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점은 저 뒤에 *..자........서..*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술래잡기를 하면 술래는 도맡아서 내가 했고, 색깔찾기며, 다방구며, 제기차기며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끝말잇기와 같이 달리기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만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4학년 여자아이들과 100미터 달리기를 같이 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4학년 여자아이한테도 달리기에서 질 정도였다. 뭐, 그 여자아이가 하필 건장하기가 6학년 뺨치는 아이였긴 했지만...

중학교 때도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오징어가이상이라든가, 축구, 농구를 하는 동안 나는 벤치에 앉아 [무기여 잘 있거라]같은 소설을 읽고 있었다. 대개 내가 필요한 경우는 숫자가 맞지 않아서 깍두기라도 필요한 때뿐이었다.

고등학교에 와서도 사정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키가 껑충 커져서 180에 가까웠기 때문에 처음에는 농구 좀 하겠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딱 한 판만에 내 본색을 알아차렸다. 서예부에 있으면서 붓글씨 연습한 시간과 농구한 시간이 비슷한데도 3년 동안 골을 넣은 수는 한 손을 넘지 못했다.

고3이 되어서 가장 걱정이 된 것은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체력장은 20 점 만점이었는데, 남학생 중 19 점을 맞는 사람들은 가뭄에 콩날 정도였다. 그러니 여기서 점수를 깎아먹는 것은 정말 바보짓이었다.

하지만 멀리뛰기 이외에는 잘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도 허리 힘을 사용해서 하는 정상적인 멀리뛰기는 할 줄 몰랐고, 그저 팔 흔들다가 다리 힘으로만 뛰었다. 그 멀리뛰기 거리가 하키부 주장과 맞먹는 거리여서 이 분야에서는 만점이었다. 체육교사는 내 폼을 교정해 주려 노력했으나, 몸을 활처럼 휘었다가 튕겨내는 방식의 정상적인 멀리뛰기 폼으로는 비거리가 확 줄어들었기 때문에 결국은 교정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체육교사는 학생주임이기도 했다. 당연히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고, 아주 인기없는 교사였다. 하지만 수업을 들어보니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훈훈한 인품의 사람이었다. 소문에는 월남전에서 작전 실패로 부하들이 전멸해서 옷을 벗고 교사가 되었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이 교사 덕분에 체력장을 간신히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100 미터 달리기 요령을 배운 덕분이었다. 나는 모든 체육교사가 이 요령을 가르쳐주는지 어쩐지 모른다. 따라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당시에 그 요령을 매우 충격적으로 들었다.

그 요령은 이런 것이었다.

"너희들이 100 미터 달리기를 왜 못하는 지 알아? 너희들은 결승점이 보이면 그 10 미터 앞에서부터 속도를 줄인다. 결승점에 도달햇을 때는 터덜터덜 걸어서 들어온단 말이다. 결승점이 보이더라도 그것이 결승점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결승점은 20 미터 뒤에 있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느린 놈의 경우에 3초는 더 빨라질 거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체력장 날 친구에게 빌린 런닝 슈즈와 체육교사로부터 받은 조언을 바탕으로, 만년 18 초를 뛰던 나는 13 초 F라는 경이적인 (그후로는 전혀 달성하지 못할) 기록으로 100미터를 통과했고, 체력장 만점에서 1 점을 오버해서 간신히 20 점을 받을 수 있었다.

살면서 가끔 나는 이때 생각을 한다. 저기까지 가면 끝일 것 같을 때, 사실은 그 뒤로 20 미터는 남아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을 망각하면 그 대가가 늘 쓰다는 것. 하지만 자꾸만 나태해지면서 남아있는 20 미터를 잊어버린다. 그래서 10 미터 앞에서부터 속도를 줄여버린다. 어떤 경우는 결승점이라고 생각한 지점이 그저 반환점일 때도 있다. 지나는 순간 그것을 알면 늦는다. 결승점이 보인다고 속도를 줄이지 마라. 결승점은 저 뒤에 있다. 언제나 그렇다.

덧글

  • 사발대사 2007/02/20 12:34 #

    정말 좋은 말씀이십니다. (__)
    더불어 새해에는 대박작가 되시기 바랍니다. ^^
  • 아케트라브 2007/02/20 12:38 #

    음 생각해보니까 저희 체육선생님도 가르쳐주셧네요 그땐 그렇게 깊게 다가오지않았는데./..
  • 에이미 2007/02/20 12:44 #

    기억해두겠습니다. ^^
  • Pluto 2007/02/20 12:57 #

    (__) 새해인사드립니다.^^
  • 잠본이 2007/02/20 13:25 #

    정말 훌륭한 진리로군요. 마음에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 sharkman 2007/02/20 16:09 #

    손들이여 잘 있거라. 여자가 죽어서 어린 마음에 실망이었던...
  • 포더윙 2007/02/20 16:56 #

    저도 새해인사부터 _(_ _)_

    그런데 저도 정확히 똑같은 교훈을 들었고! 똑같이 충격을 느끼고 감동먹었는데! 달리기 기록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던 건 어찌된 영문일까요....
  • 초록불 2007/02/20 17:32 #

    사발대사님 /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아케트라브님 /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인생의 오묘한 점이죠.

    에이미님 / ^^;;

    Pluto님 /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잠본이님 / ^^;;

    재원님 / 역시 특이한 관점...

    포더윙님 / 런닝 슈즈를 착용하지 않았던 게지요.
  • chione 2007/02/20 18:49 #

    초고만 끝내면 쉴 수 있어- 라는 생각에 1월 말부터 내내 나태하게 살고 있었는데 정신이 확 드는군요. 남은 20미터 얼른 달려가야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초록불님 가정에 올 한 해 좋은 일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
  • 타브리스 2007/02/20 21:32 #

    좋은 글입니다. 저도 20미터 달리겠습니다.
  • 오우거 2007/02/20 22:09 #

    훌륭한 말씀 감사합니다. 운동할때 볼 수 있게 뽑아놔야겠어요.
  • 서산돼지 2007/02/21 00:16 #

    제가 바로 체력장 19점 받은 사람입니다. 기적이었지요. 평소때는 14-15점 정도였거든요
  • 할배 2007/02/21 06:37 #

    이런.. 저는 그냥 기본 점수만 받은 사람입니다만..^^
    덕분에 오래달리기는 할 생각도 안했지요. (먼산..)
  • 우유차 2007/02/21 11:55 #

    뜬금없지만 SES [달리기] 추천합니다. ^^
  • Kyrie_KNOT 2007/02/21 12:30 #

    와우,나중에 써먹아야겠습니다.
  • 초록불 2007/02/21 12:47 #

    우유차님 / 무, 무슨 말씀인지...
  • 타브리스 2007/02/22 01:14 #

    초록불님 / 노래 이름 같은데요...
  • 총천연색 2007/02/22 02:10 #

    후흐후흐흐흠. 왜 이제 체력장이 없는 사회인이 되어서야
    기초체력 키우기에 안달인... _-_
    여하튼 '결승점'따윈 멀고도 멀었으니, 꾸준히 해야겠습니다. ^^
    새해 복만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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