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봐서 간단하게 적어본다.
최X환이라는(자세히 거론하고 싶지 않다) 사람의 이야긴데, 이런 주장을 해놓았다.
조선이 중국에 있었다는 증거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가져와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선조 52권 27년 6월 2일의 기록이다. 좀 길지만 인용한다.
례부(禮部)주객 청리사(主客淸吏司) 제독(提督) 회동관 주사(會同館主事) 홍계준(洪啓濬)의 주본은 다음과 같다. (중략) 각성(各省)의 순무(巡撫)를 맡은 신하가 마땅히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을 한 집안처럼 형세가 서로 연결되게 하여, 적이 산동(山東)에 들어오면 회주(淮州)·서주(徐州)가 지원하고, 적이 회주·서주에 들어오면 절강(浙江)·직례(直隷)가 지원하고, 적이 절강·직례에 들어오면 민중(閩中)·양광(兩廣: 광동성과 광서성)이 지원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군대의 사기가 진작될 것입니다.
원문까지 같이 적어서 길게 인용하고 있는데 핵심적인 부분은 저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저렇게 중국 지명들이 나오고 적과 싸울 것을 대비하는 이야기가 나와 있으니 조선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는 논리.
혹세무민도 이런 혹세무민이 있을까?
우선 홍계준은 명나라의 관리다. 앞에 버젓이 "예부"라고 나와 있다. 조선에서는 "예조"지, "예부"가 아니다. 저것은 명나라 신하가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그게 왜 조선왕조실록에 들어 있을까? 이런 이유로 들어있는 것이다.
선조 52권, 27년( 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6월 2일 기유 3번째기사
유 총병(劉總兵=유정) 의 접반관(接伴官) 김찬(金瓚)이 장계(狀啓)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총병이 신에게 묻기를 ‘호 참장(胡參將=호택) 을 보내온 이유를 알고 있는가? 혹시 왜노(倭奴)를 봉해달라고 청하는 것으로 주본(奏本)을 올리게 하지는 않았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 적은 곧 우리 나라의 불공 대천의 원수이지만 우리 나라는 군량이 바닥나고 병졸마저 지쳐서 그들을 소탕할 힘이 없다. 만약 중국이 봉왕(封王)을 허락한다면 모르거니와 우리가 어찌 왜를 위하여 주본을 올려서 그 의논을 도울 수 있겠는가. 봉공(封貢)의 일은 중국 조정의 논의가 어떠한가?’
하니,
‘조정도 두 가지를 견지하고 있고 논의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과도관(科道官) 및 예부(禮部)와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 손광(孫鑛) 등은 허락할 수 없다고 하고, 석 상서(石尙書=석성) 는 허락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중에 한 관원은 논의하기를 「이번에 소서비(小西飛)를 송환하면서 왜노를 그들의 소굴로 모두 돌아가게 한 다음 그들이 만약 그 명을 따르면 봉공을 허락하자.」 하였는데, 다만 그 관원의 논의가 좋았다. 황상(皇上) 또한 이 일을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했다. 밖에 있는 사람으로 강화를 하려 하지 않는 자는 오직 나 한 사람이다. 문관(文官)의 말이 중시되고 무관의 말은 시행되지 않으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습니다.
명조(明朝)의 예부 주객 청리사 제독 회동관 주사(禮部主客淸吏司提督會同館主事) 홍계준(洪啓濬)이 주본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저들이 숨이 차 헐떡이는 나머지 어찌 잠깐이나마 생명을 구차하게 연장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그 군신(君臣)은 행성(行成=화친)의 치욕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포서(包胥)의 눈물을 뿌리면서 차라리 황제 폐하의 궐문에 하소연하여 한 판의 죽음을 택하려고까지 하는데, 이는 그들이 행장(行長)과 심유경(沈惟敬)의 계획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당당한 전정(專征) 의 사마(司馬)로서 망국의 대신(大臣)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신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들[彼]이란 우리 나라를 가리키고, 사마란 석성(石星)을 지칭한다. 중조(中朝)의 사론(士論)이 이와 같이 꼿꼿한데도 지금 호택의 계획을 따라 수적(讎賊)을 위해 봉공을 허락해 주길 청하는 것은 무슨 생각에서인가. 성교(聖敎)에 이른바 ‘드러내고 봉공을 청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한 것이야 말로 이 당시의 정세를 한 마디로 대변하였다고 할 것이다. 아, 통탄할 일이다.】
위 내용은 무슨 이야긴고 하니, 명나라 장수 유정의 접빈관이었던 김찬이 명나라의 화친 논의에 대하여 보고한 것이다. 유정은 화친에 반대하지만 조정에 화친 논의가 많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고 그 뒤에 홍계준이 "화친을 해서는 안된다, 조선이 위급하고 힘들지만 화친을 맺으려 하지 않고 원군을 얻어서 싸우고자 하는데 왜 화친을 맺으려 하느냐"는 상소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붙여놓은 것이다.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홍계준이 고마운 상소를 올려준 것이다. 그래서 홍계준의 상소 내용을 이 기사 바로 다음에 붙여 놓은 것이다. 기사에 보이듯이 명조明朝=명나라 조정이라는 말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은 "명조란 우리 조정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행성의 치욕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포서의 눈물을 뿌리는 [저들]은 대체 누굴까? 혹세무민도 이런 혹세무민이 있겠는가?
최X환이라는(자세히 거론하고 싶지 않다) 사람의 이야긴데, 이런 주장을 해놓았다.
조선이 중국에 있었다는 증거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가져와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선조 52권 27년 6월 2일의 기록이다. 좀 길지만 인용한다.
례부(禮部)주객 청리사(主客淸吏司) 제독(提督) 회동관 주사(會同館主事) 홍계준(洪啓濬)의 주본은 다음과 같다. (중략) 각성(各省)의 순무(巡撫)를 맡은 신하가 마땅히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을 한 집안처럼 형세가 서로 연결되게 하여, 적이 산동(山東)에 들어오면 회주(淮州)·서주(徐州)가 지원하고, 적이 회주·서주에 들어오면 절강(浙江)·직례(直隷)가 지원하고, 적이 절강·직례에 들어오면 민중(閩中)·양광(兩廣: 광동성과 광서성)이 지원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군대의 사기가 진작될 것입니다.
원문까지 같이 적어서 길게 인용하고 있는데 핵심적인 부분은 저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저렇게 중국 지명들이 나오고 적과 싸울 것을 대비하는 이야기가 나와 있으니 조선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는 논리.
혹세무민도 이런 혹세무민이 있을까?
우선 홍계준은 명나라의 관리다. 앞에 버젓이 "예부"라고 나와 있다. 조선에서는 "예조"지, "예부"가 아니다. 저것은 명나라 신하가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그게 왜 조선왕조실록에 들어 있을까? 이런 이유로 들어있는 것이다.
선조 52권, 27년( 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6월 2일 기유 3번째기사
유 총병(劉總兵=유정) 의 접반관(接伴官) 김찬(金瓚)이 장계(狀啓)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총병이 신에게 묻기를 ‘호 참장(胡參將=호택) 을 보내온 이유를 알고 있는가? 혹시 왜노(倭奴)를 봉해달라고 청하는 것으로 주본(奏本)을 올리게 하지는 않았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 적은 곧 우리 나라의 불공 대천의 원수이지만 우리 나라는 군량이 바닥나고 병졸마저 지쳐서 그들을 소탕할 힘이 없다. 만약 중국이 봉왕(封王)을 허락한다면 모르거니와 우리가 어찌 왜를 위하여 주본을 올려서 그 의논을 도울 수 있겠는가. 봉공(封貢)의 일은 중국 조정의 논의가 어떠한가?’
하니,
‘조정도 두 가지를 견지하고 있고 논의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과도관(科道官) 및 예부(禮部)와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 손광(孫鑛) 등은 허락할 수 없다고 하고, 석 상서(石尙書=석성) 는 허락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중에 한 관원은 논의하기를 「이번에 소서비(小西飛)를 송환하면서 왜노를 그들의 소굴로 모두 돌아가게 한 다음 그들이 만약 그 명을 따르면 봉공을 허락하자.」 하였는데, 다만 그 관원의 논의가 좋았다. 황상(皇上) 또한 이 일을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했다. 밖에 있는 사람으로 강화를 하려 하지 않는 자는 오직 나 한 사람이다. 문관(文官)의 말이 중시되고 무관의 말은 시행되지 않으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습니다.
명조(明朝)의 예부 주객 청리사 제독 회동관 주사(禮部主客淸吏司提督會同館主事) 홍계준(洪啓濬)이 주본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저들이 숨이 차 헐떡이는 나머지 어찌 잠깐이나마 생명을 구차하게 연장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그 군신(君臣)은 행성(行成=화친)의 치욕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포서(包胥)의 눈물을 뿌리면서 차라리 황제 폐하의 궐문에 하소연하여 한 판의 죽음을 택하려고까지 하는데, 이는 그들이 행장(行長)과 심유경(沈惟敬)의 계획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당당한 전정(專征) 의 사마(司馬)로서 망국의 대신(大臣)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신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들[彼]이란 우리 나라를 가리키고, 사마란 석성(石星)을 지칭한다. 중조(中朝)의 사론(士論)이 이와 같이 꼿꼿한데도 지금 호택의 계획을 따라 수적(讎賊)을 위해 봉공을 허락해 주길 청하는 것은 무슨 생각에서인가. 성교(聖敎)에 이른바 ‘드러내고 봉공을 청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한 것이야 말로 이 당시의 정세를 한 마디로 대변하였다고 할 것이다. 아, 통탄할 일이다.】
위 내용은 무슨 이야긴고 하니, 명나라 장수 유정의 접빈관이었던 김찬이 명나라의 화친 논의에 대하여 보고한 것이다. 유정은 화친에 반대하지만 조정에 화친 논의가 많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고 그 뒤에 홍계준이 "화친을 해서는 안된다, 조선이 위급하고 힘들지만 화친을 맺으려 하지 않고 원군을 얻어서 싸우고자 하는데 왜 화친을 맺으려 하느냐"는 상소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붙여놓은 것이다.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홍계준이 고마운 상소를 올려준 것이다. 그래서 홍계준의 상소 내용을 이 기사 바로 다음에 붙여 놓은 것이다. 기사에 보이듯이 명조明朝=명나라 조정이라는 말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은 "명조란 우리 조정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행성의 치욕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포서의 눈물을 뿌리는 [저들]은 대체 누굴까? 혹세무민도 이런 혹세무민이 있겠는가?
덧글
나중에 무려 "하멜 표류기"도 대륙 조선설의 증거라고 해서 새로 번역 -_-;;을 한것도 있구요
조선시대 조상들이 현대의 후손을 혹세무민 한거죠.
조선의 학자들은 거의가 사기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