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백제, 고구려, 왜와 모두 화친을 맺고자 노력했는데, 그것은 이들이 평화를 사랑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약한 나라였기 때문에 벌인 일이었다.
신라의 가장 오래된 숙적은 일본이었다. 아직은 왜倭라고 불리는 이들이 신라 역사상 가장 먼저 나타난 외적外敵이었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는 상당한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기록을 남긴 최초의 왜적은 박혁거세의 성덕에 굴복하여 물러났다. 이런 박혁거세를 흠모하여 신라에 귀부한 왜인도 있었다. 그는 신라 최초의 외교관으로 이름은 호공瓠公이었다.
그러나 왜적의 침입은 그치지 않았다. 왜적에 시달리다 못해, 왜적이 온다는 소문만 돌아도 공포가 서라벌을 휩쓸었다.
123년, 지마 이사금 때 왜국과 화친에 성공했다. 백제와는 이미 파사왕 때(105년) 화친한 바 있었다. 60년간 지속되었던 백제와의 평화는 165년 깨졌다. 이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백제로 달아났다. 신라는 죄인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백제는 거부했고, 결국 이 일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백제는 화친을 청했지만 신라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왜와 화친을 이루었기 때문에 대백제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와의 평화도 결국 깨졌다. 208년 왜적이 노략질을 시작했다. 왜적은 금성을 포위공격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백제와 왜에 시달리는데, 고구려까지 신라를 공격했다. 248년, 첨해왕 2년에 고구려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왜국과도 화친을 기도했으나, 뻣뻣한 성질의 장군 석우로는 그런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머지 않아 너희 국왕을 소금 굽는 종으로 만들고 왕비는 밥짓는 여자로 만드리라."
이 말에 격노한 왜왕은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249년 석우로는 입방정의 책임을 지고 왜적에게 나아가 화형을 당했다. 석우로의 죽음으로도 왜와는 화친을 할 수는 없었지만 왜는 당분간 신라를 괴롭히지 않았다. 286년 신라는 백제와 화친을 하고 왜적과의 싸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부터 왜의 공세가 드세진 것으로 삼국사기는 전하는데, 왜의 공세가 드세졌기 때문에 백제와 화친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백제는 261년에도 화친을 청했지만 신라가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295년, 유례 이사금은 바다를 건너 왜를 칠 계획을 세웠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포기하고 말았다. 백제를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다면 왜와 화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300년, 기림 이사금은 왜와 화친을 맺었고, 312년 흘해 이사금은 아찬의 딸을 왜에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흘해 이사금은 왜적이 불태워 죽인 석우로의 아들이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나이에 아버지가 불에 타 죽는 것을 보아야했던 흘해 이사금이 이런 일을 좋아했을 리는 만무하다. 흘해 이사금 35년, 왜는 또 신라의 딸을 청했으나 흘해는 여자를 보내지 않았다. 다음 해(345년) 흘해 이사금은 왜와 수교를 단절했다. 이로써 45년간의 해빙 무드는 사라지고 말았다.
373년, 내물왕 18년에 과거와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백제 독산성주가 신라에 투항했고, 백제는 그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거부했고,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백제와의 화친도 깨졌다. 이제 신라는 또다시 백제와 왜, 두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391년 왜는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고구려 뿐이었다. 하지만 고구려가 왜 신라를 위해 움직이겠는가? 신라는 약속의 징표로 볼모를 보냈다. 미추 이사금의 동생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낸 것이다. 내물 이사금은 미추 이사금의 동생 말구의 아들이고, 실성과는 사촌지간이다. 둘 다 어머니는 석씨 집안 사람이었다.
왜적의 공격은 날로 거세어졌다. 내물 이사금은 정면충돌을 피하고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을 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왜적이 물러나면 그 뒤를 쫓아 공격했다.
고구려는 당장 신라를 구원해 주지는 않았다. 고구려는 백제부터 공격했다. 왜가 이때 백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고구려가 왜를 트집 잡아 백제를 쳤다는 사실이다. 백제는 고구려 군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백제의 아신왕은 당장 왜와 손을 잡았다. 왜의 영향력을 제거하고자 출동했다던 고구려 군의 위상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었다. 아신왕은 왜에 태자 전지를 보낼 정도로 왜와의 협력을 갈구했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신라와 왜, 두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이 경우 누가 보더라도 왜와 손을 잡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왜는 이미 신라를 궤멸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었으니까.
이 마당에 백제가 왜와 손을 잡은 것은 신라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신라는 고구려에 긴급 구원을 요청했고, 고구려는 보기 5만의 군사를 보내 그 부름에 응답해 주었다. 고구려 군은 신라로 쳐들어온 왜적을 몰아냈고, 그들을 임나가라까지 추격하여 섬멸했다. 이제 고구려의 영향력은 신라 안에서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런 과정을 은유적인 말로 감춰놓았다.
45년(400년) 가을 8월에 살별이 동쪽에 나타났다. 겨울 10월에 왕이 타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었다.
살별이 언제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이번에는 왜와의 전쟁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왕의 말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왕이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의 왜곡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었다.
이렇게 암담한 처지에 시작된 세기가 신라의 5세기였다.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세월이었다.
401년 고구려의 위세를 등에 업고 볼모였던 실성이 돌아왔다. 다음해, 우연인지는 몰라도 연로한 내물왕이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죽었다. 실성은 왕위에 올랐다. 실성이 왕위를 차지한 뒷배경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겠다.
실성이 비록 고구려의 위세를 빌려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실성도 자기 나름대로 원대한 뜻이 있었다. 실성은 우선 왜와 화친을 추구했다. 내물 이사금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제공했다. 전왕의 아들을 볼모로 제공했으니 나름 성의를 보인 셈이다.
이 시기, 백제는 왜와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404년, 아신왕은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다. 광개토대왕은 즉각 군사를 보내 백제-왜 연합군을 박살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신라는 여전히 왜적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성 이사금 4년, 실성 이사금 6년에 계속 왜적이 공격을 했던 것이다. 이 습격으로 왜적도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그럼 대체 볼모로 간 미사흔은 어찌 된 것일까? 그리고 왜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함과 동시에 신라를 습격할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유지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실성왕 7년(408년)의 기사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실성 이사금은 왜가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신라를 침공하고자 한다는 첩보를 받고 선수를 쳐서 대마도를 정벌하고자 한다. 대마도는 후대에도 그렇지만, 이 시기에도 해적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실성 이사금 대에 신라를 공격하고 있던 왜적은 왜국의 군사가 아니라, 대마도를 근거로 하고 있는 왜구였던 것이 아닐까?
이 무렵 아신왕이 죽고(405년), 왜에 있던 태자 전지가 백제의 왕이 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아신왕의 막내가 둘째를 죽이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전지는 호위병으로 따라온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반란을 선동했고, 왜인들은 전지를 지켜줌으로써 백제 내에서 왜의 입지를 한층 더 굳건하게 만들어냈다.
백제와 왜의 결속은 실성에게는 더 큰 위협이었다. 실성은 내물왕의 또 다른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삼국유사를 따르면 복호가 고구려에 볼모로 간 것은 눌지왕 때 장수왕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원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실성은 나이가 들었고, 왕위는 내물 이사금의 장남인 눌지에게 넘어갈 공산이 컸다. 실성은 여기서 무리수를 두고 만다. 고구려 군에게 눌지의 제거를 의뢰한 것이다.
실성은 눌지에게 부계로는 5촌 당숙이 되지만, 눌지의 어머니가 실성의 부인과 자매간으로 실성은 눌지의 이모부이기도 하며, 눌지의 아내는 실성의 딸이므로 장인-사위 간이기도 한, 매우 복잡한 관계였다. (신라의 왕실은 대개 이 모양이지만...)
실성은 본래 왕위에 오를 사람이 아니었으나 고구려의 위세로 왕위에 올랐고, 그만큼 기존의 귀족들에게 큰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실성의 모계도 다른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대 왕조인 석씨 집안이기는 해도 한미한 집안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눌지는 정통 가문의 적장자로 실성과 맞먹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성이 자신의 힘으로 눌지를 제거하지 못하고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한 시점에서 실성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를 보면, 노쇠한 실성은 정권 지지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눌지는 탄탄한 기반에 젊었다. 실성의 뒤를 봐주느니 차라리 눌지를 편들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 백번 유리한 상황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그런 결정을 내렸다. 실성을 버리고 눌지를 택한 것이다.
눌지는 왕위에 오르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복호를 찾아왔다. 삼국유사에서는 복호를 찾아오는 과정에서 속임수를 쓰고, 복호가 덕이 있어서 고구려 군사가 빈 화살을 쏘아서 그가 살아돌아왔다고 말하지만, 이 경우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박제상은 장수왕에게 양국의 이해관계를 들어 복호를 돌려주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고구려를 속여서 분노를 샀다면 왜에 있는 미사흔을 찾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제상이 왜에 갔을 때, 백제인이 참소하기를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칠 것이라고 했다. 왜왕이 신라 국경을 정탐하게 했는데, 이들은 신라에 진주하고 있던 고구려 군에게 걸려 박살이 났던 모양이다. 이때 눌지는 박제상과 미사흔의 가족을 옥에 가두어 그들이 신라를 배반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왜왕은 이에 속아서 박제상을 신임하게 되었다. 왜는 박제상과 미사흔을 향도로 삼아 신라 침공을 계획했다. 아마도 이들이 대마도에 도달했을 때 탈주가 일어났던 것 같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떠나 보내고 자신은 홀로 남아 미사흔이 아직 남아있는 것처럼 꾸몄다.
이 모든 일은 고구려와 우호 관계가 지속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박제상이 고구려를 설득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고구려는 이때 후연과의 전쟁이 한참이었다. 402년 숙군성을 함락시켰고, 405년에는 역습을 받아 요동성이 함락될 뻔 하기도 했다. 북방의 전세가 긴급했으므로 고구려는 신라 쪽에는 큰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이것은 신라에게는 기회였을 것이다. 고구려 군이 언제 신라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눌지 초년 경에 떠나간 것이 분명하다. 눌지는 재위 8년(424년)에 고구려에 예물을 보냈는데, 이런 기록이 따로 남은 것은 고구려 군이 신라를 떠났다는 증거라 생각한다.
눌지는 재위 17년(433년)에 백제와 화친한다. 고구려와 철천지 원수 지간인(백제는 고구려의 왕을 죽인 바 있는 불공대천의 원수다. 훗날 장수왕은 개로왕을 죽임으로써 이 빚을 갚는다.) 백제와 화친함으로써 반 고구려 정서를 드러냈다.
백제와는 화친했지만 왜와는 여전히 적대 관계였다. 444년 왜적은 금성을 열흘이나 포위 공격했다. 물러가는 적을 추격했던 눌지는 역습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여전히 신라를 한수 아래의 속국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는 남의 영토임에도 그곳에 들어가 사냥을 즐기곤 했다. 신라 하슬라 성주 삼직은 그런 고구려 장수를 잡아죽이고 말았다.(450년) 반 고구려 정서가 표면화 한 것이다.
장수왕은 당장 군사를 일으키고 신라를 응징했다. 아직은 고구려 군이 두려웠던 눌지는 몸을 낮추고 사죄했다. 장수왕은 정벌을 중지했다. 이것이 신라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저들도 사실은 신라를 만만히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만 셈이었다.
장수왕은 신라의 태도가 고쳐지지 않는 것을 알고 다음 해 정벌군을 다시 일으켰다. 신라는 이제 공공연히 고구려에게 반기를 들었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쳤을 때 신라가 원군을 보낸 것이다.
458년, 42년간이나 왕위를 지켰던 눌지가 세상을 떠났다.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으로부터 신라를 벗어나게 한 이 위대한 왕을 마립간이라 불렀다.
눌지 마립간이 맺은 신라와 백제의 화친은 진흥왕의 배반이 있기까지 120년 이상 지속되었다. 왜적의 침입은 더욱 심해졌지만 백제와 화친으로 안정을 찾은 신라는 왜적 격퇴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500년, 소지 마립간 때의 침공을 끝으로 왜적의 침공은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5세기가 끝났다.







덧글
날씨좋다 2008/01/06 22:50 # 답글
이랬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걸보니 대단하네요...
dunkbear 2008/01/06 22:53 # 답글
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1세기였네요....
francisco 2008/01/06 23:08 # 답글
흐음..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고 평야도 부족한 경상도 동남부 지방에서 숱한 외침을 받아가면서 국력을 길렀다는 것이 신기에 가까운 일이로군요. 신라의 6세기도 한 번 기술해주시면 좋겠네요^^
제갈교 2008/01/06 23:21 # 답글
삼국 중 가장 약하던 나라가 삼한통일이라니, 역사는 두고 봐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초록불 2008/01/06 23:26 # 답글
날씨좋다님 / 기적적인 일이죠...^^;;dunkbear님 / 동시에 두 적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죠.
francisco님 / 6세기라... 신라, 배반의 6세기 정도 되겠군요.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초록불 2008/01/06 23:26 # 답글
제갈교님 / 그러니 이명박이 대통령 되었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먼산)
르-미르 2008/01/06 23:54 # 답글
파라만장하군요. 아니 풍전등화 그 자체였군요;저랬던 나라가 통일을 하다니, 역사는 예측할 수가 없군요.
아롱쿠스 2008/01/07 00:22 # 답글
초록불님, 오류 하나 지적합니다.눌지는 실성에게 부계로는 5촌 당숙이 되지만, 눌지의 어머니가 실성의 부인과 자매간으로 실성은 눌지의 이모부이기도 하며, 눌지의 아내는 실성의 딸이므로 장인-사위 간이기도 한, 매우 복잡한 관계였다. (신라의 왕실은 대개 이 모양이지만...)
실성이 눌지의 당숙이 아닌지요??
kalay 2008/01/07 00:22 # 답글
엔간한 데 가서 이런 얘기 하면 욕먹지만, 제가 그래서 신라를 좋아합니다.'군사력'이 전부가 아니란 걸 너무 잘 보여줘서요.
네비아찌 2008/01/07 00:38 # 답글
역시 왜와 한반도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군요.예전에 고람거사님이 자기 이글루에서 주장하신 것들을 보니 일본의 임나일본부 주장에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하던데, 이정도의 관계였다면 왜가 '백잔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자칭할 만 하겠습니다.
초록불 2008/01/07 00:47 # 답글
아롱쿠스님 / 맞습니다. 제가 헛갈려버렸군요...^^;;kalay님 /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신라빠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제 첫 소설책의 절반 이상이 백제가 배경인 역사단편인데 말입니다...^^;;
네비아찌님 / 임나일본부 관계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만, 왜가 당시에 그런 허풍을 치고 다닐 수는 있었겠죠.
朴下史湯 2008/01/07 01:28 # 답글
뭐 열도와 반도의 상황은 그런거 아니었겠습니까? 당장 똥줄에 도폭선 꽂혀서 타들어가는건 반도 나라들이고, 열도 나라는 멀찍이서 구경좀 하다가 도와달라고 바치는 물건들 받아먹으면 되는 거고요. 바깥 일에 너무 관여하다가 백강에서는 3만명 털렸지만서도....
청수정 2008/01/07 08:10 # 답글
5세기는 그야말로 스릴있는 시대였군요 -_-;;;
上杉謙信 2008/01/07 09:16 # 답글
어떻게 된건지 요새는 신라와 조선을 까면 지가 잘난줄 아는 사람들이 보여서 안습입니다......적어도 초록불님이 기술하신 상기의 글처럼 신라도 참 끈질긴 나라였단 말입니다....ㅡㅡ
초록불 2008/01/07 09:58 # 답글
청수정님 / 아무튼 광개토대왕이 버티고 있는 시기였으니까요. 태왕사신기 같은 엉터리 판타지를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는 시대였다는 말이죠.
야스페르츠 2008/01/07 10:09 # 답글
역쉬...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니깐 흥미진진한 한세기가 나타나는군요... 삼국사기를 읽을 적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재미가... ㅎㄷㄷ
운다인시언 2008/01/07 11:11 # 답글
신라로써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5세기였군요.
아롱쿠스 2008/01/07 12:03 # 답글
눌지(訥知)아재... 이름은 어리석어 보이나, 참 지혜로왔던 사람이군요. 그덕분에 신라는 살아남아 통일도 하구...
marlowe 2008/01/07 18:33 # 답글
적을 분열시켜 아군을 늘리는 게 상책이군요.(그걸 정반대로 하다 피 본 분도 계시지만...)
구민 2008/01/07 19:46 # 답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이런 드라마틱한 면 때문에 신라 역사를 좋아하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스릴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그럼 6세기 편도 부탁드립니다~(어느새 기정사실화)
아무로 2008/01/07 23:33 # 답글
우왕ㅋ굳ㅋ..가 절로 나옵니다. 전 이렇게 재미있게 써 놓은 신라사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배반의 6세기 편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초록불 2008/01/07 23:39 # 답글
아무로님 / 고맙습니다. 안 쓸 수가 없게 만드시는군요...^^;;
루드라 2008/01/08 00:20 # 답글
백제가 왜와 손을 잡은 시기와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시기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군요.임라로 추정되는 김해 지역과 왜와의 관계도 궁금하고 하여간 이 시기의 역사는 정말 한일간의 골이 완전히 제거되든가 해야 보다 객관적으로 연구할 풍투가 만들어질 거 같네요. 아무리 봐도 이 시기 신라에게 왜는 고구려 백제와 별 차이없는 옆나라 중 하나 아니었나 싶습니다.
초록불 2008/01/08 00:44 # 답글
루드라님 / 윗글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신라를 친 왜는 대마도의 해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Dataman 2008/01/08 01:41 # 답글
100년이면 무슨 짓이든 벌일 수 있죠. 1850~1950년 사이 유럽대륙이 어떻게 지지고 볶았나...를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위와 같은 속칭 찌질한 생존행보를 벌이던 신라가 기실 그 전에 5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경탄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일본은 어떻게 된 나라이기에 그 시기에 내란이 그리 적었는가 하는 것도 하나의 미스터리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규슈 하나만 해도 대략 저 시기 백제-신라 합친 것보다 큽니다.
헤온 2008/01/08 23:49 # 답글
그러고 보니 전국시대에 지들끼리 못 죽여서 안달이던 걸 생각해보면 저 시기에 열도가 어찌 그리 조용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군요.
앨런비 2008/01/09 09:52 # 답글
개인적으로 신라와 한바탕 하던 왜가 이즈모나 큐슈의 제호족 세력들이 아닌가 합니다-_-;야마토는 이즈모부터 멸망시키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으니(일본서기는 신화로 4세기경 멸망을 은유하는데, 들어보니 고사기는 같은 신화를 건국신화라고 한다고 하더군요-_-; 고사기는 아직 안 읽어봐서;;)
사실 왜가 이렇게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할수 있었던것은 절대적인 국력보다는, 해적질이라는 특수한 행동으로 봐야하지 않냐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개인적으로 5세기경 왜구가 사라진것은 신라의 국력이 다시 강해진것도 있지만, 왜의 통일로 잡다한 왜구 세력들이 사라지는게 아닌가 합니다
초록불 2008/01/09 10:24 # 답글
앨런비님 / 저도 대략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사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Kimbros 2008/01/10 05:23 # 답글
요즘 나오는 고구려 관련 드라마를 우연히 왔는데 민족이 어쩌고 하면서 연개소문이랑 김유신이었던가 같이 만나가지고 삼한은 하나! 어쩌고 막 그러던데 개인적으로는 좀 믿어지지 않는군요.백제가 고구려 유민이라는 건국신화는 있지만 당시에 그런 개념이 신라에게도 있었을까요.
그냥 좀 궁금해 지는군요.
잉글랜드가 웨일즈를 지배한것도 약 1000년전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 웨일즈는 다른 나라라는 개념이
있는데(오히려 분리운동이 활발한거 같고) 당시 신라에게 있어서는 고구려나 신라도 왜와 같은 존재였던거 아닐가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런 소리 하면 안되는 건가...그냥 단순한 의문인데...
초록불 2008/01/10 09:26 # 답글
Kimbros님 /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겠죠. 그런 장면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장면입니다. 가령 중국 드라마에서 전국시대의 왕이 서로 만나 중국은 하나! 어쩌고 막 그러는 장면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건 뭐, 김유신이 민노당 NL도 아니고...
굔군 2008/02/03 16:12 # 답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런 과정을 은유적인 말로 감춰놓았다.45년(400년) 가을 8월에 살별이 동쪽에 나타났다. 겨울 10월에 왕이 타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었다.
살별이 언제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이번에는 왜와의 전쟁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왕의 말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왕이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의 왜곡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손아귀에 들어간 셈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희진 씨의 <거짓과 오만의 역사>에 이런 말이 있군요.
"비 때문에 군대가 돌아갔다"든가 "왕의 말이 무릎을 꿇고 슬피 울었다"는 문구가 신라의 패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펼친다. 삼국사기를 마치 독재 정권 하에서 핍박받는 언론 기사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신라 측이 남긴 기록 위주로 쓰여졌다. 쓰긴 써야겠는데 직설적으로 쓰자니 검열에 걸릴 게 무서워 은유와 상징을 동원해서 써야 했던 독재 정권 치하의 언론과는 근본적으로 입장이 달랐다. 간단히 말해서 한통속인 후손들이 쓴 기록이니, 가야에 대한 패배 기록을 남기기 싫으면 아예 안 쓰면 안 썼지 은유와 상징까지 동원해서 쓸 필요는 없었다는 말이다.
저도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왕조실록> 시리즈에 한창 낚여 있던 시절에는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을 은유적으로 왜곡하여 표현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했지만,
(가령 백제본기 온조왕 조의 "수도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하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모가 죽었다"는 구절을 소서노가 다섯 명의 중신들과 함께 군사를 지휘하여 온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사했다고 해석하는 것 등)
이 글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말 그대로 당시에 그런 사실이 있었다 할지라도, 역사서에 그걸 은유적으로 꼬아서 기록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역사서를 신문 기사처럼 검열하던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대체 뭐가 두려워서 은유적인 표현을 써야 했을까요?
고구려에서 신라의 사관(史官)들에게까지 손을 뻗쳐서, 역사 기록을 검열이라도 했던 걸까요?
왜곡을 하려면 그냥 아예 안 쓰면 그만이지, 그걸 은유적으로 감춰야 할 이유는 없었다고 사료됩니다.
초록불 2008/02/03 16:48 # 답글
굔군님 / 그 부분은 이희진 박사와 생각이 전혀 다릅니다. (그 책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희진 박사와는 가야 관련 부분에서도 의견이 다릅니다.) 저 기록은 당연히 신라인의 기록이 남아서 그대로 적힌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즉 당대 기록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우선 저것은 가야에게 졌다는 기록이 아닙니다. 고구려에게 굴복했다는 기록이지요.이희진 박사 말처럼 신라는 쓰기 싫은 부분의 기록은 상당수 없애버렸습니다. 광개토대왕비나 중원 고구려비에 적혀 있는 기록이 신라 본기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당대에도 그런 기록이 없었을까요? 당대에는 분명 기록이 있었을 것입니다. 후대에 신라인들이 기록을 정리하면서 수치스런 부분을 없애버렸을 가능성이야 충분히 있을 것이지만.
그런데 저런 구절, 즉 마굿간의 말이 무릎을 꿇었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적어놓은 당대 기록은 후대의 검열을 오히려 빠져나와 버린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당대에 애매한 기록을 남긴 것은 곧이 곧대로 쓰기 싫었던 이유일 것이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 하겠지요. 또한 당시 고구려는 서라벌에 군대도 주둔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한만큼 아예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대체 마굿간의 말이 무릎을 꿇었다와 같은 기록을 왜 남겼을까 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상시적으로 나타나는 기록도 아니고, 고대 국가에서 어떤 중요한 일도 아닐 그런 일이 왜 사서에 남아있을까요?
삼국사기의 기록을 과도하게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당연히 은유적으로 해석해야할 일조차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 역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