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또 한국사 미스테리라는 낚시글이 폭주 중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 글 중 정말 개념없는 글을 보았다. 아, 진짜 욕나온더라는....
일부만 옮겨놓는다.
한양으로 모아진 사고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빼돌려지고 10여년이 흐른다음 이분들을 죽이는데 일조하고 돈을주고 벼슬을한 이광수 최남선 한용운 등이 역사서를 쓰게 됩니다. 왜놈들과같이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한국역사 입니다.
이것들이 어디다 만해 한용운을 끼워놓고 있는 거야!
아, 진짜 욕 나와서...-_-;;
그리고 한국사 미스테리 60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들은 이 글을 보도록...
글이 컴퓨터 화면 2개를 넘어가는 건 못 읽는다는 분은 아예 보지 말길...-_-;;
한국사 미스테리 60 [클릭]
그런데 그런 글 중 정말 개념없는 글을 보았다. 아, 진짜 욕나온더라는....
일부만 옮겨놓는다.
한양으로 모아진 사고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빼돌려지고 10여년이 흐른다음 이분들을 죽이는데 일조하고 돈을주고 벼슬을한 이광수 최남선 한용운 등이 역사서를 쓰게 됩니다. 왜놈들과같이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한국역사 입니다.
이것들이 어디다 만해 한용운을 끼워놓고 있는 거야!
아, 진짜 욕 나와서...-_-;;
그리고 한국사 미스테리 60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들은 이 글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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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치오네님 / 퀘이사 너머로 보낸 겁니다.
MrNoThink님 / 초등학교 방학한 것을 실감케 합니다.
둔저님 / 아는 이름은 다 주워섬긴 거죠. 저거 앞뒤글 전체 다 읽으면 정말 뒤집어집니다.
변절자들과 동류로 넣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머엉)
-_-;
그리고 저런 허랑방탕한 소리들을 하고 있으니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더욱 강화하는 겁니다. 재야사학자들이 주류강단학계에 새로운 경향을 줬고, 일반인에게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다른면에서 이러한 민족주의의 반작용으로 중국에게 위기의식을 가지게 해서 동북공정을 불러일으킨 잘못도 있습니다. 한족의 문화는 모든것을 끌어당겨 녹여버리는 성격이 있어요. 그들이 동북공정을 통해 자신의 조상으로 섬기던 황제와 헌원에 우리들이 동이의 조상이라고 말했던 치우를 끼워넣어 중화삼조로 모시는걸 봤다면 좀 자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대로된 근거나 교차검증없이 무조건 책팔아 먹고 인터넷 조회수 올리기 위한 무분별한 저질글의 양산은 좀 지양해주셨으면 합니다.
잊혀질 만하면 올라오길 반복하는건 아직도 낚일 사람은 많다라는거겠지요.
그, 한국사 60 미스테리인가 하는 반박문을 보고 쓰는건데요.
첫번째에 봉황성의 위치에 대한 글 때문에 질문 드립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 한다 하였다.
'지지(地誌)'에, 봉황성은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으로 이름함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地誌)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봉천부에 속하는 지명)의 동북 70 리에 있다 하였으니,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까지가 3백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부합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다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 예, 맥 등 동이(東夷)의 여러나라가 모두 위만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자, 영고탑, 후춘 등이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아니하고 함부로 한사군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고
다시 패수(浿水, 강이름 패)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을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을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중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에 현토나 낙랑은 있으나 진번과 임둔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부분이 있는데요,
이런 부분들은 환단고기를 떠나서 그 이전의 기록인 것으로 보아서 봉황성의 위치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연암의 열하일기는 그야말로 일기답게 매일 매일의 행로가 잘 적혀 있습니다.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넜고
6월 25일 구련성을 지나고
6월 26일 탕산성을 지나
6월 27일 책문에 도착하였으며
6월 28일 봉황성에 도착하여 쓴 글의 일부가 위에 인용하신 겁니다.
조선 사신들이 북경으로 가던 연행로는 자세히 조사되어 있으며, 봉황성의 위치가 다른 곳으로 움직일 가능성이란 0%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