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학을 알리는 책으로 가장 유명한 책이다. 사실 내 생각에 역사학 초보자가 읽기에는 쉬운 책이 절대 아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읽다가 읽다가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었다. (내가 본 책은 탐구당에서 나왔던 것으로 길현모 선생님이 번역한 것인데, 세로쓰기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은 너무나 유명해서 읽거나 안 읽거나 이 구절은 대한민국에서 먹물 좀 먹은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입니다."읽기는 어려웠지만 이 책은 내 역사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도 저 말에 한참 매료되었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저 말보다 훨씬 중요한 말이 있다. 바로 이 말이다.
"역사는 획득된 기량이 세대에서 세대에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를 말하는 것입니다."나는 역사를 진보라 믿으며, 아직도 미시사보다는 거시사가 올바른 역사를 그린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시사를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세상 최고라 믿는 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이 안에 있다. (카의 말은 아니지만...)
"역사를 해석하겠다는 열망은 너무나 뿌리 깊은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어떤 건설적인 견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신비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1961년에 나온 이 책의 역사 해석에 100% 동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역사학은 카 이후 반세기 동안 눈부시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고구려가 다시 약진하여 일대제국을 건설하려할 즈음에 웅재대략을 품고 나타난 지도자가 곧 광개토왕이었다... 왕은 원래 사람됨이 호매영특하고 군사를 부림이 신과 같아 즉위 이래로 남정북벌, 동토서략, 간 곳마다 승리를 전하며 가위 전필승戰必勝 공필취功必取(싸우면 이기고 공략하면 빼앗는다)의 상태였고 토경土境의 개척이 광대하여 문자 그대로 광개토왕이었다... 고구려는 왕의 공업에 의하여 비로소 만주대륙의 완전한 주인공이 되고 또 반도북부의 고조선의 땅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 있어 왕의 사업은 큰 의의를 가진 것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 (국사대관 73-74)위 대목을 보면 환빠가 쓴 글이라 해도 속을 지경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저 글은 환빠들이 식민사학자라 욕하는 이병도 박사의 글이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치고 저렇게 글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목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오늘날 한국 역사학자들의 글은 너무 딱딱하고 건조하다. 이병도 박사의 글만도 못한 글이 너무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럴까?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역사학자들이 역사학자가 당연히 갖춰야 하는 한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역사학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는 그것이 아니다.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는 "
역사학자와 독자의 대화"다.
역사학의 성과는 책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책은 저자와 독자 간의 대화를 위한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자들의 책도 당연히 독자와 대화한다. 문제는 역사학자의 책 대부분이 독자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역사학자가 역사학자와 소통하기 위해 책을 내고 있다는 점.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 역사학의 가장 큰 문제다.
그러니 사학과 강의 과목에 전공필수로 [글쓰기 강좌]를 신설해야 한다.
음, 분명히 해결 방법을 제시한 거긴 한데... 왜 글이 삼천포로 빠진 것만 같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