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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뱀파이어 3
7.
사람들의 이목이 너무 집중되어 있어서 그 자리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놈을 어깨에 둘러메고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녀석의 몸을 보자니, 이런 놈 피를 빨아먹고 사는 내가 새삼 대견스러워졌다. 그래, 오백년을 살아간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닌 거다.

나는 탕비실로 녀석을 데리고 들어갔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여기에 올 역무원이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문을 닫으니 깜깜했지만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깜깜하다고 앞을 못 볼 이유가 없다. 녀석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는지는 사람에 따라 좀 다르다. 그러니 이 녀석만 남겨두고 떠날 수도 없었다.

현대 사회의 즐거움은 이럴 때도 즐길 수 있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PMP를 꺼내서 잔인무도한 호러물인 [블레이드]를 감상했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설정에 아무 죄도 없는 뱀파이어들을 끔찍하게 학살하는 내용이었는데, 시리즈가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말이 안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다.

인간과 뱀파이어가 공존한지 무려 오백년이 넘었거늘 아직도 이런 미신들이 횡행하고 있는 걸 보면, 우리 드라큐라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억제하고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나저나 영화 세 편을 보도록 깨어나지 않으니, 참 큰일이다. 혹시 김치를 입에 쑤셔넣고 가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그렇게는 해봐야 소용이 없다. 마늘은 몸 안으로 들어가 소화가 되어야 효과를 발휘한다. 개도 마늘을 먹으면 죽지만, 마늘을 개 몸에 백날 문질러봐라, 죽나.

그러니 이 놈이 깨어나야만 한다. 신경질이 난 나는 그 놈을 세게 걷어차 버렸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지만 최소한 기분은 좀 나아졌다. 걷어차인 녀석은 바닥에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엉덩이를 드러낸 이 자세가 좀 낫다. 진작 걷어찰 걸 그랬나 보다.

달칵.

이런, 너무 오래 있었다. 탕비실 문이 열리고 청소 아줌마가 들어왔다. 불이 켜졌다.

"엄마야!"

50대로 보이는 푸짐한 몸매의 아줌마가 비명을 꽥 질렀다. 나는 얼른 검지를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냈다. 아줌마는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나를 한 번 보았다가, 그 망할 놈을 한 번 보았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저 아줌마 미친 거 아닐까?

미친 거 아니었다. 청소 아줌마는 대걸레 자루를 들더니 그걸로 나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 미친 양놈! 어디 할 데가 없어서... 여기가 어디라고! 응, 여기서.... 여기서..."

나는 한 팔을 들어 대걸레 자루를 막으며 외쳤다.

"여기서 뭐? 왜 이래?"

내 말이 청소 아줌마의 화를 더 돋운 모양이다.

"이 쳐죽일 놈이 뭘 잘했다고 말대답이야? 못 배워 먹은 놈! 비역질을 하려거든 딴 데 가서 해! 이 쳐죽일 놈아!"

비역질? 비역질이라면 남자랑 남자가 거시기 하는 그거? 이번에는 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되고 말았다. 이거 왜 이러셔? 난 먹는 거 가지고는 장난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청소 아줌마의 매질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제 피를 빨아서 별로 출출하지는 않지만 그냥 확 잡아먹어버려?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노숙자와는 성질이 다르다. 신분이 확실한 사람을 직장에서 잡아먹었다가는 사단도 보통 사단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 고만 해요! 나가면 되잖아!"

그 말에 청소 아줌마가 매질을 멈췄다. 내 말에 멈췄다기보다는 패다가 지쳐서 멈춘 것 같다.

"빨랑 나가! 이 썩을 놈아!"

다시 녀석을 들춰 업었다. 나가려고 하자 청소 아줌마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아, 왜?"
"미친 놈아, 그 꼴로 어딜 나가려는 거야? 바지는 어쨌어?"

바지를 어쨌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유, 미친 놈들이 그러고 돌아다니면 어떡해? 이거라도 써서 가리고 가야지!"

청소 아줌마가 보자기 하나를 던져줬다. 일단 그걸로 드러난 하반신을 가릴 수 있었다. 나오긴 했지만 지금은 한낮. 딱히 어디 갈 데가 없다. 지하철이라는 놈이 지하로만 다녀야 할 텐데, 가다보면 꼭 지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방법이 있나? 나는 녀석을 꿇어 엎드린 모습으로 만든 뒤에, 놈의 선글라스를 내가 끼고 그 옆에 앉았다. 손수건 하나를 꺼내 펼쳐 놓으니 딱 형제 걸뱅이 모습이다.

먹음직한 것들이 간혹 동전을 던져주고 간다. 특히 피둥피둥한 꿀맛들은 천 원 지폐도 놓고 간다. 조금 있으니 햇반과 김치 값이 빠졌다. 이거 괜찮은 직업이잖아?

8.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꿇어 엎드린 자세였다. 내가 왜 이런 자세로 있는 거지? 몽유병이라도 생겼나?

땡그랑!

돈 소리다.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못보던 손수건 위에 돈이 쌓여있었다. 그런데 너무 밝게 보인다. 아, 띠바, 언 놈이 선글라스를 훔쳐갔구만. 그거 3천원이면 사는 건데, 벼룩이 간을 빼먹지 장님 선글라스를 훔쳐가냐? 생각 같아선 벌떡 일어나야 하는데,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 피가 통하질 않아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단 주변 환경부터 파악하자. 슬며시 주위를 바라보니 옆에 한 놈이 쪼그리고 앉아있는데, 분명 어제 그 변태 새끼다. 저 새끼가 감히 날 앵벌일 시켜? 어라라, 거기다 내 선글라스까지? 이 시키, 너 이제 죽었어.

어, 근데 제법 돈이 많이 쌓였다. 저 바보는 구걸 초짜가 분명하다. 돈이 이렇게 많이 보이면 더 이상 돈이 안 들어온다는 기초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다. 돈이 하나도 없어도 돈 받기가 쉽지 않지만, 돈이 많은 경우가 훨씬 어렵다. 특히 지폐 같은 건 얼른 치워버려야 하는 법이다. 하여간 저런 초짜들이 구걸 세계의 물을 다 흐려서 요즘 점점 더 구걸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거다.

삐익!

어? 호루라기 소리? 공익이다. 빨리 피해야 한다. 굳은 뼈다귀를 깨우려는데, 변태 새끼가 좀더 동작이 빨랐다. 매우 익숙하게 날 어깨에 걸치더니 손수건을 재빨리 챙겨서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완전 날 개호구로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러다가 어디가서 또 날 덮치려는 게 틀림없다. 어쩐지 똥고가 아픈 것 같다. 아, 씨바, 기분 존나 드럽다.

9.
돈이 좀 벌리는 것 같았는데 공익들이 달려오는 통에 달아나야 했다. 거지 새끼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어서 지하철 개찰구를 나가고 말았다. 다행히 공익들이 더 쫓아오지는 않고 인상만 부라린다. 저것들 퇴근할 때 기다렸다가 확 잡아먹어버리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생각 같아선 거지 새끼의 모가지를 확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방법이 없다. 뱀파이어들은 목이 부러져도 아무 소용이 없다. 더군다나 목이 부러지면 음식을 못 먹기 때문에 마늘도 먹일 수가 없다. 그랬다가는 정말 말뚝 찾아다가 심장에 꽂아줘야 하는 일이 생긴다. 블레이드는 은으로 된 무기로 뱀파이어들을 불태워 버리던데, 은제 무기야 늑대인간 잡는데 쓰는 거지 그걸로 어떻게 뱀파이어를 잡냐? 기본도 없는 놈들.

"얌마, 내려놔."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거지 새끼가 깨어난 거다. 땅바닥에 패대기 쳤다. 거지 새끼는 죽을 것처럼 난리를 쳤다. 그래 봐야 안 죽거든? 엄살 피우지 마라.

"너 뭐야?"

한마디 쏘아 부치려다가 참았다. 일단 호의를 보여서 안심시킨 다음 김치를 먹이면 상황 종료다. 잠깐만 짜증을 참자.

"나야 지나가던 행인이지. 바지도 없이 쓰러져 있기에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어째 믿지 않는 표정이다. 이 새끼 뭔 눈치라도 깐 건가?

10.
당연히 눈치를 깠다. 뭐하던 놈인지 뻔히 아는데 걱정은 뭔 걱정? 그런데 이 변태 새끼 봐라?

"배고프지 않냐? 밥이랑 김치 있는데 먹을래?"

너라면 이 상황에서 주는 거 처먹겠냐? 분명히 약을 듬뿍 친 걸 내미는 걸 거다.

"나 김치 안 먹어."

변태의 얼굴이 있는대로 일그러진다. 역시 꿍꿍이가 있었던 거다. 내가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다, 요 놈아.

"한국 사람이 김치를 왜 안 먹어?"
"난 안 먹어. 매운 거 먹으면 설사 해."

설사는 무슨 설사? 없어서 못 먹지. 거지가 먹는 거 가리면 출세 못 한다.

"그러지 말고 좀 먹어보지? 맛있는 건데..."
"너 먹으면 한 번 먹어보지."

변태 얼굴이 더 일그러진다. 약을 쳐놓았으니 먹을 리가 있나. 변태 새끼랑 오래 있어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된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저 변태 새끼, 내 바지는 어떻게 한 거야? 분홍색 보자기? 아주 용두질치기 쉽게 보자기로 입혀 놓았구만? 저 변태랑 오래 있어봐야 나만 피볼 게 분명하다. 나는 뒤로 돌아 달아나 버렸다.

아니, 달아나려고 했다. 하필 그때 내 쪽으로 걸어오던 처녀와 제대로 부딪치고 말았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처녀를 자빠뜨리고 말았다. 어? 그런데 이 처녀 냄새가 너무 좋다. 처녀 냄새를 맡는데 아랫도리로 피가 쏠리진 않고, 갑자기 입에 군침이 돌았다. 목에 퍼렇게 서 있는 핏줄기가 눈으로 확 들어오면서 내 입이 절로 그곳을 향했다.

그순간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은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by 초록불 | 2007/08/24 04:17 | *.....비공개....* | 트랙백 | 덧글(11) | ▲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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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산 at 2007/08/24 05:08
으하하하 너무 재밌어요 ㅠㅠ
Commented at 2007/08/24 05: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耿君 at 2007/08/24 08:56
잘 보고 있습니다 ^^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7/08/24 09:40
이산님 耿君님 / 고맙습니다.

비밀글 / 쉽게 예상 가능한 일이니 신경쓰지 마세요.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오우거 at 2007/08/24 10:03
아... 거지 화이팅.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Commented by SOOK at 2007/08/24 10:30
어떻해요 너무 재미나요 끅끅대며 읽었네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재미있어지는데요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8/24 11:06
아아아...날이 갈수록 흥미진진(?) 해 지는군요 ^^ 거지에 감정 이입이 확실합니다.
Commented by woodstock at 2007/08/24 11:46
전 찬별님보다는 상운님이 생각나네요. 정말 잼있게 읽었습니다 ㅋ.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7/08/24 11:51
woodstock님 / 고맙습니다. 과한 칭찬이십니다...^^;;
Commented by 언에일리언 at 2007/08/24 18:00
공익들이 달려오는 통에 달아나야 헸다 - 달아나야 했다

초록불님 블로그에서 오타를 발견하는건 처음이군요~~

개가 마늘을 먹으면 죽는가보죠? 처음 알았습니다.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7/08/24 18:07
언에일리언님 / 어제 졸면서 타이핑 했더니 ㅐ와 ㅔ를 잘못 눌렀군요...^^;; 저도 오타 많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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