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5년(1356)에 기철奇轍이 제거되었다. 기철은 몽고 이름 바엔부카伯顔不花로 그의 누이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황후다. 그는 기황후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지난 번 포스팅에서 본 바와 같이 배원정책을 쓰는 공민왕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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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처형 당했으나 당시 원은 고려를 돌아볼 수가 없었기에 기철의 아들 기사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는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기철의 반란을 진압할 때 기철의 친인척을 모두 죽였지만, 그는 몽골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복수는 요원했다. 당장의 문제는 한족의 반란이었다. 급기야 1368년에 순제는 주원장朱元璋에게 쫓기다가 숨을 거두었고, 그 아들 소종昭宗이 즉위했다. (바로 기황후의 아들이다.) 소종은 몽골 지방으로 쫓겨가 원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했는데, 이를 북원이라 부른다.
아무튼 그것은 조금 뒤의 이야기다. 북경에서 원을 밀어낸 홍건적들은 요동까지 진군했다가 원군의 반격을 받아 고려로 후퇴한다.(1359년 11월) 약탈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온 홍건적은 아예 고려를 병참기지로 생각했는지, 다음 달 4만 대군으로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한다. 난데없는 침략을 받은 고려는 개전 초기에 평양까지 내주며 밀리고 만다. 다행히 이방실李芳實, 안우安佑 등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361년 10월. 겨울을 맞이한 홍건적은 다시 한번 고려를 약탈하고자 달려들었다. 홍건적 10여만 군은 파죽지세로 밀고내려와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공민왕은 안동까지 달아나 숨을 돌려야 했다. 1362년 1월,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이 이방실, 안우, 최영崔瑩 등을 거느리고 홍건적 토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총 20만 대군. 이때 동북면東北面 상만호上萬戶 이성계李成桂가 사병 2,000명을 이끌고 적장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등의 목을 베어버리며 화려하게 등장한다.
홍건적의 무분별한 침입으로 공민왕은 명과 거리를 두고 다시 원과 친교를 맺는다. 때리고 있는 쪽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런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문제는 기황후였다. 자기 오라비를 죽인 공민왕을 기황후가 그냥 내버려둘 리가 만무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꼬드겨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임명하게 했다.(1362년) 최유, 김용 등의 인물이 이에 호응했다. 덕흥군은 요양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고려로 곧 침공할 판이었다. 드디어 1364년 최유는 1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 국내로 진공했다. 의주가 함락되자 공민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보내 최유를 공격하게 했다. 이성계는 제장들에게 겁쟁이라 야단을 치고 힘써 싸우라고 말했으나, 다른 장수들은 이 일로 이성계를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최유 군과 접전을 벌일 때 다른 장수들은 이성계를 도와주지 않아, 이성계는 홀로 최유 군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귀신같은 활솜씨로 적장들을 무찌르며 오히려 승전을 일궈냈다. 최유 군은 일패도지하여 불과 17명만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갈 수 있었다. 순제는 공민왕을 인정하고 분란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공민왕이 원에 대해 만정이 떨어졌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1369년 4월 명은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해왔다. 일단 명과 수교한 공민왕은 이때부터 양 국 사이를 줄다리기 한다. 그러던 끝에 마음을 굳힌 것이 1369년 11월.
공민왕은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할 결심을 했다. 본래 동녕부는 원이 우리나라 평양에 두었던 기관이었다. 고려의 동녕부는 1269년 설치되었다가 1290년 폐지하고 요양으로 옮긴 바 있었다. 요양은 바로 고구려의 요동성이다.
출진 명령이 동북면원수 이성계에게 내려졌다. 동북면은 지금의 함경남도 일대라, 이성계는 보병 1만, 기병 5천을 이끌고 황초령을 넘어 강계를 통과해 압록강을 건넜다. 동녕부 동지同知 이우로티무르(李兀魯帖木兒:우리 이름은 이원경李原景)가 고려군에 맞섰다.
이우로티무르는 야돈촌也頓村에서 고려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얼마 싸우지도 않고 이우로티무르는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말에서 내려 항복했다.
"나의 선대先代는 본래 고려高麗 사람이온 바 신복臣僕되기를 원하나이다."
이우로티무르(이제 이원경이라 쓴다)는 삼백여 호를 이성계에게 바쳤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가 항복하지 않고 우라兀剌산성에 들어가 항거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 우라 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 위나암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성전은 공격하는 측에 매우 피곤한 전쟁이다. 이성계는 종자에게서 활을 빌려 편전을 쏘았는데, 70여발이 모두 적군의 얼굴에 명중하는 신위를 떨쳤다. 고안위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그날 밤 어둠을 틈타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두목頭目 20여 인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성城을 나와 항복하니 여러 성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항복하여 얻은 호가 무릇 1만여 호나 되었다. 이성계는 노획한 소 2,000여 두와 말 수백여 필은 모두 본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 인심을 얻었다. 이런 조치는 크게 환영받아서 요동의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고려군에 투항하게 되었다. 압록 이북 일대가 일시에 고려 쪽으로 붙는 쾌거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다음달 항복한 삼백여 호의 주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돌아갔다.
원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제거한 공민왕은 그해 7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외교 단절인 셈이다. 또한 이성계의 무력 시위와 더불어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군사기지화 해나가기 시작했다. 안주도호부, 의주만호부, 이성만호부, 강계도호부, 화령부 등을 신설하여 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평북 일대의 조직을 쇄신했던 것이다.
그것은 동녕부에 웅거하고 있는 인물이 껄끄럽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동녕부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은 기황후의 조카이자 기철의 아들이었던 기사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였다. 기사인티무르는 원이 멸망하고 북쪽으로 쫓겨나자 동녕부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분사요심관리평장分司遼瀋官吏平章 김백안金伯顔 등과 함께 고려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본래 이성계의 출전도 기사인티무르를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으나, 기사인티무르는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공민왕이 앉아서 당할 위인이 아니었다. 공민왕은 서북면 상원수 지용수池龍壽와 동북면원수 이성계, 서북면부원수 양백연楊伯淵 등에게 동녕부 공략을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