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 복수는 왜 허용되면 안되는가? - 고려 경종의 복수법 *..역........사..*



고려 초의 일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태조 왕건은 무차별적인 혼인 동맹을 맺었습니다. 후비전에 등재된 부인들만 29명. 그중 13명의 부인으로부터 아들만 25명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아들 사이에 당연히 치열한 권력 암투가 있었을 것입니다. 왕건은 장남 무(武)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2대 혜종입니다. 혜종은 일찍이 왕건을 따라 스무 살부터 종군하여 군공을 세운 용맹한 왕이었습니다. 왕규가 혜종을 암살코자 자객을 왕의 침실로 집어넣었는데, 혜종이 한주먹에 자객을 때려죽일 (一擧斃之) 정도였죠.

하지만 잠들었다가 당하면 속절없는 노릇인지라 항상 갑사들에게 호위를 시키느라 편한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려 초 호족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 하죠. 이런 명백한 반역행위를 보고도 국왕이 응징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혜종은 이런 스트레스로 일찍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혜종은 서른넷의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미처 후사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혜종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정종은 태조의 둘째 아들입니다. 혜종과는 달리 외가도 튼튼했습니다. 정종이 제일 먼저 처리한 일은 왕규를 처단하는 일이었습니다. 왕규는 두 명의 딸을 태조의 후비로 넣었고, 또 다른 딸을 혜종에게도 보냈습니다. 자매지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지위가 갈린 셈입니다. 이렇게 위세를 떨치니 국왕도 조심스럽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죠. 이런 개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종은 평양으로 천도를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찍 죽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정종도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왕위는 친동생에게 물려졌습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 광종입니다.

광종은 과거를 실시한 최초의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고려사]에서 평가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광종은 7년에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노비들을 풀어주었습니다. 노비들이 풀려나기 위해 주인을 모함하는 일이 성행하였습니다. 또한 광종 11년에 권신이라는 사람이 대신들을 참소했는데, 왕은 그 말을 믿고 그들을 귀양보냈습니다. 이때부터 참소가 극성을 부렸다고 하는데, 고려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니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하매 감옥이 항상 차 있었으므로 따로 임시감옥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자가 뒤를 이었다.

이 광풍은 그치지 않아 왕족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광종의 외아들조차 언제 목숨이 달아날까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태조가 총애하던 장수 박수경도 광종 15년에 아들들이 참소로 옥에 갇히는 통에 울화병으로 죽을 정도였습니다. 태조의 옛 신하로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40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자 광종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걱정을 풀어주는 기관이 바로 종교죠. 광종은 절들을 세우고 재물을 풀어 선업을 쌓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건달 무뢰배들이 승려로 둔갑하여 재물을 빼돌리게 되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최승로는 성종에게 바친 시무십조에서 광종 때의 일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참소(讒訴)를 믿음으로써 사람 보기를 초망(草莽)과 같이하고 주살한 자가 쌓여서 산과 같으며 항상 백성의 고혈을 다하여 재설(齋設)에 공급하니 이때를 당하여 아들은 부모를 배반하고 노비는 주인을 배반하며 모든 범죄자는 중으로 변형하고 떠돌아 다니는 걸인의 무리가 와서 여러 중과 같이 서로 섞여 재(齋)에 나아가는 자가 또한 많으니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광종이 51세로 죽자 스무 살의 청년 왕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고려 제5대왕 경종입니다.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까 공포에 떨던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마음 속에 분노가 가득했던 이 청년은 왕위에 오르자 대사면령을 발합니다. 귀양간 사람들을 풀어주고 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었습니다. 빚을 탕감해주고 임시 감옥을 헐어버렸습니다. 조세와 공납도 감면해 주었습니다. 이 정도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경종은 전대미문의 법을 시행합니다. 광종 연간에 억울함이 쌓인 사람들의 분노를 모두 풀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경종은 개인이 직접 복수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관청에 소를 올려 재판을 받을 필요 없이, 모함했던 나쁜 놈을 찾아가 죽여버려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니 세상이 어찌 되겠습니까? 이 때문에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도 한 둘이 아니었으니, 세상은 정의가 실현되기는커녕 더 어지러워지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왕선이라는 대신이 태조의 아들인 원녕태자와 효성태자를 죽이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광종 때 참소를 받았지만 광종도 차마 죽일 수 없어 용서했던 아우들인데, 경종의 복수법 때문에 살해당하고 만 것입니다.

삼촌들까지 죽게된 이 비극으로 정신이 번쩍 든 경종은 복수법을 폐지했습니다. 1년 간에 걸친 혼란이 이로써 끝이 났습니다.


덧글

  • 시퍼렁어 2007/01/29 13:37 #

    인구 감소에는 도움이 되었겠군요 -_- 일단 죽여놓고 개중에 몇몇녀석은 진짜 나쁜놈이었을테니 (다행히 초가삼간 태운 격은 안되었으니 나름 성공한걸까)

  • 2007/01/29 13:4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테이_ble 2007/01/29 14:24 #

    복수법이라니 --;;
  • nauta 2007/01/29 14:34 #

    저런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 시행된 때가 있었다니... 놀랍네요.
  • 리체 2007/01/29 14:58 #

    하하...어이없는 비극이긴 하지만, 읽는 입장에선 재밌네요.^^
    그래도 나중에 정신이 번쩍 들긴 했다니...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아는 왕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이후 경종의 정치인생은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무지무지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 페로페로 2007/01/29 15:06 #

    그러고 보면... 한반도 역사에서 왕권이 타국 마냥 무지막지 했던적은 없는것 같아요...
  • 풍백비렴 2007/01/29 15:11 #

    복수라.. 확실히 그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으로 보이지만.. 글쎄요. 광종때 참소로 죽은 사람들 중에 선량한 사람들이 몇 %있는지 부터 의문이군요. 복수. 정당한 복수였을까나..
  • 초록불 2007/01/29 15:28 #

    비밀글 / 동생이 아니라 삼촌들입니다. 경종은 태조의 손자였습니다.
  • 초록불 2007/01/29 15:33 #

    리체님 / 그후 정치를 잘해보려 노력하지만 암살 음모를 한차례 겪은 후 정사를 내팽개치고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스물여섯에 죽습니다. 다행히 그 뒤를 이은 성종(사촌 동생이죠)이 정치를 잘해서 고려 왕조의 기틀을 잡고 있죠.
  • 초록불 2007/01/29 15:34 #

    nauta님 / 우리나라 역사도 알고보면 로마인 이야기 못지 않게 재밌는 일이 많답니다...^^;;
  • 별빛수정 2007/01/29 15:47 #

    복수법이라니...세상에;;; 나라가 난장판이 됐겠네요;;;
  • 정시퇴근 2007/01/29 16:17 #

    아아 저런 법이 있었다니, 무시무시한 법인데요...--;;

    사회 민심도 흉흉했겠군요.

    걸리기만 해봐라 이런 분위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리체 2007/01/29 17:04 #

    그랬군요. 경종도 비운의 인물이네요. 과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나이가 나이인만큼 왕에 맞지 않은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이야기 더 들려주세요.^^
    + 혹시 블로그에 쓰신 역사 관련글들을 추려서 책으로 내실 계획에 포함되어 있나요?
    환단고기에 대한 것과 더불어서요.
  • 초록불 2007/01/29 17:39 #

    리체님 / 환단고기 관련 글들만 정리했는데도 책 한권 분량이 나와 버려서 역사관련 이야기나 민족에 대해서 쓴 글들은 넣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눈먼 출판사가 책 내자고 하기 전에는...
  • joyce 2007/01/29 18:16 #

    굉장히 흥미로운 사건인데요. 정말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듯한.
    문화대혁명의 선구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 한도사 2007/01/29 18:47 #

    법원에서 공정하게 재판을 해서 형량이 결정되면, 피해자로 하여금 가해자에게 체형을 가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곤장 100대라던가, 직접 사형(死刑)을 가할 수 있게 해 준다던가... 그래야 원한이 해소되지 않을까요.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재판에서 벌금형이나 금고형을 받았다고 해서, 나의 원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국가가 공정하게 관리하는 복수법은 찬성입니다.
  • 슈타인호프 2007/01/29 18:51 #

    광종의 저지른(?0 일들의 뒷처리(?)는 그 후에도 계속 있었죠. 경종의 뒤를 이은 성종만 해도 노비환천법을 만들어 노비들 중 성질이 좋지 않은 - 옛 주인을 모욕하는 등 - 자들은 다시 노비로 만드는 법을 시행했으니까요...^^
  • 초록불 2007/01/29 18:53 #

    슈타인호프님 / 맞습니다. 주제와 관련이 없어서 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 오우거 2007/01/29 20:26 #

    복수는 목숨 내놓아야 해볼만한 일인데 그걸 법으로 좋다고 풀었으니...
    지금도 복수법이 생기면 인구 10분의 1은 날아가지 말입니다;;
  • 샤리 2007/01/29 21:52 #

    정말 정신이 중간에라도 번쩍 들어서 다행이네요.. 안들었으면 저도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니까요 --;
    (저 무차별적으로 혼인 많이해서 아들 잔뜩 낳으신 분이 조상님이라 참... 고려사 배울 때 혼자 민망했었지요. 그 시기라서 통일을 위해서라는 명분이라고 해도 참...--;)
  • matercide 2010/08/19 22:45 #

    개성 왕씨는 이성계의 창업으로 거의 씨가 말랐을 텐데 아직 대가 이어져 있군요. 이런 분에게 답글을 달다니 영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파입니까?
  • 쇠나무 2007/01/30 01:09 #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써주시니 우리 역사도 흥미진진한걸요. ^^ 그나저나 경종의 복수법 시행 당시를 배경으로 무협지를 쓰면 아주 재밌겠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은원관계에, 강자에게 복수하기 위한 약자의 분투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강자의 음모 등 소재가 무궁무진하겠습니다.
  • 초록불 2007/01/30 01:54 #

    쇠나무님 / 왕들도 한 무술 하던 시대니, 재밌을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는 워낙 먼치킨이 대세인지라...
  • matercide 2010/08/19 22:45 #

    임금도 황족도 나름 무슬하는 시대를 흥미진진하게 되살려내고 싶은 나
  • 총천연색 2007/01/30 15:58 #

    감히 흥미롭다고는 말 못하겠네요. ;;;
  • luxferre 2007/01/31 00:05 #

    한마디로 막나갔던 거군요--;
  • 유진 2007/01/31 09:18 #

    착하게 살아야겠군요...
  • Cato 2007/02/01 00:04 #

    천추태후와 경종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 초록불 2007/02/01 00:53 #

    Cato님 / 오촌당숙모이자 아내죠.
  • 쩌비 2007/02/01 09:37 #

    오~, 복수법이라니 이런 터무니 없는 일도 있었군요. 잘 읽고 갑니다. ^^
  • 겨울사랑 2007/02/14 11:39 #

    사실 사료만 조금더 충분하다면 지금보면 소설이나 드라마소재로 고려시대만큼 재미있었던 시대도 없었을꺼라는 생각들이 들더군요. 가끔은 화끈하고 가끔은 막나가고 가끔은 어이없고 가끔은 감동적이고 근친상간에 반란에 이민족 침입에 잘 따져보면 로마시대못지않게 소재꺼리가 많을것같다는...(솔직히 조선시대는 제가 보기에는 좀 고리타분합니다..-_-;;)

    광종은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그의 정책이나 그렇게 좋다는게 아니라....) 임금인데 그에 대한 사료만 좀더 나온다면 한번 소설로 써볼까하는 마음마저 들더군요..^^
  • 이야타 2009/02/20 21:40 #

    안녕하세요 초록불님 오래간만에 초록불님 블로그에 널러와서 글 읽어보네요.

    사실 딴 글을 찾다가 이 글이 눈에 확~! 들어와서;;;(요새 꽃보다경종에 낚여서 헤롱헤롱거리고 있거든요 ㅜ_ㅠ)

    이 글 촘 복사해서 디시인사이드 드라마 천추태후갤러리에 올리고싶은데...

    역시 퍼가기는 안되는 걸까요????

    물론 출처는 남길겁니다. 이글루스 주소랑!

    혹시 제 댓글 보시고 안된다고 답글 달아주시면 곧 와서 보고 지울께요.

    답글 부탁드립니다.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 이야타 2009/02/20 21:45 #

    그런데 경종이 광종의 외아들이 아니라 동생인 효화태자란 분도 계셨다고 들었는데

    (요절했다고 그러더군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것인지;;;;
  • 초록불 2009/02/20 22:15 #

    맞습니다. 일찍 죽어서 경종을 하나 남은 아들이라는 걸 강조하려고 외아들이라고 쓴 것 뿐입니다.
  • 이야타 2009/02/20 22:02 #

    박시백님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종대부터 광해군때까정(현재 인조실록까지 나왔습니다)

    어찌나 고변&참소들이 많은지......... 보는 제가 다 질리더라구요. 헐~

    경종이 광해군시절과 똑같았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네요 ㅜㅠ

    ↑현재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경종캐릭에 워낙 닥빙해서 한달째 정신 못차리고 있는 중입니다;;
  • 녹두장군 2016/03/06 18:15 #

    고대나 중세 근세 사회에서 복수 허용한 사회 많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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