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9성의 수축과 여진의 반격
고려가 새로운 땅에 세운 성의 이름은 모두 상서로운 글자로 만들어지고, 현지 지명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은 이름이다. 이후 만들어진 성들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네 개의 영토는 고려인들로서는 처음 가본 땅이었던 것 같다.
윤관이 개척한 땅은 북으로 궁한령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곳에 길주성을 쌓았다고 했다. 즉 윤관 9성의 최북방은 길주성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당대 사료로 길주에서 병마판관으로 종사한 허재의 묘지명에도
당시 9성 중에서 오직 길주가 오랑캐 땅과 가장 가까웠다.
吉州其時九城中 唯吉最近虜境
이라는 말이 나온다. (허재의 활약은 뒤에 다시 나온다.) 또한 고려가 9성을 돌려주고 철수할 때도 길주성부터 철수한다. 이것 역시 길주성이 최북단에 있었다는 증거다. (철수 순서는 길주, 숭녕진, 통태진, 영주, 복주, 진양진, 함주-웅주, 선화진의 순서였다. 이중 함주와 웅주는 병렬로 같이 논해진 것으로 나는 웅주가 더 멀리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지리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웅주와 영주는 나중에 길주에 합해졌다고 나온다. 즉 길주-웅주-영주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성이다.)
고려군은 애초에 길주, 즉 궁한리까지 진군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고려사절요]에는 “궁한리 밖은 산이 잇달아 벽처럼 서 있는데 오직 작은 길 하나만 겨우 통하므로 여기에 관성을 세우면 여진에 대한 근심이 영구히 없어질 것이라고 했으나 막상 이 땅을 빼앗고 나니 수륙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듣던 바와 달랐다”는 말이 나온다. (예종 3년 5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중요하다. [고려사] 윤관 열전과 함께 보도록 하자.
이위伊位 경계상에 산이 연달아 있으니 동해안으로부터 굴기하여 우리 북쪽 변경에 이르러서는 험준하고 황폐하여 사람과 말이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한 지름길이 있어 속칭 병목[甁項]이라 하였으니 그 출입이 한 구멍뿐임을 말함이다. 공을 탐하는 자가 간간히 의론을 드리기를 그 길을 막으면 적인(狄人)의 길이 끊어질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내어 평정하자고 하였다.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종합해 보면 고려인들은 이위동에서 궁한리까지, 함흥 인근부터 길주까지 사이에는 북방과 통하는 통로가 없었던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위동은 여진 정벌전 개전 초기에 최홍정 등이 점령한 곳으로 당연히 천리장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 된다.) 윤관이 길주까지 진군해야 했던 이유는, 길주에 도달하여 [병목]을 제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추측이지만 윤관이 비석을 세워 경계를 표시한 곳도 이 [병목]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병목]은 윤관이 비를 세웠다는 [선춘령先春嶺]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남쪽에[병목]을 지키는 공험진公嶮鎭이 있었을 것이다. 윤관에게는 이 병목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물론 여진(완안부)도 고려군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고려의 기만 전술에 말려 초전박살이 난 우야소는 고려와 화친을 할 것인지, 항전을 할 것인지의 기로에 섰다. 모두들 화친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고려도 고려지만 함부로 군사를 일으켰다가 요나라로부터 책망을 들을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때 우야소의 아우 아골타阿骨朶만 반대하고 나섰다.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갈라전을 잃는 것은 물론이요, 모든 부족들이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적에게 영토를 빼앗기는 지도자를 누가 따를 것인가? 아골타의 발언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이 말에 힘입은 우야소는 이복동생 장군 오싸이幹塞를 보내 고려군과 싸우게 했다. 아마도 윤관과 오싸이는 바로 문제의 [병목]에서 만났을 지도 모른다.
1월 14일, 윤관은 오연총과 더불어 8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목으로 가다가 여진군의 복병을 만나고 만다. 기습으로 고려군은 순식간에 와해되고 부원수 오연총마저 화살에 맞고 말았다. 윤관의 주위에는 불과 1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 척준경이 윤관을 구원하기 위해 나섰다. 아마도 척준경은 후위에 있다가 여진군의 포위망 밖에 남았던 모양이다. 급히 용맹한 군사 십여 명을 모아 돌파를 감행하고자 했다.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이 형을 말렸다.
“적의 진이 견고하여 가히 깨뜨리지 못할 것이니 헛되이 죽으면 무엇이 유익하리까.”
그러나 그런 말로는 척준경의 결심을 허물 수 없었다.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라 나는 몸으로써 나라에 허락하였으니 의리상 가히 그만 둘 수 없다.”
척준경은 본래 무뢰배 출신이었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의리가 중요하다. 윤관이 자신을 믿어준 이상 윤관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각오가 척준경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척준경은 무서운 무용으로 적의 후방을 돌파했다. 척준경의 활약으로 적진은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물론 척준경과 용사 십여 명의 힘만으로 윤관을 구원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천만다행으로 영주에서 구원군이 왔다. 최홍정과 이관진이 달려와 윤관을 구출하고 여진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고려군은 해가 진 뒤에야 영주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죽음에서 벗어난 윤관은 척준경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로부터 내가 마땅히 너를 보기를 아들과 같이 할 것이니 너는 마땅히 나를 보기를 아비와 같이 하라.”
척준경은 이 날의 공으로 정7품에 올랐다.
오싸이는 초반에 고려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했고 갈라전의 여진족은 혼란에 빠져 들었다. 완안부는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고려는 그 땅에 성을 쌓았다. 고려가 영구적으로 영토를 점유하려는 의사임이 분명했다. 여진족의 일부는 고려에 투항했다. 여진 추장 아로환阿老喚이 항복했고 문관의 좌군에 투항한 여진 남녀도 많았다.
우야소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은 더 이상 두고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골타의 말대로 부족들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여진군은 윤관이 주둔하고 있는 영주성을 향했다.
고려사 지리지를 따르면 영주성은 고려가 점령한 땅의 서쪽 경계다. 이곳은 병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었을 것이므로 병목을 놓고 길주와 마주보는 곳이었을지 모른다. 영주를 보통 명천에 비정하는데, 그렇게 비정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그곳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고려사]에 전하는, 임언이 쓴 벽비에 서로는 개마에 이르렀다고 했으므로 영주는 마땅히 함북의 험지 중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1월 26일 여진군 2만이 영주성을 포위했다. 이는 영주성 내의 병력보다 많은 것이었다. 오연총도 아직 부상에서 회복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윤관은 병마영할 임언과 함께 적병을 바라보고 놀라 수성을 전략으로 세웠다.
그러나 척준경이 이에 반대했다.
“적의 포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엄해질 것인데, 구원병이 오지 않고 양식마저 떨어지면 어찌 하겠습니까?”
그러나 반대가 가라앉지 않자 척준경이 다시 말했다.
“전날 소장이 싸워 이긴 것을 보지 못한 분들이 많은데, 오늘 소장이 사력을 다해 싸울 것이니 망루에 올라 구경하십시오.”
기어이 성을 나가 결사대와 함께 적진을 깨뜨리고 19명을 목 베어 돌아왔다. 적군은 크게 놀라 물러가고 말았다. 혼자 힘으로 2만 대군을 물러나게 하였으니 척준경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다.
여진의 공세를 막으려면 병목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사방이 통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주요 통로인 병목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급히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게 되었다. 더불어 이때에 함흥 지방인 함주에도 성을 쌓았다. 이로써 9성 중 6성이 완성되었다. 1108년 2월의 일이다.
윤관은 영주에서 중성대도독부中城大都督府(웅주로 추즉하고 있다)로 옮겨간 뒤 각 성을 지키는 장수들을 소집했다. 이때 공험진 성을 지키던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王字之가 여진족 추장 사현史現에게 기습을 당해 말을 잃고 위기에 빠졌다.
왕자지(이분 이름이 좀...)의 위기를 알고 달려온 장수는 이번에도 척준경. 척준경은 여진족을 쫓아내고 그들의 말을 빼앗아서 왕자지에게 건네 주었다.
2월 11일 여진군 수만 명이 웅주성을 포위했다. 이때 윤관, 오연총 등은 이곳에 없었던 것 같다. 최홍정이 지휘관이었다. 최홍정은 여진군이 웅주성을 포위하자 일시에 4대문을 열고 적진을 기습했다. 사면에서 고려군이 쏟아져 나오자 여진군은 당황하고 말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최홍정의 주 목표는 적의 보급 부대였던 것 같다. 이날 고려군은 병거兵車 50여 량, 중차中車 200량, 말 40필에다가 병장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노획했다.
그러나 그런 타격에도 불구하고 여진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웅주성은 영주-길주-공험진과 정주-함주를 잇는 요지로 이곳을 끊으면 고려의 점령지는 중간이 잘리는 결과를 빚을 것이었다. 최홍정은 척준경을 불러 구원군을 불러올 것을 요청한다. 수만 명이 지키고 있는 성을 빠져나가 구원군을 부르러 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지만 웅주성의 상황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점점 식량은 줄어들고 있었고 구원병은 보이지 않았다. 척준경은 달이 어두운 날을 택해 낡은 군졸 옷을 입고 밧줄로 성벽을 타고 내려가 적진을 빠져나갔다.
정주에 도착한 척준경은 구원병을 직접 거느리고 통태진通泰鎭을 거쳐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에 이르기까지 포진해 있던 적병을 모조리 물리쳤다. 구원받은 웅주성의 군민은 척준경의 활약에 모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여진군의 주력을 물리친 윤관은 공험진 너머에 있는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고려와 여진의 경계를 삼았다. 또한 3월에는 의주宜州·통태通泰·평융平戎의 세 성을 더 쌓았다. 이로써 9성이 모두 만들어졌다.
성이 있다 해도 백성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는 법. 윤관은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사민하여 성을 채우고자 했다. 문제는 백성들을 보호할 외성이 없는 점이었다. 윤관은 내성을 헐어서 외성 짓는데 이용하라고 했다. 최단시간내 외성을 짓기 위한 방책이었으나 중군병마사 김한충이 이 계획은 무모하다고 반대했다. 외성은 방어가 힘들다. 더구나 내성을 헐어서 외성을 짓고 있다가 여진군이 몰려들면 방어할 수도 없이 성이 함락되게 된다. 김한충의 고언이 받아들여졌는지는 불명확하다. 이때 사민된 백성은 [고려사] 지리지를 따르면 총 6만 9천여호에 달한다.
윤관은 4월 9일 개성에 귀환했고, 국왕 예종에게 승전의 보고를 올렸다. 예종은 사당에 승전을 고하고 윤관, 오연총과 함께 밤새 담소를 나눴다. (계속)
고려가 새로운 땅에 세운 성의 이름은 모두 상서로운 글자로 만들어지고, 현지 지명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은 이름이다. 이후 만들어진 성들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네 개의 영토는 고려인들로서는 처음 가본 땅이었던 것 같다.
윤관이 개척한 땅은 북으로 궁한령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곳에 길주성을 쌓았다고 했다. 즉 윤관 9성의 최북방은 길주성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당대 사료로 길주에서 병마판관으로 종사한 허재의 묘지명에도
당시 9성 중에서 오직 길주가 오랑캐 땅과 가장 가까웠다.
吉州其時九城中 唯吉最近虜境
이라는 말이 나온다. (허재의 활약은 뒤에 다시 나온다.) 또한 고려가 9성을 돌려주고 철수할 때도 길주성부터 철수한다. 이것 역시 길주성이 최북단에 있었다는 증거다. (철수 순서는 길주, 숭녕진, 통태진, 영주, 복주, 진양진, 함주-웅주, 선화진의 순서였다. 이중 함주와 웅주는 병렬로 같이 논해진 것으로 나는 웅주가 더 멀리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지리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웅주와 영주는 나중에 길주에 합해졌다고 나온다. 즉 길주-웅주-영주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성이다.)
고려군은 애초에 길주, 즉 궁한리까지 진군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고려사절요]에는 “궁한리 밖은 산이 잇달아 벽처럼 서 있는데 오직 작은 길 하나만 겨우 통하므로 여기에 관성을 세우면 여진에 대한 근심이 영구히 없어질 것이라고 했으나 막상 이 땅을 빼앗고 나니 수륙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듣던 바와 달랐다”는 말이 나온다. (예종 3년 5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중요하다. [고려사] 윤관 열전과 함께 보도록 하자.
이위伊位 경계상에 산이 연달아 있으니 동해안으로부터 굴기하여 우리 북쪽 변경에 이르러서는 험준하고 황폐하여 사람과 말이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한 지름길이 있어 속칭 병목[甁項]이라 하였으니 그 출입이 한 구멍뿐임을 말함이다. 공을 탐하는 자가 간간히 의론을 드리기를 그 길을 막으면 적인(狄人)의 길이 끊어질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내어 평정하자고 하였다.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종합해 보면 고려인들은 이위동에서 궁한리까지, 함흥 인근부터 길주까지 사이에는 북방과 통하는 통로가 없었던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위동은 여진 정벌전 개전 초기에 최홍정 등이 점령한 곳으로 당연히 천리장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 된다.) 윤관이 길주까지 진군해야 했던 이유는, 길주에 도달하여 [병목]을 제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추측이지만 윤관이 비석을 세워 경계를 표시한 곳도 이 [병목]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병목]은 윤관이 비를 세웠다는 [선춘령先春嶺]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남쪽에[병목]을 지키는 공험진公嶮鎭이 있었을 것이다. 윤관에게는 이 병목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물론 여진(완안부)도 고려군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고려의 기만 전술에 말려 초전박살이 난 우야소는 고려와 화친을 할 것인지, 항전을 할 것인지의 기로에 섰다. 모두들 화친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고려도 고려지만 함부로 군사를 일으켰다가 요나라로부터 책망을 들을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때 우야소의 아우 아골타阿骨朶만 반대하고 나섰다.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갈라전을 잃는 것은 물론이요, 모든 부족들이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적에게 영토를 빼앗기는 지도자를 누가 따를 것인가? 아골타의 발언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이 말에 힘입은 우야소는 이복동생 장군 오싸이幹塞를 보내 고려군과 싸우게 했다. 아마도 윤관과 오싸이는 바로 문제의 [병목]에서 만났을 지도 모른다.
1월 14일, 윤관은 오연총과 더불어 8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목으로 가다가 여진군의 복병을 만나고 만다. 기습으로 고려군은 순식간에 와해되고 부원수 오연총마저 화살에 맞고 말았다. 윤관의 주위에는 불과 1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이때 척준경이 윤관을 구원하기 위해 나섰다. 아마도 척준경은 후위에 있다가 여진군의 포위망 밖에 남았던 모양이다. 급히 용맹한 군사 십여 명을 모아 돌파를 감행하고자 했다.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이 형을 말렸다.
“적의 진이 견고하여 가히 깨뜨리지 못할 것이니 헛되이 죽으면 무엇이 유익하리까.”
그러나 그런 말로는 척준경의 결심을 허물 수 없었다.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라 나는 몸으로써 나라에 허락하였으니 의리상 가히 그만 둘 수 없다.”
척준경은 본래 무뢰배 출신이었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의리가 중요하다. 윤관이 자신을 믿어준 이상 윤관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각오가 척준경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척준경은 무서운 무용으로 적의 후방을 돌파했다. 척준경의 활약으로 적진은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물론 척준경과 용사 십여 명의 힘만으로 윤관을 구원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천만다행으로 영주에서 구원군이 왔다. 최홍정과 이관진이 달려와 윤관을 구출하고 여진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고려군은 해가 진 뒤에야 영주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죽음에서 벗어난 윤관은 척준경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로부터 내가 마땅히 너를 보기를 아들과 같이 할 것이니 너는 마땅히 나를 보기를 아비와 같이 하라.”
척준경은 이 날의 공으로 정7품에 올랐다.
오싸이는 초반에 고려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했고 갈라전의 여진족은 혼란에 빠져 들었다. 완안부는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고려는 그 땅에 성을 쌓았다. 고려가 영구적으로 영토를 점유하려는 의사임이 분명했다. 여진족의 일부는 고려에 투항했다. 여진 추장 아로환阿老喚이 항복했고 문관의 좌군에 투항한 여진 남녀도 많았다.
우야소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은 더 이상 두고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골타의 말대로 부족들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여진군은 윤관이 주둔하고 있는 영주성을 향했다.
고려사 지리지를 따르면 영주성은 고려가 점령한 땅의 서쪽 경계다. 이곳은 병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었을 것이므로 병목을 놓고 길주와 마주보는 곳이었을지 모른다. 영주를 보통 명천에 비정하는데, 그렇게 비정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그곳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고려사]에 전하는, 임언이 쓴 벽비에 서로는 개마에 이르렀다고 했으므로 영주는 마땅히 함북의 험지 중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1월 26일 여진군 2만이 영주성을 포위했다. 이는 영주성 내의 병력보다 많은 것이었다. 오연총도 아직 부상에서 회복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윤관은 병마영할 임언과 함께 적병을 바라보고 놀라 수성을 전략으로 세웠다.
그러나 척준경이 이에 반대했다.
“적의 포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엄해질 것인데, 구원병이 오지 않고 양식마저 떨어지면 어찌 하겠습니까?”
그러나 반대가 가라앉지 않자 척준경이 다시 말했다.
“전날 소장이 싸워 이긴 것을 보지 못한 분들이 많은데, 오늘 소장이 사력을 다해 싸울 것이니 망루에 올라 구경하십시오.”
기어이 성을 나가 결사대와 함께 적진을 깨뜨리고 19명을 목 베어 돌아왔다. 적군은 크게 놀라 물러가고 말았다. 혼자 힘으로 2만 대군을 물러나게 하였으니 척준경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다.
여진의 공세를 막으려면 병목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사방이 통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주요 통로인 병목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급히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게 되었다. 더불어 이때에 함흥 지방인 함주에도 성을 쌓았다. 이로써 9성 중 6성이 완성되었다. 1108년 2월의 일이다.
윤관은 영주에서 중성대도독부中城大都督府(웅주로 추즉하고 있다)로 옮겨간 뒤 각 성을 지키는 장수들을 소집했다. 이때 공험진 성을 지키던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王字之가 여진족 추장 사현史現에게 기습을 당해 말을 잃고 위기에 빠졌다.
왕자지(이분 이름이 좀...)의 위기를 알고 달려온 장수는 이번에도 척준경. 척준경은 여진족을 쫓아내고 그들의 말을 빼앗아서 왕자지에게 건네 주었다.
2월 11일 여진군 수만 명이 웅주성을 포위했다. 이때 윤관, 오연총 등은 이곳에 없었던 것 같다. 최홍정이 지휘관이었다. 최홍정은 여진군이 웅주성을 포위하자 일시에 4대문을 열고 적진을 기습했다. 사면에서 고려군이 쏟아져 나오자 여진군은 당황하고 말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최홍정의 주 목표는 적의 보급 부대였던 것 같다. 이날 고려군은 병거兵車 50여 량, 중차中車 200량, 말 40필에다가 병장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노획했다.
그러나 그런 타격에도 불구하고 여진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웅주성은 영주-길주-공험진과 정주-함주를 잇는 요지로 이곳을 끊으면 고려의 점령지는 중간이 잘리는 결과를 빚을 것이었다. 최홍정은 척준경을 불러 구원군을 불러올 것을 요청한다. 수만 명이 지키고 있는 성을 빠져나가 구원군을 부르러 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지만 웅주성의 상황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점점 식량은 줄어들고 있었고 구원병은 보이지 않았다. 척준경은 달이 어두운 날을 택해 낡은 군졸 옷을 입고 밧줄로 성벽을 타고 내려가 적진을 빠져나갔다.
정주에 도착한 척준경은 구원병을 직접 거느리고 통태진通泰鎭을 거쳐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에 이르기까지 포진해 있던 적병을 모조리 물리쳤다. 구원받은 웅주성의 군민은 척준경의 활약에 모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여진군의 주력을 물리친 윤관은 공험진 너머에 있는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고려와 여진의 경계를 삼았다. 또한 3월에는 의주宜州·통태通泰·평융平戎의 세 성을 더 쌓았다. 이로써 9성이 모두 만들어졌다.
성이 있다 해도 백성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는 법. 윤관은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사민하여 성을 채우고자 했다. 문제는 백성들을 보호할 외성이 없는 점이었다. 윤관은 내성을 헐어서 외성 짓는데 이용하라고 했다. 최단시간내 외성을 짓기 위한 방책이었으나 중군병마사 김한충이 이 계획은 무모하다고 반대했다. 외성은 방어가 힘들다. 더구나 내성을 헐어서 외성을 짓고 있다가 여진군이 몰려들면 방어할 수도 없이 성이 함락되게 된다. 김한충의 고언이 받아들여졌는지는 불명확하다. 이때 사민된 백성은 [고려사] 지리지를 따르면 총 6만 9천여호에 달한다.
윤관은 4월 9일 개성에 귀환했고, 국왕 예종에게 승전의 보고를 올렸다. 예종은 사당에 승전을 고하고 윤관, 오연총과 함께 밤새 담소를 나눴다. (계속)







덧글
서군시언 2007/11/26 10:26 # 답글
1여명이라는 표현도 있나요? 10여명이 아닌지...이번 화는 완전히 척준경의 독무대이군요.
초록불 2007/11/26 10:34 # 답글
서군시언님 / 오타군요...^^;; 수정했습니다.
을파소 2007/11/26 11:05 # 답글
역시 척준경은 소드마스터입니다.
베리타스 2007/11/26 11:58 # 답글
뭡니까....정말 장비저리가라군요. 조운과도 비교할수 있으려나...10여명의 결사대로 윤관을 구하러 가다니.... 저건 괴물입니다 괴물
초록불 2007/11/26 12:21 # 답글
베리타스님 / 정말 멋지지요.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서 생각해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정말 언젠가는 꼭 한번 멋지게 형상화해보고 싶은 장면입니다.
개멍 2007/11/26 12:25 # 답글
록불님이 글을 쓰고 최훈님이 그림을 그린 "여진정벌기" 가 나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헛꿈일라나요? ㅠ.ㅠ
시리우스 2007/11/26 12:37 # 답글
여진정벌기를 읽은 소감은.... "척준경 영웅전"이라는 느낌이.. 대단하군요 ㅋ
초록불 2007/11/26 12:52 # 답글
개멍님 / 최훈님과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만화는 좋아합니다만...시리우스님 / 척준경의 이후 이야기를 포스팅해야 한다는 압박이 생깁니다...^^;;
슈타인호프 2007/11/26 13:45 # 답글
아 제가 척준경의 끝이 안 좋았다는 이야기를 한 건...개심해서 다시 왕의 편에 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뒤에 결국 귀양가서 생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최후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거든요. 연재는 잘 보고 있습니다^^;
나아가는자 2007/11/26 13:47 # 답글
척준경은...그냥 무장으로 남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정계의 음모에 휘둘리는 바람에... 어쨌든 그 힘이 외적과 싸우는데 쓰여질 때에는 정말 공을 많이 세운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록불 2007/11/26 13:49 # 답글
슈타인호프님 / 그렇죠? 소설가의 재주는 대개 그런데서 발휘되는 거잖아요...^^;;
아무로 2007/11/26 14:21 # 답글
소드마스터 척준경...--b
windxellos 2007/11/26 16:11 # 답글
척준경... 확실히 개인적으로도 언젠가는 한 번 조명해 보고 싶은 인물입니다. 다만 호프님 말씀대로끝이 좀 좋지 않았던 것이 아쉬웠지요. 결국 국왕 편을 들었는데도 돌아온 것이 '팽' 이었으니...(먼산)
아롱쿠스 2007/11/26 18:15 # 답글
정지상, 나쁜넘...
초록불 2007/11/26 18:29 # 답글
아롱쿠스님 / 척준경을 내치라는 상소 올린 것 때문에요?
루드라 2007/11/26 20:22 # 답글
삼국지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군요. 감동했습니다. ^^
아롱쿠스 2007/11/27 09:47 # 답글
초록불이여/ 그것만은 아닙니다. 정지상을 보면 조선시대 명분과 의리에 집착하는 성리학자들을 보는 듯 해서요.
총천연색 2007/11/28 11:43 # 답글
9성의 성립 배경을 얼추 알게 되어 기쁘네요.그나저나 척준경님은 우와. -0-
앨런비 2007/12/07 14:21 # 답글
왕자지의 아명은 왕소중이라죠 낄낄출신은 내시부 낄낄낄
물론 고려의 내시가 환관은 아니었지만; 참 경력이나 이름이나 멋진 분입니다-_-
예전에 이것가지고 글을 한번 써본일도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