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곡학아세란 무엇인가? 만들어진 한국사

재야사가 이덕일의 이 책은 대중에 영합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그야말로 곡학아세의 전형이라 하겠다.

너무나 명백한 오류와 뻔뻔한 인신공격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길어질 것 같아서 접어버린다.

 
그럼 시작해 보자.

이 책은 제목부터 문제가 있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 그럼 현재 우리는 대체 뭘까? 우리는 대륙의 지배자가 아닌 반도의 떨거지란 말인가? 압록강 이북만 대륙인가? 대체 이덕일이 생각하고 있는 대륙이란 무엇인가? 웃기게도 이덕일의 책에는 그 답이 없다. 답이 없을 수밖에. 대륙의 지배자가 아니고서는 자랑스런 한국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일제의 [만선사관]이다. 이덕일은 일제 만선사관의 충실한 계승자인 것이다.




천하제일 코미디 치우 논증 - 215쪽
치우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같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도 나오지만. 이 두 책은 사학계에서 위서로 몰리는 책이다. 그러나 치우가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 때 전한의 역사가인 사마천이 쓴 [사기]나 후한시대 반고가 쓴 [한서]에도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마천이나 반고는 뛰어난 역사가의 대명사기 때문에 그들이 쓴 책의 내용을 무작정 허위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슨 이야기가 달라질까? 이런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사기]는 탁록 전투에서 황제 헌원이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환단고기]는 거꾸로 치우가 황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기록 모두 치우가 등장하고 둘이 싸웠다는 점은 같지만 전투의 결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225쪽)

그래서 이덕일은 [환단고기]의 신빙성을 따지기 위해 [사기] 주석서들까지 검토하는 친절을 베푼다. 그리고 결론은 이렇다.

[환단고기]가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31쪽)
치우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가 창작해낸 인물이 아니라 중국 고대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231쪽)


어떤 인물이 다른 신빙성 있는 역사서에 등장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부분이 사실이 될 수는 없다. 누군가가 박정희는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글을 썼다고 하자. 박정희는 실존인물이었으니까 그 내용이 사실이 되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이덕일은 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렇게 신화 세계를 실존 인물로 끌어올렸으니 이제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치우는 동이족과 묘만족의 공동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중국 남방의 묘족과 우리 민족은 치우를 공동 조상으로 하는 같은 지류가 된다. (238쪽)

더욱 끔찍한 것은 중국치우학회 회원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런 이야기를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이덕일이다.

“치우는 한국, 일본, 만주족의 조상이다.”
우리는 툭하면 위서다 뭐다 해서 부인하려고 애쓰는 동안 중국인들은 치우의 진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239쪽)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으면 동조동근론에 앞장 설 사람 아닌가!

 

 

낙랑군 문제? - 112쪽
(낙랑군은) 313년, 설치된 지 약 420년 만에 고구려 미천왕에게 망하고 말았다. (112쪽)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한번 볼까? 바로 313년의 그 기사다.


겨울 10월에 낙랑군에 침입하여 남녀 2천 명을 사로잡아왔다. (미천왕 14년)


저런 낙랑이 멸망했다는 구절이 없네? 이덕일 식 사고를 하면 이때 낙랑이 멸망했다고 믿어선 안 되는게 아닐까? 위만 조선 함락기가 자세히 나와 있는 [사기]도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덕일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하고, [자치통감]의 해당 시기 기사를 한번 보자.


건흥 원년 (313년)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웅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격하여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이에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참군사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에 있던 낙랑은 요서 일대의 지배자였던 모용외가 새로이 설치한 군현이 되어서 요서에 존재하게 되는 거다. 북위 세조는 북연을 정벌하고 이 낙랑군의 백성을 유주로 옮긴다. 그곳이 바로 이덕일이 노래부르는 갈석산이 있는 그곳이다. 이덕일은 자치통감이나 위서를 읽어보았을까? 그럼 거기에서 313년 이후에 나오는 낙랑군, 낙랑태수 기사를 읽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긴 책 쓰느라 원전 읽을 새가 어디 있겠는가?

다음은 이덕일 책의 한 구절이다. 패수에 대해서 묻자 고구려 사신이 대답한 내용이다.

“성(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패수의 북쪽에 있는데,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 서북 방향으로 흐른다.” (144쪽)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성과 낙랑군 치소가 같은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덕일은 이런 사료쯤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만 이용하고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조사도 안 하고 쓰기 - 209쪽
봉니는 발신자가 도장을 눌러서 보내는 것이므로 수신자의 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하는데, 발신자의 지역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봉니는 우표가 아니다. 봉니는 중요 문서나 물품을 봉인할 때 쓰는 것이다. 이덕일은 잘 모르면 네이버 백과사전이라도 한번 찾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도 해당 지명의 봉니가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중요한 유물은 “낙랑태윤장(樂浪太尹章)”이라고 하겠다. “태윤”이란 왕망이 태수 이름을 바꾼 것이다. 즉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셈이다. 이덕일은 후한 광무제가 평양 일대를 점령했던 것이며, 여기는 낙랑군이 아니라고 했는데, 불행히도 저런 봉니가 나옴으로써 이덕일의 설은 설 곳이 없어진 셈이다. 왜냐하면 왕망은 광무제 이전 사람이기 때문이다. 평양 일대에서 왕망이 낙랑 태수를 임명한 증거가 나오면, 광무제가 이곳을 점령했을 뿐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런 것은 다 위조라고 우겨야 한다.

이는 이 지역이 낙랑군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 의도적으로 봉니를 위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까지 낳고 있다. 대동강 일대를 낙랑군 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이 아니냐는 것이다. (209쪽)

 

 


엉터리방터리 임의 해석 1 - 84쪽
고조선의 옛 지배층이 제후로 봉해진 지역은 오늘날의 산동성 일대와 그 북쪽의 발해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대개의 경우 항복한 인물들에게는 항복한 그 지역을 봉지로 주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 영토를 한나라가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나라는 명목상 승리를 거두었을 뿐 조선의 영토는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84쪽)

항복한 인물에게 항복한 지역을 봉지로 주는 경우가 많다니? 그 근거는 뭘까? [사기] 동월열전을 읽어보면, 투항한 사람으로 건성후 오는 개릉후(안휘성), 연후 오양은 북석후(산동성 북해군)로, 동월 장수 다군은 무석후(강소성 무양시)에 임명되었다. 그럼 동월이 저런데 있었을까? 아니면 동월도 정복하지 못한 걸까? 그런데 동월의 경우는 작전을 수행한 장군들 중 제후가 된 사람도 있으니 이를 어쩔고? 이들 장수들이 받은 봉지도 동월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지역이다. 이덕일은 저 글에서 [모른다]라고 했다가 [것이다]로 단정을 짓고 있다. 그럼 조선의 영토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낙랑군은 어디에 설치한 걸까?

 

 


엉터리방터리 임의 해석 2 - 211쪽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미천왕은 요동을 공격하기 전에 낙랑군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할 때 남쪽의 낙랑군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그럼 낙랑을 공격할 때 요동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대체 어디 있는데?

 

 

불리한 것은 빼버린다 1 - 31쪽
이덕일은 고구려가 요서로부터 요동에 이르는 대제국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에 부록으로 따라온 지도를 보면 남방으로는 한반도 남단을 넘어서서 제주도와 대마도까지 고조선 영토라고 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허점이 너무나 많다. 당장 이덕일 자신도 여러차례 거론하고 있는 [후한서] 동이열전 예조를 읽어보자.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에 귀속하자 한무제는 그 지역에 창해군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31쪽)

우거왕을 배반한 남려가 "요동"에 귀속했다 했으니, 요동은 한나라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고조선은 요동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그 요동이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현재 난하 동쪽을 요동으로 보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이덕일은 이런 부분은 거론하지 않고 있다.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감추는 이런 수법은 재야들이 중국사를 기술한 학자들에게 늘 덮어씌우는 누명인데, 알고보면 자기들 스스로도 늘 하는 짓이기 때문에, 남들도 다 그런 줄 아는 것이다.

자, 하나 더 보자.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이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그곳을 요동의 외요(변경 초소)에 소속시켰는데, 한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154쪽)

이덕일은 이 구절을 들어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빼앗긴 땅 2천리를 되찾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동을 회복했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서 요동이 고조선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한나라는 고조선 땅 안의 옛 요새를 수리했단다. 이런 명백한 모순에 대해서 이덕일은 한 줄도 설명하지 않는다. 더구나 고조선이 연나라에게서 땅을 빼앗긴 것은 연소왕 때의 일로 BC3세기 후반이다. 그런데 한나라 발흥 후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유방이 황제가 된 202년으로 대략 80년에서 백 년 정도의 시간이 벌어져 있다. 이걸 이덕일은 "곧"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구절은 이덕일 책 안에서 또 찾을 수 있다. 이건 어떨까?

좌장군 순체는 요동 지역의 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고조선의 패수 서군을 공격했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79쪽)

요동은 고조선 꺼라면서? 한나라의 좌장군 순체는 고조선 영토인 요동에서 군사들을 모았나보다. 정말 대단한 장군이다!

 

 

불리한 것은 빼버린다 2 - 115쪽
후한 광무제가 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광무제 자신이 자신의 군현을 공격했다는 것으로서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아주 미치겠다. 이덕일이 중국 사서를 읽지 않는 건 그렇다치고 [삼국사기]도 안 읽었을 줄이야! [삼국사기] 대무신왕 조를 읽어보자.

15년(32) 낙랑국 멸망
20년(37) 왕은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27년(44) 가을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소속되었다.

낙랑국은 대무신왕 15년에 멸망했으니, 광무제가 다시 칠 수가 없다. 낙랑국은 대무신왕 15년에 멸망했고, 낙랑군은 대무신왕 20년에 멸망했다. 대무신왕은 낙랑국과 낙랑군 모두를 정복한 것이다. 광무제는 대무신왕에게 빼앗긴 낙랑군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들이 싸워서 이긴 끝에 낙랑을 회복한 것이다. 이덕일은 [삼국사기]에서 대무신왕 20년조를 고의로 누락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자기 논지에 맞지 않으면 사서의 기록을 임의로 누락시키는 행위를 이렇게도 뻔뻔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광무제가 왕망 이후의 뒷수습도 바쁜 판에 난데없이 남의 나라 건너편에 있는 낙랑국을 왜 점령하러 온단 말이냐? 나 참 기가 막혀서...

 

 


불리한 것은 빼버린다 3 - 116쪽
(낙랑)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은 대동강 유역의 제1호 고분에서 출토된 화천인데, 이는 왕망 때 주조된 청동제 화폐이다.

그럼 이런 것들은 뭘까?

정오동 1호 무덤 - 옻칠 그릇 명문 시원 2년 蜀西工長 (BC 47 전한 원제)
정백동 2호 무덤 - 양산대에서 나온 명문 永始三年 (BC 14년 전한 성제)

이외에도 다수의 옻칠 그릇에서 전한 시대 명문이 새겨진 채 출토되었다. 왜 화폐만 예로 들고 있을까? 왜 그럴까?


 

 

거대 고조선을 위한 곡학아세 사료 읽기 1 - 76쪽
[사기]는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사방 수천 리"는 고조선 전체 강역이 아니라 위만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제한된 강역을 의미한다.

참으로 참신한 해석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런 발상을 해 본 적이 없다. 인기영합을 위해 학문을 어떻게 구부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덕일의 생각은 이런 것이다.

고조선은 엄청나게 큰 나라이므로 이미 사방 수천리 이상의 나라인데, 위만 때에 이르러 정복 사업 결과 사방 수천 리의 영역을 가졌다고 하면, 그 전의 고조선은 그보다 작은 나라였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 사료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위 기록이 위만이 정복한 땅의 영역만 가리키는 것이라고 엉터리 해석을 한 것이다.

 

 

거대 고조선을 위한 곡학아세 사료 읽기 2 - 140쪽
패수를 압록강으로 본 견해는 조선 후기 정약용에 의해 주창되었다.

정약용은 패수변을 이렇게 시작한다.

패수는 평양의 대동강이니 본래 상흠의 [수경]에는 잘못이 없었는데, 역도원이 잘못 의혹을 만들어서 후인으로 하여금 따로 다른 물을 찾게 했다.

이덕일이 오해한(또는 고의로 사람을 기만한) 부분은 이런 것이다.

[사기]에 실린 바에 의하면, 패수는 지금의 압록강인데, 패수라고 잘못 가리켰으니, 시대가 앞섰다고 해서, 이것을 믿고 저것을 의심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사기]에 나오는 패수는 [압록강]이고 이것은 사마천이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정약용은 이 부분에서 [사기]의 잘못을 [한서] 이후로는 바로 잡았으며, 그 이후의 패수는 모두 대동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정약용의 이런 견해는 탁견이다. 나는 정약용이 아주 정확하게 사태를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덕일은 두 패수를 구분할 줄 모른 채 횡설수설하고 있을 뿐이다.

 

 

황당한 인신공격 - 33쪽
[후한서] 동이열전 '예조'는 예군 남려가 우거왕을 배신하고 이끌고 간 숫자가 28만 명이라고 기록했으나, 이병도는 예의 규모를 대폭 축소한 [삼국지] 기록만을 맹신하면서 "그 수는 2만이나 되었다 한다"라며 2만도 대단히 많은 것처럼 기록했다. 28만이라고 쓴 [후한서]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2만이라고 쓴 [삼국지]만 금과옥조로 여긴 인식의 결과이다. 고조선은 작은 나라였다는 식민사학적 고정관념에 의한 사료 선택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을 읽고 나는 "이 사람 바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나하면 바로 이 책에 위의 바보같은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 설명하는 글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식민사학자"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서 글을 읽으니까 뻔히 눈에 보이는 사실마저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덕일 스스로 인용하고 있는 이병도의 [조선사대관]에 나오는 그 대목들을 읽어보자.

마침 조선에 예속하였던 압록강 방면의 예맥의 군장이 우거를 배반하고 주민 28만 구를 들어 요동에 항속한 일이 있었다. (조선사대관 28쪽)
동예는 그(옥저) 남쪽에 있어 지금 영흥, 문천, 덕원, 안변 등지를 중심으로 하였던 것이니 그 수는 2만이나 되었다 한다. (조선사대관 45쪽)

이병도는 [후한서]의 예와 [삼국지]의 동예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이야기다. "예"는 압록강 방면에 있다고 했고, 동예는 "함경남도" 일대에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덕일은 [후한서]의 예와 [삼국지]의 동예를 같은 것으로 본 다음, 이병도가 앞뒤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저렇게 자기가 인용한 부분에 뻔히 이야기가 있는데도 이덕일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예가 이병도의 주장대로 함경남도 남쪽 지역에 있었다면 예군 남려는 어떻게 28만이나 되는 거대 인구를 거느리고 개마고원과 장백산맥 등 수많은 험지를 거쳐 요동지역까지 갈 수 있었을까?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라면, 텍스트도 제대로 못 읽는 사람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느 쪽이건 한심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중잣대 - 61쪽
이덕일은 기자조선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조선 후기까지 기자조선의 실재를 부정하는 의견은 없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재를 부정하는 '기자부정론'이 통설을 이루고 있다. 이는 기자조선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연구성과의 결과이기보다는 이민족인 중국인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적 차원이기도 했다. 또한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것이 식민사학 잔재의 청산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 때문인데, 역사가 실재가 아닌 후대의 감정에 의해 부정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61-62쪽)

식민사학계가 왜 식민사학 잔재 청산을 위해 노력했을까? 이덕일의 주장은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본인은 뭐라고 말하고 있었는지 한번 볼까?

기자가 조선의 제후가 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는 광대한 고조선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모든 역사를 자국 위주로 서술하는 전통을 갖고 있는 중국인들이 마치 기자가 조선 전체를 지배했던 것처럼 기술하고, 그 후로 조선왕에 대해서는 무조건 기자의 후손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중략) 따라서 고조선의 대부분은 여전히 단군의 후예들이 다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위 말은 "엄밀한 학문적 연구성과"에 의하여 전혀 "감정적"이지 않게 기술된 것이겠지? (기자 조선을 고조선의 작은 제후국으로 볼 때 생기는 황당한 문제점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주겠다. 윤내현은 위만이 쓰러뜨린 준왕의 이야기도 기자 조선, 즉 고조선의 작은 제후국에서 생긴 일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저 먼 왜국까지고 기술하고 있는 [삼국지]에 대체 왜 거대제국인 고조선이 등장하지 않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모든 것이 중국인의 조작이다!"라고 외쳐서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리고 이덕일은 "기자의 후예"로 묘사된 부왕, 준왕은 단군 조선 왕으로 인정하는 것인데, 명백하게 사서에 기록된 것을 살짝 바꿔치기해서 고조선 것으로 만든 수법은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선대 학자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건국영웅은 외부에서 온다]라는 글에서 기자가 어떻게 우리 시조 중 하나로 자리잡은 것인지 설명한 바 있다.)

 

 

간편한 육로? - 73쪽
이덕일은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달아날 때 배를 타고 바다로 갔다면, "간편한 육로"를 이용하면 되는데 "위험이 따르는 해로"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압권은 이 부분이다.

따라서 준왕이 '바다를 경유해' 도주했다면 그것은 준왕의 도주 전 도읍지가 육로보다 해로가 훨씬 유용성을 갖고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이 경우 바다를 경유해서 도주하는 것이 유용성을 갖고 있으려면 최소한 배를 타는 것이 유리한 요동반도 서쪽이어야 한다.

이덕일은 요서에서 평양으로 준왕이 도망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요동반도를 뺑 도는 '위험이 따르는 해로'를 준왕이 이용할 필요가 왜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간편한 육로"로 도망치는 게 좋을 텐데.

해로는 여러 이점이 있다. 우선 힘들어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준왕과 측근들이 육로로 도망치려면 직접 말을 달려야 하지만 해로로 간다면 선실에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 북방에서 쳐들어온 위만은 해로로 도주한 준왕을 쫓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준왕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기들이 이용하지 않는 배는 침몰시키고 도망쳤으리라. 나는 이것이야말로 준왕이 해로로 도망친 이유라 생각한다. 육로로 달아나다가는 추격군에게 따라잡힐 확률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이동한 수가 수천 명에 달하니 배가 유리한 것은 그야말로 당연하다.  

그런데 이덕일이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 사료는 최치원이 "마한은 고구려다"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훨씬 가까운 시대에, 훨씬 자세히 기록된 사료에 "바다를 건너 남쪽의 한 지역"으로 도망쳤다고 나오는 것은 무시하고, 그로부터 근 천 년 뒤의 단편적인 말 하나를 보고 위치를 추정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박사라는 타이틀이 아깝다.

(고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이라는 설은) [후한서]와 [삼국지]의 준왕 도주 기록과 [삼국유사]에 인용된 최치원의 "마한은 고구려"라는 인식에 의해 설득력을 상실했다. (76쪽)

 


 

트집을 잡으려면 뭘 못 잡으랴 - 103쪽
동서양을 통틀어 위대한 역사가로 손꼽히는 사마천이 생전에 목격한 한사군의 이름을 왜 적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다.

내게는 이덕일이 [사기]를 다 읽어보기는 했는지가 “가장 큰 의문”이다. [사기] 남월열전을 보자.

남월은 평정되었다. 마침내 이곳에 9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군 이름? 그런 것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복파장군과 누선장군이 모두 상을 받았다. 이곳 일도 사마천 생전에 일어난 일이다. 사마천은 여기서도 군 이름은 명기하지 않았다.



 

 

뭘보고 쓴 걸까? - 165쪽
연나라는 존속 기간이 기껏해야 10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연나라는 기원전 11세기에 주나라 무왕에 의해 소공 석이 북연 지역의 제후로 봉해진 것에서 시작하여 BC 222년 진나라에 멸망 당했다. 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체 뭘보고 쓴 걸까? 이덕일이여, 제발 [사기] 세가편의 연소공세가 정도는 읽고서 글을 써라.

그나마 조선일보 컬럼에서 바보처럼 명도전의 구멍이 둥글면 원절식이오, 네모지면 방절식이라고 썼던 것은 이 책에서 수정해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장박천의 논문에서 주장하는 것은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가 아니라, 기자조선의 화폐라고 한다는 점은 숨기고 있다.





 

자기 마음대로 오독하기 - 24쪽
(국사교과서는)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기자조선의 실재는 부인하니까 사실상 위만조선만 실재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국사교과서에 대단한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비판을 장황하게 여러 쪽에 걸쳐서 펼치고 있는 것은 처음 봤다. 국사교과서가 단군조선을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 대목이 어디 있을까? 없다.

이덕일 자신이 인용한 국사교과서 내용을 좀 보자.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 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이 글을 읽고 국사교과서가 위만조선만 실재했다고 주장한다고 읽을 수 있는 그의 배배꼬인 시각이 놀랍기만 하다.


 

 

교묘한 인상 심어주기 - 35쪽
또한 고조선 수많은 번국 중의 하나에 불과한 예가 최소한 28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을 정도의 대제국이었다. (35쪽)
...라는 기록에서 명확하게 보이듯 여러 번국들을 거느린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36쪽)

처음에는 "수많은 번국"이라고 썼는데, 이어서는 "여러 번국"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예" 뿐이다. 실제로 고조선에게 번국이라 칭할 나라는 당시 동북아의 알려진 나라를 다 긁어모아봐야 몇 개 되지 않는다. 이덕일은 2개 이상이면 "수많은.."이라고 셈을 하는 모양이다.


 

 

양날의 칼이라는 걸 왜 모를까? - 200쪽
기자의 후예에 대한 사료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이들이 단명으로 끝났거나 단군 조선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미안하게도 단군의 후예에 대한 사료는 기자의 후예에 대한 사료보다 더 없다. 기자의 경우는 기자지후 조선왕 이야기라도 있지만, 단군의 후예에 대한 사료는 어디 있을까? 이덕일은 알고 있을려나? 그러니 저 구절은 기자 조선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단군 조선에 대한 공격인 셈이다. 자기가 쓴 글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쓰면 좋겠다.

------------
이 외에도 숱한 자질구레한 오류가 있으나, 이 정도에서 그만 쓴다. 어차피 시간낭비일지도 모른다.

 

 

추가 : 네이버에서 이런 답변을 보았다. 내가 한 답변과 똑같은 것들도 조금 있지만, 내가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 (일일이 찾기 귀찮아 생략한 것도 알뜰하게 찾아주었다. 내 글과 서로 보완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geIC83FSdmmX4xxQ2IEAMRsoBJtRZ0SB



추가 :
이덕일은 자신의 책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의 107쪽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한국 학자 중에서는 이병도가 이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한국고대사연구] '낙랑군고'에서 수성현에 대해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썼다. 낙랑 수성현의 遂자와 황해도 수안의 遂자가 같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가 이런 비실증적인 주장을 한 이후 낙랑 수성현은 황해도 수안으로 둔갑했고, 이곳이 졸지에 장성의 기점으로 변했다.

그럼 사실을 알아보자.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에서 뭐라고 하고 있는가? 원문은 한자를 그냥 쓰고 있지만 읽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한자음을 부기한다.

(6)수성현遂成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黃海道 북단北端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比定하고 싶다. 수안遂安에는 승람산천조勝覽山川條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山名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소축後代所築의 성城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東西行城의 석성石城(고산자古山子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이를 패강장성浿江長城의 유지遺址라고 하였다)이 있고, 또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孟浪한 설說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記載도 있다. 이 진장성설秦長城說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遼東山」이란 명칭名稱과 어따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附會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記事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博英社, 1976, 148p.)

보다시피 이덕일이 말한 것처럼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쓴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낙랑 수성현의 遂자와 황해도 수안의 遂자가 같다는 이유 때문이다."라는 말은 근거가 없다. 이병도는 그런 이유는 들고 있지 않다. 또한 이병도는 수안이 장성의 기점이라는 설에 대해서도 "맹랑한 설", "그릇된 기사"라고 그 사실을 명백하게 부정하고 있다. 이덕일은 까막눈이란 말인가?

이것은 이덕일이 이병도의 논문을 읽지도 않고 엉터리 이야기를 썼거나, 읽고도 고의로 왜곡했다는 이야기다. 

재야사가 임승국도 똑같은 구절을 가지고 이병도를 비난한 바 있었는데, 임승국의 비난의 초점이 이덕일과 다른 방향에 있다는 것을 알면 매우 재미있다.

그는 동서 제이편 한사군의 연구에서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예의 반도사관의 발작으로 「황해발 북단에 있는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p.148) 했다.
분반대소噴飯大笑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이는 말일것이다. 그는 동서同書에서 계속해서 발작하기를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孟浪한 설說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記載도 있다. 이 진장성설秦長城說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遼東山」이란 명칭名稱과 어따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附會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記事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동서同書 p.148)
사학에 뜻을 둔 사람은 차치하고 차라리 삼척동자에게 물어보자. 중국정사의 기록을 「맹랑한 설」「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우겨대는 사학자의 정신파산행위가 「맹랑하고」「 터무니 없는」것인가 아니면 중국사의 직필이「맹랑하고」「 터무니 없는」것인가?  (임승국, [이병도 저 「한국고대사연구」를 논박한다] 中, 「자유」76년 8-9월호 p.45~46)


위에서 보다시피 임승국은 이병도가 수성현에서 만리장성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부인한 것을 공박하고 있다. 왜냐하면 임승국은 수성현을 요서 지방에 비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병도가 저 기사가 그릇된 것이라고 하면 자기 주장에 흠집이 생기기 때문에 중국 정사의 기록이 맞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임승국은 황해도 수안을 수성현에 비정하는 것 자체를 문제로 삼고 있을 뿐이지, 이병도가 만리장성이 수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하 있었던 내용은 만리장성은 평양까지 있었다? [바로바로님 블로그]의 내용에 의해 삭제 처리하였습니다. 바로바로님은 만리장성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인 설명을 하고 계시므로 한 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추가2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04 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나 요양과 적봉도 기원전 3세기까지 고조선 영토라고 보는 러시아의 고조선 연구가 유 엠 부찐의 견해에 따르면 의문이 생긴다.

요양은 요하 동쪽에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적봉은 대능하 서쪽의 요서 지방이다. (적봉의 행정구역은 내몽골이다.)
과연 유 엠 부찐은 그런 말을 했을까? 사실 내가 유 엠 부찐의 이 책을 구한 이유도 이 점이 제일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덕일이 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 엠 부찐 책의 결론을 읽어보자.

고조선의 국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직 후기 고조선(기원 전 4~2세기)의 영토에 대하여만 말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고고학 및 문헌 자료가 뒷받침해 주고 있다. (중략) 문헌 사료와 고고학 자료에 의하여,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대능하 서쪽 지역으로 넓혀진 적이 없었음이 밝혀지고 있으며, 난하 - 대능하 두 하천 사이 지역의 후기 청동기 유적과, 이른바 치펜 그룹, 특히 '오르도스' 식 단검은 고조선 유적의 주요 징표로 보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더 이전에 산융, 또는 동호의 선조들이 남긴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이다. (고조선 / 유 엠 부찐 381쪽 / 1990 / 소나무)

유 엠 부찐은 기원전 4~2세기의 고조선이 결코 대능하를 넘은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적봉이 위치한 난하와 대능하 사이의 유적은 산융이나 동호의 것이라고 결론에서 분명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이덕일은 과연 무엇을 본 것인가?

그 원인은 이 책의 편집 때문이다. 소나무의 번역본에는 편집자가 54쪽에 유 엠 부찐의 주장이라면서 마음대로 지도 한 장을 삽입해 놓았는데, 난하까지를 3세기까지의 고조선 영토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편집자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유 엠 부찐은 이 지도가 삽입된 장의 마지막에서 분명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조선의 위치와 그 영역의 범위에 대한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은 고고학자가 해야할 일이다. (앞의 책 50쪽)

남의 책을 왜곡 편집한 것에 이덕일이 덜컥 걸려들어서 그 책 내용인 줄 알고 적어놓았다는 이 코메디를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한숨만 나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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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별빛수정 2007/02/17 23:27 #

    이사람 요새 책을 꽤 많이 내는 것 같더군요=_= 소설공장이라도 차리려는 모양입니다;;;
  • 措大 2007/02/17 23:49 #

    이덕일은 자칭 <역사평론가>랍디다. 제 입으로 인터뷰에서 그런 웃기지도 않은 명함을 들고 다니는 소이연을 "역사학자라고 하기엔 가당찮고, 시사평론가가 그럴듯해보여 이렇게 지었다"라고 말했으니, 학자취급해 줄 필요가 없지요.

    펴 내는 책의 양을 보세요. 뭔 연구를 했겠습니까. 전 고대사 쪽 서술은 콧방귀도 안뀝니다만, 읽은 근세사 쪽 서술들은 죄다 '아이디어' 수준에 불과하더군요. 그 '아이디어'라는 것도 대체로 참신하다기보다는 센세이셔널한 수준의 -_;
  • 총천연색 2007/02/18 01:55 #

    에잇 중간에 읽다가 말았습니다.
    조곤조곤 따져주시는 초록불님이 더 대단. _-_
  • 이준님 2007/02/18 06:21 #

    1. 이덕일씨도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정식 학위를 땄으니 "그 방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는 맞지요. 문제는 서중석이나 이종석, 서대숙 교수와는 달리 그쪽이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 글을 써서 유명해졌다는 겁니다. 민주화 열기가 지속될때는 민주화 세력과 수구세력간의 대결을 사림과 훈구(뭐 훈구 자체도 그렇게 인간 쓰레기로 몰기도 그렇습니다만)의 대결로 몰았고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 뜨게 되자, 아예 노론 프리메이슨설 -_-;;까지 가는거지요. (개그는 이인화가 지향한 남인 정치와 이덕일이 주창한 정치가 분명히 다르다는 겁니다만)

    2. 한때나마 "조선왕조" 사극이 유행하자. 이번에는 그쪽 관련글을 썼고 이제 고구려류의 이야기가 나오니 당연히 거대제국 고구려(혹은 고조선)이 나오는거지요. 차츰 뒤로 갈수록 곡학아세에 돈벌이 되는 글을 쓰는거지요. 한때 무지무지 싫어햇던 그 신문과 결탁하는 것도 사실 그런걸로 보면되구요
  • 이준님 2007/02/18 06:25 #

    3. 저는 이덕일씨 개인의 문제이기 보다는 사회 자체의 보수화에 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한 마디로 "팔리니까" 저런 글이 나오는거 아닙니까 -_-;;;; 이런 저런 문제로 인해서 중국이 소시적 일본보다 더 악의 "축"으로 인식되는 세상이니까요.

    PS: 이덕일씨 말씀에 의하면 노론은 조선왕조 최대의 어둠의 정부이지요(가히 감벽의 함대에 나오는 그 조직에 버금갑니다.) 임금도 여럿 독살하고 온갖 음모를 다 꾸미는 집단인데.뭐 나중에는 "노론 친일파설"까지 버젓히 쓸 정도니 -_-(동 시대 연구하신 분이면 친일파의 계급구성도 아실분이 이러시면 곤란하지요)
  • 숫자 2007/02/18 11:46 #

    댓글남길려고 이글루 가입했습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 초록불 2007/02/18 13:01 #

    이준님 / 이준님의 관심분야의 넓이에 감탄하게 됩니다.
  • 초록불 2007/02/18 13:01 #

    숫자님 / 반갑습니다.
  • 愚公 2007/02/22 08:21 #

    이준님 / 볼수록 창피한 사람입니다. -_-
  • 홍비홍신랑 2007/02/23 11:41 #

    네이버에 있는 글도 읽고 왔는데 댓글에 누군가가 답변자가 식민사관 맞다고 단정해 놓았네요...
    대한민국은 위대한 국가이어야만 하니
    역사도 위대해야만 하고, 역사가 위대하려면 땅덩이도 넓어야만 하고....
    뭐 이런걸 인정하면 민족주의 사관이고, 부정하면 식민주의 사관이라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좀 갑갑하네요....에휴~~~
    그리고 이준님 의견에 공감이 갑니다...
  • 緣。 2007/05/09 03:31 #

    괜찮을까 싶어 이 책을 사다 봤었는데.. 도중에 중간중간 화가 나서 그냥 넘어가버렸습니다.
    진짜 완전 소설.. 인듯..
  • 초록불 2007/05/09 07:21 #

    緣。님 / 고생하셨습니다...^^;;
  • 半道 2007/06/11 10:21 #

    훌륭한 고찰, 잘 보았습니다. ^^
  • 초록불 2007/06/11 11:59 #

    半道님 / 고맙습니다.
  • 지구호 2007/06/30 23:49 #

    아~ 이덕일씨 문제가 있는 것이었습니까? 역사에 대하여 무지한 저는 조선역사에 대하여 이덕일씨의 책을 통하여 많이 알게되었기 때문에, 많이 좋아하던 분입니다.

    이덕일씨가 고조선에 관한 책을 썼다고 하기에 '고구려는 대륙의지배자였다' 출판기념 세미나에 갔었습니다. 되려 재야쪽의 분들은 이덕일씨의 이 책이 너무 소극적이라고 하면서 마구 공격을 하던데...
    저는 이덕일씨에게 한단고기매니아들의 주장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밝혀달라고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발언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질문을 못했습니다. 후일 이덕일씨가 증산도 특강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시 무엇인가 있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초록불님의 글을 보니 조금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준님]의 '노론 프리메이슨설'이라는 것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의 책머리 부분을 가지고서 하시는 말씀이겠지요?
  • 초록불 2007/07/01 00:32 #

    지구호님 / 이덕일은 조선사 부분을 쓸 때만 해도 뭐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는데, [우리역사의 수수께끼]에서부터 삐딱선을 보이기 시작해서, 현재는 거의 환빠라고 할 수준입니다. 물론 그 수준은 임승국 정도에 그치고 있죠. 즉 80년대 재야 인식 정도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 이야타 2008/12/09 11:51 #

    며칠전부터 이덕일선생의 위에서 소개된 책을 읽어왔는데,

    평소 이덕일씨에 대한 평가는 들어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아무튼 초록불님 덕분에 공부가 아직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쳤네요.

    글 잘 읽고갑니다^^
  • 애민군주 2009/07/20 21:43 #

    제가 조선사 특히 정치사부분에 관심이 있다보니 정조독살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데 그때 이덕일을 처음 안.......뭐 정조비밀 어찰 뜨고 좀 조용해졌나 싶었었는데.. 여기서도 사고치네유..에효..그리고 노론을 무조건 암당이라고 표현한것은 이준님의 말에 동감..
  • 애민군주 2009/07/22 17:19 #

    근대 숙세가나, 역사속으로 숑숑 모두다 초록불님께서 쓰신 책들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 초록불 2009/07/22 17:23 #

    네, 제가 쓴 책들입니다...^^
  • 2010/06/16 02:1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0/06/16 09:21 #

    그런가봅니다...
  • 우리봄이 2010/07/27 23:05 #

    초록불님 글 열심히 읽고 있는 사람입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는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본문 중에 살짝 잘못된 곳이 있는 것 같군요.

    "특히 중요한 유물은 “낙랑태윤장(樂浪太尹章)”이라고 하겠다. “윤장”이란 왕망이 태수 이름을 바꾼 것이다."

    "윤장"이 아니고 "태윤"이 "태수"를 바꾼 이름이 아닌가요?

    그리고 어디서 보니 (아래 링크) 왕망이 군이름들을 바꿀 때, 낙랑군도 낙선군으로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낙선대윤장"으로 씌여 있었어야 하고, "낙랑대윤장"은 오히려 조작의 증거다라고 하던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http://blog.naver.com/casahoo?Redirect=Log&logNo=20001447059
  • 초록불 2010/07/27 23:11 #

    잘못 적었네요. 고맙습니다.

    먼저 관직이 고쳐지고 다음에 지명이 고쳐졌기 때문에 이 도장에는 잘못된 부분이 없습니다. 이런 선후관계를 확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지요.
  • 굔군 2011/04/01 18:56 #

    태윤(太尹)이 아니라, 대윤(大尹)이 맞습니다.
  • 우리봄이 2010/08/01 12:31 #

    답변 감사드립니다. 하나만 더 여쭤 볼게요.

    '만들어진 한국사' 수정판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벌써 나왔나요? 아니면 언제쯤 나올 건지 알 수 있을까요?
  • 초록불 2010/08/01 12:50 #

    올해 가기 전에는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아무튼 초판이 다 팔려야 나올 수 있으니까요. 대부분 오탈자이고 한두가지 인용에서 부정확하거나 권리를 침해한 부분을 수정하는 것이고 추가되는 내용이 있거나 전면 개정이라든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 matercide 2010/08/28 12:14 #

    봉니가 위조품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박진욱이 쓴 {<낙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 [고조선고고연구] 제2호(루계 95호), 1995년}에 나온 것입니다.
    1. 봉니와 도장의 크기가 다르다. 거기서 나온 도장의 크기는 모두 한 변의 길이가 1.5cm 미만이지만 봉니에 찍힌 도장의 크기는 대부분 2cm를 넘는다.
    2. 같은 봉니가 서로 크키가 다르다. "동이장인"이라는 봉니 두 점이 나왔는데 하나는 한 변의 길이가 2cm이고 하나는 2.1cm입니다.
    3. 당시 관직제도와 다른게 있습니다. 거기에는 "장잠장인長岑長印"과 "장잠령인長岑令印"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장잠현長岑縣의 장관이 쓰던 도장인데 현의 장관은 령이나 장입니다. 그런데 이 두개가 모두 있네요. 거기다 장잠현의 장관은 장잠장이므로 장잠령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초록불 2010/08/28 12:18 #

    1.2. 크기는 본래 다양합니다.
    3. 왕망의 신이 생기면서 관직이 바뀔 때마다 인수가 바뀐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matercide 2010/08/28 12:15 #

    거기다 봉니가 한반도에서 유독 많이 발견되고 보존이 잘 된게 이상합니다. 중국본토에서도 잘 나오지 않는건데
  • 초록불 2010/08/28 12:19 #

    중국 본토에서 엄청 나왔습니다.
  • matercide 2010/08/28 12:47 #

    그럼요. 1997년 요녕성 금서시 연산구 여아가 태집둔 소황지의 옛 성터에서 '임둔태수장'이라고 쓴 봉니와 승丞자가 새겨진 봉니가 발견되었습니다. 복기대가 2002년 백산학보 61집에 쓴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에서 "지난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와 지금의 요동 지역으로 본 통설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이병도의 [한국대사관]에 실린 [동방한사군도]에 나온 것처럼 임둔군이 함경도에 있었다는 설은 다시 따져야 합니다.
  • 초록불 2010/08/28 12:51 #

    그러세요.
  • matercide 2010/08/28 12:24 #

    초록불님이 추가에서 쓴 것 : 태강지리지에서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역사지도집] 제2권(진,서한,동한) 28쪽에 낙랑군 수성현은 대동강 근처에 있습니다. 그러나 갈석산은 하북성 창려현에 그려놓고 대갈석산이라 표시했습니다.
  • 초록불 2010/08/28 12:32 #

    그 대목의 요점은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 matercide 2010/08/28 12:48 #

    수성현과 갈석산이 서로 다른 데 있는 이 모순을 어찌해야 합니까?
  • 초록불 2010/08/28 12:54 #

    그런 모순은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수도 없는 경우의 수가 생기지요.

    임둔 봉니 하나에 임둔군 위치를 바꾸려 하면서 낙랑 봉니는 모두 무시하면 어떻게 되나요?
  • matercide 2010/08/28 19:08 #

    그렇지만 일제의 손이 닿은 유물은 위조시비에 휘말렸습니다. 거기다 이것을 발견한 이마니시 류는 가는 곳마다 중국계 유물을 속속 발굴해서 '신의 손'이라고 불렸습니다.
  • matercide 2010/08/28 19:09 #

    그리고 복기대는 임둔 봉니 하나만 갖고 따진 게 아닙니다. 그는 그 둘레의 유적과 유물의 성격을 동시에 밝혀 동방변군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돕습니다. 결코 봉니하나만 갖고 그런 게 아닙니다. 거기다 낙랑 봉니 때문에 임둔 봉니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 초록불 2010/08/28 19:56 #

    이 부분의 논점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과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그려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복기대의 주장은 이 글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2010/08/28 22:5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0/08/28 22:55 #

    제가 요즘 무척 바쁜 관계로 참고서적을 펼쳐볼 시간도 모자랍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썼더니 오류가 많았네요.
  • 2011/04/01 19:4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1/04/01 20:01 #

    글쎄요...^^

    옛날 김한규 선생님은 역사지리 문제는 깊이 들어가면 억측을 하기 쉽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두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저로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데 억지로 들어간 셈이라서... 잘 아시겠지만 정약용은 이 문제를 한강=열수를 착오에 의해 기재한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물론 패수-열수-대수가 등장하기 때문에 청천강-대동강-임진강으로 비정하는 경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 시간이 있다면 이런 문제를 천착해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다만 좋은 포스팅으로 뵐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굔군 2011/09/20 08:56 #

    결국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공개하면 역밸을 충격과 공포의 소용돌이에 빠뜨릴 엄청난 위력의 핵폭탄이 될 것입니다. (흐흐)
  • 2011/05/26 14:4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1/05/26 15:19 #

    이 계통으로 정리된 책을 보고 싶다면 졸저 <만들어진 한국사>를 보시면 됩니다.

    각론으로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행하는 책들을 보셔도 도움이 될 겁니다.
  • 2011/08/09 23:3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1/08/09 23:42 #

    1. 무덤 양식의 특징과 유물이 결합해서 나오는 결론이므로 그런 식의 이야기는 별 가능성이 없다고 봅니다.

    2. 그런 주장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만, 발해라는 것이 어차피 황해의 일부분인데 그런 주장은 애초에 바다로 나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네요.
  • 2011/08/10 20:4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1/08/10 20:52 #

    멀쩡한 기록을 놓아두고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죠.
  • fdu123 2011/08/10 20:58 #

    답변감사합니다
  • 2011/08/25 09:4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11/08/25 10:05 #

    여러 다른 시대의 일을 가지고 동질성을 논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동 시기에 같은 사례를 가지고 비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지, 시대와 배경이 다른 일을 가지고 예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특수한 경우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다만 그것이 그 시대의 일인 것입니다.
  • 붉은잎 2012/05/11 22:16 #

    근데 이덕일이 쓴 조선시대 책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은 내용이라고 봅니다.
  • 초록불 2012/05/12 09:07 #

    오항녕 교수의 <조선의 힘>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치산선생 2012/07/09 21:32 #

    이덕일씨는 원래 문학도였는데, 사학과로 전과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래서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신듯 ㅎㅎ 숭실대 사학과의 망신일까요 자랑일까요
  • 초록불 2012/07/09 23:35 #

    최소한 제가 만나본 분들은 망신이라고 말씀하더군요. (몇 분 되지는 않습니다...)
  • 초대륙 아마시아 2017/06/23 01:30 #

    애초에 섬이 아니면 다 대륙지역일 텐데 이덕일은 대륙의 의미를 맘대로 축소시키는 듯 합니다....씁...한반도는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의 일부죵..흠흠...
  • 초록불 2017/06/23 11:23 #

    맞습니다...^^
  • 초대륙 아마시아 2017/06/23 15:35 #

    갑자기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 왜 많고많은 강들중에 하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을 한반도로 정의했을까요..음.........갑자기 든 뻘생각이긴 합니다만..흠흠...
    아마도 국경선이 그쪽이라서 그랬던 걸까요..흠흠...
    가령 대한민국 헌법 3조에서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랑 그 부속도서라고 했는데 정작 헌법에서는
    한반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일컫는 것이고 부속도서는 어디서부터 어디서까지를 일컫는 것인지 명확히 정의하지는 않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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