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의 역사 만들어진 한국사



BC 108년 위만 조선이 한나라 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죠,

遂定朝鮮, 爲四郡. 마침내 조선을 정벌하고 4군을 만들었다.

재야사가들은 이 명확한 문장에 시비를 겁니다.

첫 번째 부류는 한이 조선에 설치한 4군은 실제로는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4군의 이름이 없으니까 4군은 없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한이 조선에 4군을 설치한 것은 맞는데, 위만조선은 중국 땅에 있었던 고조선의 변방 국가였으므로 4군도 그곳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조선에 설치된 4군이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한사군이라 알려져 있는 이 군현들을 한나라 동방변군(이하 동방변군)이라 부릅니다. 동방변군이란 한나라가 동방에 설치한 변군(邊郡)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군현에는 본토에 설치한 내군과 점령지역에 설치한 변군이 있습니다. 변군은 내군과 달리 직접 통치하는 구조가 아니라, 점령지의 통치자를 이용한 간접통치 방법을 채택한 곳입니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인두세를 거두지 못합니다. 변군마저 설치할 형편이 되지 못하면 점령지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한무제는 동월을 정복하고 군현 설치를 포기했습니다. 그리하여 [사기] 동월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리에게 조서를 내려 그곳의 백성들을 모두 강회 일대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동월의 땅은 마침내 무인지경이 되었다.

한사군이란 명칭은 4개의 군이 지속된 것도 아니고, 그 이름 자체가 군의 정확한 성격을 보여주지도 못하므로 저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죠.

 


첫 번째 부류의 이야기부터 합니다. 4군의 이름이 없으니 동방변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무식한 주장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조선 정벌은 사마천 생전에 있었던 일이다. 사마천은 현장 목격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4군의 명칭을 기재하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4군은 설치되지 않았다.

아, 정말 한심한 논리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기]도 안 읽어본 사람들인 거죠. 사기 [남월열전]을 볼까요?

남월은 평정되었다. 마침내 이곳에 9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네, 보시다시피 여기에도 군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남월정벌은 BC 112년에서 BC 111년간 이루어진 것으로 역시 사마천 생존기간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이 전쟁에는 위만조선 정벌에 왔던 누선장군 양복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4개의 군을 설치했다고 적었으면 그만이지, 군명 따위를 적을 필요는 없었던 겁니다. 적었으면 더 좋긴 했겠죠. 참고삼아 이야기한다면 위만 조선이 멸망했던 그 해에 [사기]를 쓴 사마천이 태사공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럼 두 번째 부류의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이덕일의 책([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풋)에도 이 바보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더군요. 서점서 잠깐 보고 왔는데 도저히 돈내고 살 수가 없어서 그냥 왔습니다만, 책이 없으니 꼭 집어서 씹어줄 수가 없어서 아깝군요. 다 돈이 웬숩니다.)

이 주장은 동방변군이 있기는 했지만 그 위치가 한반도 및 평양 일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주장에는 위만 조선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는 주장과, 애초에 고조선이 요서-요동 일대에 존재했다가 요서 일대를 잃었던 사건이라는 주장까지 혼재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그런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중요하지 않은지는 글을 읽어나가면 알게 될 겁니다.

이 이야기의 근거들은 다 엉터리입니다. 근거의 큰 줄거리는 수성현, 갈석산과 요하의 위치 문제입니다. 먼저 수성현과 갈석산을 볼까요?

이덕일은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컬럼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수성현과 갈석산을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는 저절로 밝혀진다.

저렇게 써놓으면 [태강지리지]가 [사기]의 일부분처럼 보입니다. 역사학자가 되어가지고 이렇게 엉터리 출전을 쓴다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태강”은 진(晋)나라 무제(사마염)의 연호로 280년에서 289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태강지리지]는 이때 만들어진 책으로 실전(失傳)된 책입니다. 다만 당나라 때 사마정(司馬貞)이라는 학자가 [사기색은]이라는 주석집을 만들 때 [태강지리지]를 인용했을 뿐입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뒤에 이런 말이 붙어 있습니다.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또 [수경]에 전하기를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 여기 재밌는 구절이 있군요. 갈석산이 두 개가 있답니다. 대체 이런 구절은 왜 무시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걸 이야기하면 자기들 이야기가 뻥이라는 걸 자백해야 하기 때문이죠.

일단 [태강지리지] 문제는 그렇고, 이덕일은 수성현(遂城縣)을 어떻게 찾을까요? 뭐, 남들 다 한 것처럼 찾습니다. 컬럼에는 이렇게 나오죠.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改名)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덕일은 지금 난하 동쪽 대능하 서쪽에 있는 창려현이 창려군이며, 여기가 낙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갈석산도 있으니, 앞뒤가 딱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서 지리지 상곡군 조에 보면 이런 말도 나옵니다.

遂城舊曰武遂。
수성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불렀다.

이건 무슨 말일까요? 재야사가들 식으로 “무수”를 추적해 볼까요? [사기] 본기 진무왕 4년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4년, 의양을 점령하고 6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황하를 건너 [무수]에 성을 쌓았다.

여기 나오는 [무수]는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원곡현(垣曲縣) 동남쪽입니다. 그러니까 재야사가 식으로 말하면 여기가 바로 낙랑군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대체 한나라 시절 낙랑군 이야기를 왜 수나라 사서에서 찾느라 난리를 치는 걸까요? 세월이 흐르면 지명은 변합니다. 왜 저기에 낙랑이 나오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낙랑군은 고구려 미천왕 14년 (313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한번 볼까요?

겨울 10월에 낙랑군에 침입하여 남녀 2천 명을 사로잡아왔다.

어? 이게 뭘까요? 사실 저도 고등학교 시절에 [삼국사기]의 이 대목을 읽고 대체 이게 무슨 낙랑군 멸망 이야기람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안 드나요? 이 문제는 사실 중국사서를 봐야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자치통감]을 보죠.

건흥 원년 (313년)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웅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격하여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이에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하게 하였다.

위에 나오는 장통이나 왕준, 모용외 등은 태수가 아닙니다. 실력자들이죠. 혼란기였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낙랑군은 한반도에서 축출된 것입니다. 그것이 낙랑군의 끝이 아니라는 게 후대의 바보 재야사가를 혼란케 하는 것입니다. (제발 사서 좀 읽으십시오.) [자치통감]의 뒷 구절을 마저 읽겠습니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참군사로 삼았다.

모용외가 낙랑군을 두었답니다. 그럼 어디에 두었을까요? 불행히도 이 당시 기록에서 낙랑군의 위치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그것이 어디에 있었든지 고구려에 의해 축출된 곳에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낙랑군의 위치는 두 개가 되는 것입니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 있었던 위치와 모용외가 설치한 위치의 두 개지요.

하지만 모용외가 그냥 명목 상의 이름만 가진 군을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모용외의 막료 중에도 낙랑 태수를 역임한 자가 있었으며, 모용외의 세자 모용황도 “평북장군 조선공”으로 낙랑과 관련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선은 낙랑군의 한 현입니다.) 또한 현도군도 이동해 오기 때문에, 낙랑군이 실제 설치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 참고할만한 것은 [위서] 세조기(世祖紀)입니다. [위서]는 북위의 역사를 기술한 책입니다. 모용외의 손자 모용준이 세운 것이 “전연”입니다. 전연은 370년에 망했고, 북위는 386년에 세워진 오호십육국 중 하나입니다. 그럼 [위서] 세조기를 읽어보겠습니다.

연화 원년(432년), 영구, 성조,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없는 군현의 백성을 옮길 수는 없습니다. 이를 보면 분명히 낙랑, 대방 등의 군현이 모용외에 의해 옮겨져서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서 지형지에는 이런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樂良郡前漢武帝置,二漢、晉曰樂浪,後改,罷。正光末復。治連城。領縣二。戶二百一十九 口一千八。永洛正光末置。有鳥山。帶方二漢屬,晉屬帶方,後罷。正光末復屬。
낙양군은 전한 무제가 두었다. 양한과 진에서 낙랑이라 불렀는데 후에 고쳤다가 파하였다. 정광(520-525) 말년에 복구했다. 치소는 연성이다. 현을 둘 가지고 있다. 호는 219, 인구는 1천 8이다. 영락현은 정광말에 두었으며 조산(鳥山)이 있다. 대방현은 양한과 진에 속했는데, 후에 파하였다. 정광말에 다시 속하게 했다.

[위서] 지형지에 따르면 요동군의 호는 131, 인구는 855에 불과하니 낙랑군이 그보다 더 큰 군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분명히 알겠지만 낙랑군은 고구려에 의해 축출된 후 모용외에 의해 어딘가에 설치된 것입니다. 그럼 이 낙랑군은 모용외의 통치가 미치는 곳 어딘가에 있었겠죠? 그곳이 어디일까요?

모용씨는 선비족의 하나입니다. 본래 시라무렌 강 상류에 살던 모용씨는 285년에 요동에서 모용외를 수장으로 추대합니다. 289년 대능하 방면을 차지하고 307년에는 선비대선우의 지위에 오릅니다. 중심 근거지는 요서의 창려군(昌黎郡)이었습니다. 동진 원제는 모용외를 평주 자사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앞에 본 것처럼 미천왕 때로 모용외와 요동의 지배권을 놓고 티격태격하고 있었습니다.

모용외의 본거지는 창려군이었으므로 옮겨간 낙랑군도 그 부근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튼 요서 일대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모용씨가 세운 전연은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당했으나 모용 가문의 모용수에 의해 다시 부활합니다. 이것을 후연이라 부릅니다.

모용수는 부하들의 작호로 “낙랑왕”, “대방왕” 등을 내리고 있습니다. 모용씨의 낙랑, 대방에 대한 집착은 이 정도였던 것이죠. 후연은 한때 하북을 위협했으나 곧 탁발씨의 북위에 밀려 요동 방면으로 쫓겨났습니다. 요동에서 다시 광개토대왕에게 밀려서 결국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가 멸망하고 말지요. 후연의 뒤를 이은 북연의 지배자는 고구려계였던 고운(高雲)이었습니다. 이때 북연의 영토는 난하 동, 요하 서로 요서일대에 불과했습니다. 불과 1년 만에 고운은 암살 당하고 풍발이 북연의 왕이 되었습니다. (409년)

북위는 432년부터 436년에 걸쳐 북연을 정벌하고 요서를 장악했습니다. 북연의 왕 풍홍은 고구려로 도망쳐왔다가 목이 잘리죠. 아무튼 바로 이 북연 정벌 와중에 나오는 기사가 바로 위에 이야기한 연화 원년의 기사입니다. 다시 한번 보시죠.

연화 원년(432년), 영구, 성조,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점령한 땅의 백성들을 강제이주시킨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용어로 사민(徙民)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때까지 낙랑, 대방이 요서 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사민시킨 곳은 어디일까요? 명말 청초에 지어진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노룡현 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북위 임금 도(세조)가 연화 초에 조선민(朝鮮民)을 비여(肥如)로 사민하여 조선현을 두고, 아울러 북평군을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고, 북제가 북평군 치소인 신창(新昌)을 옮기고 조선현을 병합하여 이에 들게하였다.

여기서 “조선민”이란 조선현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북위의 세조([독사방여기요]를 지은 고조우는 민족의식이 투철해서 오랑캐 탁발씨의 황제인 세조에게 황제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임금(主)으로 쓰고 있습니다.)가 낙랑군 조선현의 백성을 옮긴 뒤 북평군 안에 조선현을 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비여”라는 곳입니다. 이 비여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해 두세요. 비여가 노룡현이라는 점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 신창(新昌)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세요. (기억할 것도 많군요.)

이 사실은 [위서] 지형지에서 확인이 됩니다. 이렇게 확인이 되어야 후대 사서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는 거죠. [위서] 지형지 평주 북평군 조에 세조의 사민으로 조선현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조선현은 양한과 진 때는 낙랑에 속했으나 후에 파하였다. 연화 원년에 조선민을 비여에 사민하여 다시 설치하였다.

이렇게 낙랑군과 조선현이 서로 분리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 둡시다. 그런데 북위는 효창 연간(525-527)에 낙랑군이 속한 영주를 잃어버립니다. 아마도 영주의 군벌 취덕흥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취덕흥은 영주에서 524년에 반란을 일으켜 529년에 진압됩니다.

바로 이때 낙랑군이 다시 세워졌다는 것이죠.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정광 말년에 낙랑군이 다시 세워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광 말년이라면 523-525년 중 어디쯤일 겁니다. 기록을 보면 낙랑군이 먼저 설치되었고, 그 후 영주가 함락된 것이지요.

반란이 진압된 뒤 534년에 영주가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서] 지형지에는 특이한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537년에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기사입니다.

525년 영주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이 537년에는 남영주에 설치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영주는 533년에 영웅성을 치소로 해서 세워진 주였습니다. 그럼 남영주는 어디일까요?

[수서] 지리지 상곡조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遂城舊曰武遂。後魏置南營州,准營州。置五郡十一縣。
수성은 옛 이름이 무수이다. 북위가 남영주를 두어 영주에 준하게 하고 5군 11현을 두었다.

남영주의 5군은 광도군, 요동군, 낙랑군, 영구군, 여군(=창려군)입니다. 북제는 5군 중 창려군만 남기고 다 폐지하였으며, 수나라가 되어서는 개황 원년(581년)에 주를 옮기고, 583년에는 창려군도 폐지하고 상곡군에 현들(영락현과 신창현)을 소속시켰다가 598년에 수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 북평군 치소가 신창(新昌)이었다고 했는데, [수서] 지리지에는 신창이 요동군의 현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신창이 수성이 됩니다. (영락현은 뒤에도 이름이 나오지만 신창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수성만 나옵니다.)

여기가 바로 비여이며, 난하 하구이며, 갈석산이 있는 곳입니다. 즉 남영주의 낙랑군은 북위 세조가 설치했던 조선현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자, 길고 지루해서 이따위 포스팅은 더 읽지 않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연도별로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313년 낙랑군,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모용씨의 요서 지방으로 이동함
432년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사민시킴. 북평군에 조선현을 둠 (낙랑군은 쇠락하여 폐지된 것 같음)
52X년 북위에서 다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함
525년 영주를 잃어버림. 낙랑군도 이무렵 없어진 듯
537년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됨. 남영주는 [수서] 지리지에 나오는 수성임

여기서 이덕일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이덕일은 이런 복잡한 낙랑군의 이동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바로 [수서]로 날아갑니다.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이 나오니, 그 수성현만 찾으면 된다는 게 이덕일의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냅니다. [수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먼저 이덕일의 말을 다시 한번 볼까요?

수나라 정사인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이 창려군과 같은 지역이라고 전하고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수나라 때는 창려군으로 개명(改名)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창려군이 모용외의 본거지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낙랑군과 조선현이 모두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덕일의 저 말은 원문과는 많이 어긋나지만 대의에는 지장이 없으니 세세히 고증하는 일은 그만 둡니다. 하지만 원문을 찾아보지도 않고 재야사가의 글을 휙 베껴썼으리라는 의심이 강하게 드는군요.)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건성건성 읽으신 분들은 문제가 아직 남았다는 것을 못 느끼신 것 같습니다.

[태강지리지]로 돌아갑니다. [태강지리지]는 실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쓰인 때가 280년에서 289년 사이입니다. 낙랑군이 요서로 이동한 것은 313년이고, 갈석산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것은 동위 효정제 천평 4년(537년)입니다. 다시 한번 [사기색은]에 있는 [태강지리지]의 원문을 보시죠.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낙랑군이 250여년 뒤에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수성현에 올 줄 어떻게 알고 이런 것을 써놓을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앗, 그러면 여태까지 낙랑군을 추격해 온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공연한 헛고생일까요? 그럴 리가요.

우선 이름이 같은 수성현이기는 하지만 본래 수성현은 낙랑군이 관할하던 25개 현 중 하나였습니다. [한서] 지리지에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에서 이야기하는 낙랑 수성현(樂浪遂城縣)이란 낙랑군 수성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후대에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난하 하류에 자리잡은 수성현이 아닙니다.) 이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는 문제는 장성이 시작된다는 갈석산입니다.

[사기색은]에 나오는 [태강지리지] 인용문은 너무 짧아서 뭐라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기색은]과 동시대에 쓰인 [통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통전] 권 178 주군8에는 좀더 긴 인용문이 있습니다. 한번 보실까요?

盧龍漢肥如縣。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故名之。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非此碣石也。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으니 해안가에 우뚝 선 모양을 보고 그 이름을 삼은 것이다. 진나라 태강지지에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한다했는데, 갈석은 지금 고려의 옛 강역에 있으니 이 갈석산이 아니다.

재야사가들은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늘상 제일 뒤에 있는“이 갈석산이 아니다此碣石也”는 인용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어지니까요. 두우는 노룡현에 있는 갈석산은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시작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문장에서 [태강지리지]의 인용문이 어디까지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저는 매우 소극적으로 “진나라에서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한다秦築長城, 所起自碣石” 부분만 [태강지리지]의 인용문으로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나라 시대인 8세기 후반에 지금 진황도의 갈석산이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고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 여기서 [사기색은]을 다시 볼까요?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또 [수경]에 전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북평의 갈석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통전]에는 유주 계현(薊縣)을 소개하며 계현에 갈석궁이 있었다고 적어놓았습니다. 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였으며, 한나라의 계현, 상건하가 흐르며 모용준이 도읍한 곳이라 적어놓았습니다. 이런 곳이 위만 조선이 있던 자리이며 낙랑군이 설치된 곳일리 없죠.

연나라의 장성은 요하를 넘어갑니다. [사기] 본기에는 진나라의 영토를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地東至海暨朝鮮, 西至臨洮, 羌中, 南至北嚮戶, 北據河為塞, 並陰山至遼東。
땅이 동으로는 바다와 조선에 이르고, 서로는 임조와 장중에 이르며, 남으로는 북향호에 이르고, 북으로는 황하를 요새로 삼아 음산을 아우르고 요동에 이르렀다.

요동을 영토로 삼고 있는데 왜 북평의 갈석에서 만리장성을 시작했을까요? 최근 연진장성은 압록강까지 뻗어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에라이, 동북공정 추종자야라고 할 인간들이 있겠군요.) [사기] 조선열전을 잠깐 봅시다.


연나라는 그 전성기에 진번과 조선을 공격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고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요동외요(遼東外徼=요동 밖의 경계)에 속하게 하였다.

위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나라의 경계는 요동이었습니다. 난하 하류를 경계로 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물론 이덕일 류의 생각은 난하를 요하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논의하는 것은 다람쥐 쳇바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덕일 류의 사람들은 전국시대 연나라의 영토를 이야기하는 적이 없거든요. 연나라는 고조선에서 2천리 땅을 빼앗는데, 난하가 경계라면 그 전에는 난하에서 이천리를 물러난 곳이 연의 동쪽 경계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연나라는 존재할 수 없는 4차원에 살던 나라가 됩니다. 그러나 연이 난하로부터 이천리쯤 고조선 땅을 빼앗았다면 고조선은 청천강을 경계로 버틸 수 있게 되죠. 따라서 패수는 압록강이며 압록강에서 청천강 사이가 공지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판단입니다. (사기에서의 패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후대의 패수는 대동강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압록강 너머 요동 어디쯤에 갈석산이 있었던 거죠. 후일 낙랑군 수성현이 되는 곳입니다. 그 갈석산과 노룡현의 갈석산이 후대에 와서 혼동되어 버린 거죠. 또한 연진장성은 잊혀지고 산해관으로 장성이 놓이면서 갈석산이 진시황대 장성의 시작이라는 전설이 나온 것이라 봐야하겠습니다. (사족) 노룡현의 갈석산도 역사가 짧지 않습니다. [상서 우공편]에 황하 옆(고대에는 황하가 북경 인근으로 해서 바다로 나갔다고 합니다.)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통전] 변방전 동이 고구려 조에 있는 다음 기사를 한번 보시죠.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石。
갈석산은 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 전하는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우갈석은 황하 너머 바다 근처에 있는데 지금의 북평군 남쪽 이십여리 지점이므로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 된다.

재야사가들은 절대 쳐다보지도 않는 구절이죠. 이 부분은 고고학적 자료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야사가들은 평양에서 나오는 낙랑 유적을 무시하는 것과 같이 장성 유적도 무시하고 있죠. 유적과 문헌이 대립해도 유적이 이길 것인데, 유적과 문헌이 일치하는 것을 무시하면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부류를 보지요. 이게 가장 바보같은 이야기입니다.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이 구절을 먼저 보도록 합시다.

마침내 조선을 정벌하고 4군을 만들었다. 참(니계상 參)을 홰청후(澅淸侯)에, 음(조선상 韓陰)을 추저후(萩苴侯)에, 겹(장군 王唊)을 평주후(平州侯)로, 장(우거왕 아들 長)을 기후(幾侯)에 봉했다.

참, 음(한음), 겹(왕겹), 장은 모두 위만조선에서 투항한 사람들로, 왕검성 함락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제후에 봉해졌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본 재야사가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사실 4군이란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 아니라 바로 여기 적혀 있는 제후 4명이 봉해진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재야사가는 그 네 곳이 어딘지 추적했습니다. 대체 그 사람들 눈에는 분명히 적혀있는 군(郡)과 후(侯)도 구분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추적이나마나 [사기] 건원이래후자연표와 [한서] 경무소선원성공신표에 위 제후들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홰청후는 BC 99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봉지는 지금의 산동성 임치 부근입니다.
추저후는 BC 91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봉지는 지금의 천진 남쪽입니다.
평주후는 BC 107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봉지는 지금의 산동성 태안 부근입니다.
기후는 BC 105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봉지는 지금의 산서성 임분 서쪽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재야사가는 이 영역을 다 묶어서 여기가 위만 조선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는 세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그 지역에는 중국 군현들이 있습니다. 그 군현들은 어디로 비정해야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그후 등장하는 낙랑군, 현도군 등의 기사는 대체 무엇일까요? 몽땅 날조라고 우깁니다.
세 번째, [사기]에는 저 4명의 제후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 바로 이어져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최(最)는 죽은 아비(조선상 路人)가 세운 공으로 인해 열양후(涅陽侯)가 되었다.


이렇게 4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바로 뒤에는 5명의 제후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대체 재야사가들은 사료를 어떻게 읽는 걸까요? 5명의 제후가 있으니, 한5군이라 불러야 하는 걸까요? 열양후는 BC 103년에 폐지되었는데, 지금의 하남성 진평 부근입니다.

진짜 낙랑군의 역사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 하겠네요. 어째 낚시글이 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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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功名誰復論 2007/01/31 05:56 #

  • damekana 2007/01/31 08:10 #

    상당히 긴 포스팅에 덧글을 달자니 부담스럽습니다만, 이덕일이 요상한 모양새로 인용한 太康地理志라는 책은 비슷한 이름의 책이 몇 종 전하다가 없어진 모양입니다. 구당서 경적지에 太康 3년 (282)에 쓰여졌다는 地記라는 책과 州郡縣名이라는 책이 언급되어 있군요. 신당서 예문지에서 말하는 晋太康土地記와 太康州郡縣名이라는 책과 동일한 것 같은데 이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송의 왕응린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구요. 太康地理志가 만약 이 둘 중 하나와 동일한 책이라면 연대를 282년이라는 구체적인 연도를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어차피 태강 년간의 책이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나저나..."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라니 뭐, " '삼국사기' 세종실록지리지에는..."이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군요. 쯔쯔.
  • 슈타인호프 2007/01/31 08:16 #

    전혀 낚시 아닙니다.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 머미 2007/01/31 09:13 #

    그런데 가장 궁금한 것은, 낙랑 축출이 313년이라면 대체 호동왕자가 쳐들어간 낙랑은 뭐냐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국사시간때 이 얘기를 물어봤더니 '호동왕자가 미천왕의 아들'이라는 헛소리를 해 대서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 별빛수정 2007/01/31 09:44 #

    저 이덕일씨가 사서에서 일부만 집어내서 왜곡하는 데는 대가(?)인 듯 하더군요;;;
  • 초록불 2007/01/31 09:46 #

    功名誰復論님 / 좋은 포스팅이군요. 그 포스팅에 있는 것처럼 교치된 군이 당시에 매우 많습니다. 그걸 일일이 잡아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죠.

    머미님 / 원래 낙랑군의 역사를 이야기하면 그 부분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특히 그 부분은 바보 이모씨의 말도 안되는 설을 반박해 주어야 하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죠. 그나저나 호동왕자가 미천왕의 아들이라니... 국사 시간에 애로가 많으셨겠습니다. 언제 후속편을 올릴지 모르겠으니 좀 기다리셔야 할 듯...^^;;
  • 얼음칼 2007/01/31 09:59 #

    이덕일이 쓴 잡서 딱 한권만 읽었음에도 바로 정체 파악이 되더군요.
  • 措大 2007/01/31 10:01 #

    사무실에서 스윽 훑어보다가 황급히 내렸습니다. 지도책이 필요하겠군요 (...)
    이덕일이 환빠인건 세상이 다 아는 얘기죠.
  • 초록불 2007/01/31 10:45 #

    措大님 / 제가 뽀샵질이 서투른 관계로 지도를 첨부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페로페로 2007/01/31 10:48 #

    서점에 갔다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라는 책이 보이길레 "어라? 이게 뭔가?" 해서 잠깐 집어다 봤죠, 그리고는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 충격에 바로 옆에 있던 "옛날에도 일요일이 있었나요?"라는 책을 샀다가 지금 돈아까워 미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허영만의 사랑해 3권이나 살껄...
  • 루드라 2007/01/31 11:07 #

    북위는 오호십육국에는 포함시키지 않고 북조(남북조의 그 북조)라고 해서 따로 취급할 겁니다. 오호십육국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북중국일대를 통일한 국가니까 아무래도 그 이전의 올망졸망한 십육국이랑 같은 자리에 놓긴 좀 그랬나 봅니다. ^^
  • 초록불 2007/01/31 11:22 #

    루드라님 / 그렇긴 하겠군요. 사실 중국 측에선 오호십육국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더군요, 그냥 위진남북조로 고고씽...
  • BigTrain 2007/01/31 16:06 #

    환빠들의 패턴을 보면 마치 창조론자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과학사 속의 대논쟁"의 진화론 vs 창조론 챕터를 보면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이 논파하는데 일주일이 걸릴 분량의 거짓말을 한시간만에 지어낸다."는 글이 쓰여져 있는데, 보다보면 환빠들과 창조론자들은 별 차이가 없어보이네요. 둘 다 진실,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고 믿고싶은 사실을 믿기 위해 왜곡과 조작까지 서슴치 않으며, 그들의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서는 정론 측에서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는 것.

    수고하십니다. ^^ 역사관련 글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 찾아 읽는 동안 큰 공부가 됐습니다. 늦었지만, 항상 감사드립니다 ^^
  • 초록불 2007/01/31 16:26 #

    BigTrain님 / 고맙습니다. 비유가 딱 맞는군요. 무책임하게 주장하는 건 쉬운데, 그 무책임한 주장을 깨려면 참 복잡합니다.
  • 마요네즈 2007/03/02 20:18 #

  • 초록불 2007/03/02 23:48 #

    마요네즈님 / 원문과 주석도 구분할 줄 모르는군요. [한서 지리지] 응소의 주석에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 위만의 옛 도읍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험독현이 어디인지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위만이 요동을 거쳐 고조선으로 들어간 흔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잘못된 주석으로 생각합니다. 응소는 2세기 말의 인물로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잠깐 등장합니다.)

    서광은 후조 석륵의 신하로 낙랑이 요서로 이동한 뒤의 인물입니다. (석륵의 재위 기간은 319-333. 낙랑군 이치는 313년의 일) 따라서 시기를 따져보면 사기집해에 인용된 서광의 말에는 모순이 없을 수 있습니다. 험독현은 요동군의 속현인데, 이 위치도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 선학이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겠군요.) 사기집해를 쓴 배인은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의 아들로 5세기 후반의 인물입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따지지 않고 마치 사마천 시대에 주석이 쓰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바보라고 불러야죠.
  • 가우리 2008/04/25 11:46 #

    본문의 글을 보면,

    <<참, 음(한음), 겹(왕겹), 장은 모두 위만조선에서 투항한 사람들로, 왕검성 함락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입니다>>

    이런 문장이 있는데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승전국인 한의 무제가 조선과의 전쟁에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극형에 처한 까닭이 뭘가요?


  • 가우리 2008/04/25 11:59 #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중국사람들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다름이 아니라 상관도 없는 전 왕조의 해외 식민지 계승하는 것도 모자라 멸망한 식민지를 본토에 옮겨 그 이름을 계승시켜 유지 발전한다는 웃지못할 행태를 보이는 것 말이죠.^^
  • 초록불 2008/04/25 22:38 #

    가우리님 / 사기 조선열전을 읽어본 적이 없으시군요. 사기의 내용은 매우 명확해서 따로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부디 재야의 헛소리만 읽지 마시고, 원전을 직접 보시고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 matercide 2010/08/19 22:37 #

    걱정스러운게 단군이라는 군주제가 없었고 동방변군이 한반도(정확히 한강이북)에 있었다면 남북한은 "한강 이북은 중국역사의 영토이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수세적 방어에 나서야 합니까? 마침 동북공정의 어용학자들이 한강이북도 중국역사의 영토라고 여기니... 걱정스럽습니다.
  • 초록불 2010/08/19 22:41 #

    음...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국이 말하는 것과 같은 논리에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태리가 서유럽에다가 다 우리땅이야,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 matercide 2010/08/20 13:53 #

    그건 조금 다를 듯 합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뒤를 이은 나라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서쪽땅을 먹어버린(영가의 상란을 일으킨 비한족처럼) 오랑캐의 뒤를 이은 나라입니다. 로마는 콘스탄티누스가 동천해서(마치 진晉의 중종中宗 원황제元皇帝 사마예司馬睿처럼요.) 또 즈믄해를 이어가다가(부자가 망해도 삼년을 먹고산다더니, 큰 나라는 쇠퇴해도 천년은 먹고사나 봅니다.) 오스만 튀르크에게 먹혔잖습니까? 제가 걱정스러운 것은 동방변군이 한반도에 있다고 하면서 동북공정을 무너뜨리려는게 쉬울 것 같지 않다는 겁니다. 저만해도 어떻게 동북공정을 깰지 몰라서 절절 매거든요.
  • 초록불 2010/08/20 13:59 #

    동방변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은 동북공정과 별 관계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몽골의 예를 들어도 됩니다.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는 어떤가요? 일시적으로 해당 지역을 점령했다고 역사가 타국의 것이 된다는 이야기는 성립 자체가 안됩니다.

    동북공정의 논리에 대해서는

    http://orumi.egloos.com/4135892
    http://orumi.egloos.com/4137106

    두 포스팅을 읽어보시고, 그 포스팅에 사용된 <동아시아의 역사분쟁>을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 굔군 2010/08/21 03:58 #

    matercide//일단 뭔가 대단히 잘못 알고 계시는데,

    1. 동방변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해서 단군 및 고조선을 부정하는 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군현 설치 이전에 엄연히 위만조선이라는 국가가 있었고, 또한 그 이전에도 조선이라 불리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했음이 기록상으로도 확인되는데, 군현을 설치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 모든 사실들이 깡그리 부정되지는 않습니다.

    로마의 갈리아 속주나 브리타니아 속주가 오늘날의 프랑스와 영국에 있었다고 해서, 속주 설치 이전에 그 땅에서 일어났던 역사, 예를 들면 베르킨게토릭스, 베르카시벨라우누스, 부디카 여왕의 저항 운동 등 원주민들에 의해 일어난 일체의 사건들이 모조리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2. 중국은 동북공정의 근거로 동방변군을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동북공정이 동방변군에 기초하고 있다는 생각은 대단히 큰 착각입니다.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 과거 중국의 동북 지방에 존재했던 예맥계 종족들이 아예 처음부터 중국 내부에서 갈라져 나온 소수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동방변군 같은 것에는 초점이 맞춰져 있지도 않습니다.

    설령 중국이 동방변군을 근거로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과거 사실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우스운 논리죠.
    이런 논리는 초록불 님 말씀대로 로마 제국이나 몽골 제국, 나폴레옹 제국, 알렉산드로스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의 예를 들면서 비웃어 주면 그만입니다. 중국 학자들도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습니다.

    동방변군의 정체나 그 의미에 대해 의문을 표하시는 거라면, 그냥 "과거에 한국의 일부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됩니다. 한국의 일부가 한때 중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왜 "수세적 방어"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현재 우리의 역사나 정체성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설령 우리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한들, 그것은 천년도 더 지난 일인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와 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현재의 정체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영국인과 프랑스인, 에스파냐인, 포르투갈인들이 과거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실로 인해 이탈리아인에 대해 자신들의 역사를 방어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3. 중국의 연고권 주장은 로마 제국(과 그 후예인 이탈리아)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동천을 근거로 드신 것을 보니,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의 천도를 통해 정통성이 동로마로 넘어갔다. → 고로, 떨거지인 서로마는 로마의 뒤를 이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서로마는 오랑캐(게르만 족)에게 멸망당했다. → 고로, 현재의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이 아닌 오랑캐의 뒤를 이은 나라다. → 고로, 이탈리아는 서유럽에 대해 연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먼저 대단한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한 나라의 정통성이 다른 나라로 계승된다고 보는 유교식 종통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떤 나라의 역사적 정체성이 그 지배 세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도 우습지만 당시 로마의 국교는 유교가 아닌 기독교였으니, 제가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로마에 있었으므로 정통성은 서로마에 있었던 거라고 주장한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역사 전개에 대해 유교적 관점인 정통성 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사실상 아무 의미 없습니다. 정통성이라는 것은 결국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론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정통이 어디 있고, 비정통은 또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힘이 강대한 세력이 인민과 영토를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또 다수의 사람들이 그 지배를 인정하면 그게 바로 정통이 되는 거지요.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무리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다 한들 황제는 서방에도 엄연히 있었으니 서유럽에서는 서로마 황제가 정통이고, 게르만 족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왕국을 세웠으면 정통이 게르만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님의 논리대로라면 현재의 중국 역시 한반도에 대해 연고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사에도 마찬가지 논리를 적용하면 현재의 중국은 한족이 아닌 오랑캐의 뒤를 이은 나라가 되니까요.
    정통성을 따지자면 중국사의 정통은 하-은-주-진(秦)-한-위-서진-동진-송-제-양-진(陳)으로 이어지고 화북은 오랑캐(5호)에게 점령당하는데,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결국 오랑캐인 북위의 뒤를 이은 수나라가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비한족 오랑캐들이 중국을 통일한 셈이고 그 뒤를 이은 나라가 현재의 중국인데, 님의 논리대로라면 한나라 때 한족이 지배했던 동방변군에 대해 그 정통성을 계승하지도 않은 현재의 중국인들이 연고권을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미 앞에서도 말했지만, 동방변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은 동북공정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애초에 논점 자체가 그쪽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반박하는 우리 입장에서도 굳이 동방변군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 초록불 2010/08/21 09:12 #

    굔군님의 상세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 matercide 2010/08/21 15:29 #

    굔군님의 자세한 답변이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역사관이 꽤 보수적인 듯 하네요.
  • 굔군 2010/09/29 00:16 #

    "낙랑군이 4반세기 뒤에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수성현에 올 줄 어떻게 알고 이런 것을 써놓을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앗, 그러면 여태까지 낙랑군을 추격해 온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공연한 헛고생일까요? 그럴 리가요."


    →이 문장이 약간 이해가 안 되려고 하네요.
    4반세기면 25년인데 태강지리지가 쓰여진 시점(280~289)에서 현재의 갈석산 위치로 이동한 것(537)은 대략 250년 뒤의 일이니까, 4반세기가 아니라 2.5세기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대충 "3세기 말에 쓰여진 책이 어떻게 약 250여 년 뒤에 낙랑군이 현재의 갈석산 위치로 올 줄 알고 저런 "예언"을 해 놓았겠느냐?"라는 의미의 문장을 잘못 쓰신 것 같습니다만...
  • 초록불 2010/09/29 07:16 #

    4반세기라는 말은 "1세기의 1/4 = 250년"으로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4반세기라는 말이 잘 안 쓰이는 말이라 혼란을 드린 모양입니다.
  • 굔군 2010/09/29 09:34 #

    1세기 = 100년 아닌가요?
    1세기의 1/4 = 25년일 텐데....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 초록불 2010/09/29 09:39 #

    앗... 그렇군요.

    4반세기면 25년이네요. 이런 바보...

    수정하겠습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 굔군 2010/09/29 10:42 #

    아닙니다.

    "250년 뒤의 일"이라는 의미는 대충 알아들었는데, "4반세기"라는 표현이 나와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뿐입니다.

    그렇게까지 자책하실 필요는...^^
  • 굔군 2010/09/30 21:40 #

    차라리 4반세기가 아니라(250년은 세기로 표현하면 2.5세기가 되기 때문에 약간 어색...)


    5천년을 반만년이라고 표현하듯이,
    "천년의 1/4"이라는 의미로 "4반천년"이라고 하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반천년 = 500년
    4반천년 = 250년
  • 초록불 2010/09/30 23:11 #

    ^^
  • 굔군 2010/10/20 00:05 #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우선 이름이 같은 수성현이기는 하지만 본래 수성현은 낙랑군이 관할하던 15개 현 중 하나였습니다. [한서] 지리지에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낙랑군의 속현 수를 15개라고 하셨는데, 낙랑군은 속현이 가장 많았을 때가 영동7현까지 포함한 25현이었고, 평시에는 그걸 제외한 18현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15현이라는 것은 어떤 근거가 있는 건가요?
  • 초록불 2010/10/20 00:10 #

    25현의 오타네요. 수정하겠습니다.
  • 2011/04/01 11:0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1/04/01 11:38 #

    이런 문제는 칼처럼 잘라서 뭐라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김한규 선생님의 <천하국가>를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선무공신 2011/05/09 00:51 #

    갈석산은 우리나라도 있고 중국에도 있는걸도 알고있습니다.

    더 헷갈린게...낙랑도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있었고,중국에도 있었습니까?(그러니까 낙랑은 두 곳이 있습니까?)
  • 굔군 2011/05/09 02:52 #

    1. 역사서에 등장하는 '갈석'이라는 지명은 (중국과 한반도 등을 포함해서) 전부 8군데나 있었습니다.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갈석산도 그 중 하나이며, 물론 하북성의 난하 근처에 있는 현재의 갈석산과는 동쪽으로 3천 리 정도는 떨어진 곳입니다. 진한대 만리장성의 기점은 오늘날의 갈석산이 아니었는데, 낙랑군의 위치를 하북성에서 찾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요.

    (물론 한반도에 있었던 갈석산이 어디인지는 미상입니다. 낙랑 수성현의 위치가 확정되지 않았으니까요.)


    2. 쉽게 설명하자면, 한반도에 있었던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쫓겨나면서 중국 요서 지방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한반도의 낙랑군이 사라진 이후에도 '낙랑'이라는 지명이나 행정 구역은 계속 기록에 등장하게 됩니다.
  • lasnata 2011/06/04 00:25 #

    한국사를 좋아하는 고딩 1학년(아직 전문지식이 부족하니 비판하진 말아주세요)으로서
    낙랑군에 관한 요동반도설과 한반도설을 접했는데요, 솔직히 환단고기같은 허무맹랑한 책은 믿지는 않지만(읽을때 뿌듯하긴했는데...) 현재 고등학교 국사에서는 낙랑군의 설명이 빠져있거든요?
    낙랑이란것이 일제에 의하여 지금 어디다 어디다 하며 논란이 이는거잖아요, 그래도 낙랑군이 한반도래도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면 더 좋지않을까요? 왠지 중국에서 한국북부차자지한 삼국지 위나라 지도를 보면 좀 짜증나거든요, 좀 넓다 주장하면 안되나요? 그리고 일본이 낙랑군을 식민통치를 위해서 이용한 것이 좀 꺼려져서 그랬습니다만, 위글을 읽으면서, 한반도 설도 괜찮다 본는군요, 다만 이병도님이 주장하시는 패수는 천청강이다가 정확할까요? 압록강이 정확할까요?
    횡설수설이 많아서 죄송합니다만 오늘 이글을 읽고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환빠란 용어도 처음 접해보고... 나중에 역사연구계열 직업을 꿈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한국고대사는 기록이 적어서 아쉽다고 생각합니다.(저는 현재 고대국가 영토위치를 교과서적으로 생각하지만 한사군만 아까전까지만해도 요동반도에 있었고 비판적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변화하고있습니다.)
    추가로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있다는 중국의 주장은 어느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겁니까?
    뭔가 질문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
  • 초록불 2011/06/04 00:43 #

    1. 낙랑이란것이 일제에 의하여 지금 어디다 어디다 하며 논란이 이는거잖아요 -> 아닙니다. 낙랑에 대한 논란이라는 것은 국수주의 사관론자들에 의해서 감정적으로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2. 그래도 낙랑군이 한반도래도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면 더 좋지않을까요? -> 좋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을 우리한테 유리하다고 해도 된다고 하면 중국은 동북공정 해도 좋고, 일본은 임나일본부 주장해도 좋은 것이 됩니다. 우리만 거짓말하고 남들은 거짓말 못하면 좋을 것 같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3. 다만 이병도님이 주장하시는 패수는 천청강이다가 정확할까요? 압록강이 정확할까요? -> 정확하다는 말은 이런 때 쓸 수가 없습니다. 패수는 사서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정약용이 옳게 판단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4.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있다는 중국의 주장은 어느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겁니까? -> 이 주장은 아직 중국학계에서도 정설이 아닙니다. 물론 이야기하는 것은 한나라 때를 기준으로 하겠지요.
  • 2011/08/19 17:5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1/08/19 20:32 #

    제가 요즘 원문을 확인할 시간이 없습니다. 주석은 주석을 누가 달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를 알고, 그 시대의 상황이 반영된 것인지 알아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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