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간단한 정리.
고려군이 요동에서 돌아온 뒤 명은 요동 접수에 발빠르게 나섰다.
명 태조 홍무 4년(1371) 즉 고려군이 철수한 다음 해, 명은 북원의 요양행성을 접수하고 요동의 서남부에 정요위와 요동도사를 설치했다.
명은 고려를 충실한 동지로 보고 있지 않았다. 공민왕은 표면적으로는 명에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북원과 확실한 적대 관계를 가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런 공민왕의 태도가 요동을 타격하기만 하고 점유하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 당하고 우왕이 즉위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사신이 피살되는 사태까지 일어나자 명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명이 의심을 강하게 하자, 우왕은 원나라 쪽으로 기울어졌다.
1377년, 우왕 3년에 북원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정동행성 좌승상 고려국왕이 된 것이다. 북원은 고려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요동 공략에 원군을 보내라고 명했으나 우왕은 그것은 거부했다. 오히려 명에도 사신을 보내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명은 고려에게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요동민들을 송환하라는 등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고려와 국교 재개를 거부했다. 이 일은 요동을 둘러싼 이해관계 때문에 삼국 간에 일어난 신경전이다.
1385년에 와서야 명은 우왕을 책봉해 주었다. 하지만 양국의 관계는 여전히 불편한 사이였다.
1388년 2월, 우왕 14년에 명의 호부는 철령 남쪽만 고려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일방적인 통지문을 보냈다.
이 통지에서 명의 후군도독부가 철령위 설치를 담당할 것이라는 말도 들어있었다.
고려는 외교로 이 사태를 풀고자 했으나 명태조는 일언지하에 고려를 거짓말장이로 몰아붙이며 강행을 선언했다.
우왕과 최영은 이런 명의 태도에 반발하여 북원과 손을 잡았다. 요동공략을 약조하고 명의 복식을 버리고, 원의 복식을 다시 공식 복장으로 채택했다.
1388년 최영은 이성계를 원수로 해서 요동정벌군을 발진시켰다.
그러나 이성계는 유명한 4 불가론을 들고나와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퇴위시키고 명의 연호와 복식을 부활시켰다.
명의 입장에서는 전쟁을 피하게 되기는 했지만, 고려가 이 일로 일전을 불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명은 철령위 설치 건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성계의 손을 들어준 것도 아니었다. 명은 이성계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1390년에 윤이, 이초 등은 명으로 가서 이성계가 명을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명의 원조를 얻고자 한 행동이었겠지만 이런 일이 명에게는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명은 조선을 즉각 승인해주었다. 이성계가 친명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한 외교적 승리였다. 다만 명은 요동에 대한 조선의 야욕도 고려 때나 마찬가지로 경계했다.
명은 요동에서 조선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송환하라는 명을 끊임없이 내렸고, 조선의 말들을 끊임없이 사들였다. 특히 주전론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도 수차례 내렸다. 위기감을 느낀 정도전은 오히려 요동정벌을 서두르게 되었다.
정도전이 주도했던 요동정벌은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1398)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 무렵(1395) 명태조는 조선이 요동 정벌의 음모를 지니고 있다고 격노하여 조선 정벌을 거론하며 조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은 어쩌면 명과 벌일 전쟁이 부담이 되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이 무렵에는 명과 일전을 벌인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효종의 북벌론이 등장할 때까지 요동에 대한 점령 계획은 세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