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자........서..*



살면서 한두번 배신 안 당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것이 큰 배신이든, 작은 배신이든.
나 역시 여러 차례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반 당한 경험이 있다.

그 중 가장 뼈아픈 배신은 제일 처음 당했던 배신이었다.
그것은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5학년이 되면서 점점 성적이 떨어지자 엄마는 특단의 조치를 내려 나를 동네 작은 학원에 보냈다. 사실 여기는 학원이라는 이름도 붙이기 뭐한 괴외방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친구 하나를 만나게 된다.

박XX라는 그 친구는 매우 친근하게 굴면서 내게 접근했다. 원래 사람을 잘 믿는 나는 그에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박은 모터가 내장된 탱크 장난감을 선물로 주고, 그 외에도 자질구레한 물건 이것저것을 내게 집어주었다. 나도 받아먹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여러가지 물건을 선물로 주었다. 박은 우리집에 놀라와서는 집안 물건들도 은근슬쩍 집어가곤 했는데, 당시에는 그냥 없어진 것으로만 생각했다.

이 무렵 나와 별로 가깝지 않았던 친구 하나가 어느날 나를 따로 불러 "박, 조심해야해. 걔 니가 진짜 좋아서 잘 해주는 게 아니야. 내가 남의 일 끼어든다고 이상하게 볼 지 모르지만, 니가 워낙 순둥이니까 알려주는 거야. 조심해."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다정한 우리 사이를 깨뜨리려는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박은 애초에 "우리 사이가 좋아지면 질투하는 놈들이 나올 수도 있어."라고 내게 주의를 주어놓은 상태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낸 지 두달 쯤 되자 박은 슬슬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꾸만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사실 별로 형편이 좋지 않았던 우리 집안 사정에 뻔한 내 용돈으로 박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한두번이었다. 심지어 박은 우리 사촌 형수네 집에 가서 용돈 좀 달라고 대신 졸라서 받은 돈을 자기가 챙기기도 했다. 이건 아니잖아, 라고 생각한 내가 항의를 하자 그걸 계기로 바로 화를 내고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며칠 안 보였던 박은 어느날 내게 나타나 인상을 그으며 이야기했다. 그동안 자기가 나한테 준 물건들을 다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박은 나보다 머리는 하나 더 컸고 (난 중학교 때까지 별로 큰 키가 아니었다.) 완력도 좋은 아이였다. 은근히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나, 너희 집도 알잖아. 수틀리면 가만 안 둔다."

형이야 상관없지만 여동생을 때리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놈의 물건을 갖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싹 긁어서 가져다 주었지만 또 시비를 걸었다. 탱크에 흠집이 났다는 둥 트집을 잡으며 돈을 요구했다. 아마 열심히 용돈을 모아서 돈을 주었던 것 같다. 알고보니 박이 자기 집이라고 한 집은 실은 자기네가 세들어 살고 있는 주인집이었을 정도로 무엇 하나 제대로 이야기한 것이 없었다.

아무튼 나는 깨끗하게 박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다행히 6학년이 되었을 때, 박과 한 반이 되지 않았다. 박은 그 후에도 나같은 사냥감을 노려서 사기 행각을 벌이고 다녔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번 부딪친 적이 있는데, 전형적인 양아치 모습 그대로였다.

그 후에 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도 그다지 흥분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때 그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은 금방 잊어버리고, 중대한 배신도 그냥 마음 속에 묻어버린다. 그 사람, 앞으로 안 보면 그만. 내 마음의 한 조각이라도 그런데 쓰는 것이 아까울 뿐이다.

살다보면 우스운 일도 많은데, 내게 엄청난 배신을 때린 사람이 때론 내게 연락을 취해 이것저것 도와달라 말하는 경우도 있다. 속으로는 후안무치도 이만저만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뭐 전화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준다. 만나야 하는 일이라면 극구 사양해 버린다. 내가 비위가 웬만큼 좋기는 하지만 도저히 얼굴 보고는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면, 이런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또 원망을 한다. 그런 소리가 돌아서 들어오는 것도 싫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도와줄 수 있는 건 립서비스하고 마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더 좋은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배신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잖은가?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나니까 그렇지 않으리라 믿어줄 친구들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덧글

  • Shaw 2007/04/26 22:56 #

    생각해 보면, 어린나이인데도 굉장히 타산적인 목적으로 접근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 Shaw 2007/04/26 22:56 #

    그리고 그다지 관계는 없는 얘기지만 전 중1때 믿었던 신채호로부터 배신당했습니다. (응?)
  • 공대생 2007/04/26 23:02 #

    아...공감이 가네요...
    계산을 안하려고 해도 하게되는것이 사람의 관계라지만 그 계산을 목적으로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죠..ㅠㅠ
  • 시퍼렁어 2007/04/26 23:32 #

    다행히 저는 비뚤게 자랄 외부적 요소는 없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ㅎㅎ
  • 초록불 2007/04/26 23:35 #

    시퍼렁어님 / 그 말씀은 제가 비뚤게 자랐다는 이야긴가요?
  • 미스복 2007/04/26 23:40 #

    음.. 저도 딱 초등학교5학년 때, 친구(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둘에게 그런 비슷한 일을 당했었네요..
    제 경우는 그 친구들이 뭘 주진 않았고, 단지 우리집에 와서 그들끼리 놀다가 머리쥐어잡고 싸우다가 울다가 집에 있는 물건 부수고, 목욕하고 갔던..(이게 하루에 일어난 일;;;) 거기다가 우리집에 놀러왔으니까, (한정거장 거리를 가겠다고) 버스비를 달라는 둥, 그 후에 어떤 물건을 사다주겠다, 그러니 돈을 주라.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ㅠㅠ) 물건값을 주니.. 나중에야 그래도 양심에 찔렸는지(?) 그 때 그 물건값 사실은 우리가 조금 더 받았었다고.. 그러면서 주진 않았어요.
    그들이 형편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그 어린나이에 거짓으로 사기까지 쳤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단 걸 그들은 알까요..;
    지나다가(?) 갑자기 옛기억이 떠올라서 초면에 말이 길었어요..^^;
  • 라피에사쥬 2007/04/26 23:51 #

    사람의 인성은 정말 함부로 판단하기 힘들더군요. 유복한 가정에서 인자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어도 참 성질 더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극히 불리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자란 좋은 친구도 있고[..]

    다행히 후자쪽을 더 많이 만나긴 했지만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과는 전화 통화는 할 수 있어도 정말 직접 다시 만나게 될 경우,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질 것 같아서 못하고 있답니다.
  • 아케트라브 2007/04/26 23:53 #

    놀러와서는-오타입니다~
  • 초록불 2007/04/26 23:56 #

    미스복님 / 반갑습니다.

    라피에사주님 /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판단해야죠.

    아케트라브님 / 고쳤습니다. 고맙습니다.
  • 치오네 2007/04/27 00:04 #

    예,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니까 믿어줄 친구들이 있는데... ^^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이 안 좋았는데, 초록불님 글을 읽으니까 흥분이 가라앉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으면 내 마음의 한조각이라도 쓰는게 아깝다, 대범하게 넘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 leinon 2007/04/27 00:07 #

    ...저는 중 2때 가장 친한 친구가 바로 전의 중간고사에서 저한테 져서 2등을 했다는 이유로 미술시간 제 과제를 몰래 찢은 사실을 알고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을 때리고 비웃어 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도 있네요.
  • 초록불 2007/04/27 00:10 #

    치오네님 / 사실 치오네님 포스팅을 보고 생각이 나서 적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leinon님 / 아니, 이런 염장성 댓글을...^^;; 저는 등수가 기록된 이래 한번도 1등을 해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 샤리 2007/04/27 00:28 #

    중학교 때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다가와서 엄청 친한척 하고 그랬던 짝이 있었는데 성적이 나와보니 제가 좀 더 좋더군요. 그걸 안 후, 그 짝은 정말 뒤에서 엄청 열심히 공들여 작업해서 절 왕따시킨 적이 있습니다(언제나 온갖 장르의 책만 붙잡고 앉아있고 공부 하는건 본 적이 그닥 없는데 성적이 무난한건 용서할 수 없는 중죄더군요..) 정작 그 친구에게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났지만, 그 작업에 넘어간 그당시 젤 친한 친구의 모습이 제 가슴에 비수를 꽂았었지요.... 동조안하면 자기도 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이었을거라고 지금은 이해하지만.. 사람에 대한 불신이 심해진 계기가 되었던 일이지요..
  • 파파울프 2007/04/27 00:35 #

    이건... 배신이 아니라 거의 범죄인데요? 정말... 사람이 더 무섭군요.
  • 지미 2007/04/27 00:51 #

    왠지 저도 공감이 갑니다...
    뭐 배신 당한건 다른 상황이긴 하지만요.
    역시 큰 배신을 당하면 작은 배신은 좀 가볍게 보이는 것 같아요... ㅠ.ㅠ
  • 시퍼렁어 2007/04/27 00:58 #

    초록불 // 세상일이 항상 두개의 길로 나뉘는건 아니지요 --;;
  • 초록불 2007/04/27 01:35 #

    샤리님 / 그건 진짜 배신이군요.

    파파울프님 / 박에게는 치밀한 사기극이었죠. 나에게는 배신이었고요.

    지미님 / 어떤 배신이건 마음에 상처가 되는 건 마찬가지겠죠.

    시퍼렁어님 / ^^;;
  • 시온 2007/04/27 01:39 #

    저는요 당하고도 얼굴보고 그랬는데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래요. 망할 성격같으니. 딱 잘라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초록불님은 어린 나이에도 명쾌한 뭔가가 있네요.
  • 2007/04/27 12:3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7/04/27 13:55 #

    비밀글 / 아닙니다. 그냥 생각나기에 적은 겁니다.
  • 보드라우미 2007/04/27 14:42 #

    사람의 불건전한 성품이 어릴 때부터 발휘된다는 것.... 참 무서운 일이네요.
    성장과정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태교가 잘못된 것일까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머리구조 때문에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을 탓한들 어쩌겠습니까. 피하는 게 상책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 자꾸 대하면 피해가 심해지니 얼굴 안 보는 게 안전합니다. 저도 경험상 사람은 성격이 잘 바뀌지 않더군요. 몇 년을 대해도 그대로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돈 뺏고 중상모략하는 것도 인간이 가진 속성의 일부일까요? 궁금해집니다. 심리학 교과서를 보니, 중상모략은 고대 로마인들도 했다고, 폼페이 유적에 그 증거가 나왔다는군요. 사람들 행동이 다 비슷비슷하겠지요.

    FBI 수사관의 책을 읽어보면, 연쇄살인범들은 어릴 적 가정에서 학대 받고 자라서 머리 구조가 정상인과 다르다고 하더군요.
    유달리 부적응적인 행동을 거듭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 머리 구조나 정신구조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랑이 부족한 가정에서 자라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앞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도 불량하거나,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나도 똑바른 친구도 있다고 댓글 달아주신 분도 계시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유전적 요인, 태교, 부친의 사랑, 또는 학대, 교육의 영향, 친구의 영향 등...... 사람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은 많을테니까요.

    아뭏든, 율곡 선생 말씀이, 상대할 만하지 못한 사람은 날씨 이야기나 대충 하고 상대하지 말고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경험상 동감합니다.
  • 초록불 2007/04/28 00:18 #

    보드라우미님 / 네, 좋은 사람들 만나기도 시간이 짧은데, 마음에 상처 주는 사람들까지 시간내가며 만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 냉장고 2007/04/28 07:04 #

    그 후에 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도 그다지 흥분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때 그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은 금방 잊어버리고, 중대한 배신도 그냥 마음 속에 묻어버린다. 그 사람, 앞으로 안 보면 그만. 내 마음의 한 조각이라도 그런데 쓰는 것이 아까울 뿐이다

    ....초록불님의 마음가짐 쓸쓸하면서도...저도 그래보고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 총천연색 2007/04/29 08:32 #

    정반합으로 이루어진 세상.
    아하하하하하하. _-_
    그래도 배신은 싫은 게 인지상정.
    아아아아~~~ 여하튼 잘 보았습니다.
    근데 그리 큰 배신 같지 않아요!
    동심에서는 큰 충격이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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