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는 삼국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가? *..역........사..*

흔히 이병도가 고구려는 태조왕대, 백제는 고이왕대, 신라는 내물왕대에 개국했다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 근거가 뭔지 궁금하다. 일단 이병도의 한국사 개설서인 [국사대관]에는 그런 말이 없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그런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게 기술되어 있다.) 그럼 한번 살펴 보자.

고구려
신흥 고구려는 즉 소수맥의 일부락인 졸본(금 환인)에서 일어나 주의의 여러 부족을 차차 아울은 후 대수맥 지방인 국내위나암(금 집안현 통구)으로 옮기었던 것이다. 고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는 북부여의 망인 주몽(추모, 동명), 그 건국 연대는 서기전 37년, 국도를 옮긴 것은 제2대 유리왕 22년(서기 3년)이라 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대소 이수二水 유역의 제부락을 완전히 한덩어리에 뭉치어 중앙집권의 정치를 행하기는 제6대 태조왕(일운 국조왕) 때로부터가 아닐런가 한다. 그것은 왕의 호로 보아 그렇게 추측되는 소이다. 태조왕은 안으로 민정에 힘쓰고 밖으로 한의 현도, 요동에 자주 쳐들어가 그들을 괴롭게 하여 현도군으로 하여금 금 흥경 지방에서 다시 무순 지방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또 왕은 동으로 옥저(금 함흥 지방)를 정복하고 남으로 살수(금 청천강) 상류까지 지경을 널피어 차차 정복국가로서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국사대관 pp46-47)


보다시피 이병도는 고구려 건국 연대를 밝히고 있고, 다만 태조왕으로부터 정복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병도는 [참고] 난에 주몽에 대한 전설을 세가지 기록을 통해 검토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병도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떠튼 고구려의 왕실이 북부여에 기원을 갖고 왕업의 기초가 졸본부락에서 된 것은 의심없는 사실일 것이다. (국사대관 p48)

이병도의 이런 입장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오늘날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1956년의 학설이니 당연한 일이다. 가령 1976년판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을 볼까? 이기백은 이병도의 수제자로 재야사가들은 이병도의 학설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고 주장하지만, 뭐 결국 이들은 책 하나 변변히 읽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후 다시 현도군이 설치되었으나(BC 107) 이도 30여년 만에 만주로 쫓기어 갔다.(BC 75) 이 현도군의 이동은 곧 그 지방 세력의 반항에 의하였을 것이므로, 고구려의 연맹왕국 형성은 이미 이때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한국사신론, p37)

국사교과서는 어떨까? 1990년판 중학교 국사교과서를 보자.

고구려는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유역에 세운 국가였다(서기 전 37). (중학교 국사교과서 p21)

그러나 위와 같이 이병도의 학설이 오늘날 잘못 되었다는 것과는 별도로 이병도가 태조왕 때 고구려가 개국했다고 하거나, 그 이전의 기록은 다 거짓말이라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모함], 또는 [누명]이라고 한다. (이기백 이후 노태돈과 이종욱의 대립은 유명한 이야기가 되는데, 이 글에서의 주제는 아니므로 생략한다.)

그럼 이번에는 백제 편을 볼까?

백제
전설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는 온조라 하여 그는 고구려 시조 주몽이 졸본왕녀에게 낳은 아들인데, 주몽이 앞서 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가 와서 태자가 되매 (온조는) 형 비류와 함께 약간의 무리를 이끌고 남으로 와서 아우는 위례에 도읍을 정하고 형은 미추홀(금 인천)에 근거하였던 바, 얼마 아니하여 미추 부락은 위례에 합치고 말았다 한다. 온조가 과연 주몽의 아들이냐 아니냐 함은 별문제로 삼고 그가 남래南來 즉시에 건국하였다는 것은 도모지 믿기 어렵다. 다만 후일 건국의 기초인 부락을 건설하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 하여튼 일찍이 부여의 씨족을 중심으로 한 이민단이 북에서 남하하여, 혹은 위례 부락 혹은 미추 부락 혹은 기타에 분거하였다가 위례 부락의 일파가 유력하여 백제 왕실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부락이 발전하여 중앙집권의 국가 태세를 이루기까지에는 상당한 세월을 요하였을 것이다. 엄밀한 의미의 백제 건국은 상술한 바와 같이 한위韓魏 충돌 이후의 사실이니, 세계에 의하여 말하면 온조로부터 제8대 되는 고이왕 때 해당한다고 나는 본다. 고이왕 이전은 부락정치시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국사대관, pp 62-63)


위 대목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의 백제 건국]이다. 이병도는 그 이전의 백제를 [부락정치시대]라 불렀다. 이는 뒤에 김철준의 [부족국가론]으로 발전하는 것인데(김철준이 사용한 이 용어의 잘못은 이미 많은 지적이 있었으므로 생략한다), 이병도는 이 당시 국가형성론의 기초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이런 식으로 기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병도는 [국가]라는 것은 [중앙집권]이어야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 [중앙집권] 이전에도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이 문제를 좀더 따지면 부체제설 논쟁으로 흘러가는데 역시 이 문제는 생략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병도는 백제가 고구려계 유이민이 남하하여 건설했다는 것을 사실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이 백제 정치 세력의 중추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병도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해서는 분명한 불신을 전하고 있다. 위의 본문과 달리 [참고] 항복에서 그렇게 나온다. 그 결론 부분을 옮겨본다.

이상 4설 중 제1설, 제2설은 부여씨족단의 단장들이 각기 이주부락의 시조가 된 것을 반영시킨 전설인 듯하므로 백제 건국의 태조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제4의 구이仇台설은 중국의 사자가 백제에 와서 직접 견문한 바에 의한 것이으로, 그 국도에는 시조 구이묘가 있어 매년 네 번씩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는 가장 정확한 사료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중략) 구이는 고이의 이음異音으로 동일인에 틀림없을 것이다. 실제 고이왕 때라야 엄밀한 의미의 건국이 가능하므로, 이를 백제의 시조, 즉 태조로 인정함에 하등 불가함이 없는 까닭이다. 고이왕 이전의 세계는 추존일 것이다. (국사대관 p64)

문제는 저 추존이라는 말이겠다. 이성계는 조선의 국왕이 된 후 자기 조상들을 추존했다. 추존이라는 말이 거짓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물론 조선시대의 일과 삼국시대의 일은 동일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추존이라는 말이 거짓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 또한 오늘날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다. 오늘날 역사학자 논문 중에 고이왕 이전 세계가 추존에 의한 것이라고 서술하는 것이 있으면 제시해 주기 바란다. (천관우는 이미 1976년 논문에서 구이(구태)와 고이는 별개 인물이라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재야사가들의 주장에 분명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병도의 생각을 보면 고이왕 때 백제가 생겨났다고 믿었던 것 같다. 즉, 고이왕이 선대 조상을 추존했다면 그 선대는 왕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되며, 그것은 즉 백제가 고이왕 대 개국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도가 온조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 두기 바란다. 이병도는 온조가 백제의 모태가 되는 위례부락의 창시자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또한 고이왕의 추존에 대해서도 [~일 것이다]의 추측성 발언이라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런 주장은 오늘날에는 먹히지 않는다. 역시 중학교 국사 교과서를 보자.

온조가 세운 백제는 한강 유역에 터를 잡고 출발하였다(서기전 18). 한강 유역은 자연 환경이 유리하였고, 여러 지역의 문화가 합쳐지는 곳이어서 나라의 발전이 빨랐다. (중학교 국사교과서 p29)

이제 신라를 살펴보자.

신라
군장의 선거는 촌장회의에서 - 현지자 혹은 연고자年高者를 자격으로 - 정하던 것이어니와 혁거세의 즉위는 지금으로부터 2천십여년 전(서기전 57년)이라 한다. 또 전설에 의하면 혁거세의 뒤에는 그 아들 남해 차차웅이 서고 남해의 뒤에는 아들 유리이사금이 서고 유리의 뒤에는 남해의 사위인 탈해이사금이 서고 그 후에는 유리의 자손(박씨와 탈해의 자손(석씨)이 번갈아 계승하다가 제11대 조분(석씨) 이사금의 사위인 미추(김씨)가 제12대 첨해(석씨)이사금의 뒤를 이으므로부터는 비로소 김씨의 군장이 생기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신라의 왕통이 대대 김씨로 연잇게 되기와 또 주위의 제부족을 완전결속하여 중앙집권의 국가형태를 갖추게 되기는 아직도 3~4대 후의 일이었다. (국사대관 p66)


이병도는 신라의 이야기를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이 시기의 [삼국사기] 기록을 신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신라 건국이 내물왕 때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글을 보자.

원시국가로서 지지한 걸음을 걸어온 신라가 부근의 군제소국을 병합하여 중앙집권의 정치로 발전하기는 제17대 내물왕 때로부터니, 삼국유사 왕력편에 의하면 이때 왕호도 마립간의 칭을 시용始用하였던 것이다(이전의 왕호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중략) 이런 칭호 사용으로 보드라도 신라의 국가정치의 태세가 내물왕 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국사대관 p72)

내물왕 이전에 신라가 없었다거나, 내물왕이 개국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없다는 점을 주목하라. 이번에도 중학교 국사교과서를 참조해 보자.

신라는 일찍이 경주 평야에서 박혁거세에 의해 세워졌으나(서기전 57), 오랫동안 소백 산맥에 막혀 외부와의 접촉 없이 성장하였다. 신라가 중앙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의 내물왕 때였다. (중학교 국사교과서 p29)

결국 위와 같은 예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병도가 백제의 경우에만 충분히 고이왕이 개국했다고 믿을만하게 기술했을 뿐 고구려와 신라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며, 엄밀히 말하자면, 고이왕 이전 시대를 위례부락의 부락정치시대라고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견해는 오늘날에는 먹히지 않는 낡은 학설이라는 점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재야사가들은 [중앙집권국가]라는 말과 [국가]를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국사 시간에조차 잠이나 자는 것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만다.

이병도가 일본에 대해서 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포스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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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을파소 2007/10/03 13:49 # 답글

    저들이 과연 뭘 읽고나 주장하는 것인지가 의심스럽습니다.
  • 초록불 2007/10/03 13:52 # 답글

    을파소님 / 환빠들의 주장은 제일 밑바닥에 있는 기초부터 깨부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 講壇走狗 2007/10/03 14:01 # 답글

    전 이병도의 仇台=古爾만 보고 GG쳐버렸습니다. 아 이런 환타지한 논리로 국사학을 했으니, 언어학적 방법에 대한 학자들의 반감이 만만찮은 것도 이해되더라구요.
  • 초록불 2007/10/03 14:05 # 답글

    講壇走狗님 / 단지 발음의 유사성만으로 추정한 것인데, 당시 학문으로는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보다는 꿈에서 중원고구려비의 연대를 보았노라고 주장한 데서 KO 되었습니다.
  • 우아한냉혹 2007/10/03 14:52 # 답글

    풍납토성의 탄소연대로 이병도의 고이왕때 기틀을 잡았다는 설은 깨진게 아니었나요? -ㅅ-a

    환빠는 배척합니다만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 확실시 되지 않나요
  • 초록불 2007/10/03 15:44 # 답글

    우아한냉혹님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학계의 의견이 통일된 것은 아닙니다. 이 글에서는 그야말로 통설에 기초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환빠들은 조금만 어려운 이야기를 해도 주제가 뭔지 잊어버리거든요...^^;;
  • 서군시언 2007/10/03 18:02 # 답글

    국사사관도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대학 도서관에는 윤내현씨 책밖에 없네요. 일본편 기대하겠습니다.
  • 초록불 2007/10/03 18:47 # 답글

    서군시언님 / 사실 웬만한 도서관에서도 이병도 책들은 찾아보기도 힘들죠. 이런 것만 보아도 재야들의 헛소리 수준이 짐작이 갑니다.
  • dunkbear 2007/10/03 20:29 # 답글

    그래도 저는 환빠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덕분에 초록불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좋은 글들을 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죠... ㅎㅎㅎ
  • 초록불 2007/10/03 21:38 # 답글

    dunkbear님 / 그런 면에서 어쩌면 저도 환빠에게 감사해야할지도... 그들이 아니었다면 역사공부를 계속 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간에 좀더 생산적인 글들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죠. 가령 위화도 회군 문제를 써보려 하니, 확실히 어려운 문제라 시간이 안 나는군요. 그냥 4군 6진으로 뛰어넘을지도... (이게 다 환빠 때문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7/10/03 22:12 # 답글

    ㅋㅋ '모든 것은 노통 탓'을 능가할 최강의 신조어로군요. 모든 것은 환빠 탓.
  • 나비의바람 2007/10/04 15:10 # 답글


    매번 이병도와 환빠들에 대해서 보다보면 예전에 본 창조론을 우기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공통점은 둘 다 관련 학계에서 얼마나 많은 논의가 나온줄 모르고 '과거'에 나온 일부 대표 학설(예를 들자면 이병도와 다윈)만을 가지고 전체 학계를 매도한다는 것이죠.
  • 초록불 2007/10/05 01:48 # 답글

    나비의바람님 / 적절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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