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의 근원을 밝혀낸 악질식민빠님의 노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외적 증거가 이처럼 확실하니 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의 원본 운운하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 시점에서 [규원사화]에 대한 논의 전체를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하 글들은 악질식민빠님이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밝힌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며, Shaw님 등이 기존 논의를 정리한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내가 기술한 것은 아주 작은 분량이다. 하지만 이 안에 잘못이 있다면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리라. 이미 기존의 내용을 지켜보았던 분들은 굳이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규원사화]는 단군 조선의 역대 단군 이름과 업적이 수록된 책으로 [환단고기]와는 달리 비교적 개연성이 있는 서술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교적 기존 알려져 있는 연대와 체계 속에서 서술이 이루어져 있는 책이다. 이 때문에 국수주의자들에게는 [환단고기]의 보조 증빙 자료 이외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숙종 때 백두였던 "북애자"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손보기, 이가원 임창순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규원사화]를 그 책에 나오는 숙종 원년(1675) 3월 상순경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이 책이 국립중앙도서관의 古貴629(古2105-1) 본이다.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이 1945년말에서 1946년 1월 사이에 김수일이라는 사람에게서 100원에 구입했다고 하며(국립중앙도서관의 개관일은 1945년 10월 15일), 이 책이 등록된 날짜는 1946년 5월 25일이다. 이 책은 1972년 11월 3일 고서심의위원회(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에 의해서 숙종 때 쓴 진본으로 인정받았다.
현전 [규원사화]는 모두 6종이 있다고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본래 古2105-1이었으나 진본 감정 후 貴629가 되었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古2121-3, 양주동梁柱東 소장본을 1940년에 손진태孫晋泰가 필사한 것)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마이크로필름. 출처 불명)
동국대학교 소장본 - 권상노權相老 소장본(필사본)
서울대학교 소장본 - 방종현方鍾鉉(국문학자) 소장본(등사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본 - 이선근李瑄根 소장본(등사본)
古貴629본은 과연 진짜 북애자가 쓴 책일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이미 진본으로 규정이 내려졌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김성구 씨가 자세히 논증을 해놓았다.
규원사화 교감기 [클릭]위 링크에서 하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양주동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손진태가 필사했던 책, 즉 古2121-3본은 진본이라고 말하는 古貴629본을 보고 필사한 것이 아니며, 古貴629본보다 더 정확한 책 - 즉 원본 또는 원본을 필사한 다른 책을 보고 필사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古貴629본은 사람들이 보통 필사하면서 저지르는 실수들, 즉 앞 뒤 글자를 잘못 베끼기, 몇 글자 누락하기, 빼먹은 글자 나중에 보충하기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이것은 古貴629본이 진본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다만 전문가의 이야기는 古貴629본이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책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규원사화]는 1920년대에 등장하여, 1925년에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처음 인용되었다. (단전요의는 1925년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崔國述이 편찬,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된 최문창후전집崔文昌候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천부경도 들어있다. 즉 신뢰성은 없는 책이라는 이야기.)
[규원사화] 自檀儉神人開創鴻業, 歷四十七世, 一千一百九十五年. 檀君旣徙居阿斯達而國人猶推尊之, 諸侯亦無敢逼者. 或曰, 朴氏‧白氏, 皆其後裔, 而赫居世亦出於檀君之後云, 今文獻無徵, 未知其確矣. 自後, 諸侯頗以武力相競, 獨藍侯者出諸家之右, 時常役率羣后, 以行國政, 是爲列國焉.
[단전요의] 桓儉神人의 鴻業을 開創하심으로부터 傳世 47世오 歷1205年이리라 任儉이 旣히 阿斯達에 徙居한에 國人이 오히려 尊崇하고 諸侯가 敢히 逼하난 者 - 無하더라. 自後로 諸侯武功으로 相競하니이 列國이 되니라.
그 뒤 1928년 김광의 [대동사강]에 인용되었다. 이처럼 어떤 책이 세상에 나오면 다른 책에 의해서 인용되어 증거가 남게 마련이다.
[규원사화]는 이 무렵부터 알려졌는데, 이유립은 자신이 지은 [환단고기]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는 [규원사화]를 좌시할 수 없어서 [규원사화] 위서론을 전파했다.
“현전하는 규원사화는 윤덕영尹德榮이 대종교의 입장에서 원본 규원사화를 다소 개작한 것이며 1920년대 말경 시흥의 녹동서원에서 그것을 등사하여 판매하였다. 원본 규원사화는 삭주부사 권현權俔이 지은 것이며 그 사실은 <권현행장>에 나온다. 또 나 자신도 이 원본 규원사화와 행장을 본 일이 있다. 이 <권현행장>은 권현의 후손들에게 전해졌는데 지금은 같은 문중의 한학자인 권오돈(1983 작고)이 소장하고 있다.“
윤덕영은 순종비의 숙부로 일제강점 후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다. 국권침탈 때 순종비가 옥새를 치마 속에 숨겨 내놓지 않으려 하자 윤덕영이 빼앗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규원사화]가 윤덕영의 집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이병도도 한 바가 있다. 어쩌면 이 때문에 일부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규원사화]가 두 갈래 다른 길로 전승된 것이 아닐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유립의 말 자체가 거짓말이어서 권오돈 씨는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유립은 삭주 출신으로 한국사가 삭주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의 집안인 철성이씨 중심으로 한국고대사가 돌아가게 만든 것처럼.
그럼 [규원사화]에 대한 의문점을 검토해 보자. (거의 모든 부분을 Shaw님이 정리한 것을 업어옴. 출처는
[규원사화] 에 관한 몇 가지 의문점 [클릭] - 네이버 카페 가입자가 아니면 열람할 수 없음)
▶[규원사화] 의 출처 가운데는 고려 공민왕 때 사람인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썼다는 [진역유기] 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규원사화]<단군기> 에 인용된 [진역유기] 구절 가운데, 묘청의 주장에 따라 서경에 건립한 팔성당八聖堂을 설명한 대목을 보면 "다스린다" 는 의미로 治자를 쓰고 있다. 治자는 고려 성종의 이름이므로, 고려시대에는 이를 피휘하여 理자로 대신하는 것이 상례였다. [진역유기] 가 정말 청평 이명의 저작이라면 어째서 피휘하지 않았는가? (조인성,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한국사 시민강좌 2집, 1988)
▶[규원사화]<서문> 에서는 책의 저술 연대를 "지금 주상의 재위 2년 을묘(上之二年乙卯)" 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조선 중기 이후의 연조는 숙종 2년인 1675년 뿐이다. 그런데 역시 <서문> 에서, 저자인 북애자(北崖子, [규원사화] 저자는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는 "조상의 옛 땅이 적에게 넘어간지 이미 천년이다.(我先祖舊疆入于敵國者已千年)" 라며 한탄하고 있다. <단군기> 와 <만설> 에서 북애자는 일관되게 발해를 동족 국가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발해 멸망 연도인 926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저 문장이 쓰여진 시점은 1920년대가 된다.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년 가을)
▶[규원사화]<만설> 에는, 경주 첨성대가 건립된 지 "천 수백년이 지났다." 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 세워진 것이므로 [규원사화] 가 1675년에 나온 책이라면 "천 수백년" 이라는 표현은 사용할 수 없다.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년 가을)
▶[규원사화]<만설> 은 또한 청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禽永明而掃淸海內, 服諸汗而倂呑漠北 (영명(=남명 영력제)을 잡아 해내(=중국)를 깨끗이 하였고, 한汗들을 복속시켜 막북을 병탄하였다.)
여기에서 "막북" 은 보통 외몽고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막북" 의 개념이 혼동되기도 했으나, 제한諸汗이라는 말을 쓴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도 외몽고를 뜻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청나라가 외몽고를 평정한 일은 1690년대의 준가르부 토벌전(1690~1697)으로 인한 것이다. 북애자가 정말 1675년에 이 책을 썼다면, 그는 미래를 내다 본 것인가?
가만, 다시 생각해보니...III [클릭]▶[규원사화]<단군기> 에서는, "백두산" 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으로 [고려사]의 "광종 10년에 압록강 바깥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 라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서 저 사건은 성종 10년이지 광종 10년이 아니다. 왜 이런 착오가 발생하였는가? 1823년에 완성된 [해동역사] 속편 지리고를 보면, 역시 백두산이 최초로 나오는 기록으로 저 기사를 들고 있는데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으로 쓰는 오류를 범하였다. 같은 오류가 독립적으로 발생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한 책이 다른 책을 참조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진서는 지리고에서, 남에게서 전해 들은 견해까지 포함하여 모든 출전을 명기하였다. 여기에 [규원사화]는 없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규원사화] 는 실은 1823년 이후에 나온 책으로, [해동역사]를 참조하여 쓰여졌을 것이다. (조인성, <재야사서 위서론>, 단군과 고조선사, 2000)
▶[규원사화]<단군기> 에서는, "부루(夫婁)" 와 "불우(弗虞)" 가 같은 음(音)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弗이 "불" 로 읽히는 것은 18세기 이후 원순모음화가 진행된 결과이고, 그 전에는 "블" 이라 발음되었으므로 [규원사화] 가 정말 1675년에 나온 책이라면 이와같은 말을 할 수 없다.
북애자님ㅠㅠ [클릭]▶우리나라 역사서가 당나라 장수 이적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는 주장은 1777년의 이만운이 쓴 [기년아람]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규원사화]는 그보다 먼저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봤을까? [클릭]▶이외에도 대종교에서 주장하는 조천朝天과 같은 용례의 사용 등 [규원사화]는 대종교의 교리를 이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朝天」[클릭]그런데 위 증거들은 의혹은 가득하지만 어쨌든 변명의 여지가 조금씩 있다. 물론 이 정도로 많은 의혹이 쌓이면 더 이상 조선 후기 작품이라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런데 악질식민빠님은 아예 못을 박아버리고 있는데, 이제 그 결정적인 증거들을 악질식민빠님이 어떻게 검토했는지 살펴보자.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고 있어도... [클릭]「등짝을 보자」[클릭]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하 내용은 악질식민빠님이 쓴 내용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나철은 단군교를 만들었다가 친일파들이 단군교로 침투하자 대종교로 이름을 바꾼다. 대종교의 2대 교주가 김교헌으로 그가 단군에 대한 내용을 쓴 것이 [신단실기神檀實記]다. 1914년에 나온 책이다. 즉 [규원사화]가 주장하는 시기보다는 늦게 나온 책이다. 그러나 [규원사화]가 실제로 목격되는 시점보다는 빨리 나온 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규원사화]에는 이 책의 내용과 같은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치하는 내용이 엉뚱하다. 단군의 인명이나 사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이 왜 중요한가?
만일 김교헌이 [규원사화]를 보았다면 단군에 대한 사적을 눈에 불을 켜고 찾던 그가 [규원사화]의 단군 이름을 비롯, 그 놀라운 사적들을 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전하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교헌은 [규원사화]라는 책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김교헌은 1923년에 [신단실기]를 보완한 [신단민사]를 내놓는데, 여기에도 [규원사화]의 핵심적 내용인 단군 인명과 사적은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 10년이 지나도록 단군에 대한 이 중요한 사실이 단군을 섬기고 있는 대종교에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쇼킹하지 않은가?
하지만 쇼킹할 것이 없다. [규원사화]가 김교헌의 책을 가지고 만들어진 위작이라면 모든 문제는 간명하게 해결이 된다. 이 [신단실기]는 매우 중요한데, 이후 만들어진 [환단고기] 등의 책에 자료로 분해되어 거의 완전히 흡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단실기] 삼신상제 부루 편에 나오는 부루단지와 업주가리가 [규원사화]에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
土器盛禾穀 置於檀上 編葺藁草掩之者 或稱業主嘉利
위에 적은 한문을 똑같이 쓰고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혹칭或稱” 앞에 “매 시월에 새 곡식을 담는다”는 말이 더 적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거로 이것이 있다.
[신단실기] 주신主神이 전 세계를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통치함에 있어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최고로 높은 하늘에 앉아서 지상에 있는 자는 모두 소신小神으로 하여금 쫓게 한다. 또 부여족이 논하여 말하기를 종교는 하늘에 절하는 것이니라 했다. <만주지滿州志>
이 글은 [규원사화] 조판기에도 들어 있다. [규원사화]는 주신主神 다음에 환인桓因이라는 말 하나만 더 넣었을 뿐,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이라는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신단실기]가 출전이 아니다. [신단실기]는 출전을 [만주지]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만주지]란 바로 [만주지지滿洲地誌]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주지지]는 1889년에 대일본제국육군참모본부가 편찬한 책이다. 이건 뭐 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일제육참본부의 책이 출전이니... 오 마이 갓!
앗, [만주지]가 [만주지지]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의문을 품을 분도 있겠다. 그것은 김교헌, 유근柳瑾, 박은식朴殷植이 편찬한 [단조사고檀祖事考]라는 책에 동일한 글의 출전이 [만주지지]라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11년에 발간되었다. (편찬자들이 모두 [규원사화] 출현 전에 돌아가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보일 정도다.)
저 주신主神 운운의 구절은 일본군부가 동시베리아 야쿠트족의 샤머니즘을 채록한 내용이다. 일본군부는 왜 야쿠트족의 샤머니즘까지 채록한 것인가? 일본군부는 한반도-만주-중국-시베리아 등을 점령할 광대한 야망을 가지고 이들 지역에 대한 사전 조사 중이었고 그것을 모아서 책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원래 [지나지지]의 한 편으로 기획되었으나 양이 많아지자 독립된 책으로 나온 것이었다. [단조고사], [신단실기] 등이 인용한 위 내용은 해당 책의 [종교] 편에 들어있으며, 이들은 샤머니즘을 불교의 흔적으로 이해했다.
샤머니즘을 불교의 흔적으로 이해했던 것은 일지日持(니치지) 上人(상인은 중이라는 뜻)이라는 일련종日蓮宗의 승려가 북해도-사할린을 거쳐 만주-화북으로 포교를 떠났다는 전설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샤머니즘에 대해서는 최남선이 깊이 정리해 놓은 내용이 있다. 최남선이 샤머니즘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이런 일들과 관계있는지 뒤에 한번 살펴보고 싶어진다.)
일지는 1250년생. 1295년 해외 포교에 뜻을 두고 북해도를 거쳐 해외로 갔다고 전해진다. 일본 군부는 이 중의 행적을 추적하였던 것이다. 이 중의 행적을 소개했다는 중리기암中里機庵(나카자토 키안)이라는 사람이 하는 짓거리는 이유립이 [환단고기]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와 똑같으니까 한번 보면 재밌을 것이다. (마에지마 신지의 글을 읽다가 [클릭])
악질식민빠님의 포스팅에 따르면 일본 군부가 이 설을 채록한 이후 일본육군보병중좌 수전이원守田利遠의 [만주지지滿洲地誌](1906)에서는 샤머니즘을 불교의 한 일파로 이해했다. 샤먼薩滿을 사문沙門(승려를 가리키는 말)이 변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점은 본 사건에서의 하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결국 일본 군부가 야쿠트 족의 신화를 채록한 것에 낚여서 만들어진 책이 [규원사화]인 셈이다. 이 신화를 [규원사화]가 도용한 이상 [규원사화]의 연대는 죽었다 깨나도 1889년 이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또한 [신단실기]를 베낀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1914년 위로도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고 [신단민사]에서도 고조선 역대 단군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23년 위로도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규원사화]는 1923년 이후에 작성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