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08년 위만 조선이 한나라 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죠,
遂定朝鮮, 爲四郡. 마침내 조선을 정벌하고 4군을 만들었다.
재야사가들은 이 명확한 문장에 시비를 겁니다.
첫 번째 부류는 한이 조선에 설치한 4군은 실제로는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4군의 이름이 없으니까 4군은 없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한이 조선에 4군을 설치한 것은 맞는데, 위만조선은 중국 땅에 있었던 고조선의 변방 국가였으므로 4군도 그곳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조선에 설치된 4군이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한사군이라 알려져 있는 이 군현들을 한나라 동방변군(이하 동방변군)이라 부릅니다. 동방변군이란 한나라가 동방에 설치한 변군(邊郡)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군현에는 본토에 설치한 내군과 점령지역에 설치한 변군이 있습니다. 변군은 내군과 달리 직접 통치하는 구조가 아니라, 점령지의 통치자를 이용한 간접통치 방법을 채택한 곳입니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인두세를 거두지 못합니다. 변군마저 설치할 형편이 되지 못하면 점령지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한무제는 동월을 정복하고 군현 설치를 포기했습니다. 그리하여 [사기] 동월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리에게 조서를 내려 그곳의 백성들을 모두 강회 일대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동월의 땅은 마침내 무인지경이 되었다.
한사군이란 명칭은 4개의 군이 지속된 것도 아니고, 그 이름 자체가 군의 정확한 성격을 보여주지도 못하므로 저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죠.
첫 번째 부류의 이야기부터 합니다. 4군의 이름이 없으니 동방변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무식한 주장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조선 정벌은 사마천 생전에 있었던 일이다. 사마천은 현장 목격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4군의 명칭을 기재하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4군은 설치되지 않았다.
아, 정말 한심한 논리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기]도 안 읽어본 사람들인 거죠. 사기 [남월열전]을 볼까요?
남월은 평정되었다. 마침내 이곳에 9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네, 보시다시피 여기에도 군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남월정벌은 BC 112년에서 BC 111년간 이루어진 것으로 역시 사마천 생존기간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이 전쟁에는 위만조선 정벌에 왔던 누선장군 양복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4개의 군을 설치했다고 적었으면 그만이지, 군명 따위를 적을 필요는 없었던 겁니다. 적었으면 더 좋긴 했겠죠. 참고삼아 이야기한다면 위만 조선이 멸망했던 그 해에 [사기]를 쓴 사마천이 태사공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럼 두 번째 부류의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이덕일의 책([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풋)에도 이 바보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더군요. 서점서 잠깐 보고 왔는데 도저히 돈내고 살 수가 없어서 그냥 왔습니다만, 책이 없으니 꼭 집어서 씹어줄 수가 없어서 아깝군요. 다 돈이 웬숩니다.)
이 주장은 동방변군이 있기는 했지만 그 위치가 한반도 및 평양 일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주장에는 위만 조선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는 주장과, 애초에 고조선이 요서-요동 일대에 존재했다가 요서 일대를 잃었던 사건이라는 주장까지 혼재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그런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중요하지 않은지는 글을 읽어나가면 알게 될 겁니다.
이 이야기의 근거들은 다 엉터리입니다. 근거의 큰 줄거리는 수성현, 갈석산과 요하의 위치 문제입니다. 먼저 수성현과 갈석산을 볼까요?
이덕일은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컬럼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수성현과 갈석산을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는 저절로 밝혀진다.
저렇게 써놓으면 [태강지리지]가 [사기]의 일부분처럼 보입니다. 역사학자가 되어가지고 이렇게 엉터리 출전을 쓴다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태강”은 진(晋)나라 무제(사마염)의 연호로 280년에서 289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태강지리지]는 이때 만들어진 책으로 실전(失傳)된 책입니다. 다만 당나라 때 사마정(司馬貞)이라는 학자가 [사기색은]이라는 주석집을 만들 때 [태강지리지]를 인용했을 뿐입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뒤에 이런 말이 붙어 있습니다.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또 [수경]에 전하기를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 여기 재밌는 구절이 있군요. 갈석산이 두 개가 있답니다. 대체 이런 구절은 왜 무시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걸 이야기하면 자기들 이야기가 뻥이라는 걸 자백해야 하기 때문이죠.
일단 [태강지리지] 문제는 그렇고, 이덕일은 수성현(遂城縣)을 어떻게 찾을까요? 뭐, 남들 다 한 것처럼 찾습니다. 컬럼에는 이렇게 나오죠.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改名)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덕일은 지금 난하 동쪽 대능하 서쪽에 있는 창려현이 창려군이며, 여기가 낙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갈석산도 있으니, 앞뒤가 딱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서 지리지 상곡군 조에 보면 이런 말도 나옵니다.
遂城舊曰武遂。
수성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불렀다.
이건 무슨 말일까요? 재야사가들 식으로 “무수”를 추적해 볼까요? [사기] 본기 진무왕 4년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4년, 의양을 점령하고 6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황하를 건너 [무수]에 성을 쌓았다.
여기 나오는 [무수]는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원곡현(垣曲縣) 동남쪽입니다. 그러니까 재야사가 식으로 말하면 여기가 바로 낙랑군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대체 한나라 시절 낙랑군 이야기를 왜 수나라 사서에서 찾느라 난리를 치는 걸까요? 세월이 흐르면 지명은 변합니다. 왜 저기에 낙랑이 나오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낙랑군은 고구려 미천왕 14년 (313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한번 볼까요?
겨울 10월에 낙랑군에 침입하여 남녀 2천 명을 사로잡아왔다.
어? 이게 뭘까요? 사실 저도 고등학교 시절에 [삼국사기]의 이 대목을 읽고 대체 이게 무슨 낙랑군 멸망 이야기람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안 드나요? 이 문제는 사실 중국사서를 봐야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자치통감]을 보죠.
건흥 원년 (313년)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웅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격하여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이에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하게 하였다.
위에 나오는 장통이나 왕준, 모용외 등은 태수가 아닙니다. 실력자들이죠. 혼란기였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낙랑군은 한반도에서 축출된 것입니다. 그것이 낙랑군의 끝이 아니라는 게 후대의 바보 재야사가를 혼란케 하는 것입니다. (제발 사서 좀 읽으십시오.) [자치통감]의 뒷 구절을 마저 읽겠습니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참군사로 삼았다.
모용외가 낙랑군을 두었답니다. 그럼 어디에 두었을까요? 불행히도 이 당시 기록에서 낙랑군의 위치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그것이 어디에 있었든지 고구려에 의해 축출된 곳에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낙랑군의 위치는 두 개가 되는 것입니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 있었던 위치와 모용외가 설치한 위치의 두 개지요.
하지만 모용외가 그냥 명목 상의 이름만 가진 군을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모용외의 막료 중에도 낙랑 태수를 역임한 자가 있었으며, 모용외의 세자 모용황도 “평북장군 조선공”으로 낙랑과 관련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선은 낙랑군의 한 현입니다.) 또한 현도군도 이동해 오기 때문에, 낙랑군이 실제 설치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 참고할만한 것은 [위서] 세조기(世祖紀)입니다. [위서]는 북위의 역사를 기술한 책입니다. 모용외의 손자 모용준이 세운 것이 “전연”입니다. 전연은 370년에 망했고, 북위는 386년에 세워진 오호십육국 중 하나입니다. 그럼 [위서] 세조기를 읽어보겠습니다.
연화 원년(432년), 영구, 성조,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없는 군현의 백성을 옮길 수는 없습니다. 이를 보면 분명히 낙랑, 대방 등의 군현이 모용외에 의해 옮겨져서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서 지형지에는 이런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樂良郡前漢武帝置,二漢、晉曰樂浪,後改,罷。正光末復。治連城。領縣二。戶二百一十九 口一千八。永洛正光末置。有鳥山。帶方二漢屬,晉屬帶方,後罷。正光末復屬。
낙양군은 전한 무제가 두었다. 양한과 진에서 낙랑이라 불렀는데 후에 고쳤다가 파하였다. 정광(520-525) 말년에 복구했다. 치소는 연성이다. 현을 둘 가지고 있다. 호는 219, 인구는 1천 8이다. 영락현은 정광말에 두었으며 조산(鳥山)이 있다. 대방현은 양한과 진에 속했는데, 후에 파하였다. 정광말에 다시 속하게 했다.
[위서] 지형지에 따르면 요동군의 호는 131, 인구는 855에 불과하니 낙랑군이 그보다 더 큰 군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분명히 알겠지만 낙랑군은 고구려에 의해 축출된 후 모용외에 의해 어딘가에 설치된 것입니다. 그럼 이 낙랑군은 모용외의 통치가 미치는 곳 어딘가에 있었겠죠? 그곳이 어디일까요?
모용씨는 선비족의 하나입니다. 본래 시라무렌 강 상류에 살던 모용씨는 285년에 요동에서 모용외를 수장으로 추대합니다. 289년 대능하 방면을 차지하고 307년에는 선비대선우의 지위에 오릅니다. 중심 근거지는 요서의 창려군(昌黎郡)이었습니다. 동진 원제는 모용외를 평주 자사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앞에 본 것처럼 미천왕 때로 모용외와 요동의 지배권을 놓고 티격태격하고 있었습니다.
모용외의 본거지는 창려군이었으므로 옮겨간 낙랑군도 그 부근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튼 요서 일대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모용씨가 세운 전연은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당했으나 모용 가문의 모용수에 의해 다시 부활합니다. 이것을 후연이라 부릅니다.
모용수는 부하들의 작호로 “낙랑왕”, “대방왕” 등을 내리고 있습니다. 모용씨의 낙랑, 대방에 대한 집착은 이 정도였던 것이죠. 후연은 한때 하북을 위협했으나 곧 탁발씨의 북위에 밀려 요동 방면으로 쫓겨났습니다. 요동에서 다시 광개토대왕에게 밀려서 결국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가 멸망하고 말지요. 후연의 뒤를 이은 북연의 지배자는 고구려계였던 고운(高雲)이었습니다. 이때 북연의 영토는 난하 동, 요하 서로 요서일대에 불과했습니다. 불과 1년 만에 고운은 암살 당하고 풍발이 북연의 왕이 되었습니다. (409년)
북위는 432년부터 436년에 걸쳐 북연을 정벌하고 요서를 장악했습니다. 북연의 왕 풍홍은 고구려로 도망쳐왔다가 목이 잘리죠. 아무튼 바로 이 북연 정벌 와중에 나오는 기사가 바로 위에 이야기한 연화 원년의 기사입니다. 다시 한번 보시죠.
연화 원년(432년), 영구, 성조,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점령한 땅의 백성들을 강제이주시킨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용어로 사민(徙民)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때까지 낙랑, 대방이 요서 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사민시킨 곳은 어디일까요? 명말 청초에 지어진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노룡현 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북위 임금 도(세조)가 연화 초에 조선민(朝鮮民)을 비여(肥如)로 사민하여 조선현을 두고, 아울러 북평군을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고, 북제가 북평군 치소인 신창(新昌)을 옮기고 조선현을 병합하여 이에 들게하였다.
여기서 “조선민”이란 조선현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북위의 세조([독사방여기요]를 지은 고조우는 민족의식이 투철해서 오랑캐 탁발씨의 황제인 세조에게 황제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임금(主)으로 쓰고 있습니다.)가 낙랑군 조선현의 백성을 옮긴 뒤 북평군 안에 조선현을 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비여”라는 곳입니다. 이 비여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해 두세요. 비여가 노룡현이라는 점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 신창(新昌)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세요. (기억할 것도 많군요.)
이 사실은 [위서] 지형지에서 확인이 됩니다. 이렇게 확인이 되어야 후대 사서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는 거죠. [위서] 지형지 평주 북평군 조에 세조의 사민으로 조선현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조선현은 양한과 진 때는 낙랑에 속했으나 후에 파하였다. 연화 원년에 조선민을 비여에 사민하여 다시 설치하였다.
이렇게 낙랑군과 조선현이 서로 분리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 둡시다. 그런데 북위는 효창 연간(525-527)에 낙랑군이 속한 영주를 잃어버립니다. 아마도 영주의 군벌 취덕흥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취덕흥은 영주에서 524년에 반란을 일으켜 529년에 진압됩니다.
바로 이때 낙랑군이 다시 세워졌다는 것이죠.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정광 말년에 낙랑군이 다시 세워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광 말년이라면 523-525년 중 어디쯤일 겁니다. 기록을 보면 낙랑군이 먼저 설치되었고, 그 후 영주가 함락된 것이지요.
반란이 진압된 뒤 534년에 영주가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서] 지형지에는 특이한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537년에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기사입니다.
525년 영주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이 537년에는 남영주에 설치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영주는 533년에 영웅성을 치소로 해서 세워진 주였습니다. 그럼 남영주는 어디일까요?
[수서] 지리지 상곡조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遂城舊曰武遂。後魏置南營州,准營州。置五郡十一縣。
수성은 옛 이름이 무수이다. 북위가 남영주를 두어 영주에 준하게 하고 5군 11현을 두었다.
남영주의 5군은 광도군, 요동군, 낙랑군, 영구군, 여군(=창려군)입니다. 북제는 5군 중 창려군만 남기고 다 폐지하였으며, 수나라가 되어서는 개황 원년(581년)에 주를 옮기고, 583년에는 창려군도 폐지하고 상곡군에 현들(영락현과 신창현)을 소속시켰다가 598년에 수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 북평군 치소가 신창(新昌)이었다고 했는데, [수서] 지리지에는 신창이 요동군의 현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신창이 수성이 됩니다. (영락현은 뒤에도 이름이 나오지만 신창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수성만 나옵니다.)
여기가 바로 비여이며, 난하 하구이며, 갈석산이 있는 곳입니다. 즉 남영주의 낙랑군은 북위 세조가 설치했던 조선현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자, 길고 지루해서 이따위 포스팅은 더 읽지 않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연도별로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313년 낙랑군,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모용씨의 요서 지방으로 이동함
432년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사민시킴. 북평군에 조선현을 둠 (낙랑군은 쇠락하여 폐지된 것 같음)
52X년 북위에서 다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함
525년 영주를 잃어버림. 낙랑군도 이무렵 없어진 듯
537년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됨. 남영주는 [수서] 지리지에 나오는 수성임
여기서 이덕일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이덕일은 이런 복잡한 낙랑군의 이동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바로 [수서]로 날아갑니다.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이 나오니, 그 수성현만 찾으면 된다는 게 이덕일의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냅니다. [수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먼저 이덕일의 말을 다시 한번 볼까요?
수나라 정사인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改名)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창려군이 모용외의 본거지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낙랑군과 조선현이 모두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덕일의 저 말은 원문과는 많이 어긋나지만 대의에는 지장이 없으니 세세히 고증하는 일은 그만 둡니다. 하지만 원문을 찾아보지도 않고 재야사가의 글을 휙 베껴썼으리라는 의심이 강하게 드는군요.)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건성건성 읽으신 분들은 문제가 아직 남았다는 것을 못 느끼신 것 같습니다.
[태강지리지]로 돌아갑니다. [태강지리지]는 실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쓰인 때가 280년에서 289년 사이입니다. 낙랑군이 요서로 이동한 것은 313년이고, 갈석산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것은 동위 효정제 천평 4년(537년)입니다. 다시 한번 [사기색은]에 있는 [태강지리지]의 원문을 보시죠.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낙랑군이 4반세기 뒤에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수성현에 올 줄 어떻게 알고 이런 것을 써놓을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앗, 그러면 여태까지 낙랑군을 추격해 온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공연한 헛고생일까요? 그럴 리가요.
우선 이름이 같은 수성현이기는 하지만 본래 수성현은 낙랑군이 관할하던 15개 현 중 하나였습니다. [한서] 지리지에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에서 이야기하는 낙랑 수성현(樂浪遂城縣)이란 낙랑군 수성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후대에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난하 하류에 자리잡은 수성현이 아닙니다.) 이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는 문제는 장성이 시작된다는 갈석산입니다.
[사기색은]에 나오는 [태강지리지] 인용문은 너무 짧아서 뭐라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기색은]과 동시대에 쓰인 [통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통전] 권 178 주군8에는 좀더 긴 인용문이 있습니다. 한번 보실까요?
盧龍漢肥如縣。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故名之。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非此碣石也。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으니 해안가에 우뚝 선 모양을 보고 그 이름을 삼은 것이다. 진나라 태강지지에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한다했는데, 갈석은 지금 고려의 옛 강역에 있으니 이 갈석산이 아니다.
재야사가들은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늘상 제일 뒤에 있는“이 갈석산이 아니다非此碣石也”는 인용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어지니까요. 두우는 노룡현에 있는 갈석산은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시작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문장에서 [태강지리지]의 인용문이 어디까지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저는 매우 소극적으로 “진나라에서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한다秦築長城, 所起自碣石” 부분만 [태강지리지]의 인용문으로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나라 시대인 8세기 후반에 지금 진황도의 갈석산이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고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 여기서 [사기색은]을 다시 볼까요?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또 [수경]에 전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북평의 갈석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통전]에는 유주 계현(薊縣)을 소개하며 계현에 갈석궁이 있었다고 적어놓았습니다. 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였으며, 한나라의 계현, 상건하가 흐르며 모용준이 도읍한 곳이라 적어놓았습니다. 이런 곳이 위만 조선이 있던 자리이며 낙랑군이 설치된 곳일리 없죠.
연나라의 장성은 요하를 넘어갑니다. [사기] 본기에는 진나라의 영토를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地東至海暨朝鮮, 西至臨洮, 羌中, 南至北嚮戶, 北據河為塞, 並陰山至遼東。
땅이 동으로는 바다와 조선에 이르고, 서로는 임조와 장중에 이르며, 남으로는 북향호에 이르고, 북으로는 황하를 요새로 삼아 음산을 아우르고 요동에 이르렀다.
요동을 영토로 삼고 있는데 왜 북평의 갈석에서 만리장성을 시작했을까요? 최근 연진장성은 압록강까지 뻗어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에라이, 동북공정 추종자야라고 할 인간들이 있겠군요.) [사기] 조선열전을 잠깐 봅시다.
연나라는 그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공격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고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요동외요(遼東外徼=요동 밖의 경계)에 속하게 하였다.
위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나라의 경계는 요동이었습니다. 난하 하류를 경계로 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물론 이덕일 류의 생각은 난하를 요하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논의하는 것은 다람쥐 쳇바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덕일 류의 사람들은 전국시대 연나라의 영토를 이야기하는 적이 없거든요. 연나라는 고조선에서 2천리 땅을 빼앗는데, 난하가 경계라면 그 전에는 난하에서 이천리를 물러난 곳이 연의 동쪽 경계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연나라는 존재할 수 없는 4차원에 살던 나라가 됩니다. 그러나 연이 난하로부터 이천리쯤 고조선 땅을 빼앗았다면 고조선은 청천강을 경계로 버틸 수 있게 되죠. 따라서 패수는 압록강이며 압록강에서 청천강 사이가 공지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판단입니다. (사기에서의 패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후대의 패수는 대동강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압록강 너머 요동 어디쯤에 갈석산이 있었던 거죠. 후일 낙랑군 수성현이 되는 곳입니다. 그 갈석산과 노룡현의 갈석산이 후대에 와서 혼동되어 버린 거죠. 또한 연진장성은 잊혀지고 산해관으로 장성이 놓이면서 갈석산이 진시황대 장성의 시작이라는 전설이 나온 것이라 봐야하겠습니다. (사족) 노룡현의 갈석산도 역사가 짧지 않습니다. [상서 우공편]에 황하 옆(고대에는 황하가 북경 인근으로 해서 바다로 나갔다고 합니다.)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통전] 변방전 동이 고구려 조에 있는 다음 기사를 한번 보시죠.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石。
갈석산은 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 전하는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우갈석은 황하 너머 바다 근처에 있는데 지금의 북평군 남쪽 이십여리 지점이므로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 된다.
재야사가들은 절대 쳐다보지도 않는 구절이죠. 이 부분은 고고학적 자료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야사가들은 평양에서 나오는 낙랑 유적을 무시하는 것과 같이 장성 유적도 무시하고 있죠. 유적과 문헌이 대립해도 유적이 이길 것인데, 유적과 문헌이 일치하는 것을 무시하면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부류를 보지요. 이게 가장 바보같은 이야기입니다.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이 구절을 먼저 보도록 합시다.
마침내 조선을 정벌하고 4군을 만들었다. 참(니계상 參)을 홰청후(澅淸侯)에, 음(조선상 韓陰)을 추저후(萩苴侯)에, 겹(장군 王唊)을 평주후(平州侯)로, 장(우거왕 아들 長)을 기후(幾侯)에 봉했다.
참, 음(한음), 겹(왕겹), 장은 모두 위만조선에서 투항한 사람들로, 왕검성 함락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제후에 봉해졌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본 재야사가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사실 4군이란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 아니라 바로 여기 적혀 있는 제후 4명이 봉해진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재야사가는 그 네 곳이 어딘지 추적했습니다. 대체 그 사람들 눈에는 분명히 적혀있는 군(郡)과 후(侯)도 구분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추적이나마나 [사기] 건원이래후자연표와 [한서] 경무소선원성공신표에 위 제후들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홰청후는 BC 99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봉지는 지금의 산동성 임치 부근입니다.
추저후는 BC 91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봉지는 지금의 천진 남쪽입니다.
평주후는 BC 107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봉지는 지금의 산동성 태안 부근입니다.
기후는 BC 105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봉지는 지금의 산서성 임분 서쪽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재야사가는 이 영역을 다 묶어서 여기가 위만 조선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는 세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그 지역에는 중국 군현들이 있습니다. 그 군현들은 어디로 비정해야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그후 등장하는 낙랑군, 현도군 등의 기사는 대체 무엇일까요? 몽땅 날조라고 우깁니다.
세 번째, [사기]에는 저 4명의 제후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 바로 이어져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최(最)는 죽은 아비(조선상 路人)가 세운 공으로 인해 열양후(涅陽侯)가 되었다.
이렇게 4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바로 뒤에는 5명의 제후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대체 재야사가들은 사료를 어떻게 읽는 걸까요? 5명의 제후가 있으니, 한5군이라 불러야 하는 걸까요? 열양후는 BC 103년에 폐지되었는데, 지금의 하남성 진평 부근입니다.
진짜 낙랑군의 역사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 하겠네요. 어째 낚시글이 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