 신하 박술희를 불러 혜종의 배경이 되어주길 바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서조항으로 혜종의 출신 배경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제8조도 함께 내려준 것이 아닐까요?

고려 초기의 세력관계를 조금 공부해보면 제 가설이 맞을지 틀릴지 분명하겠습니다만, 이 점은 후일의 과제로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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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훈요십조 위조설을 내놓은 사람은 일제식민사학자인 금서룡이고, 이에 대해 반론을 낸 사람은 이병도입니다.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의 사고논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이병도가 일본인 학자의 의견을 반론했다니요? 그 사람들 이런 대목에서는 무슨 생각을 갖는지 참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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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愚公 2007/01/01 14:05 #

    사족 : 별 관심 없을 겁니다.
  • 페로페로 2007/01/01 14:12 #

    환빠는 보기도 싫습니다, 2007년에는 재발 일빠와 환빠는 보지 않았으면 참 좋겠습니다만 올해도 어김없이 활동을 하는 것 같더군요 아주 둘다 똑같은 것들끼리 난리 입니다.

    헌데 혜종 세력의 외척득세를 막기 위해서라는 것은 그 조항 하나만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고려는 말이 통일국가지 초기에는 거의 연맹국가 비스무리 한 모습도 보여서 말이죠 하지만 이후 그 조항이 미칠 영향을 왕건이 전혀 고려치 못했다고 보기도 좀 그렇지 않나요? 또한 왕건 일생에 있어 주로 화합에 역량을 더했는데 일부러 특정 지역을 꼽아가며 말하는 것도 그렇고요.

    저로서는 후대에 훈요십조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쪽을 더 쳐주고 싶습니다 단순히 신라계의 모략이 아니라 혜종의 정치적 모략 그러니까 신라계나 발해계를 이용해 선대의 공신들인 백제계를 누르려 하는 정치적 포석으로 본다할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국가적 프로젝트에 그와같은 내용이 포함되는 것도 이해가 가고 훈요십조의 비현실성이나 모순점도 이해가 갈것 같아서 말이죠.

    뭐... 그냥 저 개인의 생각입니다, 글고 한자의 해석문제는 저같은 아마추어에게는 너무 힘든 문제에요 쉽다고 하시지만 자칫하면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는게 한자문장이라... ^^;;
  • 초록불 2007/01/01 15:09 #

    페로페로님 / 한자 해석의 문제는 정말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잘 모르면 기존 학자들이 해온 해석이 맞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뒤집으려면 그만한 논거가 나와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국가사업으로 편찬된 우리나라 사료들도 트집잡기 일쑤였습니다. 한국사는 부정확하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죠. (이런 그들은 일본서기는 사료비판도 하지 못합니다. 진전좌우길이 그 문제를 건드렸다가 학계에서 추방당하죠.)

    아무튼 저로서는 조작설은 신뢰가 매우 낮습니다. 이 문제는 뒤에 좀더 궁리해볼 때가 있겠죠...^^;;
  • 슈타인호프 2007/01/01 18:17 #

    역시역시...새해에도 막강 포스를 보여주시는 초록불님이시군요^^
  • 치오네 2007/01/02 00:00 #

    초록불님 가정에 새해에 좋은 일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새해 첫 날부터 초록불님 이글루에서 생각해볼만한 글을 읽으니 선물받은 기분입니다. ^^
  • 초록불 2007/01/02 01:52 #

    치오네님 / 고맙습니다. 치오네님도 새해 업그레이드된 칭찬만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 Binoche 2007/01/02 20:29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초록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 오호라 2008/09/16 16:22 #

    쓰신 지 1년 반이 지난 글이나, 글을 읽다 보니 의문점이랄까 이런 게 좀 있네요.

    1. 훈요십조가 날조라면 이런 명문의 자손이 그것을 인용하여 이야기했을 리가 없습니다. :
    그 명문의 자손 또한 이것이 위작이라는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지요. 또한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태조 왕건이 만들었다는 문서에 대한 위작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르지요. 현재도 논란이 있는 내용이니까요.

    2. 外의 해석과 관련하여 :
    外에는 바깥이라는 뜻 외에도, 앞. 이전(以前)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특정한 지역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外를 이전의 뜻으로 써서 남쪽의 경계선으로 삼을 만 하지요. 더군다나 당시 고려에서 쓰던 한자는 중국과 거의 비슷할 것이니 고려시대에 쓰여진 한자에 대한 것이라면 한화사전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3. 조선시대 후기인 1860년대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를 가지고 거의 천년전에 쓰인 지리에 대한 문구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논하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설사 훈요십조가 위작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대동여지도가 대단한 것은 역으로 말하면 그 전에는 정확한 지리정보가 없었다는 이야기죠.

    4.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면, 제가 대학교 때 94년인지 95년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사법시험 대비 한국사 특강에서도 훈요십조 중 그 문제의 지역은 청주로 저항이 심했던 청주호족을 이야기한 것이라는 강사분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 나이드신 강사분이 변태섭 교수님 같기도 한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 교재가 변태섭 교수님 것이라 제가 그렇게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요. 물론 그 강사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문구의 해석오류에 대한 문제는 설선경 교수님만 이야기한 건 아니라는 측면에서 말씀드립니다.
  • 초록불 2008/09/16 16:46 #

    1. 짧게 설명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고려사> 내용을 직접 확인해보시면 생각하시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만...

    2. 한문 해석의 용례라는 건 영어 해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have의 뜻을 웹스터 사전에서 골라내어서 가져온다고 해서 I have a dream을 나는 꿈을 먹었습니다라고 해석하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3. 지도는 어느 때 것을 쓰나 상관없습니다.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지도를 쓴 것 뿐입니다. 비교적 간략한 형태라서 설명이 편한 이유일 뿐입니다. 저 위치들의 설명은 지도가 있거나 없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시각보조교재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4. 그렇군요.
  • 오호라 2008/09/17 14:31 #

    죄송합니다. 저는 사실 고려사를 직접 확인해 볼 정도의 한자나 역사실력은 없습니다. 다만, 결론을 이끌어내시는 과정에서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 다른 측면에서 볼 소지가 있는 듯한 부분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는 딱히 어떤 결론이 있어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생각을 해 보자는 것이죠.

    만약 훈요십조 전체가 아닌 제8조만 날조라면, 최유선이 훈요십조를 들어 문종이 절을 짓는 것을 막고자 했다는 내용은 전혀 다른 조문에 대한 것이므로 제8조가 날조가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 없죠. 또한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들이 지구는 고정되어 있고 하늘이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도 지구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던 것처럼요. 선조가 원균장군을 이순신장군과 동격의 공신으로 봉했다고 해서 두 장군이 모두 명장이라는 소위 원균명장설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2. 外의 해석과 지형에 대한 문제를 추가로 말씀드리죠
    "차현"이 "차령산맥이라는 전제하에 글을 작성하신 걸로 보이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http://blog.naver.com/assah1?Redirect=Log&logNo=20033873426 이 링크 내용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지는 外를 앞, 이전, 북쪽의 뜻으로 보지 않고서 바깥의 뜻으로 보아도 청주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공주강이 공주지역을 감싸고 흐르는 모양에서 보면 그 안쪽인 공주지역이 공주강의 內이고 그 바깥쪽이 공주강의 外라는 것이죠. 또한 차현은 차령산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본래 지도를 말씀드린 것은 고려사람들이 가졌던 지리정보(동서남북이나 상호간의 위치 등)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초보자도 아닌 문외한의 댓글에 친절하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초록불 2008/09/17 14:49 #

    소개해주신 블로그 잘 보았습니다. 이런 의문은 들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왕건이 청주를 지목하고 싶었다면, 청주라고 왜 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문서의 일부만 날조라고 이야기하는 건 받아들이기가 좀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포스팅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오호라 2008/09/17 21:02 #

    왕건 사망연도는 943년입니다. 현재의 청주로 이름이 변경된 것은 940년이라고 되어 있군요(청주시 홈페이지). 그러면 훈요십조가 왕건이 직접 남겼다 하더라도 꼭 청주라는 명칭을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고, 딱 그 청주라는 도시에만 한정을 지으려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이렇게 생각하면, 청주가 남북조 시대 때 신라의 5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이었으므로(이것도 청주시 홈피에서 봤네요) 왕건이 서원경이라고 왜 칭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훈요십조 제8조에서 말하는 차현이남 공주강외가 현재의 차령산맥과 금강의 이남 지역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더 이상하고 복잡합니다. 차령산맥과 금강의 사이에 위치한 구역은 포함되는 것인지도 불분명하죠(만약 제외된다면 차현이남은 쓸필요가 없고, 포함된다면 공주강외를 쓸 필요가 없죠). 정말 왕건이 그런 의도였다면 왜 후백제지역이나 전주무주(남북조시대 신라에서 사용하던 전라북도와 남도의 구역명칭)라고 아주 간단하게 쓰지 않았을까요?

    또한 왕건이 사후에 왕후가 어디 출신이 될지는 알수 없습니다. 왕건 생존시 다음 왕이 될 사람의 부인이 전라도 출신이라 해서 그 후에도 계속 전라도에서 왕후가 나오란 법은 없으니까요. 왕후는 전국 어디에서나 나올 수 있는데 특별히 왕들에게 전해 주라는 내용에 전라도를 겨냥해서 안 좋은 말을 쓴다는 것이 이상하죠. 차라리 외척을 경계하라는 말이 더 얌전한 표현이죠. 외척 경계를 에둘러서 이야기한 것이라는 추정은 언뜻 와 닿지가 않네요.
  • 초록불 2008/09/17 21:18 #

    와 닿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대놓고 사후의 일을 부탁하면서 대놓고 외척을 쓰지말라고 할 수는 없죠. (두눈 시퍼런 괄괄한 마누라가 바로 그 외척의 중심이라는 걸 생각하세요.)

    어쨌든 납득하실 수 없는데 억지로 납득하시려 하진 마세요. 저로서는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하게 될 뿐입니다.
  • 해피 2008/12/30 15:34 #

    차령과 차현은 엄연히 틀린 개념입니다. 다음 글을 참조해보심도 좋을 듯 합니다.
    http://blog.chosun.com/blog.screen?blogId=68721&menuId=283474
    또한 공주강이 금강과 같다고 하면 금강은 주요 지류가 전북쪽 지류와 충북 북부에서 발원한 지류인데 삼국시대떄는 충북쪽 지류가 더 유명하고 요충지였지요. 그렇게 보면 금강 바깥쪽은 충북쪽 지류로 보면 경상도가 되는 겁니까?. 공주강은 금강과 다름 개념입니다. 충북쪽 지류와 전북쪽 지류가 만나서 연기군에서 부강이 되고 공주에서 공주강이 되고 부여에서 백마강이 되고 그다음에 고성진강이 됩니다. 금강과 공주강은 다릅니다. 또하나 고려 왕실과 자손대대로 인척관계를 맺은 전라북도 전주김씨나 전라남도 장흥임씨는 훈요십조대로라면 결혼을 할수 없었는데 고려왕실과 가장 왕성하게 결혼한 가문들입니다. 고려조에서 전라도보다 더 잘나갔던 지역은 경기도 빼고는 없었는데 그런 전라도가 차별받았고 그 근거가 훈요십조라는 것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 초록불 2008/12/30 16:49 #

    1. 호남지역이 차별 받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이미 포스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호남 나주 출신의 왕비 아들이 대를 잇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저것이 청주 쪽이라는 링크 포스팅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문의 구조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청주를 지목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도, <자 차현 지 공주강>이라고 쓰면 그만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가리킬 때 쓰는 용법입니다. 또한 차현은 현재의 차령이라는 것을 부인할만한 사료가 제시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의 차현을 차령이라 부른 것이라 생각하며, 그 근거로 간단하나마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 22년 10월 1일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위 기사를 보면, 정여립의 반역을 금구(지금의 김제)에서 안 이길이 은진(지금의 논산)으로 와서 고하고 차현을 넘어서 서울로 들어갑니다. 이때 이 시급한 일을 가지고 이길이 청주로 돌아서 가겠습니까? 지금의 은진에서 공주 - 천안 사이에 차현, 즉 차령이 있었음은 명약관화한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 초록불 2008/12/30 16:51 #

    또한 제가 잘 모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예시로 제시된 그림4를 볼 때 "도차현"이라 명기된 것을 "차현"이라 이야기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군요.
  • 초록불 2008/12/30 17:08 #

    한가지만 더.

    말씀하신 포스팅에서는 왕건이 김유신을 싫어했다고 하는데, 근거를 알 수가 없는 이야기군요. 청주에는 김유신의 사당이 있었는데, 고려에서도 이곳에 제사를 지냈으며 그것을 폐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 해피 2008/12/30 17:13 #

    그럼 지금도 남아있는 충북 음성군과 경기도 안성사이에 있는 차현고개는 무엇입니까?
    최근에 임의로 만들어진 차현고개입니까?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있어온 지명으로 훈요십조에서 기록한 차현과 글자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차령을 차현으로 바꿔치기하여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차현은 동국여지승람에서 공주목에서 57리라고 기록했는데 그곳이 충남 연기군의 전의입니다. 천안에 있는 차령과 틀리지요.
    차현은 여러곳에 존재했으니 왕건이 지목한 차현이 연기군의 전의에 있는 차현인지 음성의 차현인지는 왕건만이 알겠지만 음성의 차현이 더 가까워 보입니다
  • 초록불 2008/12/30 17:20 #

    세상에는 같은 지명이 너무 많아서 누군가는 차현을 중국 땅에서 찾기도 하겠지요. 종로에서 차를 잡고 신사동에 가자고 하면 은평구로 갈까요, 강남구로 갈까요? 제 의견은 드렸고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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