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여진을 정벌하다 - 특별부록 *..역........사..*



이 글은 마지막 편에 추가해 놓은 글과 같습니다. 블로그라는 특성상 지나간 글은 다시 보지 않게 되므로 기왕 쓴 글, 따로 올립니다. 금이 고려와의 전쟁 후 고려를 얼마나 꺼려했는가를 알려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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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담판 이후로 압록강 이남을 고려의 영토로 흔히 알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의 의주인 [보주保州]는 뒤에 거란(요)이 빼앗았다. 1032년 3월, 거란은 보주를 점령하고 그곳에 성을 2개 쌓았다. 압록강을 건너온 곳에 세워진 거란의 보주성은 고려에게는 큰 위협이어서 여러차례 돌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란이 그런 요청을 들어줄 리 없었다.

금나라가 일어나면서 거란을 공격했고 1117년(예종 12년)에 거란군은 보주성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이때 보주성을 고려에게 넘겨준다는 통보를 했다. 고려는 얼른 빈성을 차지했다. 이 시기에 척준경이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이곳에 있었다. (이때 동북면병마부사는 길주성의 영웅 허재였다.)

금 입장에서는 멀쩡하게 성 두 개를 날린 셈이었다. 비유하자면 형주에서 조인을 몰아낸 주유가 강릉성에 왔더니 조자룡이 성을 차지하고 있는 격이었다. 금 입장에서 굉장히 억울했겠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는 장수는 척준경. 눈물을 머금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란과 건곤일척의 대결장에 서 있는 이상, 고려와 전선을 늘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금은 1126년(인종 4년)에 가서야 보주의 원래 백성들을 금으로 송환하면 성은 돌려받지 않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한다. 당연히 고려는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후 길고 지루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1130년에 가서도 금은 백성들을 송환하라 했으나 고려는 끝내 거부했다. 금도 결국 더 이상 고려를 몰아세우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후 보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니.

덧글

  • 서군시언 2007/11/27 21:59 #

    우리나라는 원래 외교력이 대단했던 것 같네요(인조때 제외).
  • 아롱쿠스 2007/11/27 22:08 #

    서군시언님이여/삼국시대때부터 중국의 분열상을 잘 이용해 나라를 보존하고 발전시킨 저력이 있지 않습니까?
  • 나아가는자 2007/11/27 23:20 #

    일단 먹고 버로우타는 거군요. 하하하. 실컷 웃었습니다.
    그나저나 역시 우리의 소드마스터 척은 강력하다는거~
  • 초록불 2007/11/27 23:23 #

    나아가는자님 / 거란이 고려한테 성을 넘긴 건, 고려와 금이 보주를 놓고 한판 싸우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죠. 그러나 우리의 척준경이 버티는 보주에 금나라는 들어올 생각을 못했다는 거...^^;;
  • 슈타인호프 2007/11/27 23:47 #

    금나라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척준경이라는 존재가 생각만 해도 오금이 떨리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트라우마였겠죠. 아마 협상 당시 금나라 고위 장수들 중 상당수는 9성 일대에서 척준경의 칼에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경험자들이 아니었을까요^^
  • 제갈교 2007/11/28 00:25 #

    으음...금으로서는 요를 치는 것이 보주를 얻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었던 건가요?
  • 시글 2007/11/28 00:29 #

    참으로 재미있는 글들 잘 읽고 갑니다!
  • 초록불 2007/11/28 00:51 #

    슈타인호프님 /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갈교님 /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시글님 / 고맙습니다.
  • 굔군 2007/11/28 02:19 #

    그런데 저렇게 국가 건설의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여진족이 왜 조선시대로 가면서 다시 원시 부족 상태로 돌아간 것인지 이해가 잘 안 되더군요.

    저런 대제국을 세웠던 여진족의 문명이 어째서 퇴보한 것인지...?
  • 초록불 2007/11/28 09:03 #

    굔군님 / 명과 조선 사이에서 심한 견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원시부족 상태라는 건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이고요. 가령 명은 여진이 조직화되는 기미를 보이면 바로 정벌해 버립니다. 1467년 건주좌위를 공격한 뒤,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여 건주위까지 초토화 시켜 버립니다. 임진왜란 시기에 도달해서야 여진은 조직화되는데, 이것은 명의 쇠퇴, 조선의 관심이 일본으로 쏠린 덕분입니다.
  • 마법의활 2007/11/28 11:28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 여진 정벌이 아무래도 국력 낭비였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군사와 백성
    그리고 양곡을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땅도 얻지 못했으니까요. 여진이 한번 고려에게 호된 맛을 봐서 고려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지만..... 윤관의 정벌이 없었어도 금나라가 예전 요나라처럼 무리수를 두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이화 선생님은 윤관의 정벌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북진에 더욱 명분이 섰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시는 데 저로써는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_-
  • 초록불 2007/11/28 11:46 #

    마법의활님 / 세종의 북진에는 윤관의 여진정벌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치의 땅이라면... 위에 적은 것처럼 보주를 얻었지요...^^;;
  • 굔군 2007/11/28 11:50 #

    아,,,조선시대의 여진이 원시 부족 상태가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왜 계속 과거와 같은 생활을 반복한 것인지...?
  • 초록불 2007/11/28 12:43 #

    굔군님 /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시키시네요...^^;; 여진이 조직화되려고 하면 명이 흩어놓았기 때문입니다.
  • 아롱쿠스 2007/11/28 13:15 #

    여진은 중국(특히 명나라)의 '이이제이' 정책의 대표적 희생양이랍니다.
  • 굔군 2007/11/28 13:33 #

    제 질문의 뜻은 금나라를 세우면서 이미 문명 생활을 한번 경험했던 여진족이 왜 다시 이렇다 할 문화도 없이 금나라 이전 상태와 같은 원시적인 유목 생활을 영위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

    세력을 결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명과 조선의 견제 때문이었겠지만요 ^^;
  • 마에스트로 2011/12/02 17:48 #

    여진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원시화된 부족은 아닙니다. 특히 건주위 같이 명과 조선에 인접한 여진족들은 나름대로 개화된 부족들입니다. 다만 구심점을 묶어줄 세력이 없었을 뿐이었고 좀만 반기를 들 기미가 있으면 명과 조선이 토벌했기 때문입니다. 세조같은 경우 군사를 동원해 말을 듣지 않는 부족장 일가를 몰살시키기도 하죠.
  • 초록불 2007/11/28 13:50 #

    굔군님 / 글쎄요, 저로서는 여진이 원시적인 생활(여진족은 유목족이 아닙니다)을 했다는 굔군님의 근거가 뭔지 궁금해집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길게 이야기할 여력이 없는 관계로 김한규 선생님의 [요동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진족은 원-명 시기에 여전히 자기들의 행정 체계를 가지고 교역을 하면서 생활했습니다. 원-명은 매우 가혹하게 이들을 수탈했고요. 원말 교체기의 이 지역 상황은 변화무쌍해서 짧게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세종의 북방 개척을 포스팅하게 되면 간단하게나마 다룰 것 같습니다...^^;;
  • rezen 2007/11/28 20:07 #

    역시 소드마스터 척준경! 정말 재미있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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