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강소성을 누비다 *..역........사..*



공민왕 3년(1354) 6월 계묘일.

원나라에서 이부낭중 합랄나해哈剌那海와 고려인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빠이앤티무르, 고려명 강순룡康舜龍. 빠이앤티무르라는 이름은 공민왕의 몽고 이름과 같다) 등을 보내왔다. 그들이 온 이유는 강소성에 웅거한 장사성張士誠의 난에 원군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강남 일대는 홍건적 한산동韓山童, 한교아韓咬兒, 장사성 등이 웅거하여 있는 상태였다.

이들을 홍건적이라 부르는 것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인데, 그것은 송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뜻이었다. 오행을 따지면 송은 화덕火德으로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1351년 한산동, 유복통劉福通 등은 한산동이 송 휘종의 8대손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기화로 반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장사성도 그런 인물 중 하나다. 1353년 소금밀매업으로 돈을 벌었던 장사성이 무뢰배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뒤 그의 세력은 순식간에 불어나 곧 대운하의 강북 중심지인 고우(高郵=가오유)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고우 성은 지금의 강소성 고우 시다. 고우호湖 옆에 있다. 대운하가 지나가는 곳의 도시며, 그 북서쪽에는 연개소문이 쳐들어왔다는 전설이 있는 숙천宿遷 시가 있고 그 동북쪽에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피해 탑 속에 숨었다는 몽롱탑의 전설이 있는 염성鹽城 시가 있다. 이런 전설은 어쩌면 이 무렵 고려 군에 의해 유포되었을 수도 있겠다.

고우성은 대운하 수송의 중심지 당시 대도시에 속했다. 강남의 쌀과 소금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우송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만큼 원에서도 결코 내버려둘 수 없는 지역이었다. 장사성은 고우를 근거지로 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은 주周. 자신은 스스로 성왕誠王이라 일컬었다.


원은 장수들도 지목해 놓았다. 원이 요청한 장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권겸權謙 원호元顥 나영걸羅英傑 인당印璫 김용金鏞 이권李權 강윤충康允忠 정세운鄭世雲 황상黃裳 최영崔瑩 최운기崔雲起 이방실李芳實 안우安祐

수군 3백과 효용군驍勇軍을 모집하여 8월 10일까지 연경(북경)에 집합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일이 대체 왜 벌어진 것인가? 여기에는 채하중蔡河中이라는 인물이 숨어있다.

채하중. 그는 일찌감치 원나라에 붙어 협잡질을 일삼던 자로, 몽고 명은 합랄첩목아(哈剌帖木兒=하라티무르)라고 했다. 원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일찌감치 출세가도를 달리며 재상 자리까지 차지했으나 공민왕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공민왕 2년 10월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버린 뒤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는 원나라에서 귀국하지 않은 채 다시 정승 자리에 복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 마침 장사성의 토벌 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기회로 삼은 채하중은 원 재상 탈탈(脫脫=토크토, [송사]를 편찬한 인물)에게 고려에서 원군을 끌어오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고 장수들 명단까지 제출했던 것이다. 탈탈이 채하중을 통해 보낸 말은 다음과 같았다.

"두 나라가 우호한 지도 이미 오래인데 지금 한적漢賊이 크게 일어나서 내가 명을 받아 남정南征하니 왕은 마땅히 용사들을 파견하여 이를 도우시오."

공민왕은 분노를 느꼈을 것이지만 당장 원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다음달에 원군 2천명을 선발하여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 유탁柳濯, 우정승右政丞 염제신廉悌臣, 대호군(大護軍=종3품 벼슬) 최영崔瑩, 인당印璫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연경으로 출정시키고 말았다. 공민왕은 영빈관迎賓館에 나아가 친히 열병하고 그들을 전송했다. 이때 출정한 고려군은 고려군의 최정예병이어서 공민왕은 신변보호를 걱정할 정도였다. 공민왕은 서해도(西海道=황해도)에서 궁수를 모집하여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총지휘관 유탁은 일찍이 전라도 만호로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출세를 한 사람이다. 무용이 출중하고 말을 잘 탔던 것 같다. 유탁과 염제신은 채하중이 강등되었을 때 좌상과 우상이었다. 이들이 지목된 것은 이들을 내보내야 자기 자리가 편해질 것을 노린 채하중의 노림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채하중은 오매불망 그리던 정승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이수산李壽山과 함께 귀국했는데, 둘은 앙숙이었는지 서로 상대방을 전장에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 다 전장으로 가지 않았지만...)

그런데 병력 2천이 무슨 대단한 원군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을 것 같다. 실제 고려인으로 동원된 병력은 훨씬 많았다. 원 통치 기간에 요동에는 고려인들이 엄청나게 살고 있었다. 고려국왕은 심양국왕도 겸한 적이 있으며 그후에도 고려인이 심양왕에 있었으므로 이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원은 이 고려인들도 동원했다. 그 규모는 총 2만 3천명이었다.

용사들로 구성되었다고는 해도 난데없이 남의 전쟁에 출정하게 되었으니 불만들이 없을 리 없었다. 염제신은 본래 무신도 아닌데 채하중의 원한 때문에 끌려가게 된 셈이었다. 낌새를 눈치챈 염제신은 관직을 내놓고 강호로 물러났으나 채하중은 탈탈의 권세를 등에 업고 끝까지 염제신을 출정군에 포함시키게 압력을 넣었다. 결국 공민왕도 굴복하고 말았다.

이들 2천 군이 연경으로 가는 동안 길거리에서 행패가 대단했다. 민가의 말을 약탈하고 다녔는데, 오직 염제신, 나영걸, 손불영孫佛永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행동도 국가의 명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부당한 처사라 생각한 장수들이 염제신을 찾아와 하소연했다.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의 일이었다.

강윤충康允忠이 무리를 모아 작당을 하고 염제신을 찾아온 것이다.

"우리가 일가친척을 멀리하고 조상의 묘도 버려둔 채 죽을 땅으로 가고 있으니, 과연 살아서 돌아오겠습니까? 정예기병 오십 기를 이끌고 도성으로 달려가 이 일을 처음 꾸민 놈을 죽여버리겠습니다."

즉 채하중을 죽여버리겠다는 말이었다. 이 일이 성사되었다면 후일 이것도 위화도 회군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그러나 염제신은 무신이 아니었다. 그는 강윤충을 달랬다.

"좋은 꾀가 아니다. 우리 임금은 하늘이니, 하늘을 피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충신의사로 어찌 이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인가?"

염제신은 오히려 행군속도를 높여 연경에 더 빨리 도착하게 했다. 연경에 도착하니 공민왕이 간곡하게 그를 돌려보내달라는 청원을 해놓은 상태였다. 염제신은 바로 귀국하게 되었다.

앞서 반란을 꾀하던 강윤충은 본래 노비 출신으로 군문에 들어가 출세를 한 사람이다. 여러차례 유부녀를 강간하여 장형에 처해져 몸에 흉터가 남아있을 정도라 했다. 출세한 이후에도 상중의 미망인을 약취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고려사]를 따르면 원나라는 장사성 토벌에 8백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하는데(확인하지 못했다. 차후 보강하도록 한다), 그것은 과장이 틀림없겠다. 앞에 나왔던 원의 태사太師 탈탈이 총지휘관이었다. 이 전투에는 고려군만 참전한 것은 아니다. 서번과 회회에서도 원군을 보내왔다. 이들의 목표는 당연히 장사성이 진치고 있는 고우 성이었다. 9월에 드디어 출정이 이루어졌다. 아무튼 대군이긴 했던 모양인지 고우에 도착했을 때는 11월이 되었다. 도착 후 4일 후, 첫 접전이 이루어졌다. 성밖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장사성 군은 대패했다. 장사성 군은 고우 성으로 물러났다.

공방전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무려 27회의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탈탈은 병사를 나누어 육합성六合城을 치게 했다. 이 육합성을 공략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특별히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전투에도 고려군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육합성은 고우성의 서남쪽에 있는 성으로 이 성은 그다지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지만 그 동쪽에 있는 저주滁州를 위협하게 되는 효과를 가지는 성이었다. 한편으로는 저주 방면에서 오는 원군을 막을 수도 있다. 이 육합성을 지키던 장수는 원군의 침입에 놀라 다른 반란세력인 곽자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곽자흥은 육합으로 출전하는 것을 꺼렸으나 곽자흥의 참모 주원장은 육합을 잃으면 저주도 함락된다고 설득해서 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육합은 무너진 뒤였고, 원군은 승리에 도취하여 저주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패주하는 척하며 원군을 유인하여 원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미 저주성을 지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주원장은 약탈한 원군의 말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했고, 장사성과 싸워야 하는 원군은 이 화의를 받아들였다.

원군은 그동안 계속 고우 성을 공략하고 있었다. 고려군이 선두에 나섰다. 유탁이 지휘를 하고 최영이 독전하여 성은 마침내 한 곳이 무너졌다. 그러나 고려군에게 성을 함락시키는 영광을 안겨줄 수 없었던 몽골 장수들이 반발하여 그날 더 이상의 공격을 가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핑계는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날 밝은 뒤 다시 공격하자는 것이었으나, 그 하루밤의 시간을 준 때문에 고우성은 다시 무너진 곳을 복구하고 방비를 단단히 해서 함락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연경에서 탈탈을 참소하는 사건이 일어나 탈탈은 회안淮安으로 유배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일이 [고려사]에는 11월로 나오지만(원정군 일원이었던 인안印安이 귀국해서 한 보고에 들어있다)  [원사]에는 12월로 나온다. 탈탈을 참소한 이는 합마(哈麻=하마)라는 자로 예전에 탈탈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된 적이 있었는데, 그 원한 때문에 중앙 정계에서 탈탈이 나가있는 틈을 타서 기황후(고려 여인으로 황후 자리에 오른 바로 그 여자)에게 탈탈이 3월에 출병한 이래 전공이 전혀 없으니 군사비만 헛되이 내다버린 것이라고 참소해서 쫓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탈탈은 다음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더 외지로 쫓겨난 끝에 실의 속에 죽고 말았다.

고우 성은 외성도 무너지고 거의 쓰러지려던 참이어서 장사성도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총사령관의 경질로 원군이 풀죽은 것을 알고 맹공으로 나와 원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원군은 패배했으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려 군은 회안로淮安路 수비에 동원되어 팔리장八里庄(어딘지 모름)에서 여러차례 적군과 싸웠다.

고려군이 회안성(한신의 고향으로 유명한 회음 바로 아래에 있다. 고우의 북쪽에 해당하므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말은 회수 이남을 모두 빼앗겼다는 뜻이 된다)을 지키고 있는데 장사성 군이 사주(泗州=홍택호 동북에 있다)와 화주(和州=안휘성에 있다. 장강 바로 위에 위치하며 남경의 서쪽 방면이다)의 군사를 동원하여 회안성을 포위했다. 8천 척의 배가 강가에 위치한 회안성을 포위하고 공격에 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아친 것이다. 최영은 선두에 나와 싸우며 여러차례 창에 찔렸지만 끝까지 적을 추격 섬멸하였다.

이 전투를 끝으로 고려 군은 중국에서 물러난 것 같다. 이후 전투 기록도, 전쟁 기록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까. 문제는 이 전투가 언제 있었던 것인지 잘 확인이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전투는 [고려사] 세가 공민왕 4년(1355)년 5월조에 나오는 기사로 미루어볼 때 대략 3월쯤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장사성은 이후 세력을 절강, 서주까지 뻗혀 막강한 힘을 과시하게 된다. 고려와도 공민왕 6년(1357) 7월에 수교하여 공물을 주고받았다. 장사성이 사신을 보낸 것은 그 전전달인 5월에 공민왕이 기철 일당을 처단하고 6월에는 원나라 연호를 폐지하는 등 반원정책을 표면에 드러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자만 어쩌면 그것은 바로 장사성이 봉기 초에 고려군에게 혼쭐이 났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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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성계, 요동을 정벌하다]를 쓰려고 했던 건데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이 와중에 고려 병사 하나가 명교의 이념에 끌려 주원장 휘하로 넘어가는, 그런 무협을 쓰면 재밌지 않겠어요?
카메오로 장무기나 장삼봉도 살짝 등장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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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 황후, 기황후다. 그는 기황후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지난 번 포스팅에서 본 바와 같이 배원정책을 쓰는 공민왕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고려, 강소성을 누비다 [클릭]) 아버지가 처형 당했으나 당시 원은 고려를 돌아볼 수가 없었기에 기철의 아들 기사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는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기철의 반란을 진압할 때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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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講壇走狗 2007/09/22 17:39 #

    哈刺帖木兒-> 哈剌帖木兒. 아마도 본문속의 대부분의 刺가 剌인 것 같군요.
  • 講壇走狗 2007/09/22 17:41 #

    高郵는 왕인지 부자의 고향으로도 유명한데.
  • 초록불 2007/09/22 17:42 #

    講壇走狗님 / 그렇습니까? 이름은 고려사CD에서 카피해 온 것인데... 수정하겠습니다.
  • 초록불 2007/09/22 17:47 #

    참 그러고보니 脫脫을 토크토라 읽는 게 맞습니까? 어떤 문헌에는 퉈퉈라고 나오더군요.
  • 講壇走狗 2007/09/22 17:50 #

    전 토토라고 알고 있습니다. 脫을 현대 한어로 읽으면 tuo1이긴 합니다만.
  • 김미상 2007/09/22 18:02 #

    "공민왕 2년 10월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버린 뒤 정승 자리에서 영도첨의(종1품)로 내려앉혀 버렸다. 그는 원나라에서 귀국하지 않은 채 다시 정승 자리에 복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중략)

    유탁과 염제신은 채하중이 강등되었을 때 좌상과 우상이었다. 이들이 지목된 것은 이들을 내보내야 자기 자리가 편해질 것을 노린 채하중의 노림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채하중은 오매불망 그리던 정승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

    => 영도첨의와 우정승, 좌정승은 모두 종 1품입니다. ([고려사 백관지]) "강등"은 아닌 셈이죠. 실권이 없는 직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공민왕 재위기 후반의 신돈 역시 영도첨의에 임명된 것을 보면 아주 실권이 없지도 않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 약간 수정하시는 것이 어떨지?

    "원 통치 기간에 요동에는 고려인들이 엄청나게 살고 있었다. 고려국왕은 심양국왕도 겸했기 때문에 이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 고려의 충선왕이 심양왕을 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충선왕 이후 분할상속(?)이 됩니다. 심양왕 자리는 충선왕의 조카인 왕호에게, 고려국왕 자리는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에게. 그 점은 필히 수정요망. -,.-
  • 초록불 2007/09/22 18:04 #

    김미상님 / 아하, 그렇군요. 역시 고려사에 어두운 것을 증명...^^;;
  • 을파소 2007/09/22 18:10 #

    문득 환빠들은 여기서 '고려군이 회안성을 지키고 있는데 장사성 군이 사주와 화주의 군사를 동원하여 회안성을 포위했다.' 정도만 쏙 빼가서는 '강소성은 고려 영토였다. 왜 자기네 영토도 아닌 곳을 고려군이 지키겠냐? 심지어 식민강단사학에 물든 이조차 인정한 사실이다.' 라고 구라치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 초록불 2007/09/22 18:14 #

    을파소님 / 그 사람들이야 뭔 짓을 못하겠습니까? 그럴수록 자기 무덤 파는 거죠.

    김미상님 / 수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슈타인호프 2007/09/22 19:09 #

    뭐...예전에 "3007년판 한국사 미스테리 60 "에서도 그 이야기 나왔잖습니까?

    "한국은 동남아시아의 베트남과 중부 태평양의 동티모르, 이란 북쪽의 아프가니스탄, 중동의 이라크, 그 서쪽의 시리아, 아프리카 서쪽의 서부 사하라에 반란 진압과 치안 유지를 위한 군대를 보냈다. 이로 보아 이 나라들은 모두 한국의 영토거나 한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속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 celles 2007/09/22 20:51 #

    천룡전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 초록불 2007/09/22 21:11 #

    celles님 / 배경이 원말명초라면 다른 소설들도 있죠...^^;;
  • 한단인 2007/09/23 00:07 #

    헐,, 고려사는 까막눈(다른 것도 까막눈이잖아~ 퍽퍽)이라 고려군이 북경에서만 깔짝거린 걸로만 알고 있었는데 원래는 강소성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군요.

    그리고 강소성을 비롯한 중국 동해안 일대의 연개소문 전설은 1차 고당전쟁 때 그 지역에서 징병되었다가 전쟁 끝난 후에 귀국한 사람들이 전장에 대한 설명을 한게 후대에 와전되어 마치 현지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전설이 남았다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초록불님의 글을 읽어보니 고려군에 의한 유포 가능성도 없진 않겠네요.
  • 초록불 2007/09/23 00:19 #

    한단인님 / 저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을 보니 장사성이 쫓기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 당태종으로 둔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 한단인 2007/09/23 03:46 #

    으흠,,어쩌면 두 전설이 짬뽕된건지도 모르겠군요. ㅎㅎ
  • 서군시언 2007/09/23 08:22 #

    음, 저는 80만 대군 동원 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800만이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군대동원이군요;;

    탈탈은 토크토 맞습니다. 영어로 중국사 읽어보면 Toghto라고 나옵니다.
  • 김미상 2007/09/23 09:40 #

    중국 동해안 일대의 연개소문 전설은 산동성 청도 일대를 무대로 하지 않던가요? (다른 곳에 또 있나?) 강소성하고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데요?
  • 초록불 2007/09/23 09:46 #

    김미상님 / http://orumi.egloos.com/1779098 에서 24번 항목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참고삼아 25번도 읽어보세요.
  • 김미상 2007/09/23 10:00 #

    네, 감사합니다. 마지막 전설은 탈무드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네요. -o-;;;;
  • 초록불 2007/09/23 10:10 #

    서군시언님 / 중국측 기록 중 어떤 곳에는 백만 대군을 동원했다고도 나오네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군대 동원이라... 그렇군요...^^;;
  • 야스페르츠 2007/09/23 14:54 #

    인류 역사상 최대의 동원은 1차대전 때의 러시아 1500만 대군(!)으로 알고 있습니다. 헤헷... 사실 1차대전 시기의 병력동원을 보면 후덜덜하기는 해요. 기본이 몇백만명이니까요. 이탈리아도 600만 대군이었다죠. ㅡㅡ;;
  • 루드라 2007/09/23 16:16 #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대세계의 역사'에는 脫脫이 토크타라고 나오네요. 군사도 100만이라고 나오네요.

    1차대전 2차대전은 근대 국민국가의 동원력이 얼마나 방대해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죠. 2차대전때 미국도 1100만이던가 그렇고 독일도 총 누계는 2천만 가까이 될 겁니다. 현대전은 숫자로 하는게 아니지만 현대 중국과 인도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2억의 군대도 동원할 수 있을 거 같네요. ^^;
  • 베리타스 2007/09/24 11:50 #

    아 인명에 대해서 다 다르네요. 전 脫脫을 툭타로 알고있었는데 쩝;
  • 2012/11/13 00:0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1/13 00:0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1/13 21:2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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