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여진을 정벌하다 - 4 (마지막) *..역........사..*



5. 끝나지 않은 전쟁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윤관이 개경으로 가고 있던 중인 4월 8일 도지병마령할사都知兵馬鈴轄使 임언과 도순검사都巡檢使 최홍정(그동안 승진!)이 지키고 있던 웅주성이 다시 여진군에게 포위 당했다.

지금까지 고려군은 포위를 당한 경우 기습적으로 뛰어나가 여진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었다. 웅주성에서도 똑같은 작전을 펼쳤으나 너무 낡은 패턴이었다. 여진군도 이제는 대비하고 있었기에 고려군은 오히려 큰 타격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위기에 처한 고려군은 중앙정부에 구원을 요청했다.

구원 소식을 들은 예종은 4월 22일 오연총에게 부월을 주어 다시 보내야했다. 오연총은 정병 1만을 네 부대로 나누어 웅주 구원에 나섰다. 삼군과 수군으로 나누어서 모두 4군이었다. 부장으로는 문관, 왕자지, 김준金晙이 따라갔다.

여진군은 웅주로 오는 길목인 오음지烏音志·사오沙烏의 두 고개를 점거하고 원군의 행로를 저지하고자 했다. 북방의 험한 고갯길을 막고 선 여진군은 원래부터 이름난 명사수들이다. 그 길을 빼앗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오연총의 고려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립된 동료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앞다투어 뛰어올랐다. 고려군은 여진군 291급을 베고 성책을 불태워버렸다.

그대로 웅중성까지 달려간 오연총 군은 목책을 쌓고 저항하는 여진군을 깔끔하게 무찔러 버렸다. 27일간의 농성으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고려군은 드디어 구원받을 수 있었다.

오연총이 웅주성까지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12일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한양에서 길주까지 걸리는 날수가 대략 16일이다. (개성에서 출발하면 하루는 줄일 수 있겠다.) 군대의 행군이 일반인의 이동 속도보다 빠르다고 볼 수는 없는데, 오연총의 군대가 불과 12일 만에 (그것도 전투를 치르면서) 웅주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신속하게 이동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웅주성을 더 북방 지역으로 잡기 어려운 이유기도 하다. (웅주가 함북 경성 쯤에 있다면 과연 12일 만에 갈 수 있었을까?)

웅주성의 위기를 풀었다고는 하나 동북방 여진의 소요는 잠들지 않았다. 예종은 윤관에게 다시 여진 정벌을 명했다. 이때 여진족의 전술에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본래 처음 고려군의 상대는 전회에 나온 것처럼 오싸이였다. 오싸이는 초창기에 고려군 공격에 계속 실패했다. [금사] 열전에는 오싸이가 부대를 열로 쪼개 갈마들듯이 오가며 싸워 고려군을 대파했다고 나온다. 즉 게릴라전으로 소모전을 벌여 고려군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일본군을 상대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전략은 분명 사용된 것이겠지만 초기에 행했던 일은 아니다.

난처한 처지에 놓인 오싸이를 구해 준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병이 급하게 되어 오싸이는 완안부로 돌아가야 했다. 오싸이의 뒤를 이어 지휘관이 된 사람은 오로斡魯(오싸이의 숙부)였다. 오로는 9성을 상대하기 위해 자기들도 성을 쌓았다. 부대에 복귀한 오싸이도 오로의 전술을 유지했다. 보급기지를 가진 게릴라전이 벌어진 셈이다. 오싸이의 게릴라 전술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여진군의 공격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아도한阿徒罕이라는 여진 장수는 30인의 부하를 거느리고 고려군의 선박이 정박해 있는 섬에 침입하여 배들을 불지르기도 했다. 이것은 고려 측 기록에는 없지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9성은 해안가를 따라 건설되었고,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은 배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도한은 고려군의 기동력을 빼앗기 위해 모험을 했던 것이라 짐작된다. 여진군 장수 중 가장 무용담이 알려진 자는 혼탄渾坦이라는 장수였다.

혼탄은 석적환과 함께 활동한 장수였다. 혼탄은 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고려군과 만나 접전을 벌였다. 혼탄이 창으로 고려 장수를 쓰러뜨리자 고려군이 물러났다. 혼탄은 석적환과 만나 병사를 합친 뒤 아들 아리를 시켜 고려 성을 공격하게 했고, 두 개의 성을 빼앗았다. 고려군이 구원을 왔으나 혼탄이 요지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혼탄은 물러나는 고려군을 추격하여 섬멸했다. 혼탄은 석적환과 같이 고려군 5만을 만나 패퇴시키고, 다시 고려군 7만과 싸워 물리쳤다. 석적환은 “그대가 오늘 적을 세 번 만나 세 번 다 승리했으니 이를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라고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런 패전은 고려 측 기록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척준경과 왕자지도 부지런히 여진 게릴라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고려군도 피해가 적지 않았다. 고급 장교들이 전사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 와중에 전쟁이 길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긴장감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년째가 된 1109년(예종4년) 2월, 예종은 크게 잔치를 벌이고 대신들과 춤추며 놀았다. 부아가 난 임언은 취한 척하고는 그 자리를 물러나며 뼈있는 말을 남겼다.

“동쪽 변경邊境이 아직 편안하지 못한데도 어찌 춤출 수 있을까.”

여진은 화전 양면을 구사하고 있었다. 고려 조정 안에서는 벌써 9성을 돌려주고 화친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1109년 5월 길주가 여진의 대군에 의해 포위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예종은 대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윤관에게는 종묘 사직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또한 오연총에게 구원군을 이끌고 길주로 향하게 했다. 길주는 이미 포위된지 수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여진군은 길주성 근처에 쌓은 자기들 성을 기반으로 길주성 인근 10리 지점에 6개의 목책을 만들고 길주성을 포위한 상태였다. 길주성의 책임자는 병마부사 이관진과 병마판관 허재였다. 두 사람 모두 대여진전쟁 초기부터 싸웠던 백전노장이었다. 허재는 이때 48세였다.

여진군의 공격은 가파르고 길주성은 튼튼한 상태가 아니었다. 내성을 허물어 외성을 쌓은 대가를 치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급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오연총은 길주성 구원을 위해 숨돌릴 틈도 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공험진 근처에 이르렀을 때, 원군을 대비하고 있던 여진군의 매복에 당하고 말았다.

백전노장에 신중함으로 이름 높았던 오연총이 어쩌다 급습을 당했을까? 고려군은 회복불능일 정도로 타격을 받아 여러 성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길주성 구원은 날라간 것이다. 예종은 오연총의 패전 소식을 듣자(오연총은 스스로 처벌을 요구하는 장계를 올렸다) 곧 윤관을 파견했다. 윤관은 오연총과 만나 길주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이때 여진이 화친을 청해왔다고 해서 출전은 멈춰지고 만다. 여진의 사신이 한 말을 한번 보자.

“옛날 저희 태사太師인 영가盈歌가 일찍 말씀하기를,‘우리 조종祖宗이 대방大邦(=고려)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인 우야소도 역시 대방으로써 부모의 나라를 삼나이다. 그런데 갑신년 사이에 있어 궁한촌 사람으로 태사의 지유指諭함을 순종하지 않는 자를 병사를 들어 응징하였더니, 국조國朝(=고려)가 저희가 변경을 범하였다고 군사를 내어 정벌하다가 다시 수호를 허락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크게 군사가 들어와서 저희의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죽이고, 9성을 두어 유리 망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돌아가 의지할 곳을 없게 할 줄은 생각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이에 태사가 저희를 보내어 옛 땅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9성을 돌려주심을 허락하시어 생업을 안정시켜 주시면, 저희들은 하늘에 고하여 맹서를 하고 대대로 자손에 이르기까지 세공世貢을 정성껏 바치고, 감히 기와조각 돌 조각도 변경邊境 위에 던지지 않겠나이다.”

완안부가 고려에서 조종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그 유명한 금시조고려출자설 때문이다. 물론 저런 약속은 금나라가 세워지고 나서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고려 조정은 여진에게 속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길주성은 희망없는 농성을 계속하고 있었다. 고려의 구원군을 차단한 여진군은 파멸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결국 성의 일각이 무너지고 말았다. 날이 저물어 여진군이 물러났다. 단 하룻밤의 유예.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지휘관 허재는 기묘한 꾀를 내어 내성을 하루밤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오오, 무슨 방법으로? 아마도 외성을 짓기 위해 허물었던 내성을 복구한 것이리라.) 여진군은 다음날 아침 성이 새로 생겨난 것을 보고 낙담하여 물러났다. 길주성의 농성은 무려 130일간 계속 되었다. 허재의 묘지명을 따르면 길주성의 병력은 2천에 불과했다. 여진군은 결국 길주성 함락을 포기하고 화친을 맺고 물러났다.

1109년(예종 4년) 7월. 고려는 끝내 여진에게 9성을 돌려주기로 결정한다. 길주성과 같은 위험을 더 이상 두고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관원들이 화친에 동의했다.

예종은 여진 사신 요불褭弗 등을 불러 이 사실을 통보했다.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결코 고려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철수는 허탈한 것이었으리라. 쇠약한 사람들은 철수 대열에 오르지도 못한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남도에서 북방으로 사민되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셈이었다. 그 고난이 오죽했겠는가? 다행히 기쁨에 찬 여진족은 남겨진 고려인을 모두 돌려보내주었고, 한 사람도 해치지 않았다.

8월. 예종은 동북에서 돌아온 신기군을 맞아 위로의 말을 내렸다.

“동계(東界) 전역의 패배는 장수의 과실이라. 짐이 어찌 너희들의 노고를 잊겠는가.”

신기군은 말을 가지고 있어야 될 수 있는 특수한 군사 조직이었다. 말을 두 필 이상 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중장기병단으로 활동하기 위한 강인한 체력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이들은 고려를 상징하는 중장기병대였다. (유럽의 튜튼 기사단 같은 것과 비교되지 않을까?) 예종은 복귀하던 윤관과 오연총의 부월을 뺏고 그들이 보고도 올리지 못하게 했으나, 그 부하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것이다. 물론 윤관과 오연총은 그 뒤에 중용되었다.

6. 뒷이야기

철수한 해 11월부터 패전의 책임을 지고 윤관, 오연총, 임언 등을 벌주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온다. 예종은 무시해버린다. 그후에도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대관들이 강력하게 시위를 벌이지만 예종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파이팅, 예종!)

여진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인구가 대략 650만, 고려는 얼추 800만쯤이었을 테니, 두 나라는 인구 상으로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여진은 병농일체를 실현하고 있어서 군사 동원에서는 고려보다 나은 측면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1109년에 고려는 9성에서 철군했다. 그 4년 후인 1113년, 우야소의 뒤를 이어 아골타가 완안부의 수장이 되었다. 1114년 봉기한 아골타는 거란의 70만 대군을 무찌르고 1115년 황제를 칭했다. 그리고 불과 7년 후인 1122년 금나라는 연경을 함락시킨다.

바로 이들과 윤관, 오연총, 척준경, 최홍정, 이관진, 왕자지, 임언, 허재 등등은 싸웠던 것이다. 윤관은 이런 일들을 보지 못했다. 필생의 사업이 접히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까? 그는 1111년 숨졌다.

금나라는 화약의 조건을 다 지키진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다시 고려를 침공하지는 않았다.

[추가]
금이 고려와의 전쟁 이후 고려를 얼마나 껄끄럽게 생각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사례가 보주성保州城 문제다.

서희의 담판 이후로 압록강 이남을 고려의 영토로 흔히 알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의 의주인 [보주]는 뒤에 거란(요)이 빼앗았다. 1032년 3월, 거란은 보주를 점령하고 그곳에 성을 2개 쌓았다. 압록강을 건너온 곳에 세워진 거란의 보주성은 고려에게는 큰 위협이어서 여러차례 돌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란이 그런 요청을 들어줄 리 없었다.

금나라가 일어나면서 거란을 공격했고 1117년(예종 12년)에 거란군은 보주성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이때 보주성을 고려에게 넘겨준다는 통보를 했다. 아마도 고려와 금이 이 성을 놓고 쌈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거란의 예상대로 고려는 얼른 빈성을 차지했다. 하지만 거란에게는 아쉽게도 이 시기에 척준경이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이곳에 있었다. (이때 동북면병마부사는 길주성의 영웅 허재였다.)

금 입장에서는 멀쩡하게 성 두 개를 날린 셈이었다. 척준경을 상대로 싸우겠는가? 비유하자면 형주에서 조인을 몰아낸 주유가 강릉성에 왔더니 조자룡이 성을 차지하고 있는 격이었다. 금 입장에서 굉장히 억울했겠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는 장수는 척준경. 눈물을 머금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란과 건곤일척의 대결장에 서 있는 이상, 고려와 전선을 늘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금은 1126년(인종 4년)에 가서야 보주의 원래 백성들을 금으로 송환하면 성은 돌려받지 않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한다. 당연히 고려는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후 길고 지루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1130년에 가서도 금은 백성들을 송환하라 했으나 고려는 끝내 거부했다. 금도 결국 더 이상 고려를 몰아세우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후 보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니.

덧글

  • 스칼렛 2007/11/27 02:29 #

    좋은 글 읽었습니다.
  • 서군시언 2007/11/27 02:30 #

    고려가 9성을 계속 유지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금나라가 강제로 빼았았을까요, 아니면 다시 전쟁이 벌어졌을까요?
  • 초록불 2007/11/27 03:08 #

    스칼렛님 / 고맙습니다.

    서군시언님 / 이 포스팅은 사실은 세종의 4군6진 개척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밟고 지나가야 해서 적은 것이기도 합니다. 세종은 어떻게 영토를 지켰는가를 이야기하다보면 자연히 고려의 한계도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 시글 2007/11/27 03:23 #

    ... 덧글이 좀 많군요
  • 초록불 2007/11/27 03:23 #

    시글님 / 이글루 오류로 덧글이 우르르 올라갔었습니다.
  • MHLKP 2007/11/27 06:49 #

    결국 환단고기을 믿는 아니 신봉하는 자들은 바로 목숨걸고 나라를 지켜 후손들에게 물려준 윤관, 오연총, 척준경, 최홍정, 이관진, 왕자지, 임언, 허재 등등을 욕되게 하고 오히려 "위대한 쥬신'의 반역자로 만드는 군요.
  • BigTrain 2007/11/27 07:46 #

    고려는 정말 '엄청난 사람들'과 싸웠던 것이군요. 그 동안 9성 개척이라고 하면 원시적이었던 여진족을 내쫓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9성반환과 거의 동시에 금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습니다.
  • 耿君 2007/11/27 09:02 #

    아... 이거 눈물이 나올라 그럽니다 ㅠㅠ 그러고보면 9성도 그냥 헛되이 물러준 건 아니고 나름의 사정은 있었군요.
  • 야스페르츠 2007/11/27 09:17 #

    예종.. 우앙..굳!!

    그런데, 여진의 인구가 600여 만이라고 해도 만주 전체(생여진만 따져도 만주절반)에 걸친 인구일텐데요... 싸움의 양상으로 볼 때 고려가 싸운 것은 그 가운데 일부일 것 같습니다.... 완안부가 참여한 것을 보니 여진도 상당한 전력을 기울인 것 같기는 하지만... 여진이 고려처럼 중앙 권력이 강력한 체제도 아니고...

    아무튼 고려도 열심히 싸웠군요...
  • 초록불 2007/11/27 09:22 #

    MHLKP님 / 사실 우리나라 역사에 남겨진 게 없네, 어쩌네 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기록 하나 안 읽어본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BigTrain님 / 그렇습니다. 의외로 금제국이 금방 성립했다는 걸 모르는 분들이 많더군요.

    耿君님 / 영토 개척이 얼마나 많은 피를 요구하는지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 초록불 2007/11/27 09:24 #

    야스페르츠님 /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동여진은 당시에 거의 완안부에 복종한 상태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여진은 그 수가 얼마나 되었으려나... 음... (치오네님을 바라보는데... 봐 주실라나?)
  • 나아가는자 2007/11/27 09:39 #

    고려인구가 800만명이나되요? 음..제가 지금까지 알던 인구와는 차이가 크네요. 고려의 인구 추정치가 왜 그렇게된건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추이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데 수치를 제시하는 분마다 차이가 너무커서...부족한 제 지식으로는 뭐가 옳은지 판단이 안서왔거든요.
  • 아롱쿠스 2007/11/27 09:45 #

    그래도 너무 빨리(?) 영토를 돌려준 것에는 서운함이 없진 않네요.

    그래도 최대 경기도만한 영토였을텐데...('레바논'이 딱 경기도만하지요.)

    헌데, 금 건국때까지도 9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고려가 금과 그나마 좀더 대등하게 되었을까요?
  • 초록불 2007/11/27 09:59 #

    나아가는자님 / 전근대의 인구 변동은 대규모 전쟁과 파멸적 전염병 이외에는 크게 변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게 맞겠죠. 여진족 수치는 금나라가 실시했던 인구조사에 의거한 수치고, 고려는 추정입니다. 저는 통일신라가 최소한 7백만명은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란전에 동원된 병력이 20만이었을텐데, 그 수치가 동원되려면 7백만 이상이 맞을 듯합니다. 800만이라는 수치는 임용한 교수의 책에서 본 것입니다.
  • 초록불 2007/11/27 10:02 #

    아롱쿠스님 / 그건 if 놀이가 되어서...^^;; 이미 말씀드린데로 세종의 북방개척과 비교하면 고려의 실수가 드러나게 될 겁니다. 기대해 주세요...(언제 포스팅할지는 몰라요...)
  • 도원 2007/11/27 10:44 #

    여진의 인구가 왜 그렇게 많은 걸까요? 고려의 인구는 생각보다 적군요.
    사실상 인구는 식량생산량과 거의 비례할텐데, 고려의 생산기술이 낙후했던가, 아니면 여진의 생산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드네요.
    제가 고려사 등을 읽어보고 느낀 점은 윤관은 좀 덜렁거리는 성격이고, 부장인 오연총이 신중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척준경은 영웅이었군요. 그렇게 훌륭한 장수들을 데리고 결국 여진 정벌을 실패한 것은, 일단 여진족에 대한 정보 부족, 지리 정보의 부족이 원인인 것 같고 ('병목'에 관한 그릇된 정보를 믿고 들어간 것부터가 ..) 여진족에 대한 유화 회유책이 부족했고 (항복하면 고려백성으로 받아 들이겠다는, 그리고 여진의 지도층은 자제 규육과 신분 상승 등을 약속한다거나.....) 무기의 성능과 전술의 개발을 통해 압도적인 전력의 우세를 점하고 나서 정벌을 했어야 할 듯. (반면, 세종의 경우, 정보전, 적정탐지, 강온양면책, 회유, 무기 기술의 개발 등등 계획적인 면이 있었기에 성공했다고 봄)
    금나라가 다시 고려를 침공하지 않은 까닭이 전날의 '은혜' 때문이라는 기록이라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또 이것은 제안입니다만, 사실 고려의 입장에서 이 전쟁을 바라보지 말고, 아구타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초록불님이 대하 역사소설 하나를 쓰면 어떨까 싶네요. 아마 대조영의 차차기 후속작으로 간택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초록불 2007/11/27 10:56 #

    도원님 / 이야기를 좀 재미있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느라 고려와 여진 사이의 전쟁 전 관계에 대해서 설명이 미약했습니다. 사실 저도 아직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고요.

    고려가 발해 유민도 완전히 고려인 대접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한다리 더 건넌 여진족까지 포용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밀어내고 고려인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게 전근대의 방식으로는 오히려 올바른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금이 고려와 더 이상 전쟁을 꺼려한 것은 분명합니다. 여진 정벌전 이후 몇 년 안 지나서 거란 소유였던 보주를 금나라가 치고, 거란군이 도망치자 고려가 무단 점령해 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나중에 금은 보주를 내놓으라고 고려에게 으르렁대지만 고려가 배째라고 나오자 손을 들어버립니다. 너희 먹어라... 이거였는데, 이렇게 영토를 순순히 양보한 것도 고려와의 전쟁 기억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초록불 2007/11/27 10:59 #

    아골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라... 저는 아직 그 정도로 코스모폴리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게는 윤관, 오연총, 척준경 등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 푸치코 2007/11/27 14:04 #

    잘 봤습니다:)
    한반도의 전쟁사를 보면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이 그렇게 평화를 사랑한 국가도 나약한 국가도 아닌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그렇듯이 공격할 때 공격하고 막을 때 막으면서 유지된 파란만장한 나라들이었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ㅅ-
  • 굔군 2007/11/27 14:39 #

    안녕하세요. 초록불 님 블로그의 포스팅을 잘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댓글 다네요(아, 비밀글까지 포함하면 두번째군요).

    그런데 연경(지금의 북경)이 당시 요나라의 수도였던가요? 지금의 북경이 요나라에서는 남경이었다죠.
    요나라 멸망은 1125년의 일로 알고 있습니다만... 1122년에 수도가 함락되고 나서도 국가는 3년 더 유지된 건가요?
  • 초록불 2007/11/27 15:09 #

    굔군님 / 네, 3년간 도망쳐 다니는 거죠. 실질적인 전쟁은 1122년으로 끝입니다. 이때 요의 중, 서, 남경이 모두 함락됩니다. 북경은 요의 중경입니다.
  • 나아가는자 2007/11/27 17:19 #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이모작이나 기타 농법의 발전이나 개간에 의해 식량생산량이 늘어나서 인구가 점차적으로 증가했다고 추측해왔습니다. 그런데, 전근대시대에는 기본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나지않는한 인구변화가 크지 않다면 800만이라는 추정치가 크게 근거없다고는 느껴지지가 않네요.
    저는 고려인구가 200만이었다든가, 300만 이었다고 할때 속으로 그정도 인구로 어덯게 강조가 30만대군을 이끌고 요에 맞설수 있었는지 황당했었거든요. 사실 당시 송의 인구는 1억이 넘었다고 하던데 송과 고려의 기술, 문물의 차이가 그만큼 컸나라는 고민도 했었고요.
    음..당시인구를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역사연구가 얼마나 쉬워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루드라 2007/11/27 17:51 #

    다시 감동입니다. ^^
  • 굔군 2007/11/27 19:23 #

    아, 남경이 아니라 중경이었군요.

    보통 윤관의 여진 정벌에 대하여 여진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볼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초록불 님의 글을 읽고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 동안은 그냥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원시 부족 상태의 여진족을 몰아낸 것쯤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여진족도 나름대로 이 전쟁에 사활을 걸었었군요.
    금 왕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완안부가 이 전쟁에 개입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고려의 여진 정벌을 여진족이나 완안부의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한번 다뤄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 치오네 2007/11/27 22:35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역시 초록불님은 역사상의 일을 기록하셔도 소설처럼 재미있게 구성하시는군요. 그런데 어째 저는 읽으면서 자꾸 여진 편을 들게 되는지... 아골타가 자세히 보면 꽤 귀여운 인물이라;;

    말씀하신 서여진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 번 찾아볼께요.
    음, 그런데... 아골타가 황제를 칭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답니다. 저희 교수님은 아골타가 1114년 거병하여 1117년이나 1118년에 건국, 건국시의 국가명은 여진, 연호는 천보였다가 1122년에야 국호를 대금으로 바꾸었다고 보고 계세요. (http://chione.egloos.com/2018020)
  • 초록불 2007/11/27 22:58 #

    치오네님 / 아, 그 포스팅이 있었군요. 음, 사실 그래봐야 연도 차이는 많지 않지만 그쪽이 훨씬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것 같습니다.

    원래 자기가 연구하는 나라에 대해서 애정을 갖는 게 당연한 겁니다...^^;;
  • 총천연색 2007/11/28 11:52 #

    잘 읽었습니다.
  • Silverfang 2007/11/30 11:18 #

    한편의 드라마를 본 기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교과서 중심의) 전쟁사 중에서는
    고구려 못지 않게 고려사도 좋아하는데
    이번에 큰 공부한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__)
  • 초록불 2007/11/30 11:32 #

    Silverfang님 / 고맙습니다.
  • 꿈돼지 2008/03/22 03:25 #

    전 영웅문(사조영웅전)을 읽기 전에는 요나 금나라가 무슨 땅콩만한 조그만 나라인줄 알았어요. 읽고나서야 아주 강대국이라는걸 실감햇찌요.
  • 초록불 2008/03/22 11:14 #

    꿈돼지님 / 많이 읽는게 힘이 되지요.
  • 티무르 2009/06/02 16:23 #

    금나라 입장에선 화끈하게 데인 기억이 남았나 보군요^^
  • 초록불 2009/06/02 16:29 #

    그랬던 모양입니다...^^
  • 마에스트로 2011/12/02 17:34 #

    요새 교양으로 조선 전기사를 배우고 있습니다만 정말 4군 6진 지역 분쟁과 여진족과 조선의 전쟁사는 정말 치열했다는 게 느껴질 정도죠. 주변의 강대국들을 상대로 잘 버텨온 전통 왕조들의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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