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짝을 보자」 악질식민빠님의 포스팅에 링크
[규원사화]의 근원을 밝혀낸 악질식민빠님의 노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외적 증거가 이처럼 확실하니 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의 원본 운운하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 시점에서 [규원사화]에 대한 논의 전체를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하 글들은 악질식민빠님이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밝힌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며, Shaw님 등이 기존 논의를 정리한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내가 기술한 것은 아주 작은 분량이다. 하지만 이 안에 잘못이 있다면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리라. 이미 기존의 내용을 지켜보았던 분들은 굳이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규원사화]의 근원을 밝혀낸 악질식민빠님의 노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외적 증거가 이처럼 확실하니 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의 원본 운운하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 시점에서 [규원사화]에 대한 논의 전체를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하 글들은 악질식민빠님이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밝힌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며, Shaw님 등이 기존 논의를 정리한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내가 기술한 것은 아주 작은 분량이다. 하지만 이 안에 잘못이 있다면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리라. 이미 기존의 내용을 지켜보았던 분들은 굳이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규원사화]는 단군 조선의 역대 단군 이름과 업적이 수록된 책으로 [환단고기]와는 달리 비교적 개연성이 있는 서술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교적 기존 알려져 있는 연대와 체계 속에서 서술이 이루어져 있는 책이다. 이 때문에 국수주의자들에게는 [환단고기]의 보조 증빙 자료 이외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숙종 때 백두였던 "북애자"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손보기, 이가원 임창순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규원사화]를 그 책에 나오는 숙종 원년(1675) 3월 상순경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이 책이 국립중앙도서관의 古貴629(古2105-1) 본이다.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이 1945년말에서 1946년 1월 사이에 김수일이라는 사람에게서 100원에 구입했다고 하며(국립중앙도서관의 개관일은 1945년 10월 15일), 이 책이 등록된 날짜는 1946년 5월 25일이다. 이 책은 1972년 11월 3일 고서심의위원회(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에 의해서 숙종 때 쓴 진본으로 인정받았다.
현전 [규원사화]는 모두 6종이 있다고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본래 古2105-1이었으나 진본 감정 후 貴629가 되었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古2121-3, 양주동梁柱東 소장본을 1940년에 손진태孫晋泰가 필사한 것)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마이크로필름. 출처 불명)
동국대학교 소장본 - 권상노權相老 소장본(필사본)
서울대학교 소장본 - 방종현方鍾鉉(국문학자) 소장본(등사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본 - 이선근李瑄根 소장본(등사본)
古貴629본은 과연 진짜 북애자가 쓴 책일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이미 진본으로 규정이 내려졌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김성구 씨가 자세히 논증을 해놓았다. 규원사화 교감기 [클릭]
위 링크에서 하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양주동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손진태가 필사했던 책, 즉 古2121-3본은 진본이라고 말하는 古貴629본을 보고 필사한 것이 아니며, 古貴629본보다 더 정확한 책 - 즉 원본 또는 원본을 필사한 다른 책을 보고 필사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古貴629본은 사람들이 보통 필사하면서 저지르는 실수들, 즉 앞 뒤 글자를 잘못 베끼기, 몇 글자 누락하기, 빼먹은 글자 나중에 보충하기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이것은 古貴629본이 진본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다만 전문가의 이야기는 古貴629본이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책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규원사화]는 1920년대에 등장하여, 1925년에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처음 인용되었다. (단전요의는 1925년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崔國述이 편찬,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된 최문창후전집崔文昌候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천부경도 들어있다. 즉 신뢰성은 없는 책이라는 이야기.)
[규원사화] 自檀儉神人開創鴻業, 歷四十七世, 一千一百九十五年. 檀君旣徙居阿斯達而國人猶推尊之, 諸侯亦無敢逼者. 或曰, 朴氏‧白氏, 皆其後裔, 而赫居世亦出於檀君之後云, 今文獻無徵, 未知其確矣. 自後, 諸侯頗以武力相競, 獨藍侯者出諸家之右, 時常役率羣后, 以行國政, 是爲列國焉.
[단전요의] 桓儉神人의 鴻業을 開創하심으로부터 傳世 47世오 歷1205年이리라 任儉이 旣히 阿斯達에 徙居한에 國人이 오히려 尊崇하고 諸侯가 敢히 逼하난 者 - 無하더라. 自後로 諸侯武功으로 相競하니이 列國이 되니라.
그 뒤 1928년 김광의 [대동사강]에 인용되었다. 이처럼 어떤 책이 세상에 나오면 다른 책에 의해서 인용되어 증거가 남게 마련이다.
[규원사화]는 이 무렵부터 알려졌는데, 이유립은 자신이 지은 [환단고기]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는 [규원사화]를 좌시할 수 없어서 [규원사화] 위서론을 전파했다.
“현전하는 규원사화는 윤덕영尹德榮이 대종교의 입장에서 원본 규원사화를 다소 개작한 것이며 1920년대 말경 시흥의 녹동서원에서 그것을 등사하여 판매하였다. 원본 규원사화는 삭주부사 권현權俔이 지은 것이며 그 사실은 <권현행장>에 나온다. 또 나 자신도 이 원본 규원사화와 행장을 본 일이 있다. 이 <권현행장>은 권현의 후손들에게 전해졌는데 지금은 같은 문중의 한학자인 권오돈(1983 작고)이 소장하고 있다.“
윤덕영은 순종비의 숙부로 일제강점 후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다. 국권침탈 때 순종비가 옥새를 치마 속에 숨겨 내놓지 않으려 하자 윤덕영이 빼앗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규원사화]가 윤덕영의 집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이병도도 한 바가 있다. 어쩌면 이 때문에 일부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규원사화]가 두 갈래 다른 길로 전승된 것이 아닐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유립의 말 자체가 거짓말이어서 권오돈 씨는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유립은 삭주 출신으로 한국사가 삭주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의 집안인 철성이씨 중심으로 한국고대사가 돌아가게 만든 것처럼.
그럼 [규원사화]에 대한 의문점을 검토해 보자. (거의 모든 부분을 Shaw님이 정리한 것을 업어옴. 출처는 [규원사화] 에 관한 몇 가지 의문점 [클릭] - 네이버 카페 가입자가 아니면 열람할 수 없음)
▶[규원사화] 의 출처 가운데는 고려 공민왕 때 사람인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썼다는 [진역유기] 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규원사화]<단군기> 에 인용된 [진역유기] 구절 가운데, 묘청의 주장에 따라 서경에 건립한 팔성당八聖堂을 설명한 대목을 보면 "다스린다" 는 의미로 治자를 쓰고 있다. 治자는 고려 성종의 이름이므로, 고려시대에는 이를 피휘하여 理자로 대신하는 것이 상례였다. [진역유기] 가 정말 청평 이명의 저작이라면 어째서 피휘하지 않았는가? (조인성,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한국사 시민강좌 2집, 1988)
▶[규원사화]<서문> 에서는 책의 저술 연대를 "지금 주상의 재위 2년 을묘(上之二年乙卯)" 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조선 중기 이후의 연조는 숙종 2년인 1675년 뿐이다. 그런데 역시 <서문> 에서, 저자인 북애자(北崖子, [규원사화] 저자는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는 "조상의 옛 땅이 적에게 넘어간지 이미 천년이다.(我先祖舊疆入于敵國者已千年)" 라며 한탄하고 있다. <단군기> 와 <만설> 에서 북애자는 일관되게 발해를 동족 국가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발해 멸망 연도인 926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저 문장이 쓰여진 시점은 1920년대가 된다.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년 가을)
▶[규원사화]<만설> 에는, 경주 첨성대가 건립된 지 "천 수백년이 지났다." 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 세워진 것이므로 [규원사화] 가 1675년에 나온 책이라면 "천 수백년" 이라는 표현은 사용할 수 없다.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년 가을)
▶[규원사화]<만설> 은 또한 청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禽永明而掃淸海內, 服諸汗而倂呑漠北 (영명(=남명 영력제)을 잡아 해내(=중국)를 깨끗이 하였고, 한汗들을 복속시켜 막북을 병탄하였다.)
여기에서 "막북" 은 보통 외몽고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막북" 의 개념이 혼동되기도 했으나, 제한諸汗이라는 말을 쓴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도 외몽고를 뜻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청나라가 외몽고를 평정한 일은 1690년대의 준가르부 토벌전(1690~1697)으로 인한 것이다. 북애자가 정말 1675년에 이 책을 썼다면, 그는 미래를 내다 본 것인가? 가만, 다시 생각해보니...III [클릭]
▶[규원사화]<단군기> 에서는, "백두산" 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으로 [고려사]의 "광종 10년에 압록강 바깥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 라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서 저 사건은 성종 10년이지 광종 10년이 아니다. 왜 이런 착오가 발생하였는가? 1823년에 완성된 [해동역사] 속편 지리고를 보면, 역시 백두산이 최초로 나오는 기록으로 저 기사를 들고 있는데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으로 쓰는 오류를 범하였다. 같은 오류가 독립적으로 발생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한 책이 다른 책을 참조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진서는 지리고에서, 남에게서 전해 들은 견해까지 포함하여 모든 출전을 명기하였다. 여기에 [규원사화]는 없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규원사화] 는 실은 1823년 이후에 나온 책으로, [해동역사]를 참조하여 쓰여졌을 것이다. (조인성, <재야사서 위서론>, 단군과 고조선사, 2000)
▶[규원사화]<단군기> 에서는, "부루(夫婁)" 와 "불우(弗虞)" 가 같은 음(音)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弗이 "불" 로 읽히는 것은 18세기 이후 원순모음화가 진행된 결과이고, 그 전에는 "블" 이라 발음되었으므로 [규원사화] 가 정말 1675년에 나온 책이라면 이와같은 말을 할 수 없다. 북애자님ㅠㅠ [클릭]
▶우리나라 역사서가 당나라 장수 이적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는 주장은 1777년의 이만운이 쓴 [기년아람]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규원사화]는 그보다 먼저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봤을까? [클릭]
▶이외에도 대종교에서 주장하는 조천朝天과 같은 용례의 사용 등 [규원사화]는 대종교의 교리를 이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朝天」[클릭]
그런데 위 증거들은 의혹은 가득하지만 어쨌든 변명의 여지가 조금씩 있다. 물론 이 정도로 많은 의혹이 쌓이면 더 이상 조선 후기 작품이라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런데 악질식민빠님은 아예 못을 박아버리고 있는데, 이제 그 결정적인 증거들을 악질식민빠님이 어떻게 검토했는지 살펴보자.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고 있어도... [클릭]
「등짝을 보자」[클릭]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하 내용은 악질식민빠님이 쓴 내용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나철은 단군교를 만들었다가 친일파들이 단군교로 침투하자 대종교로 이름을 바꾼다. 대종교의 2대 교주가 김교헌으로 그가 단군에 대한 내용을 쓴 것이 [신단실기神檀實記]다. 1914년에 나온 책이다. 즉 [규원사화]가 주장하는 시기보다는 늦게 나온 책이다. 그러나 [규원사화]가 실제로 목격되는 시점보다는 빨리 나온 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규원사화]에는 이 책의 내용과 같은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치하는 내용이 엉뚱하다. 단군의 인명이나 사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이 왜 중요한가?
만일 김교헌이 [규원사화]를 보았다면 단군에 대한 사적을 눈에 불을 켜고 찾던 그가 [규원사화]의 단군 이름을 비롯, 그 놀라운 사적들을 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전하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교헌은 [규원사화]라는 책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김교헌은 1923년에 [신단실기]를 보완한 [신단민사]를 내놓는데, 여기에도 [규원사화]의 핵심적 내용인 단군 인명과 사적은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 10년이 지나도록 단군에 대한 이 중요한 사실이 단군을 섬기고 있는 대종교에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쇼킹하지 않은가?
하지만 쇼킹할 것이 없다. [규원사화]가 김교헌의 책을 가지고 만들어진 위작이라면 모든 문제는 간명하게 해결이 된다. 이 [신단실기]는 매우 중요한데, 이후 만들어진 [환단고기] 등의 책에 자료로 분해되어 거의 완전히 흡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단실기] 삼신상제 부루 편에 나오는 부루단지와 업주가리가 [규원사화]에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
土器盛禾穀 置於檀上 編葺藁草掩之者 或稱業主嘉利
위에 적은 한문을 똑같이 쓰고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혹칭或稱” 앞에 “매 시월에 새 곡식을 담는다”는 말이 더 적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거로 이것이 있다.
[신단실기] 주신主神이 전 세계를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통치함에 있어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최고로 높은 하늘에 앉아서 지상에 있는 자는 모두 소신小神으로 하여금 쫓게 한다. 또 부여족이 논하여 말하기를 종교는 하늘에 절하는 것이니라 했다. <만주지滿州志>
이 글은 [규원사화] 조판기에도 들어 있다. [규원사화]는 주신主神 다음에 환인桓因이라는 말 하나만 더 넣었을 뿐,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이라는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신단실기]가 출전이 아니다. [신단실기]는 출전을 [만주지]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만주지]란 바로 [만주지지滿洲地誌]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주지지]는 1889년에 대일본제국육군참모본부가 편찬한 책이다. 이건 뭐 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일제육참본부의 책이 출전이니... 오 마이 갓!
앗, [만주지]가 [만주지지]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의문을 품을 분도 있겠다. 그것은 김교헌, 유근柳瑾, 박은식朴殷植이 편찬한 [단조사고檀祖事考]라는 책에 동일한 글의 출전이 [만주지지]라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11년에 발간되었다. (편찬자들이 모두 [규원사화] 출현 전에 돌아가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보일 정도다.)
저 주신主神 운운의 구절은 일본군부가 동시베리아 야쿠트족의 샤머니즘을 채록한 내용이다. 일본군부는 왜 야쿠트족의 샤머니즘까지 채록한 것인가? 일본군부는 한반도-만주-중국-시베리아 등을 점령할 광대한 야망을 가지고 이들 지역에 대한 사전 조사 중이었고 그것을 모아서 책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원래 [지나지지]의 한 편으로 기획되었으나 양이 많아지자 독립된 책으로 나온 것이었다. [단조고사], [신단실기] 등이 인용한 위 내용은 해당 책의 [종교] 편에 들어있으며, 이들은 샤머니즘을 불교의 흔적으로 이해했다.
샤머니즘을 불교의 흔적으로 이해했던 것은 일지日持(니치지) 上人(상인은 중이라는 뜻)이라는 일련종日蓮宗의 승려가 북해도-사할린을 거쳐 만주-화북으로 포교를 떠났다는 전설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샤머니즘에 대해서는 최남선이 깊이 정리해 놓은 내용이 있다. 최남선이 샤머니즘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이런 일들과 관계있는지 뒤에 한번 살펴보고 싶어진다.)
일지는 1250년생. 1295년 해외 포교에 뜻을 두고 북해도를 거쳐 해외로 갔다고 전해진다. 일본 군부는 이 중의 행적을 추적하였던 것이다. 이 중의 행적을 소개했다는 중리기암中里機庵(나카자토 키안)이라는 사람이 하는 짓거리는 이유립이 [환단고기]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와 똑같으니까 한번 보면 재밌을 것이다. (마에지마 신지의 글을 읽다가 [클릭])
악질식민빠님의 포스팅에 따르면 일본 군부가 이 설을 채록한 이후 일본육군보병중좌 수전이원守田利遠의 [만주지지滿洲地誌](1906)에서는 샤머니즘을 불교의 한 일파로 이해했다. 샤먼薩滿을 사문沙門(승려를 가리키는 말)이 변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점은 본 사건에서의 하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결국 일본 군부가 야쿠트 족의 신화를 채록한 것에 낚여서 만들어진 책이 [규원사화]인 셈이다. 이 신화를 [규원사화]가 도용한 이상 [규원사화]의 연대는 죽었다 깨나도 1889년 이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또한 [신단실기]를 베낀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1914년 위로도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고 [신단민사]에서도 고조선 역대 단군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23년 위로도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규원사화]는 1923년 이후에 작성된 책이다.
1972년 손보기, 이가원 임창순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규원사화]를 그 책에 나오는 숙종 원년(1675) 3월 상순경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이 책이 국립중앙도서관의 古貴629(古2105-1) 본이다.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이 1945년말에서 1946년 1월 사이에 김수일이라는 사람에게서 100원에 구입했다고 하며(국립중앙도서관의 개관일은 1945년 10월 15일), 이 책이 등록된 날짜는 1946년 5월 25일이다. 이 책은 1972년 11월 3일 고서심의위원회(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에 의해서 숙종 때 쓴 진본으로 인정받았다.
현전 [규원사화]는 모두 6종이 있다고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본래 古2105-1이었으나 진본 감정 후 貴629가 되었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古2121-3, 양주동梁柱東 소장본을 1940년에 손진태孫晋泰가 필사한 것)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마이크로필름. 출처 불명)
동국대학교 소장본 - 권상노權相老 소장본(필사본)
서울대학교 소장본 - 방종현方鍾鉉(국문학자) 소장본(등사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본 - 이선근李瑄根 소장본(등사본)
古貴629본은 과연 진짜 북애자가 쓴 책일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이미 진본으로 규정이 내려졌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김성구 씨가 자세히 논증을 해놓았다. 규원사화 교감기 [클릭]
위 링크에서 하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양주동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손진태가 필사했던 책, 즉 古2121-3본은 진본이라고 말하는 古貴629본을 보고 필사한 것이 아니며, 古貴629본보다 더 정확한 책 - 즉 원본 또는 원본을 필사한 다른 책을 보고 필사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古貴629본은 사람들이 보통 필사하면서 저지르는 실수들, 즉 앞 뒤 글자를 잘못 베끼기, 몇 글자 누락하기, 빼먹은 글자 나중에 보충하기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이것은 古貴629본이 진본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다만 전문가의 이야기는 古貴629본이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책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규원사화]는 1920년대에 등장하여, 1925년에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처음 인용되었다. (단전요의는 1925년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崔國述이 편찬,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된 최문창후전집崔文昌候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천부경도 들어있다. 즉 신뢰성은 없는 책이라는 이야기.)
[규원사화] 自檀儉神人開創鴻業, 歷四十七世, 一千一百九十五年. 檀君旣徙居阿斯達而國人猶推尊之, 諸侯亦無敢逼者. 或曰, 朴氏‧白氏, 皆其後裔, 而赫居世亦出於檀君之後云, 今文獻無徵, 未知其確矣. 自後, 諸侯頗以武力相競, 獨藍侯者出諸家之右, 時常役率羣后, 以行國政, 是爲列國焉.
[단전요의] 桓儉神人의 鴻業을 開創하심으로부터 傳世 47世오 歷1205年이리라 任儉이 旣히 阿斯達에 徙居한에 國人이 오히려 尊崇하고 諸侯가 敢히 逼하난 者 - 無하더라. 自後로 諸侯武功으로 相競하니이 列國이 되니라.
그 뒤 1928년 김광의 [대동사강]에 인용되었다. 이처럼 어떤 책이 세상에 나오면 다른 책에 의해서 인용되어 증거가 남게 마련이다.
[규원사화]는 이 무렵부터 알려졌는데, 이유립은 자신이 지은 [환단고기]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는 [규원사화]를 좌시할 수 없어서 [규원사화] 위서론을 전파했다.
“현전하는 규원사화는 윤덕영尹德榮이 대종교의 입장에서 원본 규원사화를 다소 개작한 것이며 1920년대 말경 시흥의 녹동서원에서 그것을 등사하여 판매하였다. 원본 규원사화는 삭주부사 권현權俔이 지은 것이며 그 사실은 <권현행장>에 나온다. 또 나 자신도 이 원본 규원사화와 행장을 본 일이 있다. 이 <권현행장>은 권현의 후손들에게 전해졌는데 지금은 같은 문중의 한학자인 권오돈(1983 작고)이 소장하고 있다.“
윤덕영은 순종비의 숙부로 일제강점 후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다. 국권침탈 때 순종비가 옥새를 치마 속에 숨겨 내놓지 않으려 하자 윤덕영이 빼앗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규원사화]가 윤덕영의 집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이병도도 한 바가 있다. 어쩌면 이 때문에 일부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규원사화]가 두 갈래 다른 길로 전승된 것이 아닐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유립의 말 자체가 거짓말이어서 권오돈 씨는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유립은 삭주 출신으로 한국사가 삭주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의 집안인 철성이씨 중심으로 한국고대사가 돌아가게 만든 것처럼.
그럼 [규원사화]에 대한 의문점을 검토해 보자. (거의 모든 부분을 Shaw님이 정리한 것을 업어옴. 출처는 [규원사화] 에 관한 몇 가지 의문점 [클릭] - 네이버 카페 가입자가 아니면 열람할 수 없음)
▶[규원사화] 의 출처 가운데는 고려 공민왕 때 사람인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썼다는 [진역유기] 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규원사화]<단군기> 에 인용된 [진역유기] 구절 가운데, 묘청의 주장에 따라 서경에 건립한 팔성당八聖堂을 설명한 대목을 보면 "다스린다" 는 의미로 治자를 쓰고 있다. 治자는 고려 성종의 이름이므로, 고려시대에는 이를 피휘하여 理자로 대신하는 것이 상례였다. [진역유기] 가 정말 청평 이명의 저작이라면 어째서 피휘하지 않았는가? (조인성,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한국사 시민강좌 2집, 1988)
▶[규원사화]<서문> 에서는 책의 저술 연대를 "지금 주상의 재위 2년 을묘(上之二年乙卯)" 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조선 중기 이후의 연조는 숙종 2년인 1675년 뿐이다. 그런데 역시 <서문> 에서, 저자인 북애자(北崖子, [규원사화] 저자는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는 "조상의 옛 땅이 적에게 넘어간지 이미 천년이다.(我先祖舊疆入于敵國者已千年)" 라며 한탄하고 있다. <단군기> 와 <만설> 에서 북애자는 일관되게 발해를 동족 국가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발해 멸망 연도인 926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저 문장이 쓰여진 시점은 1920년대가 된다.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년 가을)
▶[규원사화]<만설> 에는, 경주 첨성대가 건립된 지 "천 수백년이 지났다." 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 세워진 것이므로 [규원사화] 가 1675년에 나온 책이라면 "천 수백년" 이라는 표현은 사용할 수 없다.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년 가을)
▶[규원사화]<만설> 은 또한 청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禽永明而掃淸海內, 服諸汗而倂呑漠北 (영명(=남명 영력제)을 잡아 해내(=중국)를 깨끗이 하였고, 한汗들을 복속시켜 막북을 병탄하였다.)
여기에서 "막북" 은 보통 외몽고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막북" 의 개념이 혼동되기도 했으나, 제한諸汗이라는 말을 쓴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도 외몽고를 뜻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청나라가 외몽고를 평정한 일은 1690년대의 준가르부 토벌전(1690~1697)으로 인한 것이다. 북애자가 정말 1675년에 이 책을 썼다면, 그는 미래를 내다 본 것인가? 가만, 다시 생각해보니...III [클릭]
▶[규원사화]<단군기> 에서는, "백두산" 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으로 [고려사]의 "광종 10년에 압록강 바깥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 라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서 저 사건은 성종 10년이지 광종 10년이 아니다. 왜 이런 착오가 발생하였는가? 1823년에 완성된 [해동역사] 속편 지리고를 보면, 역시 백두산이 최초로 나오는 기록으로 저 기사를 들고 있는데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으로 쓰는 오류를 범하였다. 같은 오류가 독립적으로 발생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한 책이 다른 책을 참조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진서는 지리고에서, 남에게서 전해 들은 견해까지 포함하여 모든 출전을 명기하였다. 여기에 [규원사화]는 없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규원사화] 는 실은 1823년 이후에 나온 책으로, [해동역사]를 참조하여 쓰여졌을 것이다. (조인성, <재야사서 위서론>, 단군과 고조선사, 2000)
▶[규원사화]<단군기> 에서는, "부루(夫婁)" 와 "불우(弗虞)" 가 같은 음(音)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弗이 "불" 로 읽히는 것은 18세기 이후 원순모음화가 진행된 결과이고, 그 전에는 "블" 이라 발음되었으므로 [규원사화] 가 정말 1675년에 나온 책이라면 이와같은 말을 할 수 없다. 북애자님ㅠㅠ [클릭]
▶우리나라 역사서가 당나라 장수 이적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는 주장은 1777년의 이만운이 쓴 [기년아람]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규원사화]는 그보다 먼저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봤을까? [클릭]
▶이외에도 대종교에서 주장하는 조천朝天과 같은 용례의 사용 등 [규원사화]는 대종교의 교리를 이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朝天」[클릭]
그런데 위 증거들은 의혹은 가득하지만 어쨌든 변명의 여지가 조금씩 있다. 물론 이 정도로 많은 의혹이 쌓이면 더 이상 조선 후기 작품이라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런데 악질식민빠님은 아예 못을 박아버리고 있는데, 이제 그 결정적인 증거들을 악질식민빠님이 어떻게 검토했는지 살펴보자.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고 있어도... [클릭]
「등짝을 보자」[클릭]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하 내용은 악질식민빠님이 쓴 내용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나철은 단군교를 만들었다가 친일파들이 단군교로 침투하자 대종교로 이름을 바꾼다. 대종교의 2대 교주가 김교헌으로 그가 단군에 대한 내용을 쓴 것이 [신단실기神檀實記]다. 1914년에 나온 책이다. 즉 [규원사화]가 주장하는 시기보다는 늦게 나온 책이다. 그러나 [규원사화]가 실제로 목격되는 시점보다는 빨리 나온 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규원사화]에는 이 책의 내용과 같은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치하는 내용이 엉뚱하다. 단군의 인명이나 사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이 왜 중요한가?
만일 김교헌이 [규원사화]를 보았다면 단군에 대한 사적을 눈에 불을 켜고 찾던 그가 [규원사화]의 단군 이름을 비롯, 그 놀라운 사적들을 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전하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교헌은 [규원사화]라는 책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김교헌은 1923년에 [신단실기]를 보완한 [신단민사]를 내놓는데, 여기에도 [규원사화]의 핵심적 내용인 단군 인명과 사적은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 10년이 지나도록 단군에 대한 이 중요한 사실이 단군을 섬기고 있는 대종교에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쇼킹하지 않은가?
하지만 쇼킹할 것이 없다. [규원사화]가 김교헌의 책을 가지고 만들어진 위작이라면 모든 문제는 간명하게 해결이 된다. 이 [신단실기]는 매우 중요한데, 이후 만들어진 [환단고기] 등의 책에 자료로 분해되어 거의 완전히 흡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단실기] 삼신상제 부루 편에 나오는 부루단지와 업주가리가 [규원사화]에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
土器盛禾穀 置於檀上 編葺藁草掩之者 或稱業主嘉利
위에 적은 한문을 똑같이 쓰고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혹칭或稱” 앞에 “매 시월에 새 곡식을 담는다”는 말이 더 적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거로 이것이 있다.
[신단실기] 주신主神이 전 세계를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통치함에 있어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최고로 높은 하늘에 앉아서 지상에 있는 자는 모두 소신小神으로 하여금 쫓게 한다. 또 부여족이 논하여 말하기를 종교는 하늘에 절하는 것이니라 했다. <만주지滿州志>
이 글은 [규원사화] 조판기에도 들어 있다. [규원사화]는 주신主神 다음에 환인桓因이라는 말 하나만 더 넣었을 뿐,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이라는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신단실기]가 출전이 아니다. [신단실기]는 출전을 [만주지]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만주지]란 바로 [만주지지滿洲地誌]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주지지]는 1889년에 대일본제국육군참모본부가 편찬한 책이다. 이건 뭐 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일제육참본부의 책이 출전이니... 오 마이 갓!
앗, [만주지]가 [만주지지]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의문을 품을 분도 있겠다. 그것은 김교헌, 유근柳瑾, 박은식朴殷植이 편찬한 [단조사고檀祖事考]라는 책에 동일한 글의 출전이 [만주지지]라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11년에 발간되었다. (편찬자들이 모두 [규원사화] 출현 전에 돌아가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보일 정도다.)
저 주신主神 운운의 구절은 일본군부가 동시베리아 야쿠트족의 샤머니즘을 채록한 내용이다. 일본군부는 왜 야쿠트족의 샤머니즘까지 채록한 것인가? 일본군부는 한반도-만주-중국-시베리아 등을 점령할 광대한 야망을 가지고 이들 지역에 대한 사전 조사 중이었고 그것을 모아서 책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원래 [지나지지]의 한 편으로 기획되었으나 양이 많아지자 독립된 책으로 나온 것이었다. [단조고사], [신단실기] 등이 인용한 위 내용은 해당 책의 [종교] 편에 들어있으며, 이들은 샤머니즘을 불교의 흔적으로 이해했다.
샤머니즘을 불교의 흔적으로 이해했던 것은 일지日持(니치지) 上人(상인은 중이라는 뜻)이라는 일련종日蓮宗의 승려가 북해도-사할린을 거쳐 만주-화북으로 포교를 떠났다는 전설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샤머니즘에 대해서는 최남선이 깊이 정리해 놓은 내용이 있다. 최남선이 샤머니즘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이런 일들과 관계있는지 뒤에 한번 살펴보고 싶어진다.)
일지는 1250년생. 1295년 해외 포교에 뜻을 두고 북해도를 거쳐 해외로 갔다고 전해진다. 일본 군부는 이 중의 행적을 추적하였던 것이다. 이 중의 행적을 소개했다는 중리기암中里機庵(나카자토 키안)이라는 사람이 하는 짓거리는 이유립이 [환단고기]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와 똑같으니까 한번 보면 재밌을 것이다. (마에지마 신지의 글을 읽다가 [클릭])
악질식민빠님의 포스팅에 따르면 일본 군부가 이 설을 채록한 이후 일본육군보병중좌 수전이원守田利遠의 [만주지지滿洲地誌](1906)에서는 샤머니즘을 불교의 한 일파로 이해했다. 샤먼薩滿을 사문沙門(승려를 가리키는 말)이 변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점은 본 사건에서의 하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결국 일본 군부가 야쿠트 족의 신화를 채록한 것에 낚여서 만들어진 책이 [규원사화]인 셈이다. 이 신화를 [규원사화]가 도용한 이상 [규원사화]의 연대는 죽었다 깨나도 1889년 이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또한 [신단실기]를 베낀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1914년 위로도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고 [신단민사]에서도 고조선 역대 단군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23년 위로도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규원사화]는 1923년 이후에 작성된 책이다.







덧글
비안네 2007/12/07 04:13 # 답글
악질식민빠 님 블로그에 가서 모든 글을 천천히 읽어보았지요. 위서라고 생각이야 했지만, 설마 일본군부가 작성한 책이 원출전일 줄 누가 짐작이야 했겠습니까? 환빠들은 여전히 무시할 일이나, 식민빠들에게는 어이없다 못해 허무할 지경입니다.
Luthien 2007/12/07 04:49 # 답글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耿君 2007/12/07 08:40 # 답글
아 이렇게 정리되니까 뭔가 승리한 느낌이에요 ㅠㅠ (뭘까요 이 기분은)정리가 심히 완벽하여 감탄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공석 2007/12/07 08:56 # 답글
결국 이렇게 되면 금상 2년 을묘년의 미스테리는 영영 풀 수 없는게 되는군요. OTL1915년이 아니면 1975년이라는 얘기인데, 1975년은 떡밥이 발견된지 한참 이후이고..
역시 북애노인이 괜히 과거에 떨어진게 아니었나봅니다. (먼산)
야스페르츠 2007/12/07 10:15 # 답글
아아... 감동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대환국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과로소이다!
고전압 2007/12/07 10:57 # 답글
"국립중앙도서관이 1945년말에서 1946년 1월 사이에 김수일이라는 사람에게서 100원에 구입했다고 하며(국립중앙도서관의 개관일은 1945년 10월 15일), "이 부분에서 어안이벙벙해졌습니다 -_- 100원이라면 오늘날 물가 기준으로 따졌을 때 경차 한 대 가격 정도는 되지 않나요?
초록불 2007/12/07 11:03 # 답글
고전압님 / 음, 사실 저도 좀 의문스럽긴 합니다. 저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지 못해서 저런 표현을 썼습니다. 하지만 가격은 부차적인 문제겠지요. 구입시기는 번호로 볼 때 맞는 것 같습니다. 손진태의 필사본보다 번호가 빠르니까요.
Silverfang 2007/12/07 11:18 # 답글
이거,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과 그에 따르는 해결이 필요하다는 걸 생각하게 하네요. 여러모로 황당하다고 느끼는 중입니다.
瑞菜 2007/12/07 11:31 # 답글
가끔 드는 생각인데, 대종교가 물론 애국자인 나철이 망해가는 조국의 민족정신을 살리기 위해(사실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일본의 신도를 참고해서 만든 것인데.
일종의 애니미즘적 성격이 강한 종교인 신도가 에도시대 외국 문화에 대항하고자 연구된 기기로부터
바탕된 국학과 융합하여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바탕이 되고, 이후 국가신도화 되어
일본의 폭주의 원동력이 된 점을 생각하면 대종교에 대해서도 매우 마음에 걸립니다.
실제로 "한국의 국학"을 만드려는 자들과 국가 신도화 하려는 자들이 수없지 많지 않습니까.
(저는 일제의 가장 큰 폐혜가 바로 이민족의 침략에 의한 민족정신의 강조화라고 생각합니다.)
포더윙 2007/12/07 12:15 # 답글
재미있다!!!!!!저는 환단고기를 비롯, 규원사화 신단민사 신단실기 등등 90년대 초에 나온 뻘건책들을 다 사 봤습니다만, 이거 작금의 환빠지란이 평정되고 나면 도로 재미있게 탐구해 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어떤 자는 칼이나 육혈포나 폭탄을 품고 어떤 자는 소설이나 시를 쓰고 어떤 자는 장사를 하고 어떤 자는 위서를 만들었군요.
앨런비 2007/12/07 14:06 # 답글
이건 감동보다는......규원사화 너마저 OTL
개멍 2007/12/07 14:14 # 답글
다음 세대 국사책에 적힐 법한 내용이 제 눈앞의 이글루들에서 펼쳐지고 있는 느낌이네요. 감동적입니다.(그런데 국사책에는 아이디 말고 실명으로 적힐테니 누가 록불님이고 누가 식민빠 및 Shaw 님인지 모를거 같다는... )
2007/12/07 14:34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초록불 2007/12/07 14:44 # 답글
비밀글 / 네, 수정해 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블루 2007/12/07 15:46 # 답글
저는 "보기"를 누르면 왜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걸까요? ㅠㅠ
zert 2007/12/07 15:49 # 답글
저도 "보기"를 눌러도 아무것도 안나옵니다 OTL
초록불 2007/12/07 16:23 # 답글
문제가 있었네요, 그냥 펼쳐 놓았습니다.
아롱쿠스 2007/12/07 18:00 # 답글
"지금 주상의 재위 2년 을묘(上之二年乙卯)" 가 혹시 1927년은 아닐까요?1927년은 소화(쇼와) 2년입니다.
맞다면 감히 히로히토를 '우리 주상'이라 칭한 셈이네요...
(헌데,1927년은 '을묘'가 아닌 '정묘'라 그냥 헛추측인것도 같구^^...)
이루아드 2007/12/07 19:04 # 답글
역시 조사하면 다 나오는 건가요.규원사화는 판단을 보류했었는데 이젠 위서라고 볼 수 밖에..
초록불 2007/12/07 23:24 # 답글
아롱쿠스님 / 그렇진 않을 겁니다. 악질식민빠님도 추측하다시피, 규원사화는 나름 열혈우국지사가 지은 것 같습니다.
루드라 2007/12/08 00:09 # 답글
정리되니까 보기 좋군요. 감사합니다.물론 악질식민빠님께는 오체투지했습니다. ^^
루드라 2007/12/08 00:21 # 답글
고전압 // 당시 100원이 그런 큰 돈은 아닐 겁니다. 당시에 일본이 패망한 뒤에 조선은행권을 마구 찍어내어(당시 총 통화량의 5배) 인플레가 심하기도 했고 그 이전 망하기 전에도 그 정도 큰 가치는 아니었을 겁니다.이보다 조금 뒤의 기록에 1달러 900원 쌀 한 가마에 2달러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100원이면 대략 쌀 5-6되 정도 되겠네요. 고서 한 권의 가격으로 적당한 가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르핀 2007/12/08 00:39 # 답글
헐... 한번에 뻥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이 묘한 슬픔은 뭘까요; 뭐랄까, 조금 가슴이 아픕니다.(..)p. s. 악질식민빠님, 초록불님, Shaw님, 講壇走狗님 블로그 글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었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초록불 2007/12/08 00:44 # 답글
루드라님 / 그렇군요.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군요.아르핀님 /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뿌려진 환독 제거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지요. 대동여지도가 화폐 도안에 들어간다고 XX대는 놈들을 보면... -_-;;
2007/12/08 07:0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초록불 2007/12/08 10:29 # 답글
비밀글 / 수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비의바람 2007/12/08 14:03 # 답글
1년전쯤인가 저희과 교수님은 규원사화는 진본이라고 주장하시던데 수업끝나고 몇몇 학우들과 저게 왜 진본이냐고 얘기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규원사화도 위서라고 하니 왠지 기분이 묘합니다(;;;)
초록불 2007/12/09 01:30 # 답글
나비의바람님 / 가능하시다면 교수님께도 일독을 권해 주십시오.
多勿 2008/01/25 13:21 # 답글
여러분,대단히 기쁘시겠사옵니다.
마지막 남은 규원사화 마저 위서로 맹글어 버렸으니,,,,
마치 승전고를 울리고 금의환향하는 전사들 같은 기분을 내시는데,
뭐가 그리 신이 납니까?
ㅎㅎㅎ
그러나 여러분이 틀렸사옵니다.
누가 뭐래도 '古貴629(古2105-1) 본'은 진본이옵니다.
그것이 북애자의 친필진본이든 아님 그 진본을 그대로 필사를 했든.
1920년대 이후에 만든 위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 연대는 1972년 손보기, 이가원, 임창순 이 세분이 인정을 했으니.
글고,
위서라고 주장하는 부분들의 주장이 미흡하옵니다.
첫째 '治자는 고려 성종의 이름이므로 고려시대에는 쓸 수가 없다?
아니죠, 청평 이명은 고려말 사람으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산속에 거하는 도인인데 굳이 세속의 예를 따를까? 오바입니다.^^
둘째 "조상의 옛 땅이 적에게 넘어간지 이미 천년이다.(我先祖舊疆入于敵國者已千年)
이것은 당근 고구려의 멸망으로 부터 천년이라는 말이지 발해는 아니죠. 이것도 오바.^^
셋째 첨성대 축조연대가 틀렸다?
ㅎㅎㅎ
그렇게 널리 알려진 연대가 위서에서는 틀릴 수가 없죠.
도둑질을 하자면 사전 준비가 철저하듯,,,,^^
넷째 해동역사에 틀린 연대를 똑같이 틀렸다?
ㅎㅎㅎ 규원사화는 스스로의 생각으로, 해동역사는 다른 실학자의 의견으로 적고 있을 뿐입니다.
해동역사가 규원사화를 보고 배껴썼을거라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기사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들만 보려고 하는 습성이 있으니,,,
다섯째 왜 그 전에는 알려지지 않다가 1920년대에 봇물터지듯 규원사화 얘기가 나왔느냐?
20세기 초 단군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고 깊숙히 감추어 두었던 소장자들이 책을 공개 했으며 이전보다 매스컴의 발달로 대중들에 알려져 여러 곳에서 나왔다면?
쪽바리나 짱께들은 관민이 합동으로 지네 역사 왜곡에 바쁜데,
우째 울나라 여러분들은 있던 역사를 없앨려고 그리 광분을 하시는지???
초록불 2008/01/25 13:40 # 답글
多勿님 / 안 되셨지만 포스팅에서 문제로 삼고 있는 핵심 부분에는 전혀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네요. 완패되시겠습니다. 포스팅을 다시 읽어보고 합당한 반론이 생각나시면 귀하의 블로그에 글을 쓰고 제 포스팅에 트랙백 걸기 바랍니다. 똑같은 이야기 반복할 경우 삭제합니다.
多勿 2008/01/25 14:36 # 답글
초록불님/뭐가 핵심 부분인가요?
막북, 천주란 용어 아니면 "부루(夫婁)" 와 "불우(弗虞)" 가 같은 음(音)이라는 지적?
그것도 아니면 대종교와 관련 유무?
아래 위서 논쟁을 소개합니다.
어쨋든 20세기의 위서들이 숙종조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지 않았다면 진본입니다.^^
http://blog.empas.com/jaauuu/3605060
초록불 2008/01/25 15:01 # 답글
多勿님 / 역시 이해력이 떨어지시는군요. 모두 10가지의 논증이 제기되어 있습니다. 多勿님은 그 중 5가지만 설득력 없는 반론을 펼치셨고요. 어쩜 글을 읽어도 맨날 그렇게 반토막만 읽습니까?
多勿 2008/01/25 15:12 # 답글
초록불님/그렇군요 정말 제가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을,,,,^^
다섯가지는 설득력은 없지만 반론을 펼치기는 펼쳤군요.
그런데 그게 그거고 또진갯진인 막북, 천주, 부루, 대종교, 신단실기를 얘기 거론했는데 그럼 10가지 다 맞습니까?
글고 제가 링크를 걸어드린 곳은 가 보셨는지요?
거기에 너무나 설득력있는 반론이 있어서,,,^^
Shaw 2008/01/25 15:17 # 답글
多勿이 하는 얘기들은 벌써 예전에 곰돌이님이 다 하셨던 것... 이미 검토가 다 끝난 것들.
초록불 2008/01/25 15:20 # 답글
多勿님 / Shaw님도 이야기하셨지만 그건 다 옛날 이야기죠. 그리고 거기에도 새로 거론된 부분에 대한 반론이 없는 건 마찬가지죠. 국내에서의 비판도 이기지 못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동북공정에 써먹는다는 야심찬 계획 같은 건 집어치우세요.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국제적인 망신만 하게 되고, 상대의 논리가 더 그럴듯하게 보이게 해주는 [이적행위]를 하게 되니까요. 어려운 이야기라 이해를 하실지 모르겠군요.
多勿 2008/01/25 15:21 # 답글
예전에 곰돌이님이 다 하셨으면,검토가 다 끝났으면,
왜들 이렇게 승전보를 울리고 샴페인을 터트리고 하십니까?
이해가 안되네요.^^
초록불 2008/01/25 15:24 # 답글
多勿님 / 이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多勿님의 이해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Shaw 2008/01/25 15:24 # 답글
방금 多勿의 발언은 캡쳐감이네효.
多勿 2008/01/25 15:56 # 답글
Shaw /ㅎㅎㅎ
외눈박이는 성한 사람을 보고 뭐라 그러겠는지 아는감?
Shaw 2008/01/25 17:01 # 답글
多勿/ 지금 이거 그대로 캡쳐했다. 너무 놀라서...
多勿 2008/01/25 17:07 # 답글
놀고있네.Shaw 토끼간인가 그만한 일에 놀래기는,,,
초록불 2008/01/25 17:17 # 답글
多勿님 / 제 블로그를 님 낙서장으로 한번만 더 이용하면 댓글 금지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본인 블로그에서 하세요.
2008/01/25 18:15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초록불 2008/01/25 18:15 # 답글
비밀글 / 천만의 말씀입니다...^^;;
2008/01/25 19:50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초록불 2008/01/25 19:54 # 답글
비밀글 / 저 분만 그런 게 아니라, 저 계통의 사람들은 다 저 모양입니다.
sharkman 2008/01/25 20:07 # 답글
그래도 '초록불이라는 아이'라고는 안불렀네요.
초록불 2008/01/25 20:34 # 답글
재원님 / 뭐라 부르건 신경 안 쓰고 있습니다...^^;;
2008/08/02 20:52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초록불 2008/08/02 21:42 #
그 말의 출전은 조인성 교수의 논문 <揆園史話論添補> (1987.3 [慶大史學] 제3집 p.174 註12)에 나오는 것으로, 이유립으로부터 규원사화는 위서이며 그것은 삭주부사 권현이 지어서 권현행장에 있으며 이유립 자신이 그것을 보았으며 행장이 후손인 한학자 권오돈에게 있다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정영훈 교수에게 직접 말했으며, 그 때문에 정영훈 교수가 한학자 권오돈을 만나 이 사실을 물어보았으나 권오돈은 금시초문이라 대답했다는 것이 해당 요지입니다. 이것은 재야사가 이상시에 의해서 <한배달> 창간호에도 실렸고, 그의 저작인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에도 실렸으며 그동안 누구도 반론하지 않았습니다.
2008/08/03 05:5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2008/12/06 15:49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초록불 2008/12/06 15:58 #
없습니다.http://orumi.egloos.com/2668370
포스팅을 참조하시고요.위 책은 숙대 도서관에서 전자열람도 가능합니다. 해당 포스팅을 연결해 드리려 했는데, 이번 이글루스 사태 때문에 이삿짐 싸면서 치워버리셨네요.
책사풍후 2009/03/01 03:58 # 답글
http://bluecabin.com.ne.kr/kyuwon/kyogamki1.htm당신이 걸어놓은 링크를 읽어보니 교감기의 저자의 왈은 규원사화를 위서라고 단정해선안된다.
라고 했는데?
왜 당신하고 주장의 목적이 다른 사람의 글을 당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올리오?
단장취의군? ㅎ
초록불 2009/03/01 09:57 #
니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
자유새 2009/09/06 21:25 # 답글
악질식민빠님의 글을 보았는데 조금 억지스런 면이 있어 보이네요.이럴수도 있겠다 정도라면 수긍이 가지만 결정적인 뭣은 아닌듯합니다.먼저 조판기의 서두와 신단실기의 서두가 같은 문장이고 신
단실기의 기반이 되는 것이 단조사고이며 단조사고중의 일부가 일본 육참에서 편찬한 만주지지라
는 것이 내용인데,악질식민빠님이 글에 쓰셨듯이 만주지지는 상당히 객관적인 내용이라 평하셨데요.
문제의 만주지지에서 인용된 내용을 보면 상당히 인용적인 내용이라 일부분들이 같을 수도 있다라
고 생각되요.같은 주제를 얘기하는 마당에 또한 누군가에 의해 전해 듣는 이야기를 적는 입장에서
같은 문장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거죠.물론 단조사고라면 분명 만주지지라는 책을 인용했으므로
그 선후는 분명하다 하겠습니다만, 이 또한 학문적 의미에서 본다면 그렇게 지탄 받을 내용은 아
닙니다.
초록불 2009/09/06 21:35 #
(1) 똑같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고 그걸 적으라고 해보신다면 똑같이 적는 아이들이 있을까요?(2) 야쿠트 족과 우리가 무슨 관계기에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그 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매식자붙이 2009/09/06 21:38 #
그게 제 글의 댓글에서도 밝혔듯이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전사의 문제인지라.정확히 말하면 단조사고는 만주지지의 그 일본어 문장을 한문으로 '잘못' 옮겼습죠.
신단실기와 규원사화는 그 조금 틀린 문장을 그대로 받아적고 있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순서가 확연해지는 것입니다. 교감의 기본...에 해당하는 것입죠.
달빛물감 2009/10/16 20:37 # 답글
초록불님 좋은글 잘봤습니다.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링크거신 http://bluecabin.com.ne.kr/kyuwon/kyogamki1.htm 를 봤더니,
국립중앙도서관소장본(貴629, 古2105-1)의 북애노인 친필 여부에 관하여는
'친필 원본 아니다'라고 확인하였지만,
서지학자이자 국립도서관에서 고서를 전문으로 다루고 있는 장지연씨가
지질(紙質)을 확인한바에 의하면 조선 중기의 것임에는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위 링크된 글의 요지는, '책은 조선 중기에 작성, 그러나 필사본'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초록불님의 정리글 중 그 링크 줄 아래를 읽어보면 또 '어라?' 하는 혼란에 빠집니다.
제가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는거 같은데, 혹시나 시간 되시어 이 댓글을 보신다면
귀찮으시더라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좋은 주말 보내세요!
초록불 2009/10/16 20:58 #
저는 저 감정 결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감정하신 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해당 링크에 있는 이야기말고는 다른 정보도 본 적이 없습니다.
유사매식자 2009/10/16 23:03 #
지질(紙質)이 조선 중기의 것이라는 얘기는 어떤 감정을 거쳤다기보단 한뿌리 쪽에서 전언(傳言)의 형태로 나온 얘기입니다. 이른바 '...카더라'.
달빛물감 2009/10/17 12:14 #
저도 논란의 중요인물이라 판단되는 '장지연'씨에 대하여 찾아봤으나제대로된 자료 하나 없이 '카더라' 통신이더군요.
그리고 김성구 씨를 통해 '지질' 조사에 대한 진위 여부를 묻고자 하였으나,
자세한 인적사항을 몰라서 인물을 특정하지를 못했습니다.
유사매식자님 말대로 '한배달(?)'이라는 단체에서 발표한 것이지,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발표한건 아니더라구요.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