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는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별로 아프지가 않다. 맞을 때 충격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 잠깐 아플 뿐, 그 아픔이 골수를 통해 대뇌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정신이 들 때, 그때도 아프지 않았다. 퍽퍽 소리만 신나게 들렸을 뿐이다. 녀석이 한심해졌다. 이런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원. 오히려 두들겨 맞다보니 뻐근했던 온몸이 시원해지고 있는 것도 같았다. 냉장고 안에서 굳어있던 몸이 다 풀린 것 같았다. 참, 그러고보니 냉장고 안에 들어간 내가 왜 죽지 않은 거지?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 이제 고만합시다."
내가 눈을 부라리니 호모 새끼도 움칠 놀라는 모습이었다. 녀석은 두리번거리다가 마당에 뒹굴고 있는 병을 집어들어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무렇지도 않다. 이럴 수가! 나는 초인이 된 모양이다. 오오, 놀랍다. 번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제 장님 행세하며 구걸하는 건 그만 둬도 되겠다. 명동에 나가서, "분풀이할 분은 때려주세요!"라고 팻말을 걸고 만 원씩 받으면 될 것 같다. 조만간 재벌이 될 것 같다.
아니다. 내가 중학교 중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이건 그 빨간 마약, 바로 내 머리통을 후려친 그 마약에 들어있던 약효과 때문일 거다. 생각이 났다. 그 병들을 다 집어던져 버렸다. 아, 내 돈을 내가 버린 거다. 그러고보니 저 호모가 방방 뜨는 것도 이해가 된다. 마약을 몽땅 잃어버린 거라 저렇게 화를 내는 거구나. 아마 냉장 보관해야 되는 물건이라 이제는 쓸 수 없게 된 모양이다. 나는 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아프지도 않으니까 그만 때리라고. 니 마약병 버린 건 미안한데, 나도 신나게 맞았으니까 비긴 거로 하자."
녀석이 입을 딱 벌리고 물러났다.
"마약? 마약이라고?"
"그래, 씨발 호모야! 이제 고만 때려!"
나는 녀석을 걷어찼다. 녀석은 뒤로 두세 발작 물러나더니,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장님 거지 새끼가, 남의 피를 다 망쳐놓고는 뭐, 마약이 어째?"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니? 피? 그럼 저 병에 들었던 게 피란 말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피라면 당연히 피비린내가 났어야지. 그 황홀한 맛이 어째서 피라는 거야? 그 맛을 생각하자 입에 절로 침이 고였다. 나는 후루룩 침을 삼키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녀석이 다시 두세 발작을 물러서더니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동족끼리는 피 못 마셔!"
저게 자꾸 왜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저 놈은 지가 백인이라는 것도 모르는 건가? 아, 그 순간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저 놈은 내가 진짜 장님인 줄 아는 거다. 그래서 지가 백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줄 아는 게 틀림없다. 그랬구나, 그랬어. 그러니 저렇게 홀랑 벗고도 창피한 줄 모르는 거다. 어차피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까. 그래, 네 놈이 내가 장님인 줄 안다면, 나도 그런 척 해주지. 나는 녀석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약간 다른 방향을 쳐다보며 말했다.
"불쌍한 장님을 감금해서 뭘 얻어낼 거라 그러는 거요? 난 돈도 없고, 가족도 없어요. 뜯어낼 돈도 하나 없으니 이제 그만 돌려보내 주시오."
그리고 얼른 말을 덧붙였다.
"바지 하나만 주시오."
두들겨 맞느라 몰랐는데, 내 하반신을 가리고 있던 보자기는 격렬하게 맞는 바람에 풀려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졸라 창피했지만 눈이 안 보이는 척 하기로 한 이상 그 보자기를 집을 수는 없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마당에 두 남자가 서 있다. 한 놈은 아랫도리를 벗었고, 한 놈은 아예 홀랑 벗었다. 이거, 절대로 정상이 아닌 거다.
"뭐, 임마? 내 피를 다 작살내놓고 이젠 바지도 달라고 해? 새꺄, 그런 거 없어!"
하긴, 이 놈의 집구석에 뭐 하나 제대로 있는 거 하나도 못 봤다. 하긴 여긴 나같은 사람 잡아다가 강간하는 곳일테니, 그런 게 없겠지. 이런 꼴로는 도망칠 수도 없다. 정말 악날한 놈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랫도리가 허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그놈이 은근슬쩍 내 물건을 훔쳐보는 꼴이란! 나는 눈으로 강간 당하는 것만 같아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웃도리를 벗어서 허리에 묶어서 일단 양물을 가렸다. 양놈은 그게 충격이었는지 갑자기 욱욱거리며 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물건이 매력적이었나?20.
놈을 신나게 때리긴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놈은 이미 엄연한 한 마리 뱀파이어가 된 상태였다. 구타의 타격은 순식간에 회복이 된다. 주먹 정도로 때려봐야 안마하는 효과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놈, 맞다가 갑자기 일어나 신경질을 부린다. 그런데 맞는 동안 녀석의 하반신을 가리고 있던 보자기가 풀려버린 것을 몰랐다. 녀석이 자기 양물을 덜렁거리며 내게 대거리질을 하는 바람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못 볼 거 봤다.
놈이 장님이라는 게 억울했다. 장님만 아니면, 놈도 내 물건을 보면서 충격을 먹었을 거 아니겠는가? 더럽게 억울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피를 넣어둔 병을 들어 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하지만 이것도 놈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놈은 날 호모라고 욕하며 마약이 어쩌고 저쩌고 하고 이야기했다. 이놈, 거지에 약쟁이였다. 정말 더러운 놈을 만난 셈이다. 아마, 마약한 지는 좀 되었던 모양이다. 만일 마약에 찌든 놈이었다면 피를 빠는 순간 내가 알았을 거다. 그런 피는 마시면 안 된다. 내 몸 속의 피까지 나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젠장! 녀석의 피를 빨 때, 녀석의 과거를 좀 들여다볼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원칙적으로 남자의 피를 빨 때는 그 음식의 유래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언제나 지저분한 생각들만 들어오기 때문이다. 입맛만 버리기 십상이다. 더구나 저런 홈리스들, 인생의 패배자들, 죽어도 누구 하나 눈물 흘리지 않을 놈들의 기억 따위는 내가 간직해줄 이유도 없다. 음식점 가서 사진찍기 좋아하는 블로거들이 천원 김밥집에서 사진 찍더냐? 응? 찍기도 한다고? 그야 세상에는 별별 사람이 다 사니까... 너무 따지지 마라.
녀석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바지를 달라고 한다. 미친 놈. 나 입을 바지도 없다, 이 놈아. 그러자 놈은 웃도리를 벗어서 자기 양물을 가렸다. 덜렁거리는 놈이 안 보이는 건 다행이었지만, 놈의 상체에 지렁이 기어간 자국같은 땟국물을 보자 기가 막혔다. 더구나 그 위로 이가 지나가는 꼴까지 보였다! 치솟아 오르는 욕지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한바탕 토를 하고 말았다.
21.
와, 이 호모 새끼는 폐병쟁이였다! 뭔가 토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오는 게 시뻘겋다. 피다! 시큼하고 더러운 냄새가 나는 피였다. 나는 질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으악, 그 꼴을 보자 나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저 폐병쟁이가 날 핥고 깨물고 했구나. 씨바, 나도 폐병 걸린 거 아니야?
빨리 여길 벗어나야 했다. 바지가 있건 없건, 엉덩이가 훤히 드러났건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빨리 빠져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나는 허둥지둥 대문을 찾아 뛰었다. 아뿔싸! 이 집은 고릿적 한옥이어서 대문으로 나가는 곳에 내 정강이 중간까지 올라오는 큼지막한 턱이 있었다. 미처 그걸 보지 못한 나는 거기 걸려 그대로 머리통을 세멘 바닥에 꽂고 말았다. 정신을 잃었다.22.
장님 새끼가 달아나려 하다가 문턱에 걸려 엄청난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눈깔도 안 보이는 놈이 함부로 설치니 저런 꼴을 당해도 싸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피를 쏟는 바람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빨리 피를 보충해야 했다. 아, 마당에 널린 저 피들. 눈에서도 피가 쏟아질 판이었다.
나는 벌벌 떨면서 냉장고로 다가갔다. 제발 한 병만이라도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 하느님이 도우셨나보다. (헉! 만군의 주 드라큐라 백작님, 용서하소서!) 구석에 피 한 병이 남아있었다. 나는 얼른 피를 마셨다. 그래, 기운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오, 미란이가 나를 또 한 번 구해주었다. 미란이가 누구냐고? 내가 지금 마시는 피의 임자다.
아마, 60년대였을 거다. 나는 이 답답하기 짝이 없는 섬 아닌 섬, 남한을 벗어나 유럽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휴전선의 철책이 땅을 철통처럼 막고 있었지만 하늘은 뚫려있지 않은가! 하늘을 날아서 북한 땅을 지나 만주를 지나가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나는 박쥐로 변신한 뒤 휴전선을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 방법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낮에는 햇빛을 피해야 하는데 휴전선 안에 그런 안전 장소가 있을 리 만무했다는 점이다. 숨을 곳을 미리 준비할 수도 없었다. 휴전선 부근의 지도같은 것을 구할 방법이 없었던 탓이다. 결국 나는 동부의 산악지대를 이용해서 휴전선을 넘어가리라 마음 먹었다. 산 속이라면 어디든 햇빛을 피할 곳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첫날, 나는 방향을 잃었다. 박쥐가 되어서 날아가다 보니, 어디가 북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산 위로 날아갈 수도 없으니 산을 끼고 돌아야만 했는데, 그렇게 한참을 날다보니, 내가 북으로 가는지,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해가 뜰 시간이 가까워지는데도 도무지 몸을 숨길 동굴 하나도 찾지를 못했다.
이러다가는 비명횡사다! 나는 더욱 날개짓을 거세게 하며, 어디든 숨을 곳이 제발 나와주기를 기도했다. 좀 있으면 해갈 뜰 위기일발의 순간에 나는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으로 숨어들어가야 했는데, 도무지 열린 창문 하나가 없었다. 나는 빙글빙글 건물 주위를 돌며 침입할 곳을 찾다가 그 건물의 굴뚝 안으로 숨어들어갈 수 있었다.
제발 불을 피우지 않기를 바랐다. 연기를 마신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나는 굴뚝 안의 작은 틈새에 간신히 몸을 끼워놓고 잠이 들었다. 어깨죽지, 아니 날개죽지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여름날이어서 다행히 불을 피우진 않았던 모양이다. 눈이 떠졌으니 밤이 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아픔이 가시지 않은 날개죽지를 움찔거리며 그 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자면서 좀더 안으로 들어갔던 모양인지, 몸이 빠지질 않았다.
나는 거기에 낀 채 두 달을 지냈다. 살이 빠져서 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된 뒤에야 그 틈새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당연히 날 기운 따위는 없었던 나는 굴뚝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때 마침 페치카에 불을 붙이려던 참이었나 보다. 군인 하나가 나를 보고 기겁을 해서 비명을 질렀다.
"쥐다! 쥐!"
젠장맞을, 난 쥐가 아니라 박쥐라고. 다른 병사들이 뛰어들었다. 이거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그 중 한 병사는 야전삽까지 들고 있었다. 저거 잘못 맞아서 목하고 머리가 분리라도 되면, 큰 일이다. 박쥐가 잘린 대가리를 들고 뛰는 거 본 적 있는지?
필사적으로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피맛을 본 지 하도 오래여서 기운이 없었다. 더구나 두 달을 움쭉달싹 못했던 탓에 온몸이 쑤셔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일단 날개부터 펼치고 봤다.
"으악! 날개달린 쥐다!"
처음 날 발견했던 띨띨한 병사가 그렇게 외치는 통에 웃음이 쏟아져나왔다.
"으이구, 이 고문관아! 이건 박쥐잖아!"
다행히 병사 중에는 인텔리가 있었다. 그 멍청한 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박쥐는 해충을 잡아먹는 좋은 짐승이니, 풀어줘."
"네?"
"굴뚝으로 잘못 들어왔다가 떨어진 모양이니 밖으로 보내주라고."
"네? 제가 말입니까?"
"그래, 임마."
병사가 벌벌 떨자 야전삽을 들고 있던 병사가 삽을 건네줬다. 고문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죽입니까?"
"삽에 얹어서 내다버려!"
"제가 말입니까?"
다른 병사들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가버렸다. 고문관은 벌벌 떨면서 내게 삽을 내밀었다. 나는 간신히 그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렇게 나는 밖에 버려졌다. 빨리 피를 찾아야만 했다. 그것도 저항하지 못할 피를. 나는 간신히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누구든 붙잡아야 했다. 나는 어느 쪽으로 날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시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미란이를 만난 것은 그때였다.
미란이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죽어야 하는데, 공연히 살아서 오만 민폐만 끼치고 있으니... 아유, 내 팔자가 왜 이리 사나운지..."
오호, 죽어야 한다면 그걸 해결해주는 사람이 바로 이 몸이지.
"죽고 싶은가?"
미란이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박쥐가 말을 하는데도 놀라지 않다니, 대단한 강심장이었다. 아직도 한참을 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넌 저승사자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정말 세상에 미련이 없는 거야?"
"미련? 호호호, 그런 거 없어. 이젠 애들에게 피해만 주고 있으니까."
"피해를 주고 있다고?"
"봐, 내 몰골을... 이제 내 몸 하나 건사할 기운이 없어. 너무 오래 산 거야. 죽어야 할 때 죽었어야지."
미란은 뼈만 남은 몰골이었다. 주름도 어찌나 쭈글쭈글한지 다리미질 잘 하면 그녀가 누워있는 두 평짜리 방을 다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발이 된 머리도 반 너머 빠져 쪽도 제대로 질 수 없었다. 응? 할머니 이야긴줄 몰랐다고? 내가 뭐라 그랬나? 원래 우리나라 말에는 존대말 같은 거 없어. 더구나 난 생긴건 미청년이어도(뭐야? 비웃는 눈길은?) 미란이보다 400살은 많다고.
"저승사자가 너무 늦게 온 거지. 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데려가 줘."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겠다고 목숨을 버리겠단 말인가?"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몸은 이제 밭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애들이 내 약값 대느라 정신이 없어. 그걸로 손주들 괴기나 사 먹이지..."
나는 미란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먹어서 이해하기로 했다. 그녀의 일생이 내 기억 속으로 들어왔다. 조선시대에 가난한 농가의 딸로 태어나 일본인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했던, 그리고 인민군 치하에서 다시 남한의 통치로 넘어오며 고난의 세월 속에서 오직 아이들을 반듯하게 기르고자 노력했던 삶. 그녀의 피는 아이들을 위한 식량이었다.
그리고 내 식량이 되었고,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내게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거지 새끼, 이제 진짜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