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 유적, 유물에 대하여
이것은 역사라기보다는 자료 차원에서 적어 놓는 것입니다. (현재 쓰고 있는 작품과도 관련이 있어서...)
추가 : 어떤 황당한 사람이 낙랑군이 대동강 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반박하는 근거 자료로 내 글을 링크해 놓았군요.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이 자료는 대동강 남쪽의 낙랑군 유물들로 낙랑군의 위치가 현 평안남도에 있었다는 명명백백한 증거들입니다.1. 낙랑토성현 평양시 낙랑구역 낙랑동. 낙랑군 치소로 여겨짐. 대동강 남안의 구릉지대 중 표고 58.8미터의 오봉산에서 북쪽으로 펼쳐진 대지. 대동강과 접하고 있음. 토성 남쪽에는 낙랑군 시기의 무덤 2,600여기가 분포.
낙랑토성의 규모는 동서 700미터, 남북 600미터로 면적은 31만 제곱미터.
토성 사용시기에 대해서는 낙랑군 설치시라는 견해와 동한 말, 진나라 초라는 견해가 대립 중.
2. 낙랑토성 유물
1935-37년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 조선고적연구회 주도로 총3회 발굴 조사 진행.
3. 다른 토성들군현 지배를 위한 다수의 토성이 존재.
운성리 토성 -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토성 남쪽에 낙랑군 시기 고분 100여기 분포. 너비 8미터, 깊이 1.4미터의 해자. 1962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발굴조사.
성현리 토성 - 평남 운천군 성현리(현 용강군 해운면 갈성리). 동북쪽 480미터 지점에서 점제현 신사비 발견. 점제현 치소로 추정.
청산리 토성 - 황해도 신천군 청산리. 동서 490미터, 남북 200미터 규모. 인근 북부면 서호리에서 "大康4년 3월 昭明王長造"라는 명문전이 발견됨. 소명현 치소로 추정.
지탑리 토성 -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동서 700미터, 남북 600미터 규모. 토성 주변에 낙랑군 시기 무덤 다수. 서북쪽 5킬로미터 지점에서 "대방태수 張撫夷"라는 명문전이 나옴. 대방군 치소로 추정.
소라리 토성 - 함남 영흥군 순영면 소라리(현 금야군 새동리). 동서 290미터, 남북 170미터 규모.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낙랑군 시기의 귀틀무덤 2기 발견.
4. 낙랑군의 무덤 양식낙랑군의 무덤 양식은 시기에 따라 나무곽 무덤(목곽묘), 귀틀 무덤, 벽돌 무덤으로 구분.
(1-1) 나무곽 무덤 - 나무곽 무덤은 토광묘의 한 종류다. 토광묘에는 나무관을 넣는 목관묘가 있고, 관의 외부에 곽을 짠 뒤에 관을 넣는 목곽묘가 있다. 곽을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목곽이라고 한다.
곽의 바닥은 3-5개의 나무판을 깐다. 곽의 네 벽은 2-3개의 나무판으로 만든다. 곽의 뚜껑은 곽의 너비보다 긴 나무판 12-14개로 만든다. 나무판의 두께는 5센티미터 정도.
나무곽 무덤에는 3종류가 있다.
1) 나무곽만 있는 경우 - 나무곽 안에 나무관을 넣은 형태. 제일 많다.
2) 나무곽 안에 부장품 칸을 따로 만든 경우 - 제일 적다.
3) 나무곽 안에 안곽을 만든 경우
나무곽 안에 들어가는 나무관은 오늘날 관과 유사하다. 보통 2개의 나무판을 이용해 각 면을 구성한다.
부부 합장의 나무곽이 40여기 발굴되었다. (한 사람만 묻힌 것을 외곽, 두 사람이 묻힌 것을 쌍곽이라 한다.)
(1-2) 나무곽 무덤의 유물 중 주목
도장 - 夫租薉君, 周古, 伂留私印
방위관측기 - 월과 28수, 갑자 등이 새겨져 있음
(1-3) 나무곽 무덤의 연대
정백동 37호 무덤의 칠곽에 地節四年이라는 기년이 명기됨. 지절 4년은 BC 66년. 전한 선제 때임.
나무곽 무덤의 하한은 BC 1세기말로 봄.
나무곽 무덤의 상한에 대해 북한 사회과학원은 BC 4세기~ BC 2세기로 추정. 위만조선보다 이른 시기임.
나무곽 무덤은 일반적인 무덤 형식으로 요동 지방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음.
(2) 귀틀무덤
낙랑구역 안에서만 200여기가 발견된 낙랑의 특징적인 무덤 형식.
귀틀이란 목재를 가로세로로 어긋나게 대서 井자 형태로 틀을 짠 뒤 그 위에 나무로 격벽을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귀틀 무덤은 이렇게 해서 부장품 칸을 따로 만든다.
기본적인 모양 형태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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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그릇 유물에서 초기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명문이 나왔다.
정오동 1호 무덤 - 시원 2년 蜀西工長 (BC 47 전한 원제 ), 원시 5년 蜀郡西工造 (5년 전한 평제)
정오동 6호 무덤 - 건무 5년 蜀郡西工造 (29년 후한 광무제)
석암리 204호 무덤 - 건무 20년 (44년)
석암리 201호 무덤 - 원시 4년 (4년 전한 평제), 거섭 3년 (8년 유자영)
양산대에서 나온 명문
정백동 2호 무덤 - 永始三年 (BC 14년 전한 성제)
석암리 200호 무덤 - 귀잔 : 원시 3년 (2년 전한 평제), 칠반 : 수화 원년 (BC 8년 전한 성제)
기타 다수... (다 적기 힘듬)
이것은 한나라 촉군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증거이고, 전한 시대 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함. 재야사가들은 낙랑구역의 무덤들이 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공격하고 군현을 설치한 뒤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광무제가 살수 이남을 공격하여 군현을 설치했다는 것은 건무 20년(44년)이다.
귀틀 무덤은 BC 1세기 말에서 AD 2세기 초까지 존재한 것으로 추정.
정백동 7호 무덤과 191호 무덤에서 2세기 초 쓰여진 청동거울이 나왔기 때문임.
석암리 219호 무덤에서는 王根信印, 王野之印이 나옴.
(3) 벽돌무덤 (전축분)
벽돌무덤은 횡혈식 석실묘 등장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
궁륭식 천장과 연도(무덤으로 들어가는 길)를 가지고 있다.
낙랑 구역에만 1,000여 기가 있음.
신분이 낮은 사람이 묻힌 벽돌곽 무덤과 신분이 높은 사람이 묻힌 벽돌칸 무덤으로 나눠진다.
관이 있는 곳은 한칸, 두칸 짜리들이 있고 (칸은 방이라고 생각하면 됨) 칸에 따라 창고처럼 작은 켵칸이 붙어 있는 것들이 있다.
정오동 31호 무덤 - 흥평 2년 (195년 후한 헌제)이 적힌 벽돌이 나옴.
신천군 봉황리 1호 무덤(왕경 무덤) - 벽에 정시 9년 (248년 위 제왕)이라 적혀 있음.
그외 나온 유물들을 판단할 때 벽돌 무덤은 2세기로부터 3세기 중엽까지 존재.
그러나 벽돌 명문 중에는 영화 9년 (353년 동진 목제)이 적힌 것도 있으므로 4세기 중반까지도 벽돌 무덤 형식이 남아있었다고 보아야 함.
(4) 낙랑 무덤의 유물 변화
초기에는 북방계 유물의 비중이 높으나 점점 중국계 유물이 늘어나고 북방계 유물은 현저히 감소함.
5. 봉니고대에는 문건을 나무함에 넣은 뒤 노끈으로 싸맸다. 그 노끈을 함부로 풀 수 없도록 진흙을 붙인 뒤 도장을 찍는다. 이 도장이 찍힌 진흙을 봉니라고 부른다. 관원들은 봉니를 찍기 위해 진흙을 넣은 통을 가지고 다녔다.
낙랑의 봉니는 매우 많이 발굴되었다. 너무 많이 나와서 일부는 위조품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재야사가들은 흔히 모든 봉니를 위조로 몰아부치는데 물론 그럴 수는 없다.
6. 점제현 신사비1913년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현 온천군 성현리)에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발견.
높이 130센티미터, 너비 109센티미터, 두께 21센티미터.
예서체 80여자 수록.
XXX년 4월 무오에 점제현장XX
X建丞屬國會X爲衆XX
神祀를 건립하고 비석을 새기노니
X평산군의 덕은 높은 산의 산신과 비견하고XX
점제현에 X佑하고 좋은 비바람을 일으키고 기름진 토지의 혜택을 내리시니
XX이 壽考하고 오곡이 풍성하며 도적이 들끓지 않고
XX蟄藏하고 길하고 이로움이 출입하여 모든 신의 빛을 받게 하나이다
7. 화폐전한 반량전, 오수전.
왕망 화천, 대천오십.
8. 葬玉 - 무덤에 넣은 옥 塞玉 - 아홉 구멍을 막는 옥
. 입 - 含玉
. 항문, 코, 귀 - 부드러운 천에 옥을 싼 뒤 구멍을 막음
. 눈 - 나뭇잎 모양의 옥을 끈으로 연결하여 안경처럼 맴.
玉豚 - 손에 쥐어준다
璧 (원반 모양) - 가슴에 얹는다
9. 기타띠걸이 - 바클
옥결 - 활시위를 당길 때 사용하는 활깍지에서 장신구로 변함 (5센티미터 이하)
양모양의 패옥 - 양은 길상의 의미로 사용
금동 곰모양 상다리
나무 인형과 목마도 출토된 것이 있다.
구장수鳩杖首 - 한나라에서 80세가 넘은 노인에게 새가 꽂힌 지팡이를 내려주었는데, 지팡이 끝의 새장식을 구장수라 함. 높이 5-10센티미터, 지름 13-17센티미터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