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6월 민주대항쟁 *..자........서..*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의외로 이때의 일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세월이 정말 많이 흘러갔음을 느끼게 된다.
가령 이한열 군의 죽음이 6월대항쟁의 원동력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본다. 미안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한열 군이 6월 항쟁의 한 축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죽은 것은 6.29 선언이 나온 뒤인 7월 5일이었다. 7월 9일, 이한열 군의 영결식에는 정말 백만 명 쯤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모였었다. 그것이 6월 항쟁의, 그리고 80년대 독재정권과의 마무리처럼 보였다. 문익환 목사님이 그동안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쳐부르셨다.

사실 5공 시절 내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권양 성고문 사건이었다. 1986년 여름에 터져나온 이 사건은 정말 쓰레기들과 내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시 5공은 철저히 언론을 통제하여 이 사건을 사회면 탑에도 올리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작은 제목을 달고 사회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편집으로 사람들에게 선보여야 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정부의 주둥이가 되어서, "성고문은 없었다. 성마저 도구로 삼는 운동권" 등의 파렴치한 날조극을 벌였던 신문도 있었다. 뭐, 어느 신문인지 지목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리라.

그러나 사회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86년 5.3 인천투쟁이 실패하고, 권양 성고문 사건도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월 15일 중앙일보에 2단 기사로 연행조사받던 대학생이 조사 중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박종철이 고문을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보도지침이 내려왔지만, 이미 이 사건을 외신들이 주목하면서 언론이 통제 범위를 벗어나버렸다. 1월 18일 동아일보는 1면 톱으로 기사를 확대했다.


1월 13일 자정에 연행되었던 박종철 군은 10시간에 걸친 물고문 끝에 죽음에 이르고 만 것이다. 16일 증거 은폐를 위해 박종철 군은 화장되었다. 이때 경찰은 부검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검찰의 강력한 저지로 결국 부검을 했고, 그 결과가 공개되면서 경찰의 사기극이 들통나게 된다. 경찰은 코메디에나 나올 말로 국민을 속이려고 했다.

"책상을 탁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는 것이 경찰의 발표였다. 1월 19일 경찰은 여론에 밀려 물고문을 시인했다. 말단 경찰들만 책임을 졌다. 1월 20일, 26일 서울대에서는 계속 시위가 있었으나 엄동설한 아래 경찰의 탄압만 거세었을 뿐, 시민들의 반응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2월 7일 국민추도대회가 벌어졌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아직 대학가는 방학 중이었다. 그리고 성고문에 물고문까지 거침없이 해치우는 군사정권의 살벌함에 시민들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3월 3일에 있었던 민주화 대행진의 행사도 운동권만의 소용돌이에 그치고 말았다.

5공 정권은 국민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봉쇄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였다.

자신의 임기 안에는 개헌은 없다는 확고부동한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또한 김영삼, 김대중의 신당 창당 움직임도 제동을 걸었다. 김대중은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김영삼은 여러차례 대화를 요청했으나 전두환과 민정당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당시 정부여당은 민주당을 빨갱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늘 재미를 본 색깔론을 또 써먹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군사정권의 철옹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이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었다. 5.18 항쟁 희생자 추도회 석상에서 한국가톨릭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 사건의 진상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5월 22일 검찰은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가 사실임을 입증했다. 5월 23일 재야인사 134명은 박종철군 국민추도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6월 10일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민주당도 저자세를 버리고 대여 공격에 나섰다. 5월 25일 민주당은 정권퇴진을 주장했다.

5월 26일 전두환은 개각을 단행했다. 여기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뿐만 아니라 4월 19일에 일어난 범양상선 회장 박건석의 자살로 인해 불거진 5공 정치비자금 의혹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이런 개각으로 들끓기 시작한 민심을 잡을 수는 없었다.

민주당은 6월 10일로 정해져있는 민정당의 전당대회를 취소하라고 요구했으나 정부는 귀를 막았다. 사실 정부는 이 점에 대해 별로 우려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문화공보부 정책홍보실에서 언론인들을 만나 6.10 전망에 대해 들은 내용을 살펴보자.

민정당 전당 대회 개최일인 6월 10일 재야단체에서 개최하려는 타종, 경종 행사 등은 대규모 행사가 되지 않을 것이다. - 코리아 타임즈 모 부장
이제 박종철 군 사건이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6.10 대회는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다. - 연합통신 모 간부
6.10 규탄 대회가 별일없이 끝날 것이다. 통민당(민주당) 의원들이 단식하는 척하며 구내 매점에서 음료와 간식을 들고 있더라 - 코리아해럴드 모 부장
6월 10일의 추모 행사는 3.3 때와 마찬가지 양상으로 생각되며 물리적 충돌이 적을 것이나 재야에 의한 체면치레용 농성 등이 예상된다. - 한국일보 모 간부

이런 판단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재야와 학생들도 상당수 좌절감 속에 6월 10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행히도 나도 그런 비관적인 전망을 가진 학생 중 하나였다. 그런데 사태는 또 뜻밖의 변수를 불러왔다.

6월 9일 연대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 하나가 직격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이 되었다. 더 이상 희생은 안 된다는 시민들의 각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한열은 시위 기간 내내 회복을 염원하던 사람들의 기도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국 숨지고 말았다.


6월 10일. 민정당은 예정대로 전당대회를 열었고,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당대 최고 인기 코메디언이었던 김병조가 이때 사회를 맡아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정당이고 통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는 망언을 했다가, 자기 유행어처럼 지구를 떠나버리게 되는 사태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환호하던 노태우와 민정당의 체육관 밖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6월 10일 국민대회에는 전국 22개 도시의 40만 시민(경찰 발표는 24만명)이 참여했던 것이다. 이날 이미 상당수의 시민들이 시위 학생들을 편들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시위대 때문에 경찰은 시위 진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그날 KBS 9시 뉴스에는 노태우의 선출 과정만 27분이 나왔다. 49분의 뉴스 시간 중 절반 이상을 노태우에 몰아준 것이다. 시위 장면도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난사 등은 전혀 나오지 않고, 학생과 경찰의 대치 장면과 화염병 투척 등의 자극적인 화면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일보는 6월 12일자 신문에서 6.10 불법집회에 대한 정부 발표문을 1면 톱으로 실었다. 당시 4대 일간지 중 유일하게 그따위 발표문을 1면 톱으로 실은 신문이었다.

6월 10일 시위대 일부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명동성당은 경찰에 의해 철통같이 포위되었다. 경찰은 명동 성당에 진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하겠다고 했으나, 성당 측의 완강한 거부로 인해 끝내 진입하지 못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명동 성당에 갇힌 농성자들을 위해 명동으로 시위를 나섰다. 성당 담장 너머로 김밥이나 음료수를 던져 넣기도 했다.

명동성당 농성은 6월 15일에 끝났다. 6월 15일까지 구속된 사람들만 220명에 달했다.

6월 10일로 돌아가자. 나는 그날 시위에 나가지 않고 학내에 남아있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보여서 나가지는 않았지만 무척 궁금해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자 하나둘 시위에 나갔던 친구들이 돌아왔다. 아, 그들의 얼굴은 희망에 빛나고 있었다.

"됐어! 해냈어!"

나를 본 친구의 첫마디는 이랬다. 다음날 나는 명동으로 나가 보았다. 명동에서 서울역까지 채워진 시위대들고 어깨를 걸고 같이 뛰어볼 수 있었다. 경찰이 쫓아오면 흩어져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서울역 앞의 고가를 가득 채우고 앉아있던 학생들에게 직격 최루탄을 쏘아대던 경찰들을 잊을 수가 없다.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더 분노하여 경찰들에게 욕을 했다.

"또 학생들을 죽일 참이냐!"

학내에서도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복학생들이 데모에 나선 것이다. 대개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들은 데모를 거의하지 않는 것이 분위기였는데, 예비군복을 입고 시위에 나선 복학생들의 수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까지는 한번도 시위 루트로 사용되지 않던 엉뚱한 장소가 시위대들에게 이용되었다. 우리는 노고산을 넘어서 신촌 로터리로 나가 오히려 경찰들을 포위하기도 했다.

6월 18일은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부산에서도 30만 명의 시위대가 경찰을 무력화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6월 19일 이한기 총리는 법과 질서를 위해 정부가 비상한 각오를 할 수 있다는 협박문을 발표했다.

6월 18-19일의 격렬한 시위 과정에서 경찰관 한 명이 순직하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정부는 지방 중소도시의 치안은 포기하고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의 대도시 시위 진압에만 집중했다. 이 때문에 도심 지역이 유령화되고 신촌, 동대문, 서울역 등의 부도심에서만 격렬한 시위가 계속 되었다.

6월 24일 전두환은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전격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양측의 견해는 이미 합의점을 도출할 수 없는 단계였다. 민주당은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겠다고 발표했다.

6월 25일 전두환은 김대중의 가택연금조치를 해제했다.

6월 26일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 읍 등 총 270여개 지역에서 10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제 세월이 지나서 돌이켜 보면 이 무렵, 미국 상원에서 "대한 민주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든가, 시거 미국무부 차관보가 군인의 개입을 반대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알 수 있지만, 당시는 이런 점을 알지 못했다.

다만 세상이 변한 것을 알려준 것은 조선일보의 논점이 변한 것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할까?

6월 29일 아침에 나는 오늘도 몸 좀 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등교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가판에 있던 신문을 보고 기겁하고 말았다.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생각한 많은 학생들이 며칠만에 귀향들을 했다. 7월 1일 전두환의 특별담화가 나와 6.29 선언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을 목격해야 눈을 감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지, 끈질기게 생명의 줄을 놓지 않았던 이한열 군이 7월 5일 새벽에 숨을 거뒀다.

7월 7일 부검 결과 이한열 군의 머리 속에서 최루탄 뇌관 파편을 찾아냈다. 7월 9일 이한열 군의 장례식에는 서울 백만, 광주 50만, 부산 30만명의 추도 집회가 있었다.


-----------------------------------------
다 써놓고 알았는데, 여기에 더 좋은 정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런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겪은 일만 적을 것을... 쩝...
인터넷 6월 항쟁기념관 [클릭]

으음.. 이오공감에 올라가 있군요.
이때를 회상한 글이 하나 더 있어서 링크해둡니다. 차하순 선생님 [클릭]

덧글

  • 2007/06/08 23:5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7/06/09 00:04 #

    비밀글 / 고생했네. 다음 주에 시간 좀 내서 다녀와야겠구나.
  • hkmade 2007/06/09 00:11 #

    중학교 일학년 시절이었죠. TV를 보며 이제 그만 학생들 데모를 해야한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젊었던 도덕을 가르키던 여선생님의 우울한 모습과 여름 이후 밝았졌던 모습.. 너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수 없는게 안타깝다라는 이야기까지..(사실 그때 선생님이 이런저런 이야기들 한들 이해하기 만무했겠지만 말이죠..)
  • 이준님 2007/06/09 00:30 #

    1. 4.13때 미국 공항에 있었던 안정효씨는 "이 X같은 나라"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더군요. 그래서 (원래 모모 그룹의 추문에 얽힌 르포식 풍자소설로 기획된) 구상중이던 작품을 80년대를 관통하는 "태풍의 소리"로 개작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솔직히 5.18까지는 걸작이지요, 그 뒤부터는 우주로 날아가는 수준이라서 그렇지)

    2. "가령 이한열 군의 죽음이 6월대항쟁의 원동력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본다"는 말은 이번주 한겨례 21을 비롯해서 일부 언론에서 이상하게 띄워주는 그런게 있어서 그럴겁니다. 사실상 박종철 사건이 시발점이 되었다는 건 이미 상식적으로 된 이야기지요.

    3. 사실 시대를 잘 타고 나서 그렇지 5공 사상 최악의 고문 파동은 김근태씨의 법정 진술일겁니다. 이 회고담 "남영동"은 후일 여러 매체에서 배껴 -_-;;지지요. 물론 업계쪽으로 본다면 "한수산 필화사건"도 만만치 않구요. 다만 이 사건들은 말 그대로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났기 때문에 86년의 사건이나 87년의 사건을 모두 그렇게 인식한걸겁니다.

    4. "성을 도구"로 말보다 더 압박인게 당시 유명한 "보도지침" 파문이지요. 그 "지침"에 의하면 "성고문"이라는 이야기 대신에 다른 용어로 쓰라고 "압박"을 내린게 있습니다. -_-;;;;

    ps: 권모씨의 요새 햏각을 보면 좀 정신이 멍하지요. 언론에 알려진 그것보다 좀 괴악한 스토리가 하나 있어서(뭐 제 지인이 하나 걸려 있는게 있지요)

    이한열 사건은 몇달뒤 선데이 서울 -_-;;에 이우정씨가 그린 성인만화에 그대로 패러디 되지요. 이한열은 아니고 대략 이한열 짝퉁으로 죽은 운동권 학생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환인데 좀 괴악한 스토리로 흐른게 압박이었습니다.

    권모양 사건은 강준식의 "적과 동지"에서 일제 말엽의 모 사건으로 그대로 패러디 됩니다.

    후반부는 완전히 삼천포로 흘렀고 (이해는 가지만) 작가의 개인감정이 너무 녹아들었기 때문에 날라가 버린 괴작 "폭풍의 소리"가 당시 사회를 "사실과 르포적" 기법으로 잘 그렸지요. (적어도 앞부분만은) 80년대 상황을 리얼하게 묘사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물론 5.18 이후부터는 날라갔고. 6월 항쟁 전야는 의외로 허술하게 그렸습니다만 -_-;;)

    4.13 하면 떠오르는게 전두환하고 서정주였죠. 전두환이야 그렇지만 서정주야 "호헌조치를 찬성하는 사회 원로"로 TV에도 나왔습니다. -_-
  • 파파울프 2007/06/09 00:53 #

    딱 하나가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왜 기억하냐고요? 저도 그렇지만 주변에서 모두들 어이가 없다 거짓말도 좀 그럴듯 하게 해야지... 라고 했거든요.
  • 초록불 2007/06/09 01:21 #

    hkmade님 / 모두 괴로웠던 시절이죠.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할 시절이고요.

    이준님 / 시대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 거죠. 정의구현사제단에 정보를 준 사람이 이부영이라는 사실도 지금 생각하면 아이러니하죠.

    파파울프님 /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정호용도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겠냐"고 뻘소리를 했죠.
  • 별빛수정 2007/06/09 02:33 #

    매스컴과 현대사회라는 수업을 들을 때 권양 성고문 사건부터 6.29 선언까지 다뤘던 적이 있어요. 당시의 언론통제는 그야말로 가관이더군요-_-
  • 초록불 2007/06/09 02:36 #

    별빛수정님 / 축제 때 주점을 하면서 보도지짐을 메뉴로 내놓은 적도 있었죠.
  • 스칼렛 2007/06/09 03:03 #

    6.18 부산 서면항쟁이 사건의 전환점이 되었죠....
  • 초록불 2007/06/09 03:08 #

    스칼렛님 / 그렇습니다. 이 글은 아무래도 서울에 있던 제 시각에 의해서 작성이 된 한계가 있습니다.
  • dcdc 2007/06/09 04:17 #

    잘 읽었습니다.
  • 永革 2007/06/09 07:52 #

    부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하려고 기자 회견이라는 방식을 쓰자고 제안한 사람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천주교 추기경의 권위를 빌어 밝히는 전략을 구상한 사람이 조영래 변호사였다고 하더군요. 90년대 초반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이유가 양김의 분열을 보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라던데. 끝까지 둘을 중재하려고 그렇게 시도했는데 둘 다 쇠고집이었다던가요. 그것 때문에 홧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적지 않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조 변호사가 살아 계셨으면 어떤 입장을 취하실지 참 궁금하네요. 외람된 말 같기도 하지만 세상도, 사람도 변하기 전에 세상을 뜨셔서 차라리 다행인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휠스 2007/06/09 09:49 #

    좋은 이야기 감사드립니다. 저 사이트도 꼼꼼히 훑어봐야겠어요.
  • 초록불 2007/06/09 09:50 #

    dcdc님 / 고맙습니다.

    永革님 / 일개 학생이었던 저도 그때 스트레스 받아 죽을 뻔 했으니, 오죽 하셨겠습니까?
  • 초록불 2007/06/09 09:52 #

    휠스님 / 고맙습니다.
  • 어부 2007/06/09 10:08 #

    대학 가기 일보직전이라 현장에서 보지 못한 것이 심히 안타깝군요. 열혈 동기들은 방과 후 나가 뛰기도 했습니다.
  • 초록불 2007/06/09 10:15 #

    어부님 / 철모르는 고등학생까지 날뛴다고 우려하시던 사회원로들이 계셨죠...-_-;;
  • 궁극사악 2007/06/09 10:16 #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초록불님 생각보다 연세가 많으시네요, 살짝 놀랐답니다). 트랙백 해갈께요^^;;;
  • 초록불 2007/06/09 10:25 #

    궁극사악님 / 연세.... 윽.... 신촌에 있는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연세대와는 관계가 없습니... (썰렁)
  • solette 2007/06/09 11:04 #

    정말 코메디같은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저야 국민학생시절이니 기억은 안납니다만, 나중에 커서 들은 것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탁하니 억'이라는 유치원생도 하지 않을 뻘소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나저나 사회가 다시 그때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서 정말 우울해집니다. 그때 잘먹고 잘살던 놈들이 잘 살아남아서 다시 기어나오는 현실이 가장 코메디같습니다...ㅠ.ㅠ
  • 초록불 2007/06/09 11:17 #

    solette님 / 그걸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발표했죠.
  • 라벤더 2007/06/09 11:51 #

    이한열 열사가 주된 원인이 아니라 기폭제 정도로 봐야하죠. 월드컵 때인가 '다이나믹 코리아'라고 할 때 저는 6월 민주 항쟁, 4.19를 떠올렸습니다. 치열한 쟁투.시민의 피. 그것을 먹고 자란 코리아.
  • 오시라요 2007/06/09 14:20 #

    프랑스가 그랬듯 우리도 그 때로 다시 한 번 돌아갈 것 같은 모습에 우울해집니다.
    프랑스혁명을 했다지만, 역시 몇년 뒤에 나폴레옹을 더욱 환영했다죠?
    어쩌면 지금 모습이 나폴레옹을 환영하는 당시 프랑스의 모습과 겹쳐지는 듯 합니다.

    정부에서는 '다이나믹 코리아'로 선전을 하는데, 6월 민주 항쟁을 예로 들진 않겠죠?
    생각해보면.. 월드컵도 의의가 있지만 6월 민주 항쟁도 의미가 큰데 말이죠.
    자력으로 민주화를 이뤄낸 나라가 흔한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건지...
  • 찬별 2007/06/09 16:57 #

    그 김병조 요즘 뭐하나 한 번 봤더니... 이런 경력이 있군요

    1998년 1월 광운대학교 한국적인식론 강의
    1996년 11월 조선대학교 사회교육원 초빙교수(고전강좌 명심보감
  • 이준님 2007/06/09 17:51 #

    찬별님,초록불님//김병조의 경우야, 그 행사 주관해서 다리를 놔준 분이 만들어준 원고를 거의 그대로 읽은게 화근이죠. (애드립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모 방송사(어딘지는 상상 가능) 피디였고 지금도 잘나간 -_-;;다고 들었습니다. 시쳇말로 김병조씨 혼자 독박을 썼지요. -_-;;; 사실 지적인 시사풍자 개그의 선구자이긴 했는데 괴악한 일에 걸려서 6월 항쟁 전야에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연예인치고는 사생활도 꽤 깨끗해서 (무려 두번인가 저축의 날 -_-;; 대통령상도 탔지요) 몇년 실의에 빠졌다가 결국 학문쪽으로 나갔지요. 대학교도 그 전력(연예인이라는 것과 그 사건 덕분에)때문에 강의가 안 들어오다가 2년 넘게 무보수 강의 -_-;;뛰었고 결국 최근에야 보수 받고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TV는 당연히 안 나오고, 가끔 군인 대상 교양 강좌나 기업체 강좌를 나가더군요)
  • 쪼잔한이병 2007/06/09 19:12 #

    이오공감을 통해서 왔습니다. 저는 이 때 태어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근현대사 시간에 어느정도 배웠기 때문에... 선생님이 가르쳐주시길 저 당시 고문한 경찰들이 일제시대 친일경찰(이름이 노 뭐시기였는데 까먹었습니다.)의 제자(?)라고 하더군요. 역시나.....
  • 로리 2007/06/09 19:43 #

    진짜 저 때 노력하시고 피를 흘린 분들이 계시기에 지금의 제가 마음 껏 찌질될 수 있는 것(절대 나쁜 의미 아님!) 같습니다. 정말로 저 때 앞으로 나간 모든 분들에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저도 저런 일이 일어났을 때 앞으로 나갈 용기를 가졌으면 합니다....

    제가 6~8살 동안 88서울 올림픽이 나오기 전에 어린 시절 대구에서 살 때에는 버스를 타는 도중에 각종 시위로 인해서 눈물을(최루탄) 흘린 적이 많은데... 아련한 기억 속에 저런 역사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찹찹해 집니다....
  • 狂猫 2007/06/09 19:52 #

    공감 통해서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저때의 희생이 그나마 지금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숙연해집니다.

    덧. 노고산을 넘으시다니 혹 s고 나오셨습니까 : )
  • 초록불 2007/06/09 20:25 #

    라벤더님 / 이한열 군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던 것은 그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죠. 나만해도 얼굴 바로 위에서 최루탄이 터진 적도 있고, 백골단이 던진 돌멩이에 쇄골을 얻어맞은 적도 있었거든요.

    오시라요님 / 제 아버지 세대에서는 4.19로 독재를 끌어내린 경험이 있었고, 우리 때는 87년 6월이 있었죠. 30년 세대설로 보면... 음... 아무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찬별, 이준님 / TV에서 몇 년 전에 한번 봤습니다. 판소리 진행이었던가... 뭐 그런 류의 방송이었죠. 저도 김병조의 케이스는 무척이나 안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된 거죠.

    쪼잔한이병님 / 일제 고문경관의 대명사 노덕술을 이야기하는 군요. 일제 강점기 경찰이 우리 현대 경찰에 임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모든 죄를 일제 강점기로 환원시키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책임은 어디까지나 그 일을 실제 저지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죠.

    로리님 / 앞으로는 선거를 통해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쭉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狂猫님 / S고라... 남들이 흔히 고등학교라 부르는 S대를 나왔습니다...^^;;
  • 措大 2007/06/09 21:18 #

    이 시기의 사건들은 지금 (나름) 민주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고 있는 부채일 겁니다. 갚아드릴 사람은 없지만 잊어서는 안될 것. 빚의식을 잊는 순간, 민주화는 공돈으로 이룬 역사가 되고, 금방 후퇴해버리겠지요.

    ...물론 세상에는 자신들만이 이 부채에 대한 채권자라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 초록불 2007/06/09 21:24 #

    措大님 / 그 착각의 채권자 대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에 큰 위안을 삼습니다.
  • 스칼렛 2007/06/10 02:29 #

    서면항쟁 관련해서 잡글 하나 트랙백합니다. (트랙백이 잘못된 제목으로 갔네요.;;...)
  • 2007/06/10 02:2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초록불 2007/06/10 08:28 #

    스칼렛님 / 고맙습니다.

    비밀글 / 저도 궁금해집니다...^^;; 이 점에서는 박노자의 견해 중에 참고할만한 것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아닙니다.)
  • 오토군 2007/06/10 10:41 #

    후우... 하지만 그때의 '가해자'들이 이제 다시 털고 일어나 한몫 잡게 생겼으니 에휴...
  • 진냥 2007/06/10 11:38 #

    이 무렵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어째 목이 메이는군요..ㅠㅠ
  • 초록불 2007/06/10 13:34 #

    오토군님 /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죠.

    진냥님 / 그렇습니다.
  • 레제미스트 2007/06/10 14:24 #

    어제 KBS스페셜 보면서 맘이 찡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슬펐지요. 제가 쓴글의 ㅈ씨는 저희 아버지입니다. 보면서 씁쓸해하시더군요. 그 방송에서 아버지께서는 취재오겠다는 것을 거부하셨다고합니다.
  • 초록불 2007/06/10 14:40 #

    레제미스트님 / 그러셨군요.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프로도가 고향에 돌아와서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점이었습니다.

    샘 - 하지만 그 큰일을 이루신 프로도 씨도 샤이어에서 오랫동안 즐거운 나날을 보내실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프로도 - 나도 한땐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내 상처는 너무 깊어. 난 샤이어를 구하려고 노력했고 이제 구해졌지만 나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어. 무엇인가 위험에 빠졌을 때 이런 일은 종종 있는 거야. 누군가는 포기하고 잃어버려야만 다른 이들이 그것을 영유할 수 있지.

    언제나 이 대목에서 가슴이 짠해집니다. 아버님의 희생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 상붐 2007/06/10 14:58 #

    잘 봤습니다! 밑에 링크가 트래픽 초과 차단이네요
  • 초록불 2007/06/10 15:09 #

    상붐님 / 이오공감의 위력...은 아니겠고, 날짜가 날짜인지라 초과된 모양이네요.
  • 노란병아리 2007/06/10 15:33 #

    네 이때를 기억합니다.
    각 성당에서 신자들 모아놓고 광주비디오를 틀어주고
    시위 나간 학생들이 무사하게 건강하게 사지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도와달라고 미사올렸죠

  • akpil 2007/06/10 16:06 #

    저때를 기억합니다. 중 2,3 ~ 고 1 때까지 정도 였지요.
    그리고 대학 들어와서도 91 년봄의 일들도 있었고요.
  • 리라이벌 2007/06/10 16:55 #

    네이버에 있다 여기로 오니까 눈물이 나네요.......... 대체....... 하아.......... 나라가 어떻게 될려고 이러는지..............
  • 초록불 2007/06/10 20:07 #

    노란병아리님 / 가톨릭 신자신가 보군요.

    akpil님 / 악필님 나이 쯤에 저는 광주 항쟁이 있었지요.

    리라이벌님 / 네이버는 또 악플의 홍수 중?
  • 꿈바라기 2007/06/10 20:25 #

    사실의 역사. 잘 배우고 갑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도 저런 투쟁이 있어야 바로 잡힐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 리라이벌 2007/06/10 21:01 #

    네... 악플이 넘쳐나네요.... 빨갱이 새퀴들이 난리친걸 가지고 뭘 또 난리냐? 부터...... 그들에게 죽은 전경들을 애도한다. 폭도들아! 까지........... 에효................
  • 초록불 2007/06/10 21:16 #

    꿈바라기 / 지금은 표로 승부를... 그리고 NGO들도 많아.

    리라이벌님 / 하하...-_-;;
  • IWBJ™ 2007/06/11 22:20 #

    ..........5.18이야 실패한 데다 낙후된 지역에서의 국지적인 사건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6월 항쟁까지 빨갱이의 책동으로 몰아가려는 사람이 있다니 당황스럽군요.
  • 오리 2007/06/11 22:20 #

    저는 이 모든 일들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아직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은 것 같아요... 자기 전에 기도 한 번 드릴게요^-^...어제 저도 KBS스페셜 보면서 가슴이 무거워지더군요. 저도 모르게 지고 있던 빚의 무게를 인식한 때문인지.
  • 초록불 2007/06/12 00:47 #

    IWBJ™님 / 그런 사람들도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법이죠.

    오리님 / 아, 한국에 안 계신 모양이군요. 고맙습니다. 그 빚의 무게는 저도 늘 느낍니다. 저야 뭐, 멀쩡하니까요.
  • 오리 2007/06/12 10:05 #

    아뇨^-^전 외국에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살고 있었지만 그런 정치적 소용돌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삶을 살고 있었답니다. 좀 심하게 천진난만해서였던 것 같아요. 또 그런 천진난만한 삶을 부모님이 제게 원하시기도 했구요^-^...초록불님 링크를 가져갈게요^-^
  • raindrops 2007/06/15 01:31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큐멘타리를 통해서만 접한 이야기입니다만, 그 시대를 산 사람의 이야기는 그것과는 다르게 이토록 생생한 것이네요.
  • 초록불 2007/06/15 01:51 #

    오리님 / 저도 제 아이들이 천진난만한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raindrops님 / 저는 6월 항쟁 1년 후에 이 문제로 잡지에 글을 하나 실었습니다. 그 글이 남아있어서 이번 글을 쓰면서 많이 참고했습니다. 안 그랬으면 좀 쓰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 책벌레 2007/06/15 17:58 #

    참고로 서울에서는 유월민주항쟁이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열렸죠. 교회측에서 교회에서 전례봉사자로 봉사할 분들이 필요하다고 둘러대주어서 경찰의 경비를 뚫고 항쟁관련자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하여간 유월항쟁에 대한 좋은 기사를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 가짜 2007/06/15 19:57 #

    저는 고등학교 1학년때 한국을 나와서 현재 외국에서 2년째 거주중입니다.
    벌써 사회, 국사 시간에 배웠던 지식들이 희미해 지던 터에 좋은 글을 읽게되어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네요.

    유월항쟁에 직접 참여하셨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에 대해 회의적이고 무관심해져 가고 있었지만, 이 사건 즈음의 우리나라와 현재의 우리나라를 비교해보니 그래도 우리나라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저에게도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 초록불 2007/06/15 20:32 #

    책벌레님 / 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말한 것처럼 그날 제가 나가지 않아서 장소에 대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가짜님 / 그런 기회가 안 오길 희망할 뿐입니다...^^;;
  • 마법의활 2007/08/14 10:57 #

    초록불님은 대학 초년생때부터 역사 흐름의 한복판에서 이렇게 치열한 삶을 사셨는데,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저는 86년하면 맨처음 떠올리는 건 어처구니없게도 "우뢰매"군요..... 새삼 제가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저같은 경우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어떻게 하면 학점을 올릴까 어떻게 하면 장학금 따서 등록금 좀 줄여볼까 그 연구만 하며 대학생활을 보낸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참 저희 세대 자체가 뭔가.... 문제가 많은 세대같습니다. (시대를 잘 타고난건지 아니면 못 타고난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 마법의활 2007/08/14 10:57 #

    앗 한마디... 놓친 것이 있습니다. 올리신 글 잘 보았고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초록불 2007/08/14 20:06 #

    마법의활님 / 한심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저도 대학생 시절에 당연히 학점 올릴 생각하고(물론 그 시절에도 학점 관리 열심히 했습니다...^^;;) 장학금 타서 등록금 줄였고(4학기를 장학금 받았다는...) 연구도 열심히 했죠. 써놓고 보니 여기에 데모 하나 더 한 셈이군요. 데모할 필요없는 세상 만들고 싶어서 싸웠던 거니까, 앞으로도 대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삶을 살아야죠. 80년대는 불행한 시대였을 뿐이에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